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쇼가 끝난 뒤.
곧바로 바트 맥센과 면담을 신청한 나는 그 사무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쪽은 화가 잔뜩 났는데, 바트는 태연한 태도라서 좀 더 열이 뻗쳤다.
아니, 웬걸.
내가 씻고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별안간 놈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미안하지만 신,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짧게 해줄 수 있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뭐, 적어도 나는.”
“…….”
“어쨌든 그래. 경기장 사용 시간이 자정까지니까 최대한 짧게 해주게나.”
한 시간쯤 남았나.
어차피 길게 할 마음은 없었다.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거기다 단체와 단체 간의 협업에 있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게 바로 이거였다.
슛(Shoot).
예정된 각본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그래서 이쪽은 근거가 있었다.
세게 나갈 근거가.
“유니버스 챔피언십 주십쇼.”
나는 일단 판돈을 크게 올렸다.
“………….”
“아, 이거 열 받는데요. 거기서 왜 갑자기 헌터가 나옵니까? 솔직히 제대로 따지자면 이거 슛이잖아요.”
“……알고 있네.”
“설마 내가 아직도 그쪽 부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영감님.”
“그래도 이쪽 사정 좀 생각해줬으면 해. 우리가 악당이 되면 대체 팬들을 무슨 낯으로 봐야 한다는 말인가?”
“그건 당신 업보잖습니까?”
“……그래, 인정하지.”
“아니, 정말로요.”
세 가지 업보가 있다.
하나는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날 엿먹이고 싶다는 마음에 그냥 해보란 식으로 각본을 대충 허락한 것.
하나는 전설적인 선수였던 리키타의 은퇴를 그런 식으로 망쳐버린 것.
마지막으로.
“팬들과 선수들의 마음을 져버린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는 거죠. 실제로 당신이 리키타에게 예우만 갖춰줬어도 이런 일은 안 벌어졌습니다.”
“끄응…….”
“이게 뭡니까? 지금 사업하는 겁니까, 어린애들 소꿉장난하는 겁니까?”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냐.”
“유니버스 챔피언 달라니까요.”
“……아니, 좀 쉽게 가지.”
바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와 내 사이잖냐. 나도 네가 이걸로 유니버스 챔피언 자리를 꿀꺽할 거라는 생각은 절대 안 하는 거 안다.”
“……흠.”
영감.
오랜만에 제정신이 돌아왔군.
“너는 분명히, 지금 널 따르고 있는 패배자들을 규합해서 내 목을 따낸 다음에야 유니버스 챔피언이든 뭐든 가져가려고 하겠지.”
그러므로 솔직히 말해라.
“뭘 어쩌고 싶은 거냐?”
“트리플H에게 지기는 싫습니다.”
“그럼?”
“헌터가 이기는 것도 싫고요.”
“뭘 어쩌자고?”
“한 명을 더 추가하죠.”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리키타에게는 말했듯이 위민스 챔피언을 주셔야 합니다.”
“흥, 그런 것쯤이야.”
“뭐 그렇게 생각하시던가.”
“……뭐냐.”
바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영감은 옛날 사람이다.
그렇기에 현재 위민스 프로레슬링이 가진 잠재력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아니, 그래.
솔직히 말해서 프로레슬링은 남성 중심의 스포츠였다. 아무리 여성 프로레슬링이 날고 기어도 주된 콘텐츠는 어디까지나 남성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이건 퍼포먼스이자 연기고.
그렇기에 여성 선수들도 실력이 있고 재능만 있다면 충분히 높은 상품 판매량을 달성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바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야 우리가 그 목을 물어뜯지.
지금 한 사람을 더 넣자고 제안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한 말이었다.
“그래서…….”
바트가 거기에 대해 물었다.
“누굴 넣고 싶은 거냐?”
“랜스 오튼입니다.”
“오튼?”
의아해하는 바트 맥센.
하지만 내 생각은 확고했다.
* * *
랜스 오튼이 필요하다.
그런 내 말에 가장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안타깝게도 오튼이었다.
그리고 당연히도 싫어했다.
“나? 에이, 싫어. 뭣하러 그래?”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오튼은 그 악독한 캐릭터나 카리스마에 걸맞지 않은, 시대를 앞서나간 욜로 스타일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거기다 얼마 전에 한동안 유니버스 챔피언으로 군림하다가 레슬 임페리움이후 헌터에게 넘겨주면서 내려왔다.
그렇기에 싫을 터였다.
“귀찮아. 메인 챔피언은 스케줄도 많은데다 자꾸 귀찮게 군단 말이야.”
“대신 돈 많이 벌잖아.”
“그건 그런데.”
“너 주식 다 잃었다면서.”
“……그건 그런데. 흠.”
