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44화 (344/634)

344.

‘슬슬 떠날 때가 되기는 했나.’

최근 들어 자주 하는 생각이었다.

날씨가 궂을 때마다 양쪽 허벅지가 시큰거리며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 잠에서 깨어난 트리플H는 그 원인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2000년의 좌측 대퇴사두근 부상.

2006년의 우측 대퇴사두근 부상.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경기는 치렀고 절름발이가 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우려에도 어떻게든 부상을 이겨냈으나.

후유증은 남았다.

저릿하고 질긴 통증.

“끄응.”

호텔 로비 측에 얼음을 부탁해 마사지를 하자 통증은 금방 진정되었지만 어쩐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공포였다.

자신의 몸이 노쇠해간다는 공포.

인간이라면.

아니, 거기에 더해 몸이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스포츠 선수는 더 크게 느끼는 미지에 대한 공포였다.

누구든 늙어본 경험은 없다.

저무는 해는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떠오르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않았다.

두렵다.

커리어를 끝내고 싶지 않다.

팬들의 거대한 반응 속에 계속 이야기와 경기를 이끌어나가고 트리플H라는 캐릭터를 불멸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태양이 질 시간이.

긴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이.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헌터는 점퍼를 갖춰 입고 방을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호텔 옥상의 실내 산책로.

희미한 조명이 어둠을 핥았다.

그게 마치 지금의 자신 같았다.

해가 저물었다는 사실을 인정 못 하고 어떻게 해서든 버티는 것이.

조금 감성적인 밤이었다.

“…….”

남들 앞에서.

더군다나 얼마 전 결혼한 아내의 앞에서는 더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

헌터는 그와 마주쳤다.

추운 날씨에 비니를 쓰고 있는, 2미터가 넘는 거구의 사내.

이 업계의 전설.

캐스켓-테이커.

황당한 우연이었다.

“테이커?”

“……헌터.”

“늙어서 잠이 안 오시나?”

“그러는 너는.”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이 업계에서 일해오면서 서로에 대한 존경심은 있었다.

그렇기에 이 한밤중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편안한 대화로 이어졌다.

게다가 공유하는 감정도 존재했다.

두 사람 다 업계에서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하는 이들이었다.

거기다 알고 있었다.

각자 여기에 나온 이유를.

테이커는 고관절 부상의 후유증.

헌터는 양쪽 대퇴사두근.

존 마이클스의 등처럼 커리어를 작살낼 정도로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밤잠을 못 이루는 날도 꽤 많았다.

테이커는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신과 경기를 한다면서.”

“그러라더군.”

“자네 의지는 아닌가?”

“글쎄다. 잘 모르겠군.”

헌터는 쓰게 웃었다.

“귀찮은 녀석이야.”

“그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GCW에서였다.

헌터는 그 아무도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던 동양인 애송이를 높이 사 레볼루션의 멤버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거절을 당했고.

메인 쇼에 올라온 그 애송이는 쿵-퓨리 기믹으로 잠깐 망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테이커와 같은 거물을 쓰러뜨리고 지금은 새 단체까지 만들었다.

헌터는 피식 웃었다.

“사람 일이란 게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솔직히 내 영입 제안을 거절했을 때는 이 업계에서 금방 사장될 멍청한 자식 같다고 느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놈에게 연승을 내줬나?”

“증명했으니까.”

테이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꼬마는 자기 자신이 그럴 가치가 있음을, 링 안과 밖에서 보였지.”

각본 상으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렇기에 줄 수 있었다.

테이커는 거기에 긍지를 느꼈다.

“앞으로 잘해나가겠지.”

“……두렵지는 않았나? 자네가 이뤄온 그 모든 결과물이 사라진다는.”

“네가 그런 것처럼.”

헌터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테이커는 손을 뻗었다.

솔직히 말해, 친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업계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태도 불량 시대의 주연들.

그렇기에 가지는 유대감.

따라서 나오는 한마디.

“나는 트리플H를 이겨봤으니까.”

“……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똑같았다.

트리플H 역시도 전성기의 캐스켓-테이커를 이겨본 레슬러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그런 거였군.’

그 시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기억 속에 등불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태양의 가장 밝은 빛보다 크게 타오르겠지.

“이제 좀 결심이 섰나?”

“그래, 뭐. 넘겨주지.”

“잘 생각했어.”

테이커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이후로는 잡담이 이어졌다.

마음이 편안해진 헌터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좀 더 먼 미래를 주제로 테이커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퇴 후에는 어떻게 할 건가?”

“글쎄, 일단 좀 쉬어야지. 자네는?”

“나는 은퇴 후에도 회사 임원으로 계속 일하기로 연장 계약을 해뒀어.”

