297.
조지아 주의 아틀랜타.
남부의 심장.
그곳에 있는 ACW 본사에 도착한 로건은 선글라스를 쓴 채 당당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약속 따위는 잡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로, 로건!”
“여기는 무슨 일로……!”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놀라 달려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로건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비숍은 있나?”
“아, 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기다리지.”
“그, 그럼 이쪽으로.”
직원들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그를 로비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프로레슬링, 더 나아가서 미국 문화의 아이콘이 가진 힘이었다.
이 회사에서 그가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터너 정도?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단체 내부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왕이 된 로건은 단체가 출범한 뒤로 계속 제멋대로 굴어왔다.
옛날처럼 무적의 선역 챔피언으로 군림하며 악당들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팬들은 점점 거기에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고, ‘부상’을 입기 직전에는 역반응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사실 그래서 도망친 것이었다.
꼴에 사람이라고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로건은 한동안 베벌리힐스의 저택에 틀어박혀 은퇴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걸어볼 만한 게 생겼다.
단체와 단체의 협업.
레슬링의 역사가 바뀌는 날.
슈퍼 히어로의 타락.
신의 제안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확실히 난놈은 난놈이야.’
동양인이라는 치명적인 ‘단점’만 없었더라도 무난히 최고가 되었겠지.
하지만 그는 그런 단점마저 자신의 드라마로 승화시키는 괴물이었다.
믿어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방문이 열리며 ACW의 부사장 데릭 비숍이 안으로 들어왔다.
“로건…….”
급하게 왔는지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에 로건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숨 좀 고르고 말하게.”
“아, 옙.”
“별일은 아니야. 단지 슬슬 복귀 계획을 잡는 게 어떨까 싶어서.”
“몸은 괜찮으십니까?”
“백 프로.”
로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부상도 핑계였다.
다들 알고도 속아주는 것이었지만.
“다행이군요.”
“고맙네. 그래서 내가 복귀하면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 게 좋겠나?”
“글쎄요.”
비숍이 자리에 앉았다.
“아이디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악역 전환을 하자.
쉽사리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그 말인즉슨, 현재의 캡틴 로건이 단체의 선역이자 간판이 되는 선수로서 실패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로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역 전환을 하자는 거지?”
“……알고 계셨습니까?”
“대충 감으로 느꼈지.”
로건은 그렇게 말을 돌렸다.
여기서 신에게 제안을 받았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현재 신이 펼쳐둔 테이블 위에서 그의 의도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본인들은 알지 못했다.
왜냐면 이게.
더없이 합리적인 선택이었기에.
“나쁘진 않은 거 같다.”
“그리고 PWA 쪽에서 저희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진행해보지.”
“예?”
“보니까 꽤 괜찮은 단체야. 사실 신이라는 빅 네임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협업할 가치는 충분히 있지.”
“WWF에 주기는 너무 아깝죠.”
“그래, 그러니 추진해봐.”
로건은 망설임 없이 이야기했다.
그는 이미 잃을 게 없었다.
* * *
시간이 촉박했다.
단체 간에 계약 서류가 오가고 조건이 면밀하게 조정되는 동안, 나는 시계가 째깍거리는 것을 들었다.
머릿속에 생각해둔 타임 밤이 터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약은 ACW 측에서 조건을 재느라 영 지지부진했고.
나는 계약을 맡은 티파니와 팀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떻게든 이번 주 내로 계약을 마칠 것을 종용했다.
“당장 다음 주부터 ACW 쇼에 출연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무슨 시간?”
“레슬 임페리움이요.”
“뭐…….”
그 말을 들은 순간 모든 팀장들이 큰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 되었다.
지금 나는 이 자리에서 레슬 임페리움과 맞붙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레슬 임페리움이 무엇인가.
관객 동원 20여만 명.
이 업계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
거기에 맞서서 ACW 역시 같은 시기에 스타게이트라는 이름의 초대형 이벤트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사실, 흥행력 자체를 따졌을 때는 스타게이트가 현저하게 밀릴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현재 레슬 임페리움의 아성을 넘는 건 쉽지 않겠죠.”
“그야 그렇겠지.”
“레슬 임페리움은 한 번 열리면 그 주간 내내 프로레슬링 이벤트로 주와 도시가 거의 마비되니까.”
그렇기에 ACW의 스타게이트가 비비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다.
스타게이트 자체는 NWA부터 이어져온 유구한 스포츠 이벤트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슬 임페리움의 이름값이 훨씬 더 큰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레슬 임페리움과 맞붙자고 이야기를 꺼내니까.
