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아니, 그러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싫으면 때려치우자니까요?”
“끄으으으으으그그그그그극…….”
“나도 바쁜 사람이야. 이번에 드라마 찍는 거 못 들었어? 왜 이러시나?”
“그런 것 치고는, ACW와의 대결에서 완전히 제대로 잡을 해줬더군?”
“허어, 명확히 말하자면 나만 진 거지 우리 선수들은 이겼잖아? 덕분에 우리 쟈니의 티셔츠 판매량이, 어후.”
“…….”
“거기는 이번에 숀 시나 하이퍼 비타민 시리얼 출시한 거 판매랑 안 나와서 죽 쑤고 있다면서요? 어쩐대.”
“널, 꼭 죽이고 말겠다.”
“속마음이 다 나오잖아.”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시간은 지나 2008년 7월.
극동 투어 직전.
나와 바트 맥센은 요 며칠간 호텔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최종적으로 협의점 따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방은 따로 썼지만.
식사는 대부분 같이 했다.
뭐, 오늘 저녁은 아닐 것 같지만.
고민하던 바트가 벌떡 일어섰다.
“밥이나 먹고 다시 하지.”
“그럴까요. 호텔 레스토랑도 슬슬 질리는데 어떻게, 버거라도 먹을까요?”
“알아서 해라. 난 나대로 할 테니.”
“…….”
카페 바깥으로 불쑥 나가는 바트.
이럴 줄 알았다.
한숨을 내쉰 나는 바트가 남기고 간 물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는 영 진전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트가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지.’
그는 우리 측에서 일단 잡을 해줘서 WWF 측의 권위를 올려주길 원했다.
하지만 뭐.
그런다고 해서 뭐가 바뀌겠는가.
프로파간다로 느껴질 터였다.
왜냐고?
현재 원탑인 ACW조차도 우리의 잡을 완벽하게 받아내지는 못했으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시청률과 관객 반응부터 시작해 각종 지표를 분석하면서 면밀하게 각본을 진행해왔다.
결과적으로 나는 할리우드 로건에게 패배했지만 고가 대시에게 이기면서 어느 정도 설욕은 이루어냈다.
ACW 팬들은 카리스마적 존재인 로건의 승리로 설욕을 해냈다고 느꼈고.
우리 PWA 팬들은 고의 승리로 나름대로 졌지만 잘 싸웠다고 느꼈다.
원래 계획, ‘완전히 져준다.’까지는 가주지 못했지만 이게 훨씬 좋았다.
두 단체가 협업하면서 서로가 각자 다른 분야에서 성과를 이뤄냈으니까.
그렇게 팽팽한 상황인데.
여기서 느닷없이 우리가 WWF를 습격해서 된통 당하는 각본을 쓴다면?
제대로 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ACW의 2인자인 케빈 대시를 쓰러뜨렸던 고가 WWF 선수에게 깨진다면, 분명히 큰 역반응이 나올 터였다.
ACW.
WWF.
PWA.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될 터였다.
이전과는 다르게 프로레슬링의 각본은 ‘멀티 유니버스’처럼 진화했다.
각본은 그에 맞춰서 진행해야지 떼를 쓴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바트는 각본을 자기 망상 노트에 끄적거린 소설처럼 쓰려고 했다.
덕분에 회의는 길어졌다.
그런 와중에 하나 고무할 만한 점이 있다면, 역시나 ACW의 성장이었다.
WWF를 완전히 짓밟고 업계의 원탑으로 올라선 그들은 nWo의 카리스마 아래에 이 업계를 지배해나갔다.
그렇기에 바트가 아무리 고집을 부리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원래의 역사에서, 2위 단체로 전락한 WWF는 이후 ACW가 스스로 몰락할 때까지 시나를 계속 밀어주었다.
바트는 WWF가 가장 빛났던 태도 불량 시대의 스타들과 비교하면서 현재의 스타들을 대우해주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WWF의 팬들은 정확히 두 갈래로 분류되어 쇼를 봤다.
시나를 믿는 가족 팬들.
그리고 WWF에 복귀하는 태도 불량 시대의 스타들을 보려고 하는 팬들.
그 가운데, 시나는 오직 자신을 믿어주는 팬들만 보며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끝끝내 ACW의 몰락과 동시에 진정한 아이콘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건 전생의 일.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터였다.
나는 말했듯, 이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고 싶은 꿈을 가졌다.
미래의 스타를 키워내지 않고 과거에 기대는 태도 또한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그걸 막아낼 생각이었다.
그것을 위해, 위기감을 조성하려고 지금 일부러 nWo를 터뜨린 거지.
‘어차피 터질 일이기도 했고.’