“……일 중독이군. 헌터.”

“내가 드와이트처럼 할리우드에 흥미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계속해서 뼈를 묻고 싶거든.”

드와이트 존슨.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는 더 팍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

“그러고 보면 바트가 원래는 이번 레슬 임페리움에서 자네와 드와이트를 붙이려고 했던 거 같은데.”

“나도 들었지. 하지만 그 드와이트가 마벨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스카웃을 받으셨다는데 어쩌겠어.”

“호오, 역할은?”

“뭐더라. 토르의 부하라던데. 녀석이 출연하는 덕분에 세 명에서 네 명으로 늘었다는 부하 역할이라고.”

“조연인가?”

“그래도 마벨이면 기대 받는 프랜차이즈니까 큰 기회가 된 셈이지.”

할리우드에서는 아직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했던 것만큼 멋진 경력을 쌓아 올리지는 못하고 있는 그였지만.

그 도전 정신은 정말 대단했다.

헌터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은퇴하고 난 다음에 회사에서 동창회라도 열어야겠군.”

그러자니 다시 확신이 섰다.

그 빛나는 시대를 계속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봉화는 건네져야만 하는 법이니까.

* * *

2009년 1월 19일, 월요일.

WWF의 위클리 쇼, ‘월요일 밤의 버닝콩’은 이례적으로 600만을 넘긴 채로 멋진 스타트를 끊었다.

나와 WWF의 계약이라는 현실, 그로 인한 홍보가 팬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른 채널에서 동 시간대 방영되는 ACW의 위클리 쇼, 나이트로에 맞서서 좋은 반격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오늘 밤 쇼의 세미 메인이벤트에 나가 바트 맥센과 계약식을 치를 예정이었고.

거기에 트리플H가 난입하면서 나와 대립을 이어나가는 게 오늘의 각본.

테이커가 슬쩍 전해줘 대강의 상황을 알아차린 나는 딱히 헌터에게 말을 걸지 않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욕심이 많다는 논란은 있을지언정, 그 또한 WWF의 레전드급 선수였다.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을 터였고, 일단은 그걸 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버닝콩은 그 나름대로 가진 매력을 발산하며 계속 방영되었고.

우리 차례가 찾아왔다.

나와 바트는 고릴라 포지션에서 나가기 위한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준비됐나, 신?”

“물론이죠. 바트.”

직원들 대부분은 극적(?)으로 사이가 좋아진 우리를 보고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고 마침 함께 고릴라 포지션에 있던 트리플H가 그것을 지적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언제냐니. 처음부터였지.”

바트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나 역시도 적당히 받아쳤다.

“전 처음부터 영감님 좋아했다고요. 여자였으면 바로 시집갔을 겁니다.”

“그건 기분 나쁘니 그만하게.”

“……아, 옙.”

안 받아주는군.

어쨌거나 분위기는 좋았다.

거기다 링에 나서는 세 사람은 전부 합쳤을 때 100년 이상 프로레슬링 일을 해온 하이퍼 베테랑들뿐이었다.

그래서 다들 딱히 걱정은 않고.

먼저 바트가 링으로 나갔다.

[No Chance In Hell-!!]

WWF의 회장.

동시에 태도 불량 시대에 락콜드 스티비 스틴의 최대 맞수로서 그를 아이콘의 반열에 올려준 최강의 악역.

하지만 현재의 바트는 ACW의 존재로 인해서 크게 움츠러든 상태였다.

선수는 빼앗기고.

그걸 이겨내기 위해 데려온 게 나.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현실이 절묘하게 각본에 섞였다.

[Waaaaaaaaaaaaaggggghhhhh!!]

팬들은 환호를 보내주었다.

오랜만에 쇼에 나온 회장님에게 충성심 높은 팬들은 박수를 보냈다.

링 위에는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한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인 상태.

거기에 옛날 스타일로 과장된 액션과 함께 손을 내저은 바트가 이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이야기는 들었으리라 믿소.]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그래, 맞아. 다들 아는군.]

[Yeeeeeeeeeeeeeeaaaahhhh!!]

[내가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

딱히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아니, 그보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저런 거짓말을 하지.

[소개하지! 신-!!]

바트 맥센이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입장로 쪽을 가리켰고.

내 테마곡이 흘러나갔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Waaaaaaaaaaaaaaaaagggghhh!!]

환호성이 경기장을 떨리게 했다.

몸도 찌릿찌릿 울렸다.

그런 상황에서 입장로를 통해 링으로 나간 나는 지금 상황이 정확히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일단 나는 큰 환호를 받는다.

결국, ACW에 빼앗기지 않았으니까.