다들 거기에 놀란 거겠지.
“어, 신. 솔직히 저는 5월 정도부터 협업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왜 그래야 해?”
“아무리 그래도 레슬 임페리움과 맞붙는 건 위험한 일이잖아요.”
티파니가 정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나는 확신이 있었다.
“기왕이면 PWA의 습격을 역사적인 순간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
“…….”
“레슬 임페리움과 맞붙어서 확실하게 상대를 조져놓자는 말이야. 괜히 정신승리 할 여지를 주지 말자고.”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5월에 습격을 하든 4월에 하든, 이 각본은 대박을 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화면 바깥’의 일이 ‘화면 안’으로 훅 파고들어오는 셈이었다.
팬들은 분명 열광하겠지.
“그리고 이길 근거라면 있어.”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WWF에서는 괜히 또 티켓 파워를 올린답시고 프로 복서를 데려왔지.”
펠로이스 메이웨더 주니어.
작은 키의 그가 빅 죠와 맞붙어 레슬 임페리움에서 승리할 예정이었다.
그는 확실히 강한 인간이었다.
복서로서도 완전체였다.
하지만 레슬링 링에서 그가 자신보다 60센티미터 이상 거대한 상대와 싸워 이기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그쪽에서 그런 ‘구린 부킹’으로 레슬 임페리움의 이름값을 알아서 떨궈준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나?”
물론, 좋은 경기들도 있기는 했다.
러셀 하트 vs 디 캐스켓테이커.
트리플H vs 닉 플레어.
내 개입으로 인해 전생과 다른 경기가 되었지만 분명 좋은 부킹이다.
거기에 숀 시나와 랜스 오튼의 WWF 유니버스 챔피언을 건 매치까지.
“……당신 말대로라면 빅 죠 매치를 제외하면 다 좋은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런 거기랑 맞붙자고요?”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확신했다.
분명히 말아먹었다고는 해도 러셀과 시나 같은 인물들이 있는 이상 WWF는 확실히 강력한 상대였다.
그렇기에 더 재밌는 거지.
내 당당한 말에 슬쩍 한숨을 내쉰 티파니가 이내 표정을 싹 바꿔서 활짝 웃어보였다.
“저도 뭐, 우리 팀과 우리 각본이 질 거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요.”
“부탁해도 되겠지?”
“내일까지 도장 찍도록 할게요.”
“좋아, 그러면 그쪽은 맡겨두고.”
나는 헤이건을 돌아보았다.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내 시선에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디테일은 어떻게 갈 거지?”
“일단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저희 습격이 각본이 아니라 실제 사건처럼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어려울 텐데?”
“그건 그렇겠죠.”
시대는 어언 2008년.
인터넷의 발달로 더 이상 사람들은 프로레슬링의 각본에 속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속였을 때의 효과는 크겠죠.”
“……흐음.”
고민에 빠진 헤이건.
나는 그가 멋진 아이디어를 보여주기를 기대하면서 잠시 기다렸다.
째깍, 째깍.
그 시간에도 타임 밤은 계속 타들어갔지만, 헤이건은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딱 한 주.”
“예.”
“한 주짜리 아이디어는 있다.”
“말씀해주시죠.”
“너 혼자서 가는 거야.”
헤이건이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건 사실, 하나의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도 있어서 당장 내일이라도 써먹을 수 있는 각본이지.”
“제가 그쪽 티켓을 사서 일반 관람객으로 거기에 참가한다는 건가요?”
“바로 그거다.”
그것만으로 화제가 된다.
PWA의 슈퍼스타인 신이 ACW의 쇼에 나타나 카메라에 얼굴을 한 번 비춘 것만으로도 분명히 들끓을 터.
왜냐고?
마이키 조던이 시카고가 아닌, 경쟁 팀의 경기를 직관한 것이었으니까.
확실히 좋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 더.
티파니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든 쇼가 끝나기 전까지 계약을 성사시켜볼게요.”
“그렇게 되면?”
“곧바로 신이 링에 난입하는 쪽 각본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면 훨씬 더 화제가 될 수 있지 않겠어요?”
“그건…….”
“가능하겠어?”
“믿고 맡겨주세요.”
티파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마침 ACW의 쇼도 바로 내일.
장소도 그렇게 멀지 않았다.
* * *
다행히 ACW 측에서도 서로 계약 성사가 거의 코앞에 와있기 때문인지 우리에게 표까지 제공해주었다.
