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개선장군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입장로 커튼 뒤에 홀로 서있던 나는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군.’
단순한 애프터 쇼에서 이런 식으로 긴장하다니,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는 킹스 럼블 우승이라는 대업을 막 달성하고, 두 사람에게 선택을 종용받을 수 있으니까.
챔피언 두 사람.
숀 시나와 랜스 오튼.
물론, 나는 우승의 대가로 받은 도전권을 챔피언이 아니라 트리플H라는 남자에게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내 우승이 우리 두 사람이 레슬 임페리움에서 벌일 경기의 의미를 한층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려주겠지.
보다 치열하고, 더 주목을 받도록.
아무렴, 킹스 럼블의 우승자면서 챔피언들이 아니라 트리플H에게 도전권을 사용하는 거니까.
‘재미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을 풀고 있자니, 얼마 후 버닝콩이 시작되었다.
미리 링 위에 서있던 시나와 오튼의 모습이 드러나자 커튼 바깥의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건 안타깝게도 두 사람을 향해 이어진 환호가 아니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우와.’
이거 어쩐다.
아무래도 극적인 우승이 나를 선역 캐릭터로 만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신! 준비해주세요!”
뒤쪽에 서있던 음향팀원이 신호를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내 음악이.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북과 나팔의 소리.
그와 함께 이어지는 현대적인 심포니.
다시 말해, 교향곡 같은 멜로디.
나는 곧바로 커튼을 걷고 나갔다.
[Yeeeeeeeeeeeeeeeeaaaaahhhh!!]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등 뒤에서 터지는 폭죽을 느꼈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평소에 나는 입장 씬에서 불꽃과 스모그가 섞인 연출을 즐겨 사용했지만.
오늘은 평소의 치열하고 섹시한 내가 아니라 우승자로서의 입장이니, 이것도 괜찮겠지.
……사실 별 차이는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잠시 입장로 위에 서서 상쾌한 미소와 함께 챔피언들을 바라보았다.
놈들 역시도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사실, 그 행동은 각본이 아니었다.
내 진심이었다.
그냥 미소가 나왔다.
두 사람 역시도 내가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똑같이 웃어주었고.
하지만 서로에 대한 투지를 드러내는 행동으로써 해석될 여지도 있었기 때문에 딱히 잘못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몇몇 팬들은 우리의 미소가 각본을 넘어선 행동임을 알아보겠지만.
그 또한 프로레슬링의 묘미.
나는 곧바로 링 위로 올라갔다.
왼쪽에 서있는 오튼과.
오른쪽에 서있는 시나.
두 사람을 지나쳐 마이크를 받아든 나는 그대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이거 원, 이렇게 멋진 자리에 누추하신 두 분이 오실 줄은 몰랐는데.”
[Waaaaaaaaaaaaaaaagggghhhh!]
“보아하니 날 위해서 파티를 열어준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 링’에서 내려가 줄 수 있을까?”
“…….”
“…….”
[Uooooooooooooooooohhhhhh!!]
‘내 링’.
당당한 선포에 침묵하는 두 사람과 반대로 경악을 금치 못하는 팬들.
분위기가 좋다.
그러자니 먼저 오튼이 입을 열었다.
“네 링이라고? 네 링은 저기 라스베이거스의 한 인디 단체가 아니던가?”
“PWA를 말하는 거지? 왜, 트리플H가 거기 언급은 못 하게 막던?”
“그건 아니고…….”
오튼이 내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지. 나한테 졌던 놈이 속한 단체의 이름은 기억을 안 해서.”
“그런 논리대로라면 ACW의 이름은 다들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겠군!”
[Boooooooooooooooooooo-!]
야유가 쏟아졌다.
WWF가 ACW에게 발리고 있다.
방금 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튼을 돌아보자니.
순간 녀석이 자신의 얼굴을 움켜쥔 채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
이건 또 각본을 벗어난 상황인데.
이 자식, 진짜로 빵 터졌다.
내가 설마 그런 식으로 자신의 말에 반박하리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다.
황당해 옆을 돌아보니, 로프에 기대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오튼을 커버하기 위함이었다.
“신, 그런 조롱은 참기 힘들군.”
“우와, The Champ가 납셨군.”
나는 잠시 관객석을 돌아보았다.
The Champ.
숀 시나의 별명이다.
그래, 이 개자식은 이제 그런 별명을 당당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2006년의 악몽 이후.