그 계약이 어찌되었든 간에 팬들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실 정확히 따지자면 무척이나 미묘한 형태를 가진 귀환이었지만.

그래도 팬들이 기뻐하니 됐다.

링에 오른 나는 바트의 박수를 받으며 팬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일이 이렇게도 되는군!”

[Yeeeeeeeeeeeeeaaaahhh!!]

“ACW와 맞서 싸우기 위해 나를 용병으로 영입하다니 탁월한 선택이야.”

“이, 일단 사인부터 하겠나?”

“잠깐만 기다려봐. 영감. 일단 팬들에게 상황부터 제대로 전해주자고.”

“…….”

순간 굳어지는 바트의 얼굴.

“아, 허리 안 좋지? 일단 앉자고.”

거기에서 농담을 건네며.

바트와 마주보고 앉은 나는 거만하게 테이블 위에 양다리를 올렸다.

[Uooooooooooooooohhhh!!]

“자, 다들 편안하게 경청해. 신 선생님의 페어리테일을 들을 시간이야.”

바트는 좀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계약을 하게 된 연유에 관하여 디테일하게 이들 앞에서 풀어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파격을 치르고.

바트는 거기에 절절 맨다.

전형적인, 사원이 사장에게 갑질을 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팬들이 좋아하는 일차원적인 드라마를 보여준다.

이게 바트의 아이디어였다.

“이 영감이 ACW라는 넘버 원 단체에 맞서기 위한 패로 고용한 게 바로 우리 해적단이었다는 말이야.”

나는 씨익 웃었다.

“안심하라고 바트. 나는 그 뒷방 늙은이들을 위한 관을 짜뒀으니까.”

“그럼, 다행이군.”

“당신이 그쪽에 빼앗긴 선수들의 연봉을 싸그리 모아다가 우리 쪽에게 준 그 값만큼은 일해주겠다 이거야.”

“후우, 굳이 그 사실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을 하지 않았었나, 신?”

“알아. 근데 기각되었지. 당신이 아래 사람들의 요청을 기각하듯이.”

“끄응…….”

“지금 대체 누가 갑이라고 생각해? 회사를 위해 뼈 빠지게 일한 전설들 연봉도 못 맞춰주고 다른 회사에 보내버린 영감, 당신일 것 같아?”

“이, 일단 사인부터.”

“아니지! 나야! 이 업계에서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바로 나라고!”

난 바트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구린 WWF 선수들이 아니라.”

팬들은 혼란에 빠졌다.

‘구린 선수들’은 악역에 가까운 발언. 하지만 ‘전설들을 팔았다.’는 분명히 선역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나라는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그건.

나를 이 링 위에 있는 가짜, 각본 상의 선수가 아니라 현실의 캐릭터로 만들어주는 베스트 트리거였다.

“정말로 이 순간만을 기다렸지.”

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바트의 앞에서 계약서를 보란 듯이 펼쳐 들었다.

그리고 다분히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 잘못된 선택을 한 거야.”

“…….”

“난 뭐든 가져야 직성이 풀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내가 먼저 먹어 치워야 할 것은 ACW가 아니라고.”

그럼 무엇일까?

“WWF야.”

바트가 손을 뻗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이 링 위에서 방금.

그와 나는 현실적으로 교감했다.

나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나에게 이 회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감정을 자극해 각본으로 승화시켰다.

그렇기에 그 감정은 진짜였다.

테이블 위로 달려든 바트가 내 멱살을 잡고 순식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콰앙-!

테이블이 쓰러지며 흩날리는 계약서.

마이크가 저 멀리 굴러떨어졌고.

그리고 나는 멱살을 쥐고 내 위에 올라탄 바트가 속삭이는 걸 들었다.

“어디 한번 가져가봐라.”

하지만 뜻밖에도.

각본과 달리 그는 찌질한 사업가가 아니라 승부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그걸로 이득을 보고 이 업계의 정상에 서있는 건 나니까.”

“나라니까.”

그렇게 대답하고.

각본이 계속 진행되었다.

나는 바트의 안면에 펀치를 날렸다.

퍼억-!

미리 말해두지만.

손속을 두지는 않았다.

얼굴이 크게 꺾이며 바트가 쓰러졌고 그 코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Boooooooooo……!]

불현듯 터져 나오는 야유.

내 위로 쓰러진 바트를 밀어낸 나는 그대로 계약서를 들고 사인을 했다.

슥슥슥.

링 위는 혼돈 그 자체였다.

관객들도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크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기는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트 맥센은 자기가 만든 단체에 독을 풀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기타 리프와 함께 한 남자의 테마곡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지금 이 상황의 구원자.

[Time To Play The Game……!]

Triple H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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