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녹색으로 빛나는 조명 아래.
[HuHuHu……! HaHaHaHaHa……!]
음산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묵직한 슬래시 메탈 속에서 이어지는 걸죽한 보컬의 노래는 트리플H라는 선수를 그대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악역 중의 악역.
또한 왕 중의 왕.
게임의 지배자.
기나긴 커리어 대부분을 악역으로서 보내온 그가 서서히 링으로 올라왔다.
나는 로프에 여유롭게 기대어 선 채로 트리플H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이어.
그 앞으로 불쑥 다가섰다.
Face To Face.
신 VS 트리플H.
팬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내 커리어 초창기였던 유럽 투어 때부터 계속 대립하고 협력해왔던 관계.
그리고 내가 랙다운으로 이적하면서 끊어졌던 이야기가 다시금 이어졌다.
나는 성장했고.
예전과는 달리 트리플H를 정면에서 상대해도 부족하지 않을 남자가 됐다.
어찌 보면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전생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는데.
이 사자와 링에서 맞붙다니.
나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고, 팬들의 반응 또한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헌터는 돌연 몸을 돌려 내 옆에 쓰러져 있던 바트를 천천히 부축했다.
그 어깨에 의지해 일어선 바트가 비틀거리며 내 옆을 그대로 지나쳤다.
헌터가 바트를 먼저 구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돌연, 헌터가 바트의 복부를 걷어찼다.
[Uooooooooooooohhhhh……?!]
충격에 빠진 관객들의 목소리.
바트가 충격에 앞으로 허리를 숙이자 헌터는 그 머리통을 붙잡고 자신의 다리 사이에 힘껏 끼워 넣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술은 자명했다.
페디그리.
바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양팔을 붙잡은 헌터가 그대로 뛰어올랐다.
투콰앙-!
무릎을 꿇으며 떨어지는 헌터와 그 다리 사이에 머리가 끼인 채로 지면에 얼굴부터 처박히는 바트 맥센.
노인에게 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잔혹한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팬들 역시도 큰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헌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를 노려보며 링 밖으로 나갔다.
그런 상황을 직접 겪은 나는 어이가 없어져 헌터를 계속 바라보았다.
‘이거였나.’
희미한 각본이 아니라 눈앞에서 행동을 보게 되자 확실하게 느껴졌다.
헌터가 무슨 기분으로 이 대립에 임하고 있는지가.
그 표정과 지금 이 링 위에서의 연기를 통해서 확실히 내게 와닿았다.
헌터는 이 대립을 통해서 자신의 야성을 200% 드러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물론.
‘바라던 바야.’
나는 씨익 웃으며 생각했다.
* * *
좋은 세그먼트였다.
그런 내 생각처럼 위클리 쇼가 끝난 뒤, 각종 매체에서 오늘 나의 계약에 대해 연이은 호평만을 내보냈다.
팬들이 기대했던 것은 변화였다.
나와의 계약으로 인해 침체되어 있던 WWF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걸 보여주었다.
사실 바트가 도와준 덕분이었다.
WWF의 회장이 나를 위협으로 느낀다는 액션을 보여주면서 팬들은 이후의 스토리에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앞으로 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거기에 하나 더.’
트리플H까지.
그가 바트를 공격하면서 이야기는 정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킹스 럼블을 일주일 앞둔 상태에서 우리는 회의를 위해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사실.
여기에서 좀 예정이 틀어졌다.
원래대로라면 펑크와 고가 럼블 매치에서 깜짝 등장하며 자연스레 WWF에서의 활동을 시작하는 거였는데.
‘그리고 그것 때문에라도 난 원래 럼블 매치에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고.’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야 할 스포트라이트가 나로 인해 흐려지게 되니까.
하지만 내가 WWF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게 되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다.
“자네도 럼블 매치에 나오게나.”
바트 맥센이 그런 요구를 해왔다.
바로 어제 내 펀치에 페디그리까지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영감은 완전히 쌩쌩한 모습이었다.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자리는 있습니까?”
“자네 자리는 비워두었지.”
“저뿐만 아니라 고와 펑크의 자리까지 포함해서 세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준비를 해뒀네.”
“그럼…….”
“거기에 자네가 리드 보이도 맡아줘야겠어.”
“또요?”
“그래, 이유는 우리 쪽에서 만들지.”
“헌터가 이사회의 힘을 얻어서 저를 1번으로 출전시키는 거 아닙니까?”
“잘도 알아차렸군.”
“……뭐, 이쯤이야.”
당연한 스토리였다.
