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13화 (313/634)

313.

전생과 달리, 극동 투어의 규모는 거의 미국 대통령의 내한 급으로 커졌다.

아무래도 내 존재 때문일 터였다.

미국에서 성공한 동양인.

그것도 부모님이 한국 출신.

그렇기에 한국 사람들이 나에게 갖는 관심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감사를 느끼면서도, 나는 이걸 이용해서 시나를 이길 생각이었다.

이 열기가 함께라면 내가 시나에게 승리를 거두는 그림이 자연스러웠다.

전체이용가 시대의 WWF 아이콘.

숀 시나에게.

하지만 그전에.

투어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일단 도착한 날 저녁에 섭외된 쇼 프로그램에 참석해 쇼를 홍보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난번 한국에 왔을 때 만났던 남자를 다시 만났다.

메뚜기.

“아, 오랜만입니다.”

“와! 신! 저를 기억하세요?!”

“물론이죠. 다른 친구들은 어디 있죠? 뚱보나 헬멧, 거성 같은…….”

“아, 그 친구들은 섭외가 안 됐고.”

“에이, 요! 신! 브라더!”

외국인은 있었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촬영.

늦은 밤, 호텔로 돌아온 나는 로비가 북적거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뭔가 싶어서 확인하자.

놀랍게도 시나였다.

로비에 몰려든 많은 팬들에게 지치지도 않고 사인을 해주고 있는 녀석.

정말이지, 엄청난 프로의식이었다.

‘나도 질 수 없지.’

여기는 내 홈그라운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쪽을 알아보고 다가온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시, 신! 정말 팬이에요!”

“감사합니다. 이름이?”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피곤했고 내일 스케줄도 있지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곳을 찾아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호텔에 쉬는 다른 투숙객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어서 딱히 좋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 투숙객들을 포함해 호텔 직원들마저 사인을 받으려는 상황이니까.’

뭐, 괜찮겠지 싶었다.

그나저나.

하나 궁금한 게 생겼는데.

“뭐 하나만 여쭤도 될까요?”

“아, 네, 넵!”

고개를 끄덕이는 로비의 여직원.

“저 녀석, 언제부터 있었죠?”

“아, 시나 님이요?”

“예, 오래됐나 싶어서.”

“저녁 드시고부터 계속 계셨어요.”

완전 사인회로군.

지칠 법도 한데, 어린애를 무릎에 앉혀놓고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렇게 자정 직전까지 이어진 사인회는 호텔 측의 요청으로 종료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가는 소년에게 끝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시나.

그 뒤에 서있던 나는 겨우 어깨의 짐을 놓고 돌아서는 녀석을 맞이했다.

“넌 대체 언제 쉬냐?”

“이제 쉬어야지.”

“내일 네 시 기상이잖아.”

“가다가 자면 돼.”

“신기한 놈.”

“그러는 너도 끝까지 사인해줬잖아?”

“네가 하니까 그렇잖아. 네가.”

나는 시나의 어깨를 툭 쳤다.

문득 옛날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GCW에 처음 입사했을 때도 이렇게 함께 걸었던 것 같았다.

그때 이 녀석은 완전 초짜였다.

과연 누가 알았으랴.

유연성도 부족하고 낙법도 제대로 못 치는 생 초짜가 프로레슬링 업계에 위대한 이름을 새기다니 말이다.

피식 웃은 나는 시나와 헤어져 바쿠와 함께 쓰고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혼자 맥주를 홀짝거리던 바쿠가 입을 열었다.

“많이 늦었구나.”

“일이 좀 있어서요.”

“얼른 자라.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하니까.”

“……아니 근데, 또 술이에요?”

“한국 맥주도 먹을 만하군.”

어제도 실컷 먹더니.

대체 간이 얼마나 단단한 걸까.

* * *

눈을 감았다 뜨자 새벽이었다.

[말씀하셨던 네 시 정각입니다.]

“예, 예. 일어났습니다. 예.”

모닝콜을 받고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대답하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씻으러 다시 샤워실로 들어섰다.

거기서 좀 잠을 깨고.

로비 집합은 4시 30분.

대충 씻고 어제 자기 전에 준비해둔 옷을 걸친 나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다녀올게요. 바쿠.”

“그래애…….”

다시금 잠이 든 바쿠.

오늘 우리들은 서울에서 떨어진 평택의 미군 기지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애국자’인 바트 맥센이 그쪽에서 위문 공연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PWA 선수들은 그런 계약까지는 없어서 다들 쉴 수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가게 되었는데.

