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그래도 노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담아 우리가 직접 그쪽을 찾아가주었다.
티파니와 여행도 하고 싶었고.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WWF 본사.
항공기 비즈니스석을 타고 오랜 시간의 여행 끝에 도착한 바트 맥센의 성채.
여전히 그대로였다.
“흐음.”
“긴장돼요?”
“아니.”
슬쩍 이어진 티파니의 물음에 웃으며 대답한 나는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
내 등장에 안쪽에 있던 직원들은 다 좋지 못한 감정을 담아 시선을 보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뭐, 딱히 내가 WWF의 적이라서 이렇게 쌀쌀맞은 눈을 하는 건 아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가적인 거.
바트 맥센의 꼬장이나.
바솔로뮤 케이브 맥센의 꼬장이나.
그것도 아니면 회장님의 꼬장이나.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나니까 다들 원망을 하고 있는 거겠지 싶었다.
그래도 다들 프로였지만.
“신 님, 그리고 티파니 맥센 님. 오후 3시 30분 약속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이런 쪽으로는 나보다 티파니가 훨씬 더 낫기 때문에 사무실 안에 들어설 때까지는 맡겨두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유리로 된 벽이 가득한 복도를 지나서 안쪽으로 향하자 회의실이 보였다.
그 앞에 있는 건 임원들.
우리 두 사람을 돌아보고는 노골적으로 적대감이 서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나마 안쪽에서 우리를 반기기 위해 나온 케인만이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케인!”
“티파니.”
그간 진 응어리가 풀린 것일까.
반가운 표정으로 포옹을 나누는 두 사람. 이어서 케인이 티파니의 옆에 서있던 나를 돌아보며 악수를 청해왔다.
“신, 잘 와주었어.”
“랙다운은 요새 어때요?”
“너희들 때문에 죽을 맛이야.”
“정확히는 전쟁 때문이라고 해야겠죠.”
“너희가 선봉장이면서.”
미소를 짓는 케인.
“아버지는 안에 계셔. 너희가 오면 들어가려고 다 같이 기다리던 참이었지.”
“요새 히스테리가 심한가 봐요?”
“……너무 자극하지 말아줘.”
“노력해보죠.”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심기가 무척 불편한 바트를 만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섰다.
가장 안쪽 자리.
회색 양복을 입고 앉아있던 그는 앞장선 케인에게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뭐하다 다 같이 와?!”
거기에 쩔쩔 매는 임원들.
기다란 테이블 주변에 그들이 앉았고, 나와 티파니는 자연스럽게 바트 맥센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런 웨이만큼 긴 테이블이다.
하지만 바트의 표정은 확실히 보였다.
얼굴이 구기자 차(?)처럼 구겨졌다.
‘케인이 거짓말을 했군.’
설득을 했다더니.
“여긴 대체 무슨 일이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는 바트.
거기에 우리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니 케인이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회사 간의 협업과 관련되어서…….”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을 텐데.”
“그때는 동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생각이 변했다.”
바트가 사악하게 웃었다.
곤란해하는 케인의 얼굴.
나는 거기에서 깨달았다.
‘일부러 이러는 거군.’
유치한 영감쟁이.
사람을 헛걸음시켜서 좀 엿을 먹여보겠다는 심보 같은데, 뭔 애도 아니고.
나는 티파니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할까?”
“음, 내가 할까요?”
“…….”
나는 바트를 돌아보았다.
옆에서 절절 매고 있는 케인을 무시하고 나를 바라본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자 마음이 섰다.
“내가 할게.”
나의 아치 에너미가 일부러 저렇게 총을 겨누고 있는데, 나서지 않는다면 카우보이로서 자격이 없는 거겠지.
사실, 반가웠다.
영감이 그대로라서.
너무 좋았다.
“너희 그 소규모 단체에서 ACW와 무슨 짓을 하던 신경 안 쓰니까. 만약에 하고 싶은 제안이 있다면 정식…….”
그 말은 끝을 내지 못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그대로 목을 답답하게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순간 임원들과 바트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가 날 비웃듯이 물었다.
“뭐, 싸움이라도 하자는 거냐?”
“아니, 좀 답답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단체 간의 젠틀한 협의의 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잖아? 당신은 지금 애처럼 떼를 쓰고 있고.”
나는 천천히 움직였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 그대로 긴 테이블 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
“…….”
경악하는 임원들과 케인.
반면 바트 맥센은 그런 내 모습에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띠웠다.
그렇게 바트의 앞까지 걸어간 나는 그 앞에 서서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넥타이를 풀고 답답한 셔츠 단추를 좀 풀어서 그런지 한결 말하기가 편했다.