계속해서 싸우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온 녀석은, 이제 ‘압도적인 양분된 반응’을 얻고 있는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그 반응이 나왔다.
[Let’s Go! Cena!]
[Cena Su-ks!]
[Let’s Go! Cena!]
[Cena Su-ks!]
[Let’s Go! Cena!]
[Cena Su-ks!]
‘렛츠 고 시나’를 외치는 여성, 가족, 어린아이 팬들과 반대로, ‘시나 석스’를 외치는 하드코어한 남성 팬들.
그 대결로 인해 시나에 대한 반응은 그 어떤 선수보다 더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끝끝내 모두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뭐, 그건 아직은 좀 먼 이야기지만.
“멋지군. 그 명물인 팬들의 챈트 대결을 링에서 들을 수 있을 줄이야.”
“녹음이라도 해줄까?”
“뭐 대단한 거라고.”
나는 마이크를 위로 들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몇몇 남성 팬들이 챈트를 그만두고 환호를 보내주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또 거기에 발끈한 여성, 가족, 어린이 팬들이 내게 큰 야유를 보냈다.
[Boooooooooooooooooooooo-!]
아까 WWF를 무시한 것도 합쳐서.
나는 시나가 했던 것처럼 팬들의 압도적인 환호와 야유를 함께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별거 아니잖아?”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이제야 알아주시는군.”
“아니, 항상 생각했어. 너는 대단해.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무대에서 한번 붙어보고 싶을 정도로.
시나가 각본에 없던 소리를 했다.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그걸 지금으로 하자고?”
[Uoooooooooooooooohhhhhh!!]
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연했다.
신 vs 숀 시나.
분명히 우리 세대의 선수들이 현재 낼 수 있는 가장 큰 카드일 터였다.
“나쁘지 않지.”
“아니, 잠깐만.”
바로 그때, 잠시 ‘바깥’으로 나가 있던 오튼이 다시 각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런 녀석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면서도 일단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에게는 빚이 있잖아?”
[Yeeeeeeeeeeeeeeeaaaahhhhh!!]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설마 내가 섬머 수플렉스에서 널 박살 냈던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것도 그렇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시나, 아니면 오튼.
내가 붙게 되는 건 어느 쪽일까.
팬들 모두가 기대감을 가지고 링 위를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침묵했다.
그리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 남자가 나오기를.
그 직후.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두워졌다.
올 게 왔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입장로 쪽을 돌아보았고, 그러자 녹색의 조명과 함께 날카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Time To Play The Game……!]
[Booooooooooooooooooooo-!!]
쏟아지는 야유.
어제 카인과 빅 죠를 고용해서 자신이 어떤 역할인지를 보여줬던 그였다.
권력자.
안타깝게도 내 세 치 혀로 인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트리플H는 끈질긴 남자였다.
그렇기에 다들 야유를 보냈다.
그가 이대로 물러날 리 없으니까.
그리고 트리플H가 나타났다.
깔끔한 정장 차림.
긴 머리는 깔끔하게 하나로 묶었고 수염 역시도 단정하게 깎은 상태로, 어딘가 유능한 마피아 보스 같았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어울렸다.
어제만 하더라도 고대의 야만전사처럼 포효하며 링에서 싸워대던 인간이 저렇게 정장을 입고 나오다니.
그래서 악역이 잘 어울렸다.
말끔 떠는 분위기가 있달까.
개성 넘치고 카리스마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선역이라기에는 좀 그렇지.
[Boooooooooooooooooooo-!]
그렇게 트리플H가 링으로 올라오자 팬들의 야유는 훨씬 더 거세졌다.
하지만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일단 신, 축하를 해야겠군.”
“……무슨 꿍꿍이야?”
“아무 꿍꿍이도 없어. 단지 이번 해의 주인공을 축하하러 나왔을 뿐.”
트리플H가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무안하게 할 텐가?”
“아니, 오히려 그쪽이 나와서 우리 세 사람 전부 무안해진 순간인데.”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또 뭘 이야기하러 나오셨나?”
“……없다니까.”
트리플H가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나는 악수를 받지 않고 헌터의 곁으로 다가가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말하자면, 할리우드 무비에서 주인공과 악당이 심리전을 하는 상황이었다.
서로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지만 감정을 속에 감춰두고 있는 상태.
이어서 피식 웃은 헌터는.
야수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장 이 링에서 꺼져. 더러운 놈.”
“……어우, 말씀이 심하신데.”
“넌 한 번 여기에 있는 팬들을 등지고 나갔어. 그런 네놈이 돌아왔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여줄 것 같나?”
