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위클리 쇼는 성황리에 끝났다.
메인이벤트까지 촬영을 끝마치고 돌아온 나는 그때까지도 로프에 끼어 있는 AK의 모습을 확인했다.
관객들이 웃으며 경기장에서 퇴장하고 있는 가운데, AK는 마지막까지 환상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나갔다.
‘멋진 친구야.’
저렇게 코미디 각본을 수행할 수 있는 것 또한 선수로서 AK의 재능이다.
동시에 다음 주에는 또 이보다 더한 명경기를 선보여야 맞는 거겠지만.
AK라면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씨익 웃은 나는 이어 누군가 어깨를 잡는 걸 느꼈다.
로건이었다.
조명이 너무 강했던 걸까.
땀으로 범벅이 된 그가 숨을 몰아쉬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정말 멋진 쇼였네.”
“감사합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참 잘한단 말이야. 오늘 자네하고 같이 경기 가진 저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지?”
“AK 스타일스요.”
“멋지더군. 결말에서 살짝 힘을 빼면서 다음 주를 또 기다리게 만드는 부분 역시도 환상적이었고.”
그는 머나먼 과거를 떠올리듯 아련한 눈으로 잠시 링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좀 어이가 없었다.
로건이 만들어낸 시대는 어쩌면, 프로레슬링 역사상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황금기’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조차 저 링 위를 계속 열망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뭔가.
‘사라지지 않는 건가.’
링에 대한 열망은.
남자의 꿈은.
* * *
[정말로 어메이징한 쇼였지.]
[그래, 맞아. 솔직히 말하자면 결말을 보고 좀 김이 새기는 했는데.]
[무슨 결말?]
[경기의 결말.]
[하지만 지능적이지. 거기서 결말을 내지 않음으로써 유입된 ACW 팬들이 다음 주를 보고 싶게 만들었잖아.]
확실히 그러했다.
다음 나이트로가 열릴 예정인 도시에 도착한 로건은 뉴스레터 팀의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공감하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호텔 방안.
남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광경이다.
왜냐면 이 뉴스레터 팀은 로건처럼 엔터테이닝에 특화된 프로레슬러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공신력이 있는 언론사인 만큼, 그들이 오늘 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였다.
그들은 지난 밤 있었던 PWA의 위클리 쇼를 무척 긍정적으로 보았다.
[특히나 마지막 세그먼트에서 신의 재치가 빛났지. 로건의 올드 스쿨 스타일에 말려들지 않고 할 말을 했어.]
[신의 앞에 서있으니 대체 언제 적 로건인가 싶던데. 너무 올드해서 걸어 다니는 투탕카멘인 줄 알았어.]
“…….”
로건은 곧바로 라디오를 껐다.
수없이 들어온 비판이었지만, 복귀한 이후로는 특히나 더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스스로가 현재 탑 가이로서 안 먹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특히나 이번에 PWA의 쇼를 보게 되고 난 후 더 실감하게 된 사실이었다.
신은 역시나 한 회사의 간판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없는 좋은 선수였다.
요즘 시대가 원하는.
쿨하고 멋진 캐릭터.
자신은 그와 완전히 반대였다.
추억팔이를 하고 있을 뿐이고, 그 수명도 다해 이제는 다 늙은 영감.
모두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럼에 로건은 조금이라도 더 탑 가이 생활을 지속해 나가고 싶었다.
90년대 이후 스테로이드 파동으로 실질적으로 선수 은퇴를 하며 잊고 살아왔던, 링 위에서 반응을 받는 쾌감.
‘그걸 다시…….’
한 번만 더 느낄 수 있다면.
“후우.”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했다.
의자에 몸을 기댄 로건은 이어 자연스레 시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문득, 신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당신보다 더 위대한 선수가 되어버릴까 두려운 거잖아. 지금?]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굳이 신이라는 한 사람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재능 있는 후배들이 링에 나타날 때마다 늘 하던 생각이었다.
그렉 하트.
존 마이클스.
락콜드 스티비 스틴.
더 팍.
숀 시나.
그래, 두려웠다.
자신이 만들어낸 시대가 지워질까.
그렇기에 로건은 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오랜 옛날의 불멸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분명, 변해야 할 때였다.
로건은 곧바로 ACW의 부사장인 데릭 비숍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했다.
“데릭, 나 로건일세.”
[아, 로건. 쇼는 잘 봤습니다. 혹시 뭐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니, 오히려 이후 턴 힐이 기대가 되어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러므로 이번 일은 우리 쪽 시청률이 안정될 때까지는 최대한 PWA 쪽 의사에 맞춰서 진행하도록 하지.”
로건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각본이었다.
멋진 턴 힐을 위해서는 일단 한 번의 쓰라린 패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내가 신에게 져주겠어. 그리고 턴 힐을 한 뒤, 다시금 탑에 오르겠네.”
[로건 당신의 턴 힐이라면 분명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대시나 홀 같은 친구들도 좀 섞어서 말이야. 아예 거대한 스테이블을 하나 조직해보는 건 어떻겠나?”