“현실을 좀 보라고. 영감.”
“…….”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아? 반 WWF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ACW를 만들고 당신의 왕국을 위협하고 있지.”
바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더 이상 WWF만이 유일한 답이던 시대는 지났어. 대체제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경쟁이라는 게 생겼지.”
바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케인이 제안한 PWA와의 협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또 어떻게든 갑질을 해보시겠다고 이렇게 사람을 놀리고 있으니.
나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로건은 턴 힐을 했고 앞으로도 우리와 그쪽은 계속해서 협업을 진행할 거야. 당신네들은 고립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도 고집을 부릴 텐가.
나는 다시 물었다.
“날 짓밟고, 다시는 WWF에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근데 이런 좋은 기회를 걷어찰 셈이야?”
그리고 비릿하게 웃었다.
“날 죽여야지?”
“웃긴 소리를 하는군.”
바트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일어서서 나와 마찬가지로 의자를 딛고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좋다. 애송이. 어디 해보자고. 말해봐라. 우리에게 뭘 요구하고 싶은 거냐?”
“요구는 그쪽이 먼저 해야지.”
난 케인을 슬쩍 돌아보았다.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던 그가 이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 진행할까요?”
“어디 들어나 보자.”
바트의 승낙에 나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바트도 내 옆에 앉았고, 그렇게 좀 황당하게 자리를 잡은 채로 케인이 빔 프로젝터로 벽에 영상을 쏘아 보냈다.
돌아보자니 어이가 없다는 듯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티파니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또 영감님 마음은 잘 알지.’
피식 웃자니 케인이 입을 열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2주간 진행될 WWF의 극동 투어에 나와 PWA 멤버들이 참가하고, 그동안 WWF의 위클리 쇼에 PWA 멤버들이 습격 각본을 진행해주었으면 한다는 것.
거기에서 티파니가 물었다.
“버닝콩과 랙다운 둘 다?”
“그래, 가능하다면.”
“흐음…….”
다소 무리한 제안이었다.
극동 투어 기간은 원래 2월이었는데 나로 인해 밀려서 6월로 예정이 되었다.
즉, 6월에서 7월.
그 기간 동안 위클리 쇼를 진행한다면……. 글쎄다. 뭔가 좀 애매한데.
“둘 중 하나, 가능합니까?”
“또 뭐냐. 매번.”
“아니, 구린 걸 어떻게 해요.”
바트의 말에 솔직하게 대답한 나는 그대로 두 가지 제안을 늘어놓았다.
“투어 기간을 좀 늘리거나 시기를 7월 말 정도로 미룰 수는 없겠습니까?”
“왜지?”
“그래야 8월 섬머 수플렉스 기간에 맞출 수 있지 않나 싶어서요.”
내 생각은 이러했다.
8월 섬머 수플렉스 기간에 맞춰서 우리가 습격하는 각본을 진행하면 분명 더 많은 돈과 인기를 얻을 수…….
“어, 일단 투어 리스트에서 제외는 시켰는데 제안이 몇 개 더 있기는 해.”
“어디죠?”
“북한.”
“……?”
“그쪽 위원장이 널 반드시 만나고 싶다면서 연락을 보낸 게 있는데.”
“???”
“경애하는 김정인 동지께서 간악한 미제 앞잡이들에게 맞서서 ‘북조선 인민 발차기’를 보여주고 있는 너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데.”
“어,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도 그 친구들이 말하는 미제 앞잡이인데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래쪽 출신이다.
“그걸 알아서 일단 그때 당시에 거절을 했는데, 계속해서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하는군. 관객도 100만 명쯤 동원할 수 있다는데?”
“……그 사람들이 과연 절 보고 싶어서 거기 온 걸까 싶어지는 부분이군요.”
아니, 애초에 그 나라에 가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내가 붙잡히면 아마 아버지가 구하러 와서 국제 문제가 될 가능성이…….
그렇기에 일단 북쪽은 보류.
“그렇다면 투어 기간을 미뤄야겠군. 하지만 여기에서 확인할 게 있네.”
바트가 날 돌아보았다.
“뭘 어떻게 할 셈인가?”
“테이커한테 져드릴까요?”
“…….”
시선이 사납다.
아직도 내가 레슬 임페리움 연승을 끊은 걸로 원한을 가진 모양인데.
“그건 그쪽에서 정하시고.”
나는 적당히 말을 넘겼다.
“일단은 극동 투어의 시간대를 어떻게 맞출지를 먼저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건, 시간대를 옮겨보지.”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고요. 그리고 극동 투어에서의 부킹 말인데…….”
