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오랜만에 팬의 입장이 되어 프로레슬링을 즐기자니 정말로 즐거웠다.
다 함께 박수를 치면서 챈트를 보낼 때마다 나도 거기에 호응을 하고.
랭 새비지의 팬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마초맨 선글라스를 쓰고 다 죽여버리라고 외쳤을 때는 좀 쫄았지만.
재미있는 세 시간이었다.
‘역시 다들 베테랑이군.’
하지만 이 쇼를 텔레비전으로 보면 그 감흥이 덜할 것 같기는 했다.
현장감으로 봤을 때는 멋진 공연이기는 해도 드라마로써 본다면 어딘가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 강했다.
출범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이트로를 봐왔기에 하는 말이었다.
이 쇼는 내러티브가 부족했다.
선수들의 개성이나, 대립으로 얽혔을 때의 드라마가 너무 단순했다.
‘좋은 선수들이 많은데 저런 걸로 봐서는 각본진이 등신들인 모양이군.’
그렇게 메인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남은 시간은 약 25분.
[Woooooooooooooo-!!]
페이스 페인팅을 한 검은 레슬링복 차림의 크로우가 링으로 나왔다.
그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TMA에 있다가 ACW로 와서 현재 로건보다 더 큰 환호를 받고 있는 실질적인 회사의 선역 메인 이벤터.
그 뒤로 나온 건 케빈 대시.
두 사람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Crow! Crow! Crow! Crow! Crow! Crow! Crow! Crow! Crow!]
팬들의 챈트가 이어지는 가운데.
경기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크로우의 주도 아래에 케빈 대시도 나름대로 잘 쫓아가는, 전형적이지만 확실하게 이해하기 쉬운 경기였다.
[Waaaaaaaaaaaaaaaaggghhh!!]
팬들의 반응도 좋았다.
크로우의 시그니처 무브인 스팅거 스플래시가 코너에서 코너로 오가고.
그럴 때마다 휘청거리며 계속 휘둘리던 대시가 어떻게든 반격을 시도하면서 계속해서 경기가 이어졌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이내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신 선수.”
“……?”
“계약 끝마쳤다고 합니다.”
“난입은?”
“터너 회장으로부터 직접 허가가 났습니다. 저쪽에서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위로 올라오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나는 씨익 웃었다.
몸이 계속 근질거리던 찰나였다.
그 소식은 링 위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는 두 사람에게도 전해졌다.
두 사람 다 나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이 상황을 몰라서 얼을 타지는 않겠군.
그리고 경기가 끝났다.
빅 붓 이후 더블 케이오.
경기 내용이 변한 건가?
아니면 실수?
그렇게 생각하게 될 정도로 갑작스러운 결말이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연출을 변경한 것이리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집중되는 시선.
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까이 다가온 카메라를 붙잡은 나는 씨익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Let’s Go. Bi-ch.”
말하자면 ‘가자, 쌍년아.’쯤 될까.
바리게이트를 넘어 안으로 들어간 나는 거침없이 링 벨 옆의 마이크를 잡아들고 링 위로 올라갔다.
순간 다가오는 심판.
자리에서 일어서는 해설자들.
거기에서 나는 모두가 이 연극에 동조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ACW.
확실히 실력은 있는 단체였다.
“여기 올라오시면 안 됩니다!”
일부러 카메라에 잡힐 정도로 큰 목소리를 내는 심판.
“저리 비켜.”
나는 그를 일부러 ‘현실적으로’ 밀어내고는 이어 선수들을 살폈다.
순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대시가 링 아래로 내려가 퇴장했다.
그리고 크로우는 어안이 벙벙해져 날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것이 현실임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관객들은.
[Booooooooooooooooooooo-!]
야유를 보냈다.
“꺼져라!”
“여기는 왜 온 거냐!”
자, 말했듯 ACW는 남부의 유산을 정신으로 삼아서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렇기에 마니악하고 충성심 높은 남부 팬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나는 지금 남의 앞마당에 멋대로 들어와 마이크를 손에 쥔 것이었다.
“너희들 내가 누군지는 알지?”
나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기에 왜 올라왔는지는 모를 거야. 한마디만 하지. 이딴 구린 쇼는 그만 보고 우리 쇼나 봐.”
[Booooooooooooooooooo-!!]
팝콘과 콜라가 날아들었다.
나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왜?! 내가 팩트를 말해서 기분이 더럽나?! 여기 이 쇼는 분명히 구리고, 나는 이 업계의 최고봉이야!!”
바로 그때였다.
쿵-!!
뒤쪽에서 달려든 누군가가 나를 덮치고 실전처럼 헤드록을 걸었다.
바로 크로우였다.
