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12화 (312/634)

312.

그렇게 7월 말.

우리는 8월 중순의 WWF 페이퍼뷰인 섬머 수플렉스에 맞춰 돌아오기 위해,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멤버는 단순했다.

PWA 쪽에서 절반인 열 명.

리더는 물론 나였고, 주된 참가 멤버는 쟈니 에이스와 리키타, 거기에 링 프로듀서로 바쿠가 따라왔다.

WWF에서도 숀 시나를 중심으로 랙다운의 랜스 오튼을 비롯한 수많은 슈퍼 스타들이 이번 투어에 참가했다.

그리고 위클리 쇼에서 습격 각본을 수행하기로 한 남자는 두 사람.

트리플H와 러셀 하트였다.

우리 쪽에서는 펑크와 고, AK 같은 선수들이 중심이 되어 습격할 거고.

고는 자신이 극동 투어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걸 알자 시무룩한 얼굴로 ‘I Love Korean BBQ…….’라고 말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지금 실질적인 2인자가 그인데.

사모안 디스트로이어, 사모아 고가 중심이 되어 WWF를 습격하는 각본.

분명히 먹힐 거다.

그렇기에 나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고 극동 투어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긴장은 당연히 별로 안 됐다.

다들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에.

안타깝게도 바트 맥센이 계속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제대로 된 인사는 나눌 수 없었지만.

뭔가 싶어서 물어보니 극동 투어를 하는 내내 그렇게 하실 예정이란다.

“……대체 왜요?”

“네가 우리 선수들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건 양보할 수 없다.”

“뭐, 그러세요.”

고문이겠군.

그렇게 생각하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WWF의 선수 전용 여객기가 뉴욕의 한 공항으로부터 날아올랐다.

해외 투어를 할 때 쓰는 물건이지.

덕분에 안은 넓고 쾌적했지만.

대충 12시간의 여행.

그동안 내내 옆의 이 영감과?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끼고 있자니, 바트가 별안간 안대를 쓰고는 좌석에 기대는 것이 아닌가.

‘뭐, 뭐지?’

일단 기다려보자.

약 30분.

충분히 사람이 잠에 빠져들 만한 시간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리던 나는 이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

“어딜 가려는 건가?”

귀신같네.

“아, 아. 잠깐 화장실 좀.”

“지켜보지.”

와.

범죄자도 이렇게는 안 다루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던 나는 자리에 앉아있던 덩치 큰 사내들과 가볍게 눈을 마주쳤다.

테이커가 미소를 지었지만 딱히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고, 다들 회장님 눈치를 보는지 침묵하고 있는 상황.

한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야!”

오튼이다.

“야-!!!”

그리고 다음 순간, 노도와 같은 불호령이 비행기 전체를 뒤덮었다.

오튼이 몸을 움찔 떨었고, 바트는 불같은 분노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할 거 없으면 잠이나 자!!”

“옙…….”

시무룩해지는 오튼.

제기랄.

‘이거 그냥 있어야 돼?’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나는 순간적으로 이성의 끈이 끊어지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몇 달 만에 만난 친구를 반가워하는 우리 오덕이에게 저런 큰 호통을 칠 필요가 있나?

“하.”

한숨을 내쉰 나는 뒤로 돌아 바트 맥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시, 신!”

순간 놀라 일어서는 선수들.

솔직히 말해서, 출발 직후부터 이런 문제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하자.

이건 바트가 걸어온 싸움이고.

난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어이, 영감.”

“뭐냐.”

이 방법은 아껴두고 싶었는데.

나는 일용품들을 담은 가방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바로 플레잉 카드였다.

“게임이나 하지.”

“호오…….”

승부에 미친 바트의 눈이 순간 반짝거릴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터.

하지만 나는 여기에 룰 하나를 추가함으로써 그를 보낼 계획을 입안했다.

비행기 안의 모두가 알도록.

“지는 사람은 위스키 한 잔.”

“하, 나에게 감히 포커로 덤벼오는 애송이가 또 나타날 줄은 몰랐군.”

바트가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사실 이것이, 이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는 상당히 보편적인 일이었다.

왜냐고?

여행은 긴데, 할 게 없으니까.

거기에 우리가 책과 가까운 인간들도 아니고.

같이 다니는 친한 동료와 계속 카드만 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다.

그리고 나에게는 무려 25년 넘게 다져진 슈퍼 포커 경력이 존재했다.