[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그걸 그 친구들이 받아들이느냐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내가 이야기를 하지. 이번 PWA의 습격을 통해 ACW는 일신하는 거야.”
그리고 이후.
“우리가 이 업계를 장악하는 거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 로건은 전화를 끊고 피우던 시가를 비벼서 껐다.
그래.
확실히 이제 ‘불멸자’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건이라는,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남자의 이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로건은 진지한 눈으로 생각했다.
* * *
3월 4주차의 위클리 쇼가 끝난 뒤, WWF와 ACW의 시청률은 처참할 정도로 벌어졌다.
프로레슬링 업계의 파이 자체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그중 70퍼센트 이상을 ACW 측에서 가져가고 있는 상황.
회사에서는 시청 시간대를 옮기자는 이야기마저 나왔다.
하지만 바트 맥센은 그런 의견을 제시한 회사 간부에게 징계를 내리며 현재 자신의 의지를 공고히 했다.
이 월요일 밤의 전쟁에서 밀리는 순간, WWF는 끝이나 다름없었다.
왜냐면 이 프로레슬링 업계가 ‘선수’를 판매하는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ACW의 존재로 인해 벌써부터 선수들이 재계약 연봉을 높여 부르고 있는 상황에서 브랜드 파워가 밀렸다가는 모든 게 속절없이 무너질 터였다.
선수들로서는 ACW라는 더 나은 대체제가 있는 상황에서 굳이 WWF에 목을 맬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바트 맥센은 아이콘의 탄생을 억제했고 선수들을 제멋대로 다루며 폭정을 부릴 수 있었던 거다.
선수에게 너무 큰 권한이 돌아가면 반대로 자신의 힘이 줄어들기 때문에.
하지만 일은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말하자면 WWF라는 회사가 회장의 고집으로 굴러가는 게 아닌 선순환을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전생에도 그랬다.
시나는 이 ACW의 존재로 인해 조금 더 자유로워졌고, 엣지나 오튼 같은 라이벌들과 이야기를 만들었다.
‘난 항상 그걸 바라보면서 오늘은 누구한테 져줘야 하나 보는 위치였지.’
TV방송에도 나가지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WWF를 나와서 그들을 몰아붙이는 입장이 되었다.
삶을 다시 한 번 살 기회가 주어지면서 이전과는 많은 것이 변했다.
많은 사람의 위치가 변했다.
내 친구였던 애덤처럼 기회를 받지 못한 자도 있고, 러셀처럼 반대로 기회를 받게 된 사람 역시도 존재했다.
모든 게 내가 한 일이었다.
좋은 쪽은 좋은 거고.
나쁜 쪽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와 이 업계의 미래만을 생각하며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딱 하나.
숀 시나만큼은 그대로였다.
나와는 별개로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하나의 역사를 새겨나가고 있었다.
……적어도 20초 전까지는 말이다.
“뭐라고?”
한창 훈련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시나의 전화를 받고 황당해하며 경기장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니 내게 손을 흔들며 서있는 아이콘, 숀 시나의 모습이 보였다.
반바지에 자신의 머천다이즈인 녹색 티셔츠와 캡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
“안녕.”
“……안녕은 무슨.”
나는 어이가 없어 대답했다.
갑자기 경기장 앞에 있다고 해서 솔직히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정말로 왔다.
스케줄도 바쁠 텐데.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했어?”
“기다렸겠지, 뭐.”
“너 하루 스케줄 빼고 온 거 아냐?”
“아니, 사실 30분밖에 시간 없어. 비행기 바로 예약해둬서 가야 돼.”
“…….”
난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말인즉슨 녀석은.
스케줄을 마치고 남은 아주 잠깐의 자유시간 동안 여기에 와서 30분 동안 날 보고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뭐라도 마실래?”
“어, 물?”
“그거라면 많지.”
싱긋 웃은 나는 시나를 안내했다.
“다들 있는데, 인사할래?”
“GCW 사람들?”
“엉, 너 보면 반가워할걸.”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오늘은 패스.”
“왜? 다들 널 보고 싶어할 텐데.”
“나도 그런데, 얼마 없는 시간, 효율적으로 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칼같이 잘라?”
“요새 어떻게 지내?”
“설마 우리 쇼 안 보냐?”
“아니, 링에서가 아니라 링 아래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아.”
설마 그걸 물어볼 줄이야.
하긴.
러셀이나 오튼과도 연락한 지 좀 됐으니까 그런 게 궁금할 수도 있겠지.
“잘 지냈지. 새 단체 일도 잘 풀리고 ACW와 협업도 하면서 말이야.”
다시금 경기장 밖으로 나왔다.
태양이 날카롭게 안광을 찌르는 가운데, 나는 경기장 뒤쪽의 공터로 가 좀 먼 곳에서 물을 뽑아 돌아왔다.