한국의 국방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날 꼭 만나고 싶어 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쪽과 나란히 앉아 공연을 관람하는 형식으로 스케줄을 짰는데.

‘그냥 거절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기엔 많은 돈이었다.

그렇게 여차저차.

새벽에 호텔을 나선 이동 버스에서 다들 곯아떨어졌고, 정신을 차리자 미군 부대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자자, 다들 열심히 하자고!”

바트가 선수들을 격려하면서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미군의 안내를 받아 이쪽의 스케줄을 소화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장년의 한국인 한 명이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아, 오셨군.”

“신입니다.”

“하하! 이 친구 한국말 참 잘하는데? 반가워요. 이성희라고 해요.”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

중책을 맡고 있는 자답게 어깨도 떡 벌어지고 목소리도 시원시원했다.

“사실, 내가 아는 은사님이 당신을 꼭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예?”

“여기 이분인데.”

그리고 돌아서는 장관.

휠체어를 탄 노인이 보였다.

주름진 얼굴에 희끗한 머리칼.

그가 날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맞군.”

뭐가 맞다는 걸까.

“자네 아버님 이름이…….”

아버지 이름을 대는 노인.

“마, 맞습니다.”

“보자마자 알았지. 그 친구 아들이 아니고서야 이 어깨는 못 나오니까.”

“저희 아버지를 아십니까?”

“모르네.”

“예?”

“그곳에 없었던 사람 중 하나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그게 자네 아버지였어. ‘그 전장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사람.’ 그렇기에 아무도 그를 기억하고 있지 않지.”

나조차도.

그렇게 말한 노인이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편지였다.

“딱히 긴 말은 필요 없고. 그 친구에게 이걸 좀 전해줄 수 있겠나? 옛 상관의 편지라고 하면 될 걸세.”

“아, 그, 그럽죠.”

나는 약간 당황해 대답했다.

아니, 음.

나야 돈 받아서 좋긴 한데.

이 자리에서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거기에 없었던 사람이라고?’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야.

순간 당황하고 있자니,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장관이 내게 다가왔다.

“뭐, 그건 그거고. 내 개인적으로 신 선수의 팬이기도 해서 여기 모셨지.”

“그, 그렇습니까?”

“요즘 PWA 잘 보고 있어요.”

호쾌하게 웃는 장관.

몇 마디 대화가 오간 뒤, 우리는 야외에 마련된 특설 링으로 이동했다.

이미 한창 미군들이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자리를 잡은 가운데, 주한 미군 사령관과 장관이 인사를 나눴다.

“아, 오셨군.”

“오랜만입니다. 사령관. 오늘 좀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장관의 감사에 웃는 사령관.

그와도 대충 인사를 나눈 나는 자리에 앉아서 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다른 군인들보다 뒤에 있어서 좀 조용히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갑작스레 나를 알아본 미군들이 챈트를 외치기 시작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하하, 이거 참.”

“멋진데요. 신.”

웃으며 돌아보는 두 사람.

괜히 멋쩍어져 뺨을 긁은 나는 가볍게 손을 드는 것으로 환호에 응했다.

[Waaaaaaaaaaaaaaaaaggghhhh!!]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쇼는 그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트리뷰트 투 더 트룹스.

Tribute To The Troops.

전 세계에 널리 퍼진 미군들의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 WWF가 거의 매년 개최하는 작은 프로레슬링 쇼.

솔직히 다분히 프로파간다적인 의도가 있는 쇼라서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좋아하는 시스템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내 일도 아니니까.’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봤다.

내일 ‘진짜’ 경기가 있기 때문에 오늘은 자연스럽게 태그 팀 매치 등으로 체력 안배에 큰 신경을 썼다.

메인이벤트로 나온 시나도 레이, 바티스타와 팀을 맺어서 오튼, 빅 죠, 젠코와 경기를 가지기로 되었다.

‘다들 여전히 잘하는군.’

미군들의 반응도 좋았다.

위클리 쇼에서는 항상 역반응을 감내해야만 했던 시나는 이곳에서는 정반대로 압도적인 환호만을 받았다.

말인즉슨, 평소에 쓰고 있던 ‘각본’이라는 가면을 벗은 시나는 확실히 팬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그런 상태에서 경기는 깊이 들어가지 않고 각자의 기술을 주고받으며 조금은 편한 스타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경기가 끝난 뒤 발생했다.

