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12월 23일에 있었던 경기는 각종 매체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20분간 각자가 개성을 드러낸 채로 이어진 경기는 그 결말도 좋았다.
이걸로 목표는 모두 이루어냈다.
내실을 다지고 각 선수들이 가진 캐릭터와 드라마를 보여줄 수 있었다.
거기다 이어서 12월 30일에 이루어진 시상식도 높은 시청률을 얻었고.
PWA는 기분 좋게 링에서 뒤풀이를 하고 2008년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해.
일주일간 휴식을 취한 우리는 곧바로 한 해에 대한 결산을 했다.
물론 혹평 따위는 없었다.
PWA는 성공적이었다.
“확실히 리그제가 괜찮았군.”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만이 할 수 있는 드라마를 보여줄 수 있었어요.”
“솔직히 처음에 신이 ‘벨트 없이 가자.’라고 했을 때는 좀 당황했는데.”
바쿠가 쓰게 웃었다.
각 팀장들이 돌아보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걸로 가야죠.”
“그 말이 맞다.”
모두가 인정했다.
각 선수들이 승패에 따라 점수를 얻으며 순위가 정해지는 리그 시스템.
선수 숫자가 타 단체에 비해서 적은 우리였기에 할 수 있는 각본이었다.
여성부 쪽은 선수 숫자가 더 적은 만큼, 벨트가 추가되어 좀 더 흥미로운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고.
남성부에서는 상위 다섯 명이 WWF나 ACW를 습격하는 각본을 추가하면서 활동 영역을 크게 넓혔다.
그로 인해, 수요일 밤의 PWA는 출범 첫해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평균 시청률 430만.”
600만 전후를 오가는 WWF나 800만까지 치솟은 ACW에 비하자면 적은 수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신생 단체였다.
그것도 로건이나 크로우, 랭 새비지 같은 네임드 플레이어들 없이, 젊은 선수들로만 구성되어 출범한 단체.
‘레전드라고 한다면 리키타 정도?’
나도 아직까지는 젊은 선수 축에 속해서 아직 성장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그 성공은 무척 값졌다.
“머천다이즈 판매처도 출범 후로 계속 늘어났고요. 모든 수치가 좋아요.”
티파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WWF 측에서 그쪽에 출연할 우리 선수들 머천다이즈 판매도 대리로 해주기로 했으니까. 내년에는 고와 펑크의 판매량이 좀 높게 잡히겠네요.”
“그거 좋군.”
“그리고 한 가지 더…….”
“응?”
“음, 이게 좀 확실한 건 아닌데.”
티파니가 날 바라보았다.
“일단 신, 이번 달에 WWF 측에서 돈 들어온 거 확인해봤어요?”
“어? 안 해봤는데.”
“나중에 확인해보고 알려줘요.”
“뭔데 그래?”
“지금 그쪽에서 당신 티셔츠를 재발매해서 뿌린다는 정보가 있어서요.”
“……?”
“뭐야?”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바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네가 바로 내 ‘현재’야……!!]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 * *
500만 달러.
통장에 찍힌 돈을 본 나는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직 인터넷 뱅킹이 활성화된 시기는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은행이었다.
황당해 서있는 덩치 큰 선글라스 남자를 본 은행 경비원이 다가왔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아닙니다.”
“문제가 있으시다면…….”
경비원이 뒤늦게 날 알아보았다.
거기에 순간적인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내 손에 들린 통장을 본 그가 곧바로 이해했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
‘VIP 창구로 갈 걸 그랬나.’
하지만 다행히 한적한 시간대라 그런지 딱히 소란이 빚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대충 일을 끝마친 나는 통장을 손에 쥔 채 은행 앞으로 나갔다.
붉은 포르쉐에 올라타자 운전석에 앉아있던 티파니가 곧바로 물었다.
“어때요?”
“500만 들어왔는데.”
“천만 장쯤 뽑은 모양인데요.”
“그러게.”
나는 황당해하며 대답했다.
우리는 의례적으로 ‘한 장 팔릴 때 얼마’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회사에서 생산하는 티셔츠 수량에 맞춰 로열티를 지불해주었다.
이 정도면 거의 숀 시나 같은 선수들이나 받는 로열티 금액이 아닐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 출발했고 슬쩍 고민에 빠졌다.
현재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권리를 거의 대부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신SIN’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캐릭터 사용권이나 링네임 사용권도 티파니가 잘 처리를 해줘서 별문제 없이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천다이즈는 좀 복잡한데.
WWF로서도 일단 발매하고 있는 상품의 판매권을 포기하면 그걸 다 폐기처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권리는 모두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약서에 판매 중인 상품이 모두 판매되었을 시 권리를 넘겨받는다는 조항을 하나 추가해두었는데.
‘돌려받기는 글렀군.’
