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망했군.’
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래, 더없이 냉정하게.
●됐다.
디 캐스켓-테이커.
The Phenom
The Deadman.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Waaaaaaaaaaaaaaggggghhhhh!!]
팬들의 압도적인 환호 속에서.
입장로 주변의 지면에 설치된 여러 대의 파이로 머신으로부터 크게 피어오른 불꽃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그 중심에 서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테이커의 모습은 링 위에 있는 우리들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지금 당장 링으로 올라와 우리 모두를 박살 내고 탈락시키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위상이었다.
WWF라는 단체의 수호신.
숀 시나가 지금 대충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아라고른 정도라고 한다면.
그는 간달프였다.
마법 대신 툼스톤을 꽂는.
어느덧 모두가 그에게 집중했다.
링 위에서 럼블 매치를 진행하던 선수들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테이커를 바라보았다.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카메라도.
시청자들마저도.
인간의 두뇌가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링 앞에 멈춰선 테이커는 중절모와 코트를 벗어 던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테마곡이 끝났다.
남은 건 피어오른 불꽃이 남기고 간 연기와 열화와 같은 팬들의 반응뿐.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링 위의 모든 선수들이 굳어졌고, 심지어 위상이 낮은 몇몇 선수들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테이커는 내게 다가왔다.
“…….”
[Uoooooooooooooooohhhhhh!!]
솔직히, 조금 도망치고 싶었다.
물론, 테이커와는 연승을 끊어낸 후 나름대로 서로를 인정하면서 훈훈하게 스토리를 끝내기는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데드맨을 눈앞에 둔 공포심은 솔직히 말해 곰과 맞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테이커가 먼저 나를 바라보고 왔기 때문에 내가 빛나는 것이기도 했다.
러셀 하트.
사모아 고.
크리스 젠코.
기라성 같은 선수들 안에서 테이커가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바로 나다.
그리고 그 대가가 찾아왔다.
아래쪽에서 주먹을 뻗어온 테이커가 그대로 내 턱을 힘껏 후려쳤다.
쩌억-!
순간 큰 충격에 나가떨어지자니 정신을 차린 다른 선수들이 하나둘씩 테이커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테이커는 달려든 그들을 어퍼와 빅 붓으로 간단하게 잠재웠다.
러셀이 나가떨어졌다.
젠코, 코디, 체드, 모두가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테이커는 굳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려드는 고.
그 목을 붙잡은 테이커가 그대로 고의 허리를 쥐고는 힘껏 들어올렸다.
투콰앙-!
호쾌한 초크 슬램.
봐봐.
내 말대로 됐지.
테이커는 단숨에 링을 정리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쓰러진 선수들을 차례차례 탈락시켰다.
그 손에 붙잡혀 일어난 로우 카더들이 별다른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링 밖으로 힘껏 내던져졌다.
연이어 탈락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BAAAAAAAAAAAAAAAAAAMMMM!!
15번 선수로 골더스크가 나왔다.
하지만 로우 카더에 불과한 위상의 그는 링 위로 올라오자마자 견고하게 서있던 테이커의 먹잇감이 되었다.
투콰앙-!!
테이커의 호쾌한 보디 슬램.
링 전체가 진동하면서 팬들이 테이커를 향해 계속해서 환호를 보냈다.
다들 꼼짝도 못하고 있는 상황.
나는 로프를 붙잡고 일어섰다.
링 위에 남아있는 선수들 모두가 우리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주기 위해 사이드에 누워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링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제 15번.
경기의 중반이 시작되었다.
슬슬 숨이 부치기 시작했고, 좀 전에 사용한 다이빙 크로스 바디로 인해 내장 어딘가가 좀 욱신거렸지만.
오히려 그게 좋았다.
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 통증이.
내가 싸울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Uoooooooooooooooohhhhh……!]
그래, 분명히.
테이커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난 괴물을 쓰러뜨렸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돌아선 테이커와 내가 마주보았고.
당연하다는 듯 팬들이 소리쳤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선과 악을 아득히 초월해.
우리 두 사람의 Face To Face는 이 정도로 높은 기대감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내가 취한 행동은 간단했다.
헤드벗.
테이커의 턱에 손을 대고, 슬쩍 밀어내면서 머리는 내 손바닥을 친다.
그렇게 되면 상대에게 가는 충격은 거의 없으면서 타격감은 훌륭한, 프로레슬링 스타일의 타격기가 완성된다.
이쪽이 테이커보다 15센티미터 정도 더 작았기에 나는 턱을 올려치는 형식으로 힘차게 박치기를 날렸다.
쩌억-!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테이커.
그렇게 일단 상대방의 고삐를 향해서 손을 뻗은 나는 그대로 난폭하게 날뛰는 테이커를 제압하려고 들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반격이 들어왔다.