고민하는 오튼.
우리는 지금 극동 투어 이후 또 오랜만에 만나, PWA에서 각본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내가 먼저 오튼에게 이번 섬머 수플렉스에서 네가 이긴다는 각본을 말하자마자 이런 반응이 나왔다.
녀석은 별로 그걸 원하지 않았다.
“아니, 그게. 지금 챔피언은 헌터잖아. 굳이 그 아저씨하고 일로 피곤하게 엮이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하나.”
“어쩌겠냐. 여기까지 왔는데.”
“그건 그런데. 그냥 내가 대립에 들어가기는 해도 굳이 이번에 또 챔피언을 먹고 싶지는 않다고 해야 하나.”
“…….”
“왜, 왜 노려보냐?”
“아니, 그냥.”
기분 나빠서.
누구는 그게 인생의 목표인데.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이 자식 성격이 이런 걸.
오튼은 프로레슬링을 자신의 꿈이 아니라 과정으로 생각하는 쪽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과정.
그렇기에 녀석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헌터도 이제 현역으로서는 끝물이야. 네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야지.”
“러셀이 있잖아?”
“러셀은 러셀이고. 게다가, 선악역을 넘어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시나가 주인공이라고 쳤을 때.
“적어도 두 명은 필요하지.”
“시나의 상대가?”
“그래, 네가 그 역할을 맡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성장해야만 한다고.”
“끄응…….”
“지금껏 먹으란 대로 먹어서 위상도 높아질 대로 높아진 놈이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
오튼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시대에서 젊은 선수 중에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온 4인방이 있었다.
‘라이징 스타’.
나, 시나, 오튼, 러셀.
이렇게 넷.
“알았어, 알았다고.”
오튼이 결국 포기하고 수긍했다.
역시 이게 먹혔다.
책임감.
선수로서 딱히 이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오튼은 그래도 동료들에게만큼은 살가운 편이었다.
‘전생에는 무서운 선배 라인이 다 빠지고 난 다음에야 그렇게 됐는데.’
지금은 내가 직접 나서서 락커룸 분위기를 잘 조율했기 때문일까?
덕분에 어깨에 힘이 빠진 녀석은 다른 선수들과 꽤나 살갑게 잘 지냈다.
그렇기에 현재 ACW와 벌이고 있는 월요일 밤의 전쟁에서도 불안감과 열심히 싸우고 있을 것이다.
난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오튼이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랬다.
지금 ACW에 맞서서 WWF가 내걸고 있는 카드는 헌터, 테이커, 레이와 같은 커리어 끝물의 슈퍼스타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 시대의 마지막에 이 업계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
잠시 후 오튼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지금 각본 상의 랜스 오튼은 트리플H에게 챔피언 벨트를 넘겨준 뒤로 영 힘이 빠져서 방황하는 중이었다.
레갈리아도 단지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텔레비전에 나온 지는 꽤나 오래된 상황.
그리고 나는 사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만큼 이후로 녀석이 어떻게 다시 올라가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무척 간단했다.
“R.K.O.만 써.”
“뭐?”
“그거면 충분해.”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일 쇼에서 나는 메인이벤트에 잠깐 얼굴만 비추면서 다음 주 월요일의 습격을 예고할 생각이야.”
“그런데?”
“거기에 진짜, 네가 갑자기 나와서 R.K.O.를 먹이고는 사라지는 거지.”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의미도 없어.”
하지만 분명 통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뭔데?”
“R.K.O.를 쓴 다음에 웃어.”
“……나보고?”
“엉, 미친 개자식처럼 웃어버려.”
“광기에 빠지라는 건가.”
“그건 아니고. 그냥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듯이 행동해.”
“어렵네.”
“쇼에서 쓰고 관객 반응을 보면 딱 어떤지 감이 올 거야. 오튼.”
나는 다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분명 오튼의 힘을 보태서 WWF는 ACW를 쫓아갈 수 있게 될 터였다.
* * *
수요일 밤의 PWA 위클리 쇼.
오프닝 매치에서 리키타가 멋진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를 거두고, 선수들 간의 대립과 경기가 계속되었다.
우리가 위클리 쇼를 계속 이어가면서 원칙으로 삼은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외부로 나가는 습격을 빼고도 스토리가 충분히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수들이 각각 목표를 가지고 링 위에 올라 경기를 치르고 승부를 낸다.
단순한 만큼 매 방송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PWA의 사람들은 모두가 죽여주는 능력치를 가진 이들뿐이었다.
우리는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매주 빼놓지 않고 해냈고, 그로 인해서 팬들의 반응은 계속 상승했다.
이제는 미국 서부에서 PWA가 주류 문화로 당당히 편입됐을 정도였다.