그건 우리 쪽에서 하겠다.
“안 돼.”
“왜죠? 극동 투어가 진행될 대 위클리 쇼에 참가하는 우리 선수들 부킹은 그쪽에서 담당할 거 아닙니까?”
“날 속이려고 하지 마라. 신.”
바트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시나를 이길 셈이냐?”
“일대일을 생각했습니다만.”
“일대일?”
“한국에서는 제가 이기고 그 다음 투어 장소인 일본에서는 져주는 거죠.”
아마 그렇게 될 터였다.
각본이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말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시나와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난 국민적인 영웅.
일본은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충분히 인기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서 두 번의 경기에서.
“제가 한 번, 시나가 한 번.”
“…….”
“이 정도면 그래도 현실성이 없는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바트가 다른 제안을 해왔다.
“너와 내가 회의를 거쳐서 극동 투어의 결과를 정하는 걸로 하자.”
“그렇다면 저희 쪽에서도 위클리 쇼에 PWA 크루들을 참가시켜도 되겠죠?”
“마음대로 해라. 대신 투어 경비는 우리가 대는 만큼 분명히 말해 너희만 좋은 부킹은 절대로 안 할 거다.”
“또 이렇게 나오시네. 영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서 우리 쪽에 도움을 청한 거 아니었어? 우리는 ACW와의 관계도 버리고 여기에 온 건데.”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신. 너희가 우리와 협업한다고 해서 ACW 측에서 과연 너희를 져버릴 수 있을 것 같나?”
예전으로 돌아왔다.
지지 않고 받아치는 바트 맥센의 모습에 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래, 이래야지.
* * *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비행기 안에서 한참 고민을 하던 티파니가 내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왜 ACW와 WWF는 협력할 수 없나.”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희가 ‘약자’라서 지금 이 관계가 성립하는 거잖아요?”
“바로 그거야.”
나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PWA는 마치 악어 두 마리의 입 안을 왔다 갔다 하는 악어새와도 같았다.
두 악어가 몸집을 불리기 위해 허겁지겁 고기를 먹고, 그 이에 낀 것을 처리해주면서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잇속을 챙기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만약 WWF에 계속 남았더라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진 않았겠지.
그곳에서 나는, 물론 정치질로 어떻게든 잇속을 끌어 모으고 있기는 했지만 한 명의 선수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재미있는 구도 같아요.”
“그래, 하지만 우리가 어디까지나 약자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돼.”
“힘 싸움을 할 수는 없다는 거죠? 두 단체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잘 하면서 계속 싸움을 끌고 가야 한다는 거지?”
그 말이 맞았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기회가 올 거야.”
WWF와 ACW, 양측의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그들은 많은 것을 걸게 될 터.
그때 바트를 한 번 더 고꾸라뜨리고.
“책임을 묻는 거죠.”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일단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가야만 했다.
WWF의 주주들을 포섭하고.
바트가 제 고집을 부리기 위해 시장에 내놓는 주식을 차례차례 구매하고……. 물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이다.
지금은 말로 고집을 꺾었지만, 그때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기대되는데.”
“아직은 먼 이야기지만요.”
“그래도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아? 난 벌써 내일도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상상하면 참을 수가 없는데.”
“당신 얼굴만 봐도 즐겁기는 하네요.”
티파니가 새침하게 웃었다.
나도 자연히 미소가 지어졌다.
WWF의 투어는 7월.
그때까지 남은 5월과 6월 내내 새로 태어난 ACW와 협업을 하면서 계속해서 회사를 굴려나갈 생각이었다.
바로 그 순간, 티파니가 뭔가를 퍼뜩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nWo가 만들어졌잖아요?”
“그렇지.”
“져줄 생각이에요?”
“물론 그렇게 해야지. 그쪽에서도 우리한테 완전히 당해줬으니까.”
하지만 그로써도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딱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바트는 지금쯤 섬머 수플렉스에서 우리 PWA를 완전히 짓밟을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말이야.”
“그렇겠죠.”
바트 맥센은 그런 남자였다.
그럴 힘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쪽의 잡으로 nWo가 대박을 치면 시청률 차이가 더욱 벌어지면서 바트도 위기감을 느낄 거란 말이지.”
“그렇게 되면 우리와 협업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때 칼자루가 넘어오겠네요.”
그 말이 맞았다.
말인즉슨 우리는 ACW를 더 키워주면서 보험을 들어두고 있는 셈이었다.
바트 맥센의 변덕.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ACW가 진짜로 WWF의 숨통을 옥죌 정도로 강력한 적으로 성장해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분명히, nWo는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역대급의 스테이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