마이크가 나가떨어지고 혼란 속에서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날 제압해라.”
“……당신 프로네.”
대충 알아들었다.
나와 크로우는 링 위에서 마구잡이로 뒤엉키며 마치 실제처럼 싸웠다.
그리고 나는 크로우의 위를 잡고 안면에 힘차게 펀치를 후려갈겼다.
뻐억-!!
겨우 제압.
그 뒤를 잇는 야유.
[Booooooooooooooooooo-!!]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물러난 나는 다시금 마이크를 손에 움켜쥐었다.
“여기 온갖 거물들이 모였다지?! 상황은 변했어. 친구들. 우리 PWA가 너희들을……!!”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박살 낼 거야!!”
내 목소리는 야유에 묻혔다.
순간 당황해서 마이크를 살핀 나는 ACW가 의도적으로 전원을 끊었음을 눈치 채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거리낄 건 없었다.
카메라에 대고 중지 두 개.
내가 힘차게 마이크를 내던진 순간 백스테이지에서 선수들을 포함해 보안 요원들이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도망쳤다.
입장로의 반대편. 경기장의 손님용 출입구 쪽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야, 이 씨발 놈아!!”
바로 그때였다.
관객들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나가던 내 얼굴에 누가 펀치를 날렸다.
가볍게 피해내고.
한 대 돌려주려다가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프로다.
그들이 흥분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흥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향해 날아드는 팬들의 증오를 받으며 도망쳤다.
경기장 바깥.
가로등 밑으로 나와 숨을 몰아쉬고 있던 나는 땀을 닦아내며 웃었다.
“Fu-king Sh-t.”
슈퍼 멋진 밤이군.
오늘 쇼의 마지막은 ‘현실’이었다.
아마 내일, 아니, 지금 당장 북미 내의 언론사는 다 난리가 났을 거다.
프로레슬링은 현실이 되었다.
만약 이게 각본을 어기고 한 ‘슛’이었다면,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강렬한 슛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그렇게 숨을 몰아쉬자니 뒤이어 도로로 무언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검은 유선형의 차량.
그게 내 앞에 멈춰 섰다.
끼이이이이익-!
스키드마크 한 번 화려하군.
그렇게 생각하자니 문이 위로 덜컥 열리며 그 안에서 당당하게 웃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금발을 하나로 묶고, 특유의 바지 정장을 입은…….
티파니였다.
그녀가 물었다.
“Need A Ride?”
“Hell Yeah.”
아무래도 여기 계속 있다가는 사람들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르니까.
훌쩍 뛰어 차에 탄 나는 티파니와 가볍게 키스를 했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오늘 멋졌어요.”
“그쪽도.”
“한 건 제대로 해냈네요.”
티파니의 공이 컸다.
경기장 안의 사무실에서 터너를 설득해 멋진 장면이 나오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관객석 쪽으로 도망치자 눈치를 채고는 빠르게 데리러 와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제 어쩌죠?”
“뭐?”
“레슬 임페리움. 진짜로 저희 팀한테 밀려서 완전 망할 거 같은데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어보였다.
우리가 확실히 더 대박을 낼 수 있을 것 같단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 * *
[뭔 개미친 쇼였던 거지.]
[시청률 지표가 정신이 나갔다니까? 보통 WWF 버닝콩과 ACW 나이트로의 팬들은 각자 쇼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단 말이야?]
[특히나 요새는 월요일 밤의 전쟁이 지속되면서 그게 심화되었지.]
[그리고 그게 이 업계가 성장하는 거고. 실제로 ACW의 출범 이후 프로레슬링을 보기 위해서 돌아온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었을 정도야.]
[……참 놀라운 시대로군.]
[그래서 이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다들 궁금해했을 텐데.]
그 대치전을 부순 것은 WWF도 ACW도 아닌 외부에서 등장한 신이었다.
[PWA, 좋은 단체지. 하지만 아무래도 좀 작은 단체라고 생각했는데.]
신의 난입으로 모든 게 변했다.
그는 다시금 시나나 로건을 넘어서서 프로레슬링 업계의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르는데 성공했다.
[150만이야.]
[뭐가?]
[신을 보기 위해서 채널을 잠시 돌렸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그때 마침 버닝콩이 광고 타임에 들어간 게 패착이었다.
정확한 타이밍에 난입이 이루어졌고, ACW가 뭘 하나 돌렸던 팬들은 다시 버닝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신이 퇴장한 이후에도 10분 이상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 내내 시청률 하이 레이팅을 넘어서서 천장을 꿰뚫고 나가버렸단 말이야!]
[결국 이번 주 최종 스코어는 WWF가 470만, ACW가 780만이라고.]
[신 하나로 벌어진 일이지.]
