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20화 (320/634)

320.

여기서 하나 말해둘 게 있다.

숀 시나는 2005년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불의에 절대 굴하지 않는 절대 무적의 선역’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단체의 얼굴이자 주인공으로.

그렇기에 이번 각본에서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말하는 과정이 한 번쯤 필요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우리에게 ‘선역’으로서의 근거가 있는 이상, 시나가 거기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지금까지의 캐릭터가 위선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이 대립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입장을 확실히 해둬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그럴 생각이었다.

“뭐라고?”

시나가 되물었다.

“내가 기회를 줄게. 여기서 똥개처럼 얻어터지거나 아니면 그냥 떠나. 겁쟁이처럼 꼬리를 말고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러셀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시나가 내게 다가왔다.

“신, 내가 지금껏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너희 나름대로 이 회사와 풀어야 할 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거였다.

시나는 올바름을 좇는 존재.

그렇기에 이 사태에 대해서 굳이 나서지 않을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Let’s Go Cena!!]

팬들이 그걸 이해하고 환호했다.

평소에 시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던 팬들도 납득할 만한 좋은 이유였다.

“하지만 이건 도를 넘었어. 지금 당장 링에서 내려가. 내가 저 자식을 두들겨 패던 중이니까 지켜보라고!”

“반대로 말한 거 아니야?”

러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Uoooooooooooooohhhhh!!]

상황은 점차 심각해졌다.

세 명의 카우보이가 각자 홀스터 앞에서 손을 까딱거리고 있는 가운데, 물론 가장 큰 총을 가진 것은 나였다.

야구 방망이를 들었으니까.

하지만 한 번에 쏠 수 있는 것은 한 명뿐. 그렇기에 말은 다 조지겠다고 했어도 쉽게 나서지는 못하는 상황.

‘물론 여기에서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둘 다 마음껏 두들겨 팼겠지만.’

오늘 세그먼트에서 주인공은 내가 아닌 오튼이었으므로 얌전히 기다렸다.

녀석이 나오는 것을.

그리고 직후.

[Uoooooooooooooooooohhhh?!]

경악하는 관객들의 목소리와 동시에, 누군가가 내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머리통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마치 미식축구의 리시버가 뒤쪽에서 날아오는 공을 잡듯이, 양손을 오른쪽 어깨 위로 뻗은 상태에서…….

마치 독사가 생쥐를 낚아채듯.

그대로 뛰어오른 녀석과 함께 나 역시도 힘껏 점프를 뛰었고, 그대로 우리의 몸이 일직선으로 쭈욱 뻗었다.

오튼은 누웠고 나는 엎드린 상태.

머리를 붙잡힌 나는 지면에 충돌함과 동시에 전류가 흐르는 걸 느꼈다.

찌릿, 찌릿.

붙잡힌 머리와 목을 잘라내듯이 이어지는 기술, 커터.

하지만 랜스 오튼이 쓰기에 여기에서는 R.K.O.

움직일 수가 없었다.

[Waaaaaaaaaaaaaaagggghhh!!]

팬들의 환호성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그 상태에서 곧바로 일어난 오튼이 다시금 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두 번 다 같은 방식.

어딘가에서 갑작스레 나온 랜스 오튼이 상대방에게 R.K.O.를 시전한다.

간단하지만, 갑작스레 들어가는 피니시 무브는 높은 설득력을 가졌다.

동시에 멋지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오튼, 지금 뭘……!”

순간 당황해 다가온 시나에게도 거침없이 오튼의 R.K.O.가 작렬했다.

투콰앙-!

[Yeeeeeeeeeeeeeeeaaaaahhhh!!]

자연히 시나의 안티들이 반대급부로 오튼에게 엄청난 환호를 보내주었다.

남은 건 러셀뿐.

바로 이 지점이 중요했는데.

“야, 너 정말 대단……?!”

오튼은 반가운 척 다가온 ‘악역’ 러셀 하트에게도 R.K.O.를 선사해주었다.