헌터가 바트를 공격했던 이유는 PWA와 계약을 해 ACW에 대항하려는 그 생각에 반발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바트는 당분간 각본상 부상으로 빠진다는 설정……을 이번 주 금요일 랙다운에서 설명할 예정인데.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뭐, 내가 1번으로 출장할 이유라면 그것밖에.
“팬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양분되겠죠.”
“굳이 바라던 건 아닌데.”
바트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되도록 선역과 악역이 쉽게 구분되는 간단한 각본을 선호했고, 그 과정 속에서 숀 시나라는 프랜차이즈 메가 스타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시나만을 너무 확실하게 밀어줬기에 다른 스타들이 떠오를 여지를 지워버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원하는 것만 할 수는 없죠.”
“난 그래야겠는데.”
“그럼 ACW한테 계속 지겠죠.”
“…….”
“중요한 건 다양성입니다. 회장님이 시나를 계속 미는 것도 좋지만, 저 같은 사람도 쇼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데리고 오신 거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네.”
ACW라는 방패를 내세운 내 논리 앞에서는 바트도 꼼짝하지 못했다.
‘다루기 편하겠어.’
어쨌든 결과를 계속 보여준다면 누구와 대립을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어나갈 수 있을 듯했다.
“그럼, 럼블 매치의 자료를 준비해주시면 바로 경기를 짜보겠습니다.”
“이미 준비해뒀지.”
바트가 밀봉된 서류를 내밀었다.
봉인을 뜯고 그 안의 자료를 본 나는 일단 참가 선수 명단을 확인했다.
30명이 순차적으로 참가하며 3단 로프 위로 나가서 링 바닥에 양발이 닿으면 탈락하게 되는 럼블 매치.
준비 기간이 좀 빠듯했지만 대충 전생의 데이터와 함께라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중.
“어라?”
준비된 자료에 적혀 있는 ‘탈락 순서’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수들이 언제, 누구에게 탈락하는지 그 순서가 1번부터 쓰여있는 자료.
그 마지막에 내 이름이 있다.
“…….”
“놀랐나?”
바트가 씨익 웃어 보였다.
이건.
정말 상상도 못했다.
* * *
그렇게 수요일이 찾아왔다.
PWA의 위클리 쇼.
거기에서 스토리가 진행되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와 PWA가 WWF와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딱히 이전까지와 변하는 상황은 딱히 없었다.
그냥 이전에는 단기로 맺었던 계약을 더 길게 확장시킨 것뿐이었다.
ACW에 대항해서 서로 뭉치자고.
말인즉슨 그건, WWF에서의 스토리가 PWA에서도 전개된다는 뜻이었다.
난 일단 이쪽 선수니까.
수요일 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의 환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링으로 나선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떡밥’을 깔기 시작했다.
“월요일에는 정말 놀라웠어. 설마 트리플H가 바트 맥센을 공격할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거든.”
[Booooooooooooooooooo-!]
“그 강철 같던 영감이 페디그리를 얻어맞더니 병원에 입원했다던데. 덕분에 우리로서는 기회가 찾아왔어.”
나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는 왕좌를 약탈해올 거야.”
[Uooooooooooooooooohhhh!!]
팬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왕좌라는 말을 들은 그들은 곧장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챈트가 터져 나왔다.
[King’s Rumble!! King’s Rumble!! King’s Rumble!! King’s Rumble!!]
원래는 내가 확실히 여기에서 ‘킹스 럼블’이라는 말을 할 예정이었지만.
안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마이크를 팬들에게 내밀었다.
오디오에 그 소리가 섞였다.
[King’s Rumble!! King’s Rumble!! King’s Rumble!! King’s Rumble!!]
기분 좋은 반응이었다.
팬들과 이렇게 호흡하면서 세그먼트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나는 씨익 웃으며 소리쳤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그런 식으로 충분히 밑밥을 깔아둔 채로 위클리 쇼는 그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런 내 선언에 대한 답변은 금요일 밤의 랙다운에서 돌아왔다.
ACW에 비해서 우리 PWA&WWF 연합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이거였다.
우리는 세 개의 위클리 쇼를 돌리면서 디테일한 스토리 전개가 가능했다.
거기다 일주일에 세 번의 쇼가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외부 홍보 효과 역시 크다는 말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우리에 대항하기 위해 ACW도 새로운 위클리 쇼를 창설하려고 했지만, 아직까지는 요원한 일이었다.
그만한 쇼를 운영할 만큼 이 업계에 대해서 빠삭한 이들을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팬들에게 킹스 럼블을 홍보할 수 있었다.
랙다운의 오프닝.
[어디 한번 해보자고!!]