또한, 무척 강력했다.

넌 오늘 죽었어.

* * *

대략 1시간 30분 정도 뒤.

“끄극, 끅……!”

바트 맥센이 한 잔을 완벽하게 비워내지 못하고 결국 뒤로 넘어갔다.

[Yeeeeeeeeeeeeaaaaahhhh!!]

주변에서 흥미롭게 그와 나의 대결을 지켜보던 선수들이 환호를 보냈다.

“와, 이 자식 미쳤는데?!”

“대체 못하는 게 뭐냐?!”

뒤에서 보던 부커와 레이가 내 등을 퍽퍽 때리면서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압도적인 승부였다.

결국 바트는 제 고집을 꺾지 못하고 흥분해 연신 위스키를 들이키다 취해서 쓰러졌고 뒤쪽으로 실려갔다.

물론, 나도 좀 지긴 해서 몇 잔 마셨더니 슬그머니 취기가 올라왔지만.

그래도 이걸로 방해 받지 않고 비행기 안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군.

그렇게 생각한 시점이었다.

쿵!

날카로운 소리에 모두가 집중했다.

방금까지 바트가 앉아있던 자리에 테이커가 앉아 카드를 바닥에 섞었다.

그리고 손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가 들린 상태였다.

“아직 더 할 수 있겠지?”

“……그야 물론이죠.”

“에이, 테이커! 저도 시켜주십쇼!”

“그렇다면 홀덤으로 할까?”

“어? 가능합니까?”

“내가 시설팀장한테 부탁해서 테이블 하나를 비행기에 넣어달라고 했지.”

“오오오!!”

기뻐하는 선수들.

텍사스 홀덤.

평범한 비행기 안에서는 절대 할 수 없지만 전용기에서는 가능한 스포츠.

‘좀 걱정했는데.’

역시, WWF는 분위기가 좋았다.

그렇다면 이쪽도 질 수 없지.

“쟈니! 바쿠!!”

나는 우리 팀을 불렀다.

줄곧 뒤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던 쟈니와 바쿠가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끼시죠. 다들.”

“오, 그럴까?”

“바쿠, 오랜만입니다.”

“아, 테이커.”

“괜찮다면 그쪽 친구들도 같이 어떠십니까. 카드도 많고 술도 많은데.”

“그렇게 할까.”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무척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 2주 동안 함께 일을 하게 될 테니 서로 친해지는 편이 더 낫지.

바트 맥센과는 달리, 적어도 WWF 선수들은 ‘협업’의 의미에 대해서는 ACW보다 더 잘 이해하는 듯했다.

ACW 친구들은 반대로 우리와 협업을 했을 때는 영 아니꼬워했으니까.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자자, 다들 이쪽으로 오라고!”

“한 잔씩들 해!”

“긴 여행이 될 테니까!”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이었다.

눈앞에 다른 선수들이 가져온 거대한 테이블이 떡하니 펼쳐졌고, 뒤를 이어 그 앞에 각자 사람들이 앉았다.

“딜러는……?”

“나다.”

테이커가 카드 더미를 들었다.

자리에 앉은 것도 다들 백스테이지 내에서 나름 한가락 하는 선수들뿐.

‘이거 좀 힘들겠는데.’

하지만 승부욕이 타올랐다.

* * *

그렇게 비행 끝에 도착한 한국.

원래대로라면 공항에 도착하는 우리를 취재진들이 반겨주면서 극동 투어의 시작을 멋지게 알릴 예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나와 시나, 두 사람뿐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바트가 또 호통을 쳤다.

……이번에는 할 말이 없었다.

시나는 술을 안 마셨고.

나는 적당히 먹다 빠졌다.

그래서 남은 인원은 우리 둘뿐.

다들 술에 완전히 뻗어버려서 비행기 안에서 구토를 하고 난리도 아녔다.

“신!! 네가 또 저지른 짓이냐!!”

“아 뭐, 선수들끼리 좋은 의미에서 여차저차 하다가 술이나 한 잔…….”

그나저나 바트도 대단한 양반이다.

술에 완전히 꼴아버렸으나, 그 난기류 속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자 숙취도 없이 곧바로 회복해서 날뛰었다.

어쨌든, 문제기는 했다.

지금 취재진과 팬들이 게이트 너머의 로비에 장사진을 치르고 있단다.