퍼억-!!
안면을 후려치는 펀치.
버텨내고 반격.
서로 한 번씩 펀치를 주고받을 때마다 팬들의 환호성이 점차 더 커졌다.
하지만 물론.
“크윽……!”
럼블 매치의 14번으로 나온 테이커가 1번으로 나온 나를 압도하는 건 지극히 상식에 의거한 그림이었다.
펀치에 얻어맞아 휘청거리고.
그대로 다리 사이로 손이 들어와 몸이 번쩍 들려서는 바닥에 메쳐졌다.
콰앙-!!
“끄윽?!”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그 상태에서 목을 노리고 레그 드롭을 사용하는 게 테이커의 황금 패턴.
하지만 직후, 러셀이 달려들었다.
테이커가 뒤로 돌아있는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이어진 저먼 수플렉스.
……가 되었어야 옳으나.
2번과 14번이다.
체력의 차이가 심각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러셀은 힘이 빠져 테이커의 몸을 위로 들어 올리지 못했고.
나는 놀라 소리쳤다.
“러……!”
하지만 이미 늦었다.
테이커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러셀의 몸이 탑 로프 위로 곧장 내던져졌다.
허망한 탈락.
아니, 상대가 너무 강력했다.
그러므로 지금 밖에 없었다.
내 오랜 숙적, 러셀 하트가 안겨준 찰나의 순간.
나는 러셀을 내던지느라 로프 앞에 서있던 테이커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리고 번쩍 뛰어올라.
[Uoooooooooooooohhhhh……!!]
그대로 무릎을 치켜들었다.
스팅거.
목표하는 지점은 하나.
나를 돌아보는 테이커의 턱.
쩌억-!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뒤쪽으로 기운 테이커의 몸이 그대로 넘어갔다.
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Waaaaaaaaaaaaaaagggghhhhh-!]
[Boooooooooooooooooooooo-!!]
환호와 야유가 마구 뒤섞였다.
14번으로 나왔던 테이커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탈락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바로 신-셀의 ‘최강 태그’가 기지를 발휘한 덕이었다.
“푸후.”
나는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링 밖으로 떨어진 테이커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나를 올려다보았으나.
이내 별 불만 없이 퇴장했다.
‘고맙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테이커라면 좀 더 욕심을 부릴 수 있는데도 나를 위해서 희생해주었다.
솔직히 정말 존경스러운 선배다.
반면 러셀은 좀 더 연기를 했는데.
퇴장하는 테이커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이어 날 돌아보았다.
그리고 중지를 치켜세웠다.
“…….”
“…….”
행운을 빌어주는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찬가지로 러셀을 바라보며 중지를 치켜세웠고.
뒤에서 누군가 머리를 붙잡았다.
“윽?!”
그대로 몸이 넘어갔다.
로프를 붙잡아 버텨낸 나는 머리 위에서 이쪽을 넘기고 서있는 사내의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리스 젠코.
“카하하! 신! 잘 가라고!!”
비겁한 악역 연기라면 그 누구보다도 정통한 그가 나를 넘겨버렸다.
내 다리는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고 손으로 로프를 잡아서 어떻게든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그마저도 크리스 젠코의 주먹 한 방이면 당장 탈락하게 되는 상황.
“크윽……!”
이를 악문 나는.
퍼억-!
그대로 놀라 앞에 서있던 러셀의 안면을 걷어차고는 그 반동을 이용해 로프를 거꾸로 올라 링으로 돌아왔다.
아니,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으헉?!”
바로 앞에 서있던 젠코의 머리에 다리를 걸고는 그대로 헤드 시저스 휩으로 로프 밖으로 던져버렸다.
“크헉?!”
……거기 또 러셀이 맞았다.
젠코까지 탈락시킨 나는 다시 링 위로 올라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야, 이 새끼야!”
잔뜩 열이 받은 러셀이 다시 링으로 올라오려고 했으나 심판들이 제지해서 미수에 그쳤다.
미안하다. 러셀.
그런 생각과 달리 다시금 중지를 날리며 러셀 하트를 조롱한 나는.
다음 선수가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BAAAAAAAAAAAAAAAAAAMMMM!!
칙-! 치익-!!
[Look In My Eyes-!]
지치는군.
[Waaaaaaaaaaaaggggghhhh!!]
이런 순간에 등장한 것은, 나를 해치우기 위한 자객처럼 등장한 남자.
C.M. 펑크였다.
팬들의 환호성은 고가 지금 이 링 위에서 제 역할을 해줬다는 뜻이었다.
또 한 명의 PWA 출신 선수.
그에게 쏟아지는 환호는 엄청났다.
나름대로 그들의 리더로서 꽤나 보람찬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경기 내적으로는 딱히 좋지 않은 상황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세등등한 펑크가 나를 노려보면서 링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다가오는 순간.