그리고 모자를 벗은 채 날 기다리고 있던 시나와 나란히 주저앉아 옛날처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넌 어떠냐?”
“죽을 맛이지. 어디 사는 누가 갑자기 이 업계의 거물로 떠오르면서.”
시나가 미소를 지었다.
참 묘한 녀석이었다.
사실, 내가 오튼이나 러셀과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서로 간에 입장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WWF의 가장 큰 적이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전혀 개의치 않는군.’
그 WWF의 현재 간판인 주제에.
그냥 헤실헤실 웃으면서 평범한 동네 친구를 대하듯이 나를 대했다.
그게 좀 고마웠다.
사실, WWF를 나온 이후로 그쪽 선수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시나나 오튼, 러셀처럼 친한 녀석들은 걱정 안 해도 될 듯했다.
“아, 헌터가 너 죽여버린데.”
“…….”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을 이야기한 건 어쩐지 조금 불편했지만.
어쨌거나.
“다들 잘 지내냐?”
“응, 이번에 헌터가 애 생겨서 락커룸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아.”
“……누, 누구랑?”
슬쩍 밀려드는 죄책감에 묻자니 시나는 정말 황당한 답을 내놓았다.
“자이나라고 하던데.”
“자이나?”
그 이름을 듣자 순간 벙쪘다.
자이나.
태도 불량 시대에 활동하던 여성 레슬러로, 헌터와 오랫동안 사귀었지만 안 좋게 헤어진 뒤 망가진 선수였다.
이후 자기 삶을 붙잡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레슬러인데.
이번 생에는 적어도 전생과는 다른 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됐단 말이지.”
“응, 내년쯤에 결혼식도 할 거라던데. 그래서 요새 헌터가 의욕이 넘쳐.”
“거기다 닉 플레어의 은퇴식도 이번에 맡게 되면서 더 그렇겠지.”
“그래, 자기한테 가장 영광스러운 경기가 될 거라면서 좋아하더라고.”
그것도 잘된 일이었다.
닉 플레어를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꼽았던 헌터니, 그 은퇴 경기를 맡게 되어서 행복하겠지.
“PWA는 요새 어때?”
“우리?”
“그래, 사실 너에게서 직접 듣고 싶은 이야긴데. 이후 목표가 뭐야?”
“글, 쎄다.”
어디까지 말해줄까.
좀 장난을 쳐볼까.
뼈가 담긴 장난을.
“WWF를 박살내고 너에게서 월드 타이틀을 가져오는 게 최종 목표야.”
“……정말로?”
“그래, 재미있겠지?”
“분명 멋진 이야기이긴 할 텐데. 그렇다면 내가 최종 보스가 되는 건가?”
“그런 셈이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지지 말고 타이틀 간수 잘 하라고.”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
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GCW 시절까지는 친구였잖아!”
“…….”
“아, 재미없었어?”
“개그였냐.”
너무 재미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어쨌든 그래.”
“무서운 적이 되어버렸는데, 신.”
“미안하게 됐군.”
“그래도 괜찮아. 그 반사 이익으로 회장님이 요새 고집을 좀 꺾어서.”
“그래?”
“덕분에 선수들은 의욕에 넘치고 있지. 러셀하고 테이커가 어떤 경기를 준비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누가 이기는데?”
“당연히 테이커지.”
“그렇군.”
“너한테 한마디 전하라던데.”
“어떤 거?”
“레슬 임페리움 30쯤에서 다시 붙자고. 그때는 자기가 이기겠다더라.”
“…….”
아무래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역시 멋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성격이 삐딱하기 때문일까.
나는 거기에서 다시 장난을 쳤다.
“그전에 WWF가 없어질 텐데.”
“내가 있는 이상 그렇게는 안 돼.”
그 말에 피식 웃은 뒤, 나는 정작 옆자리에 앉은 시나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는 네 목표는 뭐야?”
“나?”
“그래, 선수로서의 목표라던가.”
“세상에서 암이 사라지는 거.”
“…….”
“진심이야.”
고개를 끄덕인 시나가 일어섰다.
어느새 30분이 지났다.
“갈게.”
“……너 모자는?”
“아까 너 물 뽑아오는 사이에 꼬마 하나가 사인해달라고 해서 말이야.”
줬다.
그렇게 이야기한 시나가 그대로 터덜터덜 걸어 주차장으로 사라졌다.
나는 배웅도 않고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구 평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
슬픔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전부 허황된 꿈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저 녀석은 그런 녀석이다.
시대가 그를 만들어가고 있다.
“Super Hero.”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과거는 지워진다.
과거의 영웅, 미국인들의 희망이었던 캡틴 로건 역시 결국 ‘영웅’으로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그렇기에 선택한 턴 힐.
그걸 내 입장에서 보자면 영웅의 민낯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 이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싸워가고 있었다.
꿈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렇기에 역시나.
이 과정을 완수하고 앞으로 나아가 녀석과 마주하게 될 날이 기대됐다.
어디 붙어보자고.
WW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