PWA 위클리 쇼에서 방영된 내 세그먼트 영상과 함께 쇼가 시작되었다.
해설자들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난 수요일의 일이었군요.]
[신이 WWF의 회장인 바트 맥센에게 주먹을 날리고 억지로 계약서를 작성했죠! 거기다 WWF를 먹어버린다는 헛소리까지 하지를 않나……!]
[저는 그보다 트리플H의 행동이 더 놀라웠습니다. 구원자로 나오는가 했던 그가 도리어 바트를 공격했죠.]
[오늘 PWA로부터 온 경고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을까 궁금하군요!]
[그럴 겁니다. 트리플H가 오늘 메인이벤트에서 나옵니다! 기다리세요!]
그런 홍보와 함께 시작된 쇼.
‘이걸 메인이벤트로 편성해?’
나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메인이벤트는 액션성이 있는 대립을 넣는 게 다음 주를 더 기대하게 할 수 있지 않나.
경기라던가. 아니면 육체적인 마찰이 있는 세그먼트를 넣는 게 낫지.
그런 생각은 메인이벤트에서 등장한 트리플H를 보고 반대로 뒤집혔다.
그는 정장 차림이었다.
거기다 머리도 깔끔하게 묶었다.
“호오…….”
“평소와 다른 차림이네.”
“저게 딱 트리플H지.”
나는 펑크의 말을 부정했다.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래? 최근에는 계속 가죽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나왔던 것 같은데.”
“그랬었지.”
하지만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래, 분명 트리플H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랑받는 선역이었다.
그럼에도 그 인기는 악역으로서의 트리플H가 가진 재능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악역으로서 최후의 순간에 패배했을 때 가장 빛나는 레슬러.
그게 바로 트리플H였다.
링 위로 오른 그는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크게 혼란을 느끼고 있는 팬들 앞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트 맥센은 늙었어.]
그는 나와 대립하기 위해서 자신의 캐릭터를 확장시켜서 가지고 나왔다.
악역이었을 때의 ‘권력자’ 캐릭터를 한층 더 발전시켜서 회장인 바트의 권력을 한동안 빼앗을 예정이었다.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지. 이 회사를 등지고 나간 그 개자식을 다시 불러들여 단체에 독을 풀었고.]
‘저거지.’
저게 바로 트리플H였다.
완성형 악역.
가죽 재킷 입고 쿨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저렇게 상류 귀족 같은 시늉을 할 때가 더욱 어울리는 남자.
그는 두 가지 면모를 지니고 있다.
승리에 집착하고 온갖 반칙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야수로서의 면모와.
[그래서 나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그들의 대리인으로 여기에 나왔다.]
저렇게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현대의 스마트한 마피아 보스 같은 귀족적인 이미지.
그 두 개가 조합된 트리플H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남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기믹은 가죽 재킷 쪽이지만.’
테이커나 락콜드처럼 말이다.
하지만 경기 스타일부터 시작해 모든 면모가 그쪽과는 맞지를 않았다.
[신, 너는 이번 킹스 럼블에서 1번으로 참가한다. 어디 한번 우리 쪽에서 준비한 선수들을 상대해봐라.]
트리플H가 으르렁거렸다.
거기에 양분된 반응이 쏟아졌다.
[Waaaaaaaaaaaaaggggghhhhh!!]
[Booooooooooooooooooooo-!!]
PWA라는 외부 단체에 반발심을 느끼고 있는 WWF의 팬들은 환호를.
더러운 방식으로 회사의 권력을 틀어쥔 트리플H에게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반대로 큰 야유를.
각자가 그렇게 원하는 대로 반응을 보내는 가운데, 트리플H는 정장 깃을 스윽 매만지고는 그대로 링을 떠났다.
거기에서 나는 킹스 럼블에서 나에게 올 반응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양분된 반응이 나오겠지.
하지만 그게 바라던 바였다.
나는 선역이나 악역으로 평가받지 않고 ‘신’ 자체로 평가받고 싶었다.
‘신’은 누구인가.
‘신’이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분명 비겁하고 더러운 행동도 서슴없이 저지를 테고,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반발 역시 살 테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받으며 꾸준히 위로 상승하는 존재.
그렇기에 나는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나를 탈락시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킹스 럼블의 각본을.
이번 럼블 매치의 우승자는 나였다.
바트 맥센은 이렇게 말했다.
[럼블 매치에 우승해서 왕에게 도전하게. 그리고 자네가 승리하게나.]
그리고 내가 따내는 것은, 월드 챔피언십 벨트가 아니라 트리플H의 위상이었다.
그건 분명 벨트보다 더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