[아니, 하지만. 제기랄.]
[왜 그래?]
[그게 프로레슬링이야? 그냥 해프닝이지. 솔직히 신은 정말 대단한 놈이야. 괴물 그 자체지. 하지만 그걸 레슬링이라고 인정할 순…….]
[왜 그래? 멋진 각본이었는데.]
[뭐?]
[그렇지 않았다면 ACW 측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당장에 PWA를 고소하고 난리가 났겠지.]
[아니, 음.]
[그렇지 않아?]
[……그건, 그렇군.]
[대부분은 그걸 모르겠지만.]
[언론도 거기에 편승해서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다가 이상하게도 PWA와 ACW는 입을 다물고 있지.]
불이 지펴지는 상황이었다.
[지금 다들 수요일의 PWA 위클리 쇼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잖아. 분명히 이건 의도된 각본이라고.]
단지 그렇게 연출되었고.
모두가 거기에 속았을 뿐.
그런 식으로 렐처의 분석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영감쟁이가 소스 하나 제대로 나오니까 아주 진하게 뽑아먹는군.’
프로레슬링의 부흥으로 인해서 그들의 뉴스레터 또한 이전에 비해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고 들었다.
거기에 편승해 지금도 이 각본과 관련된 ‘예언’을 펼쳐 보이며 어떻게든 공신력을 높이고자 하는 거겠지.
그래도 슬슬 괜찮은 시점이었다.
어차피 영원히 속일 수도 없고, 그런 식으로 퍼져나가면서 지금 과하게 흥분한 여론이 가라앉으면 오히려 우리로서는 좋은 상황이었다.
PWA의 위클리 쇼는 바로 내일.
거기에서 나는 우리가 드디어 습격을 시작할 것임을 밝힐 예정이었다.
* * *
쿵-쿵-쿵-쿵-쿵-쿵-쿵-쿵-쿵-!
음악과 함께 내가 등장하자 소수의 관객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Waaaaaaaaaaaaaaaagggghhh!!]
첫 약탈을 혼자서 훌륭하게 마치고 온 캡틴을 환영하는 선원들 같았다.
“좋아, 새끼들아!!”
입장로 위에 서서 버럭 소리친 나는 이어 천천히 링으로 올라갔다.
PWA 티셔츠, SIN 티셔츠, 온갖 굿즈를 입은 팬들이 소리 높여 나의 이름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음악 속에서 그들의 호응에 응한 나는 이어 마이크를 쥐었다.
“월요일 밤은 다들 잘 즐기셨나?”
[Yeeeeeeeeeeeeeaaaaahhhhh!!]
“다들 놀랐겠지. 너희들이 월요일 밤에 WWF를 보든 ACW를 보든 나는 상관 안 해. 어차피 너희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쇼는 PWA일 테니까.”
나는 관객들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숀 시나나 캡틴 로건 같은 멍청이들보다 내가 나오는 쇼가 낫잖아?!”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여기에서 복선을 하나 회수해야겠군. 내가 왜 WWF라는 위대한 프로레슬링 컴퍼니를 나와서 이 PWA라는 팀을 만든 건가, 대충 알겠지?”
나는 그렇게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티파니 맥센이라는 고용주의 제안이기도 했지. 하지만 내게는 확실한 ‘힘’이 필요한 시점이었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또한.
내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였다.
물론, 액플 주식이나 각종 미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대박을 내서 WWF에 손을 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다. 나는 한 번 이기기로 다짐한 이상 철저하게 이기고 싶었다.
그게 이거였다.
나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힘을 기르고 이 시대의 중심에 우뚝 선다.
프로레슬링.
돈.
시청률.
팬들의 사랑.
모든 부분에서 상대를 이긴다.
그게 나였다.
나라는 남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PWA는 군단이야! 범선이지! 그리고 동시에 약탈자들이기도 해!”
[Waaaaaaaaaaaaaaggggghhh!!]
나는 그렇게 환상적인 반응 속에서 내가 이 단체를 만든 이유를 말했다.
“여기 모인 개자식들은 하나하나가 다른 단체의 머저리들을 모조리 죽일 정도의 엄청난 강자들이야!!”
그리고 그런 이들이 우리에 모여 혈투를 벌이고 순위가 정해졌다.
“물론, 이 순위는 바뀔 수 있어. 지금도 한창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개자식들 때문에 죽을 맛이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캡틴이었다.
“숨길 것도 없지. 다음 주 월요일, 우리는 다시 나이트로를 습격한다.”
[Uoooooooooooooooooohhhh!!]
경악하는 팬들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분명 이 광경을 모두 보고 있겠지.
지옥 같이 괴로워할 바트의 모습을 상상하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