투콰앙-!!

가장 큰 소리가 났다.

[Waaaaaaaaaaaaaaaaaggghhhh!!]

이번에는 러셀을 싫어하던 여자와 어린이 팬들이 오튼에게 환호를 보냈다.

야유도 물론 나오기는 했지만.

지금 오튼의 행동이 갖는 쿨함과 호기심이 컸기에 환호가 훨씬 더 컸다.

그게 우리의 의도였다.

우리는 오튼을 ‘트위너’로 만든다.

선과 악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자기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

그게 녀석에게는 잘 어울렸다.

물론 이걸로 끝은 아니었다.

자신이 왜 계속해서 나를 공격했으며 오늘은 시나와 러셀마저 박살 냈는가.

마이크를 쥐고, 쓰러진 우리 셋 사이에 선 오튼이 그대로 말을 시작했다.

“죄다 머저리들만 모였군. 여기 쓰러진 세 놈 모두 등신들밖에 없어.”

사실, 무척 단순한 이유였다.

“죄다 꿈이니 뭐니, 자기가 모욕을 받았다느니. 역사? 명예? 다 허상이지. 그걸 보자니 속이 살살 아프던데.”

녀석이 내 머리에 발을 얹었다.

……이건 예정에 없던 건데.

왜 하필 내 머리냐.

“이 자식만 그런 것도 아니야. 솔직히 말하지. 나는 지금 현재 WWF가 마음에 안 들어. 뭔가가 부족해.”

이 세그먼트는 오튼이 직접 짰다.

녀석의 현재 회사의 상황에 대한 진심이 담겨 있는 세그먼트는 훌륭했다.

본인과도 비슷했다.

오튼은 이런 게 잘 어울렸다.

“우리는 좀 더 야성적이 될 필요가 있어. 헌터를 봐! 그 양반은 온갖 터프한 척은 다 하면서 막상 링 위에서 신을 마주하자 공격하지도 못했지! 왜냐고? 자기 자신이 질 걸 걱정하니까!”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오튼은 징계를 받은 이후 완전히 고삐가 풀린 것처럼 야성을 드러냈다.

“다들 부족하다고! 눈치나 보고! 어떻게든 폼 좀 잡아보려고 말이야! 난 그런 거 이해 못하겠거든! 빌어먹을!”

[Uooooooooooooooooohhhh!!!]

배드애스한 세그먼트였다.

“그냥 붙자고! 신! 너 원래 이런 놈 아니었잖아! 괜히 싸움에 근거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한판 붙어보자고!!”

호쾌하게 외친 오튼이 그대로 마이크를 내던지고는 링에서 퇴장했다.

로프를 붙잡고 아래로 내려가, 껄렁한 걸음으로 돌아가는 놈이 보였다.

문신으로 뒤덮인 근육질의 상반신을 드러낸 그 모습은 확실하게 팬들의 눈에 각인되었을 터였다.

그렇기에 환호가 뒤따랐다.

[Waaaaaaaaaaaaaaaaaggghhh!!]

그리고 오튼의 테마곡이 나왔다.

느릿한 박자의 메탈 음악.

[I Hear Voices In My Head-!!]

확실히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오늘 버닝콩의 주인공은 바로 오튼이었다.

* * *

오튼은 새로운 캐릭터를 선보였다.

그건 삽시간에 반응을 긁어모았다.

뉴스레터에서도 처음으로 ‘랜스 오튼’에 대한 호평을 쏟아내는 가운데.

쇼가 끝난 뒤, 늦은 밤.

오랜만에 캠핑 버스에 모인 우리 네 사람은 오늘 세그먼트의 성공을 축하하며 한창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러셀이 미소를 지었다.

“영감님 표정이 장난 아니던데.”

“시청률 꽤 선방했다면서? 왜 화를 내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데.”

“……시청률 싸움에서 이기지도 못했고, 신에게는 도리어 패배했으니까?”

“헌터도 표정이 굳었더만.”