바트 맥센은 이 일을 통해서 확실히 지금 내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신은 자신의 현재다.
WWF의 작품이다.
그렇기에 티셔츠를 찍어내고 다시금 WWF의 상품으로 만들려는 것이겠지.
‘아주 정확한 포인트를 노렸어.’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 생각했다.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을 찔렸다.
우리는 ACW에 맞서기 위해 WWF와 협업하며 힘을 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으로 우리에게도 WWF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했다. 그들 없이 우리가 ACW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걸 아는 바트는 이 협업의 과정에서 교묘하게 나를 유혹할 생각 같았다.
그리고 그 미끼가 트리플H고.
“…….”
이를 어쩐다.
벌써 넘어갔는데.
‘무슨 계약을 제안하려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
갑자기 내 테마곡이 들려왔다.
뭔가 싶어 돌아보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전화를 받는 티파니.
이 여자.
벨소리를 저걸로 해둔 건가.
“아, 어. 응, 지금 운전 중.”
조금 어깨가 으쓱해지는 걸 느끼고 있자니 티파니가 전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단 알았어.”
전화를 끊는 티파니.
그리고 차 안의 룸 미러로 황당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길 들었어요.”
“뭔데?”
“WWF 측에서 전용기를 보낼 테니 바로 본사로 와달라고 하는데요?”
“…….”
“아버지가 치매라도 오신 걸까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전생에는 안 그랬지만.
일단 바트 맥센이 우리와 만났을 때 바지에 똥을 지린다면 당장 요양 병원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내가 그 생각을 입에 담자 티파니는 순간적으로 혐오스럽다는 듯 반응했다.
아니, 자기가 먼저 치매라면서요.
* * *
다행히 안 나는군.
그렇게 생각하며 서있자니 옆에 있던 티파니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냄새 맡지 마요!”
“…….”
치매 확률은 제로였다.
내가 그런 더러운 농담을 자꾸 생각하는 건, 도저히 지금의 분위기에 적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트가 날 좋아했다.
와, 소름.
“카하하하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곧장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날 확 끌어안았다.
아, 제발.
“잘 왔네. 사위.”
“아니, 왜 그래요?”
“아버지…….”
“왜 그러나? 앞으로 협업하게 될 내 딸과 사위인데 한번 안을 수도 있지!”
“…….”
이런 사람은 처음 봤다.
하지만 알고 있다.
바트 맥센은 이런 사나이였다.
상대를 죽어라 증오하다가도, 어느 순간 웃으며 친구가 될 수 있는 남자.
감정적이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그걸 드러낼 수 있는 선에서만 드러낸다.
사업가.
그렇기에 나 역시 웃어주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트.”
“오느라 고생 많았지?”
“아뇨, 전용기를 보내주신 덕에 아주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그거 잘됐군! 어서 앉게!”
“…….”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티파니.
우리는 그렇게 회장실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말 시상식은 잘 봤네.”
“이번에 펑크가 신인상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고에게 밀렸네요.”
“그러게 말이야! 하하하!”
“…….”
티파니는 입을 다물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가 12월 30일에 개최한 시상식에 신인상은 없다.
‘이 영감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바트는 그 사실을 지적해봤자 태연히 ‘그런가?’ 하고 넘어갈 성격이라서 나도 무시하기로 했다.
어쨌든 일 때문에 온 거니까.
“추가 계약을 제시하고 싶네.”
“어떤 계약이죠?”
“자네와 WWF 간의 계약.”
“이중 계약을 하라고요?”
“그건 아니지. 지난번에 같이 일했을 때 기억나나? 그때와 비슷하게.”
바트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협업’해보자는 거지.”
“…….”
나는 일단 열 장 정도 되는 종이를 받아들고는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추가 계약을 제시할 때 비행기에서 읽으라면서 먼저 주는 것이 보편적인데.
‘심리전을 걸겠다는 거군.’
뭔가 계약의 허점이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계약서를 읽던 나는 이내 눈썹을 찡그렸다.
‘허점투성이잖아.’
무슨 이런 내용이 다 있나 싶었다.
좋은 계약서는 탐욕 없는 바트와 비슷한 말이었다. 실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규모가 커질수록.
계약서란 물건은 보통 자신이 가지는 이득을 교묘하게 감추고, 상대에게는 득이 된다고 꾸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면,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오는 법이다.
“이거 선수 계약서 아닙니까.”
“아니네.”
“아무리 봐도 그런데.”
나를 통제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면, 나는 앞으로 ACW와 협업을 할 때 눈앞에 있는 저 영감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솔직히 계약서 제작 관련 법률에 충분히 저촉될 수 있는 쓰레기 같은 조항이었다.
본래 일과 관련되지 않은 부분에 관해서는 계약서에 명시할 수 없으니까.
‘WWF와 일하는 대신 ACW와는 일하지 마라!’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다.