그런데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멋지게 사진 촬영도 해주고 사인도 해줘야할 선수들이 다들 뻗어버렸으니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어?!”

“아, 아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재미있잖아.

지금 상황이.

그러자니 내 옆에 가만히 서있던 시나 역시도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감았다.

“수습하면 되는 거죠?”

“시나 너까지……!”

“괜찮아요. 바트. 신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나는 시나를 바라보았다.

7부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와 리스트 밴드, 그리고 캡 모자까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광고판과도 같은 남자였다.

그만큼 완벽한 프로 의식.

이 녀석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바트를 두고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불투명한 입구 유리창 너머로 인파가 바글바글하게 보이는 것이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할까?”

시나가 물었다.

그런 순간에도 순진하게 웃고 있는 모양새가 어딘가 녀석답다 싶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격언이 문득 떠오르는군.

“글쎄, 요는 기사에 쓸 그림을 여러 장 만들어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렇겠지. 경기 소스 나갔던가?”

“엉, 너랑 나랑 메인이벤트 뛰는 건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일걸.”

“그렇다면 역시…….”

그 뒤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링 아래에서 각본을 진행한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시나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환호.

[신!!]

[시나!!]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가이드라인 바깥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팬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손을 흔들었고.

시나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그런 와중, 나와 시나는 빠른 속도로 눈앞의 상황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인파는 지난번에 내가 한국에 혼자 방문했을 때와 대충 비슷한 숫자였다.

거기다 왼쪽에 포토라인이 있다.

기자들이 그 앞에서 기다렸고, 원래 계획은 선수들이 팬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그쪽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와 시나는 팬들 앞으로 이동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환호.

인파가 몰려드는 가운데, 경호원들이 스크럼을 엮어서 그들을 막아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조금만 도와주세요.

그렇게 생각한 나는 눈앞에 서있는 남자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신! 사랑해요!!”

“저도 사인 좀……!!”

“그래, 그래. 한 명씩 다 해줄 테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기다려요.”

선글라스까지 벗은 나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팬들에게 사인을 해줬다.

시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떨어진 위치에서 사인을 해주며 녀석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거리가 점차 좁혀졌다.

딱히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녀석도, 나도,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일류이기에 알 수 있는 감각.

쇼 비즈니스에서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것.

그건 역시나.

실제로 대립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동시에 사인지를 잡았다.

같은 사인지.

[우오오오오오오오?!]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팬들.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팬들이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기자들도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와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마구 찍어댔다.

그로 인해서 자연스레 우리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가 설명되었다.

시나와 나는 싸울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싸움에서는 내가 이긴다.

시나가 먼저 사인지를 놓았다.

“You First.”

피식 웃은 내가 먼저 사인을 했고, 시나가 그걸 가져가 옆에 사인했다.

종이를 받아 든 중년의 여성은 그것이 보물이라도 되는 양 안아 들었다.

우리는 이어서 옆으로 이동했다.

이제 사인 타임은 끝났고, 포토라인 위에서 기사용 사진을 찍을 차례.

거기에서도 또한 ‘누가 먼저 사진을 찍느냐.’는 그림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번엔 네가 먼저 해.”

“내가?”

가벼운 액션으로 기자와 팬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린 우리는 살짝 옥신각신하는 듯한 액션을 보여주었다.

“왜, 이번에도 먼저 가지.”

“아니 뭔가 배려 받는 듯해서.”

“그러면 안 돼?”

“기분 나쁘잖아.”

내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 자세한 대사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표정에서 충분히 전달되었을 터.

결국 우리는, 동시에 포토라인 앞에 서는 것으로 대충 타협을 보았다.

공항 내에 긴장감이 흘렀다.

마치 일류 복서 두 사람이 시합 전에 인터뷰를 나누는 자리와 같았다.

우린 그걸 노린 것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나오지 않더라도 팬들이 충분히 잘 왔다고 느낄 정도로.

거기다가 시차 적응을 마치고 3일 뒤 이어질 경기도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예상대로 되었다.

“선수들! 악수 부탁드립니다!”

기자의 말에 시나가 순간 의아한 표정으로 따라온 통역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빨랐다.

“시나, 악수.”

“아.”

우리는 오른손을 맞잡았다.

나와 시나는 그 상태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손에 꾸욱 들어가는 힘.

이건 각본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어쨌거나 하나는 확실했다.

분명 멋진 투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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