거기에 우리가 영향을 끼쳐야만 바트 맥센으로서도 말을 들을 테니까.
‘슬슬 끝을 내볼까.’
일단은 밥부터 먹고 나서.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로비를 빠져나온 나는 뉴욕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늦은 밤.
네온사인 불빛 아래.
선글라스를 쓰고 적당히 근처 식당에 들어간 나는 카운터 석에 앉아 음식 몇 가지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호텔 음식도 좋은데, 며칠 동안 거기서 나오는 거만 먹다보니 질려서.
24시간 운영되는 다이너, 가볍고 싸고, 적당히 편하게 먹기 좋은 식당.
식단 조절에 치명적이었지만 뭐, 한 끼 정도는 별문제 없겠지 싶었다.
그래도 밀크셰이크처럼 치명적이다 못해 확실한 독약은 절대 못 먹지만.
‘그건 은퇴한 다음에 먹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
나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바트 맥센.
‘와.’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두 사람이 따로 나와서 같은 식당에 도착할 확률이 대체 몇 프로나 될까.
거기다 메뉴도 나와 같았다.
더블 치즈버거에 프라이는 팬케이크로 바꾸고 제로 콜라까지 주문했다.
아니 뭐,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싶었다.
여기는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다이너 식당이고 내가 나가서 먹자고 말했고 긴 회의로 당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자리를 옮겼다.
바트의 맞은편.
비닐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니 바트가 노골적으로 노려보았다.
“다른 자리를 알아보지 그러나.”
“뭐, 같이 먹자고요. 피차 같이 먹을 사람도 없는 사이에 말입니다.”
그리고 메뉴가 나왔다.
웨이트리스가 내 사인을 받아갔고, 그것을 본 바트가 피식 웃으며 햄버거를 우악스럽게 입 속에 쑤셔 넣었다.
신경이 쓰여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회의 때는 바트의 기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좀 말을 험하게 하는 나였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예의를 차렸다.
“인기도 좋군. 보통 바깥에서 알아보는 이들이 드물 텐데 말이야.”
“동양인이니 그런 거겠죠.”
아무래도 미국에서 나 같은 스타일의 동양인은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키도 일반 신장보다 훨씬 크고.
떡 벌어진 어깨에 근육질.
그렇기에 잘 알아보는 게 아닐까?
하지만 바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유명하기 때문이겠지.”
“……갑자기 웬 칭찬이래요.”
“사실을 말하는 거다.”
이런 부분은 또 묘하게 쿨하다.
그렇기에 그 고집이 이해가 갔다.
바트는 자기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거다.
그래서 나에 대해서 보이는 태도도 계속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겠지.
동양인 월드 챔피언을 프로레슬링 팬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게 가능하다고 증명했다.
그리고 계속해내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패배가 되기에, 바트는 계속해서 눈과 귀를 막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안타까운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은퇴해서 손주 보고 할 나이에 홀로 외로이 노인의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슬슬 끝을 보자.
“바트.”
“……뭐냐.”
“원하는 대로 해드릴까요?”
“뭐?”
“원하신다면 극동 투어와 섬머 수플렉스에서 다 져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바트는 햄버거를 먹다 말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뺨에 녹은 치즈가 묻어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바깥 날씨가 심상찮더니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가 창문에 붙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닐 소파는 금방 끈적끈적해졌고 나는 옆에 있던 냅킨을 꺼내 바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까라면 까죠.”
치즈를 슥 닦아주었다.
바트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인 얼굴.
그래, 이게 먹힐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도 이게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존심이 발목을 잡아서 바트는 꼬장을 부렸다.
그렇기에 그냥 하자고 한 거다.
여기에서 바트는 어떻게 나올까.
물론.
“무슨 꿍꿍이인가?”
의심을 하겠지.
“아니, 그쪽 하자는 대로 해주겠다는데 또 꿍꿍이는 무슨 꿍꿍이요?”
“그렇게 하다가 테이커의 연승이 끊겼지 않나. 나로서는 당연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네.”
그건, 맞군.
한 방 맞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어쩌실래요. 제가 제안하는 대로 투어랑 쇼랑 진행하시겠어요?”
“…….”
“결국 자존심 아닙니까. 바트.”
나는 다리를 꼬았다.
“인정하시죠. 지금 자존심 때문에 의견을 굽히지 않는 거 아닙니까?”
“……자네는 내 작품을 망쳤어.”
“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되묻자니.
“캡틴 로건을 타락시켰다고.”
바트가 이를 악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갑자기 여기서 로건이 왜 나와?
“시나마저 그렇게 만들 셈이겠지! 내가 그걸 허락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 흥분하지 마시고.”
“흥분을 안 하게 생겼어!!”
바트가 버럭 소리쳤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창피하군.