덕분에 달러를 좀 아낀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난입’ 준비를 했다.
나는 티파니를 믿는다.
그녀라면 어떻게 해서든 쇼가 끝나기 전까지 멋진 결과를 보여주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정장을 입고 한껏 멋을 부린 채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 ACW 쇼에 입장했다.
ACW 나이트로.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WWF의 버닝콩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거대한 프로레슬링 쇼.
하지만 거기에 온 관객의 대부분은 비교적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것을 확인하며 나는 거대한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세트장도 그렇고 어딘가 좀 낡았다는 느낌이 강하기는 했다.
어떤 특정한 계층을 끌어들여서 돈을 벌 수는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몰락해가는 쇼의 전형이었다.
스포츠 팀이나 이벤트는 대부분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쳐주면서 팬 문화가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현재 로건이 주인공인 ACW 쇼는 그런 게 결여되어 있었다.
젊은 층은 선수들 간에 긴박하게 맞붙으며 경쟁하는 PWA를 선호했고.
가족 단위의 시청자들은 시나가 주인공인 WWF를 훨씬 선호했다.
즉, ACW는 최악의 시청자층을 노리고 쇼를 만들어가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후.
전생이 아니라 현재.
나를 포함해 모든 로스터가 한데 뒤엉켜서 미친 쇼가 벌어질 터였다.
그걸 기대하며 나는 시간에 맞춰서 시작된 ACW의 쇼를 보기 시작했다.
[Waaaaaaaaaaaaagggggghhh!!]
가장 보기에 좋은 앞자리.
관객들의 환호와 링의 현장감까지 있는 환경에서 카메라가 나를 다가와 찍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검지를 들어 Bang! 하고 쏘는 동작을 취한 후 박수를 쳤다.
어디까지나 여유롭게.
나는 SIN이니까.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보고를 받고 텔레비전을 켠 바트 맥센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외쳤다.
“저 새끼가 왜 저기 있는데?!”
“저,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WWF의 본사 사무실.
레슬 임페리움에 대한 회의가 이어지던 차. 회사의 고위급 인사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ACW의 나이트로의 후반부가 방영이 되고 있었다.
[케빈 대시의 빅 붓!]
[아! 화려합니다!!]
[하지만 대미지가 심각합니다! 케빈 대시! 크로우와 함께 자리에 쓰러져서 일어서지 못합니다!!]
[Waaaaaaaaaaaaaaagggghhh!!]
[Booooooooooooooooooo-!!]
팬들의 환호와 야유가 뒤따랐다.
전형적인 프로레슬링 쇼였다.
정말로 전형적이었다.
악역인 케빈 대시가 크로우를 몰아붙이다가 이기는 전형적인 영웅서사.
그 공세를 견뎌내고 있었다.
시나를 앞세워, 어떻게든 젊은 가족 팬 계층을 끌어들여 소년소녀들의 꿈을 빨아서 어떻게든 연명하려고 했다.
그게 현재의 WWF였다.
저 쇼는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할 것이다. 그것이 WWF의 간부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로건은 늙었으니까.
늙은이들이 보는 쇼니까.
하지만 거기에.
[아, 카메라가 다시 신을…….]
[저 친구, 왜 여기에 온 걸까요? 경기는 재미있게 보는 듯합니다만.]
[크하하! 분명히 멋진 선배 레슬러들에게 뭔가를 배워가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해설자들의 코멘트까지.
말인즉슨 이게 분명히 어떤 협약 아래에 진행되는 이야기란 뜻이었다.
“저, 저저, 저저저……!!”
“회, 회장님 진정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이쪽의 레슬 임페리움이 그만큼 두려운 상대니까 저쪽에서도 수를 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ACW는 언젠가 뒤질 쇼고.
PWA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인디의 머저리들이 모여 있는 쇼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수많은 예스맨들 사이에 있는 바트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케빈 대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크로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묘한 일이 벌어졌다.
갑작스레 경기가 텐 카운트의 더블 케이오로 끝나면서 링 벨이 울렸다.
[Booooooooooooooooooo-!!]
허접한 결과에 야유하는 관객들.
그리고 카메라는 누군가에게서 귓속말을 듣고 있는 신의 모습을 비췄다.
“대체 뭘 하는 거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바트 맥센은 그런 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선글라스를 쓴 채 씨익 웃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메라 앞으로 다가온 그가 그것을 움켜쥐고 씨익 웃으며 한마디 했다.
[Let’s Go, Bi-ch.]
강렬한 욕설.
그와 함께 바트 맥센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