‘딱히 놀랄 일은 아니지만.’
나는 모니터링TV로 락커룸에서 쇼를 시청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모아 고와 C.M. 펑크의 경기.
나와 함께 이 PWA의 알파라고 할 수 있는 고와 펑크의 기나긴 대립은 몇 점을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인디 단체로부터의 악연.
그것을 청산하기 위한 도전.
링 위의 펑크는 경기에서 필사적으로 고에 맞서서 싸웠고, 이제는 승리를 목전에 둔 상태였다.
시나처럼 파이어 맨즈 캐리 자세로 사모아 고를 어깨 위에 걸쳐 들고.
그 상태에서 고를 앞으로 빼내면서 동시에 니 킥으로 안면을 걷어찼다.
쩌억-!
GTS.
Go To Sleep의 약어로, 거기에 맞은 상대는 누구도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커버.
1, 2, 3-!!
땡땡땡!!
[Waaaaaaaaaaaaaaaaggghhhh!!]
마치 월드 타이틀을 따낸 것처럼 기뻐하는 펑크와 PWA에 소속된 팬들.
그런 와중, 나는 슬슬 나갈 시간임을 직감하고는 오튼과 함께 일어섰다.
그의 감상은 간단했다.
“너희는 매번 이러냐?”
“뭐가?”
“하나하나가 우리 페이퍼뷰에서 열려도 좋을 정도로 격한 경기들인데.”
“우리는 경기 많이 안 뛰잖아.”
그만큼 체력을 비축할 수 있다.
“어쨌든, 이따가 잘 부탁해.”
“그, 그래.”
오튼은 좀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아마 나를 믿어줄 것이다.
나도 나를 믿는 녀석을 믿고, 천천히 고릴라 포지션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길에 만난 직원들과 넉살 좋게 하이파이브를 주고받기도 하면서.
“아, 신. 파이팅입니다.”
“오, 캡틴. 잘 하라고.”
“맡겨만 둬.”
새삼 그들의 신용을 느끼며 고릴라 포지션 안으로 들어선 나는 광고가 끝난 뒤 음악에 맞춰 링으로 들어섰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Waaaaaaaaaaaaaaaaaaggghhh!!]
내 등장에 그야말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는 PWA의 관객들.
단체가 성립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나에게 근접할 정도의 반응을 얻는 선수는 몇 명 없었다.
‘모두 실력으로.’
그런 캐치프레이즈를 표방했기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도 단체의 최정상에 군림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이크를 쥐었다.
“방금 경기는 정말로 멋졌어. 다들 괜찮다면 고와 펑크. 둘 모두에게 다시 박수를 보내줬으면 좋겠군.”
그 말에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C.M. Punk! C.M. Punk! C.M. Punk! C.M. Punk! C.M. Punk! C.M. Punk!]
요란한 챈트 속.
그렇게 다시 한 번 여기가 ‘쿨한 쇼’임을 인식시킨 후, 나는 팬들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마이크워크를 이어나갔다.
물론 할 말은 간단했다.
“다들 지루한 걸 참으면서 버닝콩을 보지 않도록 내가 오프닝에서 습격을 했는데. 그 덕분에 시간 낭비 안 했지?”
팬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헌터가 등장할 거라고는, 솔직히 말해서 나도 예상하지 못했어. 아무래도 유럽 투어에서 나에게 당한 게 꽤나 한이 맺힌 모양인데 말이야.”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섬머 수플렉스에서 역시 그렇게 될 예정이야.”
[Waaaaaaaaaaaaaaggggghhhh!!]
“그 머저리 같은 벨트를 가져와서 잘 닦은 다음에 PWA라고 스프레이질이라도 할까? 아, 그건 좀 틀딱 냄새 나는데.”
[Booooooooooooooooooooooo-!!]
“알았어. 알았어. ACW도 구려. 우리는 우리 식대로 일을 처리해야겠지.”
우리는 해적이었으므로 당연히 약탈해온 전리품은 소중하게 보관해야겠지.
“그러니까 트리플H. 이번 섬머 수플렉스까지 타이틀 보관 잘 해두라고!”
바로 그때였다.
[Uooooooooooooohhhh?!]
관객들 사이에서 순간 웅성거림이 이는 것과 동시에, 나는 링 위로 누군가 올라온 것을 느꼈다.
등 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반드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나타난 검은 인영에 의해 머리가 단단히 붙잡힌 나는 곧바로 마이크를 내던지며 앞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검은 인영은 내 머리를 붙잡은 채 앞으로 누웠고, 나는 엎드린 자세에서 무방비하게 땅바닥에 떨어졌다.
투-콰앙-!
경기장 내에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팬들의 머리에 세 글자가 새겨졌다.
R.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