“로건은 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야! 그런데 지금 ACW에서 버러지 같은 짓이나 일삼는 악당이 되었지!!”
“그게 화가 나셨다는 겁니까?”
“그래, 넌 언제나 그딴 식이었다. 나에게 인정받지 못하니 내 작품들을 망치며 모든 걸 들쑤셔놓고 있지!”
“…….”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비참하군……!”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
나는 차갑게 되받아쳤다.
“영감. 남들이 하는 이야기 안 듣고 갇혀있던 건 바로 당신 아닙니까.”
바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이커는 자신의 뒤를 이어줄 선수를 찾고 있었어요. 그걸 무시하고 영원히 최강으로 남으라면서 밀어붙이고 있던 건 바로 당신 아닙니까?”
그러다가도 위기의 상황이 닥치자 곧바로 브룩 레스너 같은 파트 타이머에게 연승을 넘겨버리고 말았지.
스스로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서 대체 어떻게 깨끗한 척을 할 수 있을까.
“테이커의 고관절은 정상이 아니에요. 이미 선수로서의 생명은 끝물입니다. 테이커가 링 위에서 죽어서 관에 묻혀야만 결국 이 짓을 끝낼 겁니까?”
“큭…….”
“전 그걸 이어받아서 후세로 넘길 겁니다. 그걸 위해서 싸우고 있죠.”
안티 크라이스트.
샤프 슈터.
위험천만한 범프들.
모조리 받은 것들이다.
바트는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에고도 그렇고 사업가로서도 과거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그 과거를 부수고 파편을 주워 앞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존재였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 * *
호텔 방으로 돌아온 바트 맥센은 고민 속에서 한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바로 숀 시나였다.
[회장님,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아닐세. 무슨 일인가?”
바트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신 다음으로 바트가 가장 큰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시나는, 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를 압박해왔다.
그는 어떤 각본을 제시받던 꿋꿋이 소화해냈고, 현실로 확장시키면서 꾸준히 팬들에게 인정을 받아왔다.
현대 프로레슬링에서 악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사나이로 계속해서 자기 커리어를 개척한 것이다.
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
그리고 전혀 다른 각본.
따라서 바트는 시나를 최근 들어서는 자유롭게 놔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존재가 없으면 이 WWF라는 회사는 더 성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좀 안 좋으신데요?]
“아닐세.”
[일 열심히 하시는 것도 좋지만 몸 생각해서 쉬엄쉬엄 해주세요.]
“……고맙네.”
[하하, 아닙니다.]
순수한 호의에 따른 인사.
바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링 위에서나, 링 아래에서나.
시나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좀 기운이 생겼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바트는 시나라는 인물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극동 투어에서 신과 붙겠습니다. 그리고 일대일로 주고받고 싶습니다.]
“왜?”
[그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시나가 말을 머뭇거리더니.
곧 묘한 소리를 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 같습니다.]
“뭐?”
[제가 신에게 져도, 신이 저에게 이겨도. ‘아직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요.]
시나의 말은 이러했다.
프로레슬링의 승패는 결국 승자의 위상이 올라가고 패자의 위상이 낮아지는 식으로 구성이 되었다.
승자의 위상을 더 높이기 위해 일방적인 스쿼시 매치가 있는 것이고.
패자의 위상 하락을 막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연출이 가미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게 없어도.
이 일대일 교환에서 아무런 일도 벌어질 것 같지 않다.
바트는 그걸 부정했다.
“자네는 신보다 더 나은 선수야.”
아무리 그래도 시나는 현재 월드 챔피언을 수차례 획득하면서 한 단체,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선수였다.
물론 그에 따른 역반응으로 인해서 시대가 불안정하다는 평가는 받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이콘은 아이콘이었다.
반면 신은, 수많은 전설들을 쓰러뜨렸지만 월드 챔피언은 1회도 획득하지 못한 ‘선수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신도 시대의 아이콘입니다. WWF 바깥을 만들어가는 건 제 입사 동기인 그 준호 킴입니다.]
“…….”
[하지만 저는, 회장님과 수많은 선배들, 직원 분들의 도움을 받아 부끄럽지만 여기까지 커왔습니다.]
“그래서?”
[절 시험해보고 싶습니다. 아니, 이 WWF를 한 번 평가 받고 싶습니다.]
숀 시나 vs 신.
일대일로 주고받는 승부.
과연 그것을 본 팬들은 두 사람 중 누구의 편을 들어주게 될 것인가.
“………….”
바트는 코끝이 찡한 것을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래, 빌어먹을.”
하지만 답은 자동으로 나왔다.
“그렇게 하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바트.
그리고 다음 날, 신과 만난 그는 극동 투어 동안의 협업을 결정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