골더스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퍼억-!
그 관자놀이에 꽂히는 펀치.
‘후우.’
덕분에 숨 돌릴 시간을 벌었다.
테이커와 러셀, 젠코까지 떨어지자 기울었던 링 위의 균형추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자리에 누워있던 선수들이 모두 일어서서는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서있는 것은 고와 펑크.
두 사람이 링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편하게 자리에 누워 쉴 수가 있었다.
럼블 매치의 1번에서 우승까지.
거의 2시간 가까운 시간을 이 링 위에서 견뎌야만 하는 중노동.
확실히 체력적으로 힘들기는 하군.
그렇다고 해서.
우승을 놓칠 생각은 없지만.
* * *
[아! 신이 테이커를 탈락시킵니다!]
[Oh My God!! Oh My God!! 신이 테이커에게 다시 한 방을 먹입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고릴라 포지션 안.
럼블 매치의 중반부로 들어서서 다들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해설자들의 코멘터리만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런 상황에서 얼마 후, 펑크가 나가고, 테이커와 러셀이 돌아왔다.
젠코는 아직 돌아오는 상황.
바트 맥센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몬스터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멋졌네! 테이커!”
“감사합니다. 보스.”
“가서 좀 쉬게나. 아, 러셀. 자네도 고생 많았네. 얼굴에 신의 부츠 자국이 찍혀서 아주 제대로였어.”
“저 자식, 오늘 제대론데요.”
“크하하! 그렇군!”
바트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러셀은 그것이 좀 신경 쓰였다.
이후 선수들이 매치에 참가하기 위해 고릴라 포지션에 다들 모여서 이것저것 복잡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러셀은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슬그머니 바트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신을 통해서, 또한 실제로 바트의 성격을 겪어봤기 때문에 대충 눈치를 보면서 행동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다름 아닌 신으로 인해서.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16번의 펑크 이후로.
18번 마크 헨디.
20번 햄튼 벤자민.
22번 빌헬름 리걸.
24번 코피 퀸스턴.
26번 카인까지.
수많은 선수들이 링 위로 올라가 일사불란하게 신의 지휘 속에 럼블 매치를 진행해나갔다.
저 많은 인원을 어떻게 조종하는가.
간단했다.
신이 링의 중심으로서 싸울 때는 다들 빠져 있고 그가 빠지면 다음 선수가 나서서 싸우고.
그러다가 난투극으로 번지고.
그런 식으로 신을 중심으로 몇 개의 코드를 정해뒀기에 간단히 이뤄졌다.
“좋아! 잘하는구먼! 야! 해설!! 지금 신을 좀 더 돋보이게 하란 말이야!!”
“…….”
아무리 봐도 사람이 변하지 않았나.
예전에는 신을 증오하면서 어떻게든 영역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사람인데.
그럼에도 두 사람이 함께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각자 얻을 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신은 프로레슬링 업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는 꿈 때문이었고.
바트는 신을 어느 정도 내버려두면 분명히 수익이 되어주기 때문인데.
‘……럼블 우승은 참 파격적이야.’
그래서 좀 놀랐다.
WWF 소속도 아닌 신을 럼블에서 우승시키는 푸시를 바트가 줄 줄이야.
결국 호기심이 바트 맥센의 성질을 건들지도 모른다는 부담을 이겨냈다.
“저, 보스.”
“응? 무언가. 안 들어가고.”
“신을 믿으십니까?”
“……별 질문을 다 하는군.”
뜻밖에도 싫어하진 않는 눈치였다.
바트 맥센에게 자신의 장황한 야심을 떠벌리는 취미가 있기 때문으로.
그렇기에 러셀은 노인이 그려둔 큰 그림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난 놈을 믿지 않아.”
그러면 그렇지.
“놈이 가진 욕망을 믿지.”
그것은 오래전에 나눈 문답이었다.
신은 자신이 인간이 가진 신뢰와 신념을 통해서 교류한다고 이야기했고.
거기에 반대로 바트는 자신이 인간의 욕망을 통해 조종한다고 말했다.
무척 오래된 이야기였지만, 바트 맥센은 그런 것까지 기억하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신과 바트는 지금 ACW를 쓰러뜨리자는 같은 욕망으로 뭉친 상태였다.
바트도 충분히 이해했고.
신도 충분히 알아주었다.
그렇기에 맺어진 신뢰 관계였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월드 챔피언만큼은 절대로 내줄 생각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 욕망을 잘만 구슬린다면 충분히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월드 챔피언.
아이콘이 아닌, 다른 목표를 가진 신이니만큼.
그 말을 들은 러셀은 피식 웃었다.
‘글쎄다.’
아직까지 바트는 신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바라는 건 절대로 ACW의 기세를 꺾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