다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게 얼마만이냐.’

나는 마음이 편한 것을 느꼈다.

여기 있는 세 사람에게는 왠지, 어울리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함께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동료이기에 가지는 유대감.

그렇기에 우리는 뭉쳐야만 했다.

“오튼을 믿지 못하는 거겠지.”

현재 WWF가 ACW를 이기지 못하는데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헌터와 같은 고참 라인 선수들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키는 것이 시청률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현재 WWF는 바트 맥센의 주도 아래에 계속 헛물을 켜고 있었다.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키는 대신 기존의 스타를 내세워서 어떻게든 ACW를 따라가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게 통하겠는가?

같은 올드 스타 파워에서 로건의 턴 힐이라는 변주를 준 ACW가 더 세지.

하지만 WWF는 계속 그렇게 했다.

트리플H, 캐스켓-테이커, 거트 엔젤, 여기에 전생에는 존 마이클스까지.

이 네 명의 레전드급 고참 선수들에 대항해서 떠오르는 새 시대의 인물들.

숀 시나.

러셀 하트(전생에서는 엣지였지만).

랜스 오튼.

게이브 바티스타.

혹은 잭 하디.

여기에서 바티스타는 나이 문제로 사실상 미래를 만들어가기는 무리였고, 잭 하디는 약물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참 선수들은 현역 말년까지 제대로 된 잡을 해주지 않았고, 결국 시나만이 완벽한 스타로 떠올랐다.

랜스 오튼도 분명한 강자였지만, 팬들이 생각하기에는 트리플H보다는 부족한 선수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선 안 된다.

이야기는 나아가야만 하고.

업계는 성장하고.

그러기 위해 앞으로 계속해서 더 나은 선수들이 나와줘야만 했다.

그런 부킹이 필요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오튼. 이번 경기를 통해서 확실히 헌터에게 보여주는 거야.”

“……뭘?”

“그야 네가 그 남자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이라는 걸 말이지.”

분명 헌터는 욕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프로레슬링에 대한 프로의식과 애정이 변질된 결과였다.

그러므로 ACW라는 존재가 있는 지금이 확실히 어깨에 힘을 빼고 시대를 넘겨주도록 종용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나는 철저했다.

“널 보여줘.”

“나를?”

“그래, ‘오늘’도 그랬잖아.”

“……내가 뭘 했던가.”

오튼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럴 법도 했다.

자신에게는 평범한 일이니까.

하지만 보통 사람이 그렇듯.

장점이란 개자식은 보통, 자기 자신은 잘 알지 못할 때가 많은 법이었다.

랜스 오튼.

The Viper.

Apex Predator.

아이콘, 숀 시나의 라이벌 중 하나.

WWF가 배출해낸 대표 악역.

커리어 대부분을 악역으로 보냈던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팬들에게 가장 큰 반응을 얻었던 시절은, 2010년부터 2013년까지의 ‘The Viper’ 시절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놈에게는 누구든 R.K.O.를 날리며, 마치 전성기의 락콜드를 연상케 하는 트위너 캐릭터.

“그게 맞는 옷이지.”

“나한테?”

“그래, 오튼. 이유는 간단한데.”

나는 쓰게 웃었다.

“지금껏 네가 연기해온 캐릭터에는 랜스 오튼이 투영되어 있지 않았거든.”

“…….”

“…….”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다들 당황했다.

여기서는 좀 원론적인 이야기다.

“내가 말하잖아? 평소의 자신에서 벗어나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하라고.”

“그랬지.”

“그걸 비틀어서 선과 악으로 표현하는 게 프로레슬링의 캐릭터란 말이야.”

나를 예로 들어보자.

나, 김준호.

신.

그 근간을 이루는 건 성공에 대한 욕망이다.

나는 항상 목마른 상태였다.

나, 동료들, PWA, 프로레슬링 업계.

