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52화 (352/634)

352.

트리플H는 항상 그랬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야수와 신사를 오가며 팬들을 설득하고, 그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남자였다.

팬들은 악역으로서의 그 카리스마에 빠져들었고, 헌터는 닉 플레어만큼이나 성공적인 악역 선수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지능적인 권력자 스타일의 기믹이 무척 잘 어울렸다.

전생에도 트리플H는 나이를 먹고 현역에서는 은퇴했지만, 오랜 기간 파트-타이머로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레슬 임페리움 같은 중요 경기에 나와서 추억팔이에 톡톡히 사용되었지.

‘자기 자신도 그걸 원했고.’

전생에는 주인공 병이 좀 심해서 악역으로 물이 올랐던 오튼을 잡아먹는 등 나쁜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내가 손을 써둔 덕분에 또 그렇게 되진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때 헌터는 악당 CEO 캐릭터를 보여주며 계속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실제로도 티파니 맥센과 결혼한 뒤 회사의 중역으로서 활동했으므로 팬들은 그 기믹에 큰 현실성을 느꼈다.

지금은 티파니가 내 곁에 있으면서 스토리가 전생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어쨌든 지금도 은퇴한 뒤에 회사 간부로서 일할 거라고 했었고.

더군다나 티파니라는, 자신보다 거대한 권력자가 옆에서 없어진 만큼 오히려 CEO 캐릭터로서는 더 낫겠지.

아내 덕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을 붙잡은 사람으로 여겨질 테니 말이다.

‘재미있는 대립이 되겠어.’

물론 아직 대립은 막 시작 단계에 들어선 것에 불과했지만.

2009년 2월 7일.

킹스 럼블의 애프터 쇼가 끝난 뒤, 나와 헌터는 잠깐의 휴식기를 가졌다.

기대감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에 내가 헌터를 공격하면서 이 대립이 이어질 것을 암시해뒀다.

그렇기에 세그먼트가 끝난 뒤, 헌터의 코뼈가 부러져서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까지 연출을 미리 해두었다.

다른 스토리도 진행을 해야 했으므로 일단 우리가 좀 빠져주는 것이다.

언제 내가 행동에 들어갈까. 헌터가 언제 다시 나올까.

그런 식으로 팬들이 조금 더 안달이 나게 만드는 테크닉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나와 헌터는 바트에게 후보고를 하는 형식으로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서로 이 대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이야기했다.

한가로운 캘리포니아.

날씨는 좋았고, 헌터의 덩치와 내 섹시함 때문에 정체를 숨길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나름대로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일부러 근처의 조용하고 방음이 되는 가게에서 만남을 가졌다.

트리플H가 가장 먼저 궁금해한 것은 내가 선택한 경기 방식의 이유였다.

“노 홀즈 바드로 가자고?”

“일단 제 생각입니다.”

“이유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불안한데.”

“딱히 험담은 아닙니다.”

“그럼 어디 해봐라.”

“저는 트리플H라는 레전드의 가장 치열한 부분과 대립하고 싶거든요.”

“나의?”

“예, 그를 위해서는…….”

규칙이 없는 경기로 가야 한다.

노 DQ 매치.

하드코어 매치.

노 홀즈 바드 매치는 위의 두 개와 비슷한 경기였다.

“당신이 쓰는 피니시 무브의 봉인을 풀어주기 위한 경기 방식이라고요.”

“슬레지 해머 말인가.”

“그게 나와야죠.”

나는 싱긋 웃었다.

슬레지 해머.

공사 현장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도구였는데, 프로레슬링에서는 트리플H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로 유명했다.

그의 야수성을 드러내는 무기였다.

마이크를 들었을 때는 신사다운 척하는 인간이 경기에서는 슬레지 해머를 사용한 반칙으로 승리를 챙기니까.

그러므로 노 홀즈 바드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고민하던 트리플H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언생션드 매치는 어떨까?”

“……호오.”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낼 줄이야.

Unsanctioned Match.

공인을 받지 않은 경기란 뜻이다.

경기의 결과에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며 문제를 재기할 수 없다.

회사, 단체, 심판, 상대 선수.

그런 계약서에 서명하고 뛰는 경기는 하드코어의 끝판왕과도 같았다.

……아, 물론 TV에 방영될 수 있는 수위 안에서의 기준으로 말이다.

지금도 CZW 같은 하이퍼 하드코어 인디 단체에서는 가시 철선에 몸이 던져지고 형광등을 머리로 깨는 선수들이 얼마든지 나오는 게 이 업계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어쨌든.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경기의 기대감을 하드코어하게 올리고 싶지는 않아서 노 홀즈 바드 정도로 내린 건데.

왜냐고?

그 매치는 정말 서로를 증오하는 상태에서, 말하자면 죽거나 불구가 되더라도 괜찮다는 각오로 치러졌다.

물론 각본상의 캐릭터가 그렇단 거고, 경기를 할 때 그런 연출을 하고자 노력을 하는 거지만.