별안간 마이크를 잡은 시나.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연 그는 일단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위해 불철주야 힘쓰고 계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Waaaaaaaaaaaaaaggggghhh!!]

[여러분이 있어서 저 같은 사람들이 매일 밤 편하게 잘 수가 있습니다.]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고전적인 마이크워크였다.

사실 이게 가장 좋았다.

일회성 쇼.

선역이 이기는 상쾌한 결말.

……이라고 생각했는데.

[신!!]

녀석이 날 불렀다.

[거기 앉아서 뭐하고 있어?!]

[Uoooooooooooohhhhh!!]

놀라 돌아보는 미군들.

[올라와! 내일 경기를 갖게 되었는데 마이크워크 하나 없이 할 거야?!]

“……시나.”

어이가 없어 웃은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링을 향해 걸어갔다.

“오오오!!”

“신!”

“안티 크라이스트 보여줘!!”

다들 환호하는 가운데.

링으로 올라간 나는 마이크를 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시나에게 물었다.

“괜찮은 거냐?”

“뭐 어때. 이게 재미있잖아?”

“바트가 화 좀 내겠는데.”

“괜찮아. 말해뒀으니까.”

“허락은?”

“안 받았고.”

가볍게 웃은 시나가 내게 마이크를 던지고 새로운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한번 말로 붙어보자는 거겠지.

‘재미있겠는데.’

싱긋 웃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상하네, 왜 오늘은 ‘Shawn Cena Su-k’ 챈트가 안 나오는 거지?”

Shawn Cena Su-k.

시나의 입장 테마의 음율에 맞춰서 하는 챈트로, 팬들이 야유를 보내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난 그 말을 통해서 시나가 역반응을 얻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맞아. 오늘 이 미군들이 다들 멋진 친구들이라 나를 배려해준 거겠지.”

[Yeeeeeeeeeeeeeeaaaahhhh!!]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며 미군들로부터 환상적인 환호를 끌어내는 시나.

역시 타고난 놈이다.

그리고 공격이 들어왔다.

“그런데 넌 어때. 미군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신성한 의무를 져버리고 뒤에서 구경이나 했지 안 그래?”

[Booooooooooooooooooo-!!]

“뭐야. 나만 야유를 받잖아?”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 공연은 각본과는 별개였기 때문에 분명히 악역이라도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거 어쩌나.

“좋은데. 더 해봐!”

나는 야유도 사랑하는데.

[Booooooooooooooooooooo-!!]

반쯤 장난으로 야유를 보내는 미군들. 거기에 낄낄거리며 웃은 나는 그것이 가진 특별함에 대해 말했다.

“봤어? 다들 야유하잖아. 말인즉슨 나보다 특별한 선수는 지금 이 WWF에는 아무도 없단 말이지.”

[Yeeeeeeeeeeeeeaaaaaahhhh!!]

다시금 나오는 환호.

“내일 경기에서도 그럴 거야. 너는 넘버원일지언정 나처럼 스페셜하지는 않아. 시나. 그게 결국 네 발목을 잡아서 경기에서 패배하게 되겠지.”

“스페셜, 알파. 좋아. 나도 네가 쿨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게 살아가는데 중요한 건 결코 아니야.”

Hustle.

Royalty

Respect.

시나는 그 세 가지 캐치프레이즈가 새겨진 자신의 티셔츠를 내보였다.

열정.

충실.

존중.

그것이 시나를 설명했다.

“나는 여기 서있는 사람들처럼 평범한 개인에 불과하지.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대표하고 싸울 수 있는 거야!”

모두가 나처럼 특별할 순 없다.

그걸 통해 이 자리에 있는 미군들의 공감을 끌어낸 시나가 손을 들었다.

[Waaaaaaaaaaaaaaggggghhhh!!]

쏟아지는 환호.

역시 난 놈은 난 놈이다.

나는 그걸 받아주기로 했다.

“그거 재미있군. 확실히 나는 링 위와 아래, 모두에서 Alpha가 맞지.”

능청스럽게 받은 나는.

“그러니까. 내일도. 이길 거야.”

[Waaaaaaaaaaaaaaagggghhhh!!]

당당하게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게 나다.

나는 내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한다.

물러서지 않고.

누군가 인정하지 않아도.

내가 인정하니까.

그렇게 말한 뒤, 시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Face To Face.

The Alpha VS Mr. Hustle, Loyalty, Respect.

분명히 멋진 경기가 될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