“대신 자네에게 좋은 부분도 있지.”
“한번 찾아보죠.”
일단 계약서의 기본은, 4대 페이퍼뷰에 참여할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1월의 킹스 럼블.
4월의 레슬 임페리움.
8월의 섬머 수플렉스.
11월의 링 서바이벌.
거기에 꼬박꼬박.
“링 서바이벌에선 뭘 하라고요?”
“자네 팀을 데려오게.”
“PWA? 그렇게 되면 우리 애들 수당도 챙겨줘야 하는데 자신 있어요?”
“그야 물론이지.”
바트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단, 이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WWF와 맺어온 ‘협업’의 연장선상이라고 이해하면 말이다.
‘일단 수당도 나쁘지 않고.’
페이퍼뷰 출전 수당이 200만 달러.
이 정도면 솔직히 업계 탑급이다.
‘시나가 150만쯤 받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 전후의 출장 조항 때문에 높아진 것이었다.
페이퍼뷰 전 1개월, 이후 일주일은 반드시 쇼에 출연해서 스토리가 원활히 이어지게 할 것.
여기에 드는 돈을 페이퍼뷰 수당과 합쳐놔서 금액이 높아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하나 더.
바트 맥센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이건 지금부터 6년쯤 뒤.
지금은 일본을 갔다 미식축구를 기웃거리다가 종합격투기로 진출하는 브룩 레스너가 실제로 겪은 일인데.
바트 맥센은 그를 소유하기 위해서 당시 숀 시나보다 더 높은 연봉을 준 것으로 업계에서 욕을 많이 먹었다.
거기다 브룩이 계약에 따라 출전을 제한하는 ‘파트 타이머’였기에 그런 바트의 선택은 이해받지 못했는데.
나는 이해했다.
바트는 돈이 아무리 들더라도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야만 하는 거다.
그렇기에.
‘이 부분은 이용할 수 있을 테고.’
그리고 바트 맥센이 나에게 ‘이 부분은 자네가 유리하잖나.’라고 한 건.
아마.
“앞으로 4대 페이퍼뷰에서의 대립 상대를 제가 제안할 수 있다고요.”
“그래. 우리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커리어 내에서 월드 타이틀을 최소 한 번 이상 들어본 선수들로 대립 상대를 한정해주신다면 생각해보죠.”
“그럼 그건 조건에 추가하지.”
그리고 다음.
단, 대립 상대와의 경기에서 월드 타이틀이 걸려 있을 경우에는 승패를 반드시 WWF에서 결정한다.
그렇게 정해진 승패가 무너졌을 시에는 즉시 계약이 파기되며 PWA 측에서 WWF에게 그 당시 페이퍼뷰 판매량에 해당하는 위약금을 지불한다.
“이건 또 무슨…….”
너무 노골적이잖아.
나에게 절대 월드 타이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넣은 조건이었다.
테이커의 레슬 임페리움 연승 저지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후우.’
어쨌거나.
바트의 의도는 심플했다.
나보고 WWF로 돌아오라는 거다.
그를 위해 이번에 헌터라는 레전드 선수를 내줄 각오도 마쳐둔 거겠지.
이런 식으로 서서히.
나를 WWF의 선수로 다시 만들면서 ACW에 대항할 새로운 시대를 만든다.
과거 락콜드가 자신이 주인공인 시대를 만들며 트리플H, 캐스켓-테이커, 더 팍과 같은 조연을 만들었듯이.
새 시대의 주인공은 숀 시나.
조연으로 러셀 하트, 랜스 오튼, 그리고 나를 상정해두고 있는 거겠지.
그게 과연 그렇게 될까 싶으면서도.
제안을 뿌리치는 것은 힘들었다.
일단 ‘대립 상대를 제안할 수 있다’는 게 꽤 매력적으로 느껴질뿐더러.
그에 대한 아이디어도 있다.
문제는.
“계약 기간이 너무 긴데요.”
“3년이면 충분하지 않나?”
“1년에 한 번씩 갱신하죠.”
“2년.”
“알았어요. 1년 6개월로 합의를 보죠.”
“중간 지점을 찾는다면 2년일세.”
“정확히는 1년하고 반년이죠.”
“왜 짧게 가져가려는 거지?”
“굳이 계약 기간을 길게 가져가봤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이 업계에서는 손해가 될 테니까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경기를 뛰다가 실수로 크게 다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거고.
그렇기에 장기 2년 이상의 장기 계약에는 반드시 추가 조항을 달았다.
하지만 이번 계약서에는 그게 없다.
말인즉슨 바트 맥센은 내가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는 거겠지만.
여기에서 하나 더.
“이상의 조건에다가 페이퍼뷰 수당을 세 장 더 얹어주신다면 군말 없이 바로 사인하겠습니다.”
“230만인가.”
“……?”
“아, 그래. 500만.”
바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분명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