“바트가 절대 안 된다고 할걸요.”

“설득해야지.”

“설득이 통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어요. 거기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서로를 증오할 이유가 있던가요?”

“있지.”

헌터의 눈이 빛났다.

“나는 네가 싫거든.”

“……놀랍네요. 저는 당신을 선배이자 선수로서 무척 존경하는데.”

“네가 테이커 앞에서처럼 나에게 점잔을 떨었던 기억은 없다만.”

“이런, 들켰네.”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사실 좀 미묘하기는 했다.

인정은 하지만.

존중의 영역까지는 아니랄까.

“그리고 트리플H도 싫어하겠지.”

“‘신’이라면 그럴 것 같긴 한데요.”

이거 왠지 설득을 당하는 느낌인데.

나는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도록 확인해보기 위해 바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창 또 직원들을 갈구다 전화를 받으신 영감님은 ‘언생션드 매치로 해도 됩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자네 궁둥짝이나 비공인하게.]

그리고 전화가 뚝 끊어졌다.

“…….”

“……제 말이 맞죠?”

나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뭔가.

음.

이야기를 들으니 하고 싶긴 했다.

언생션드 매치.

커리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협력과 반목을 계속해온 헌터와 나의 최종전으로써 부족함이 없을 것 같거든.

“그럼 어디…….”

“응?”

“해볼까요? 설득.”

“뭔가 방법이라도 있냐?”

“없지는 않죠.”

그런 경기가 아니고서야 팬들이 납득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만들면 된다.

그리고 이 남자와 함께라면.

충분히 바트의 궁둥짝을 비공인시킬 정도로 손쉬운 작업이 될 터였다.

* * *

2월 22일, 일요일.

예산 문제 때문에 올해는 3월 페이퍼뷰가 생략되고, 오늘 페이퍼뷰를 치른 뒤 바로 4월로 넘어가게 되었다.

4월의 레슬 임페리움으로.

헌터와 나의 대립은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될 예정이었다.

내가 헌터를 공격한 이후 PWA와 WWF, 어디에도 출연하지 않으면서 팬들의 궁금증은 극도로 치달았다.

하지만 시청률은 그대로였다.

팬들이 ‘오늘은 나올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위클리 쇼를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슬슬 한계이기는 했다.

그렇기에 오늘밖에 없었다.

2009년 2월의 페이퍼뷰.

네버 이스케이프.

거기에서 나는 킹스 럼블 우승자에 걸맞은 화려한 복귀를 하며 트리플H와 대립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우승자라고 해도 WWF를 배신하고 나간 다른 단체의 선수에게 타이틀 도전을 허락할 수는 없다.’

그런 논리를 전개하며 이쪽의 킹스 럼블 우승을 무위로 돌린 CEO 트리플H에게 맞서 내가 택한 대응책은.

간단했다.

그냥 죄다 엎어버리는 거다.

네버 이스케이프의 메인이벤트로 치러진 ‘일리미네이션 챔버’ 매치.

룰은 좀 복잡하지만, 요약하자면.

헬 인 어 셀처럼 초대형 철창 안에.

여섯 명의 선수가 들어가.

그중 네 명을 개인 철창에 가두고.

두 명이 싸우기 시작해.

시간이 지날 때마다 한 명씩 나와.

한 명이 남을 때까지 핀 폴과 서브미션으로 선수들이 제거되는 매치.

킹스 럼블, 링 서바이벌과 같은 특수 경기들의 흥미로운 룰을 잔뜩 끼워넣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경기.

나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난입해서 모조리 때려 부수고 나올 예정이었다.

참가 선수는 다음과 같았다.

WWF 유니버스 챔피언 숀 시나.

원래 참가자인 코피 퀸스턴을 공격하고는 대신 매치에 들어온 러셀 하트.

트리플H.

레이 미스테리우스.

크리스 젠코.

카인.

이렇게 여섯 명.

그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경기를 지켜보며 나는 때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내 차례는 경기의 종반부.

그때까지 이 대립에 관계가 없는 선수들은 대부분 탈락할 예정이었다.

[크리스 젠코가 가장 먼저 탈락합니다! 이거 큰 실수를 저질렀어요!]

[크하하! 빅 레드 머신 카인에게 덤벼들다니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군요!]

[아, 이제 새 선수가 나옵니다!]

[과연 누가 될까요?]

[숀 시나가 나옵니다!]

[Let’s Go Cena!]

[Cena Su-ks!]

링으로 올라온 시나가 압도적인 반응을 받는 가운데 경기가 이어졌다.

다음으로 나온 러셀 하트가 녀석에게 맞서서 싸우고. 마지막으로 트리플H가 나와 선수들이 다 모였다.

압도적인 무용을 뽐내는 카인을 선수들이 단합해 두 번째로 탈락시켰고.

다음으로 레이 미스테리우스가 트리플H의 비겁한 술수에 당해 안타깝게 탈락하면서 3강 구도가 완성되었다.

숀 시나.