이것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때 나는 어느 때보다 큰 성취감을 느낀다.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지만 이 방식이 악인을 상대할 때는 선역이 되는 거고. 반대로 선역을 상대할 때는 악역이 되는 거지.”

나머지는 양념을 좀 치는 것뿐.

비겁한 각본과 관객들을 도발하는 대사를 통해서 악역이 되는 거고.

반대로 관객들과 함께 호흡을 하면서 선역으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

그게 현대의 프로레슬링.

현대의 캐릭터다.

이전처럼 과장된 캐릭터를 사용하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튼에게는 이런 게 없다.

“지금껏 악역으로서의 오튼은 탐욕스러운 트리플H의 두 번째 버전이었지.”

“그래서 별로였다는 건가.”

“그래, 프로는 100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야. 120, 140, 200. 합격점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하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오튼은 그동안 그가 연기해온 캐릭터와는 달랐다.

그게 통한 것이다.

“대사의 디테일, 동작. 하나하나. 하고 싶은 대로 연기를 시키니까 전혀 다른 논리로 이 대립에 끼어들었지.”

그리고 반응을 얻어냈다.

현재의 랜스 오튼은 그런 남자였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남들이 원하는 것.

챔피언 벨트나 승리, 그런 것에 목을 매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의 감정에 따라서 움직일 뿐인 이단자.

그게 가장 어울렸다.

오튼 역시도 납득을 했다.

“확실히, 오늘 세그먼트에서는 예전과 달리 좀 더 연기하기 편했어.”

“그렇겠지.”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내가 좀 더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거냐?”

“야, 뭘 의심하고 그래?”

“그래, 오늘 멋졌어.”

내가 말하기도 전에 시나와 러셀이 각각 오늘 오튼에 대해 칭찬을 했다.

확실히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일반적인 선수들처럼 성공을 꿈꾸지 않는 오튼에게 딱 걸맞은 캐릭터였다.

어찌 보면 운이 좋았다.

그런 습성을 가져도 스스로의 재능이나 회사의 푸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것은 어려우니까.

운.

그리고 재능.

“책임을 지라고 오튼. 이 회사가 사라지면 너도 갈 곳이 없어지잖아?”

“……ACW가.”

“거기 가서도 지금처럼 편하게 있을 수 있을 것 같냐? WWF 출신인 네가 가면 다들 잡아먹으려고 할 텐데.”

“그럼 PWA는?”

“거기에는 더 무서운 놈이 있지.”

“……설마 내 눈앞에 있는?”

“그래, 맞아.”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우리는 이제 ‘경기’를 계획하면서 트리플H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므로 좀 세게 가자고. 그렇게 해야만 헌터도 널 인정할 테니까.”

“……뭔가 불안한데.”

“섬머 수플렉스잖아. 이런 때는 좀 멋진 경기를 보여줘야 팬들도 너를 분명히 인정할 거란 말이지.”

그렇기에 택할 룰은 간단했다.

트리플 스렛 매치로.

“쓰리 스테이지 오브 헬 매치.”

“………….”

침묵하는 오튼.

옆에 있는 러셀이 오히려 하고 싶은 듯 눈을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쓰리 스테이지 오브 헬.

지옥의 세 단계.

세 경기를 연속으로 치르면서 더 많은 승리를 채가는 쪽이 이기는 경기.

보통은 룰을 다양하게 해서 스트리트 파이트, 스틸 케이지, 래더 매치 같은 식으로 맞붙는 경우가 많았다.

즉.

슈퍼 힘들었다.

그걸 알고 있는 오튼도 어떻게든 경기를 안 치르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아, 아니 잠깐만. 스테이지가 세 개면 우리가 한 번씩 주고받는 걸로 쳤을 때 경기가 무승부가 되잖아?”

“그렇겠지. 세 사람이 싸우니까.”

“그럼 의미가 없는 거 아니야?”

“아니지.”

나는 기뻐서 웃었다.

“경기를 한 번 더 하면 되잖아.”

오튼은 지옥의 입구에 서있는 단테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