[Booooooooooooooooooooo-!]
“어, 돌아왔으니 나름의 신고식이 필요한 건가? 알았어. 끝나고 타코-겔이라도 가지. 내가 살 테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신.”
“뭐?”
“우리는 규칙을 바꾸기로 했거든.”
“…….”
“‘킹스 럼블의 우승자는 당년도의 레슬 임페리움에서 메인타이틀에 도전할 수 있다.’ 이걸 없애기로 했지.”
[Booooooooooooooooooooo-!]
야유가 터져 나왔다.
완전히 갑질이었다.
바트 맥센이나 저지를 법한, 지금까지의 역사와 대중의 의식은 완전히 무시하고 만들어진 규칙이었다.
다른 스포츠로 따지면, 2등 팀을 우승으로 인정한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껏 잘 사용되어오던 규칙을 주최 측에서 완전히 뒤엎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뒤엎어버린 이유가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리그를 이끌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더 졸렬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두 챔피언이 가만히 있을 이유는 결단코 없었다.
시나가 나섰다.
“헌터,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야. 시나. 오튼. 둘 다 들어가. 회사와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나와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쪽이 더 제멋대로구만.”
오튼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회장님을 찌르고 권력을 잡은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놓고 하는 점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충격적이야.”
[Yeeeeeeeeeeeeeaaaaahhhhh!]
오튼의 통렬한 일침에 환호가 쏟아졌고, 팬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헌터는 그걸 더 유도했다.
“다들 좀 진정하고…….”
[Bull~Sh-t! Bull~Sh-t! Bull~Sh-t! Bull~Sh-t! Bull~Sh-t! Bull~Sh-t!]
“헌터, 지금 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야? 정신 차려! 네가 하는 짓은 단순한 Bullying이잖아!”
시나가 팬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헌터는 마치 청문회에 불려나간 바트 맥센처럼 팬들의 불만에 대응했다.
최악의 방식으로.
“다들 잘 들어! 이건 비즈니스야! 회사로서는 이런 외부 단체의 인물이 가장 거대한 무대에서 가장 거대한 기회를 받게 놔둘 수는 없는 거라고!”
[Bull~Sh-t! Bull~Sh-t! Bull~Sh-t! Bull~Sh-t! Bull~Sh-t! Bull~Sh-t!]
오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우승하지 못하게 막던가. 아, 그러려고 했는데 실패했지? 참 추한 꼴을 보였어. 헌터.”
“닥쳐! 오튼! 너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하, 마음대로 생각해.”
“…….”
[Bull~Sh-t! Bull~Sh-t! Bull~Sh-t! Bull~Sh-t! Bull~Sh-t! Bull~Sh-t!]
트리플H에게도 나름의 논리는 있다.
그는 PWA에 소속된 내가 여기에서 활동하는 걸 바라지 않았고, 그래서 바트를 공격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럼블 매치에서 우승을 하면서 트리플H가 가장 원하지 않던 상황을 만들어냈고.
따라서 트리플H는 최후의 수단으로 링 바깥에서 추잡한 수작을 부려 내 우승이 가진 혜택을 지워버렸다.
웃기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서 럼블 매치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위상이 모두 퇴색되었다.
다들 열이 받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지면 이후로도 킹스 럼블의 가치가 훼손될 테니까.
이제 그 누가 나 같은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럼블 매치에서 우승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럼에도 헌터는 단호했다
“그렇게 되었다고. 신.”
“흠.”
나는 일단 그렇게 운을 띄웠다.
단 한마디.
하지만 거기에 오튼과 시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정리하자.
스토리를 진행해보자고.
내가 여기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를 통해 헌터가 날린 펀치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가 정해졌다.
그리고 내 선택은 강렬했다.
딱히 말은 필요 없었다.
한 박자 스텝.
쫘악-!
오튼과 시나의 사이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간 나는 눈앞에 서있던 헌터의 안면에 슈퍼 킥을 날렸다.
[Uoooooooooooooohhhhh……!]
순간 큰 충격에 빠진 팬들.
재수 없는 소리를 내뱉던 헌터의 안면을 냅다 까버리고,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
당황한 시나.
“푸하하!”
활짝 웃어젖히는 오튼.
두 챔피언이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나는 일침을 날렸다.
“거 말 더럽게 많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챔피언이 되는 게 아니꼽다는 거면서.
하여간.
자기합리화의 신이군.
바트 맥센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