트리플H.

그리고 러셀 하트.

이렇게 세 명의 선수가 링에서 계속해서 충돌하면서 경기가 이어졌다.

다들 나름대로 이 업계에서 한 가닥 하는 선수들인 만큼, 삼파전이 되자 쉽사리 승부가 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 모두가 의도되었다.

나를 위해서.

솔직히 이렇게까지 푸시를 받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이번 레슬 임페리움은 내가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전에 테이커를 쓰러뜨렸을 때도 그렇고, 대부분 레슬 임페리움에서 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이번에는 그게 다른 수작 없이 바트 회장님의 공언 아래에 이루어지기 때문인지 영 어색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뭐.

몰아준 푸시는 완벽히 소화할 거지만.

“신 선수, 가시죠.”

바로 그때, 내 옆을 계속 지키고 있던 직원이 나갈 때임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 나는 직원을 따라서 링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고릴라 포지션에서 신호를 주면 나가서 정해진 각본을 수행한다.

[Let’s Go Cena!]

[Cena Su-ks!]

팬들의 챈트가 가까이서 들렸다.

어둑어둑한 공간에 몸을 구기고 앉아 신호를 기다리자니 옆에서 누군가 내 몸을 툭툭 건드렸다.

방금 직원이다.

그가 건네주는 ‘소품’을 받은 나는 심호흡을 하고 곧장 머리 위에 설치된 철창 바닥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높은데.’

소품이 무거워서 일단 위로 올리고, 그대로 철봉을 오르듯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들어 올리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엄청난 반응이 쏟아졌다.

[Uoooooooooooooooooohhhhh!!]

기다리게 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옆에 놓아둔 소품을 들었다.

별건 아니었다.

왼손에 슬레지 해머.

오른손에 철제의자.

프로레슬링 업계의 대표적인 무기.

그걸 들고 일어선 나는 일단 주변의 상황을 힐끔 돌아보면서 확인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기가 막히게 챈트가 쏟아지고 있어서 시간은 충분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모두 굳어진 채였다.

이 철창 안에 있는 네 명.

일단 심판부터 시작해.

숀 시나.

러셀 하트.

트리플H까지.

다들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잔뜩 굳어져서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움직였다.

철창 바닥을 걸어가 의자를 안으로 던지고 슬레지 해머를 든 채, 그대로 로프를 넘어 링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트리플H를 노려보았다.

“…….”

순간 굳어지는 분위기.

여기에서 만약, 이게 서부 삼류극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뽑으라고. 네 리볼버.’

하지만 안타깝게도.

리볼버라는 이름의 슬레지 해머를 들고 있는 건 바로 내 쪽이었다.

나는 해머의 양쪽 끝을 각각 손으로 감싼 상태에서 헌터의 복부를 찔렀다.

뻐억-!

“커헉!”

공중으로 반쯤 몸이 떠올랐다 쓰러지는 트리플H. 거기에 팬들이 속이 시원하다는 듯 큰 환호성을 내질렀다.

[Yeeeeeeeeeeeeeeeaaaaahhhh!!]

다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트리플H를 조지기 위해 왔다.

그의 타이틀 도전을 실패로 만들어 어떻게 해서든 엿을 먹일 생각이다.

슬레지 해머를 가져온 이유도 이게 트리플H가 자주 사용하는 무기라서 더 굴욕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스케일이 작은 놈이 아니다.

더없이 평등하게.

쩌억-!

“거흑?!”

나는 헌터의 옆에 서있던 러셀까지도 슬레지 해머로 공격하며 완전히 이 경기 자체를 박살 내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숀 시나에게 다시 해머.

“커헉!”

자신들의 주인공인 시나까지 내 손에 박살이 나자 여성과 가족 단위 팬들이 내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ooooo-!!]

[Yeeeeeeeeeeeeeeaaaaahhhh!!]

하지만 환호도 그에 못지않았다.

나는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충격에서 회복한 트리플H가 철제의자를 집어 들려 했다.

하지만 나는 슬레지 해머 끝을 의자에 대서 헌터가 잡지 못하게 만든 뒤.

“어이, 권력자 나으리.”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큭……!”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그대로 다시 헌터를 공격했다.

끝부분을 감싸 쥐고 엎드린 헌터의 안면을 후려친 나는 이번에는 철제 의자를 들고 무자비하게 후려 팼다.

뻐억-!

그리고 옆의 러셀이 꿈틀거리며 일어서려고 하자 다가가서 좀 패주고.

퍼억! 퍼억!

시나에게는 아예 일어서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안면에다 체어샷을 날리고.

쩌억-!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팬들이 압도적인 반응을 내게 보내주었다.

[Waaaaaaaaaaaaaaaggggghhh!!]

[Booooooooooooooooooooo-!!]

그런 가운데, 나는 철저하게 원한이 남도록 트리플H를 계속 두들겨 팼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남은 1개월.

우리는 그야말로 서로에게 ‘원한’을 가질 만큼 철저하게 싸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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