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상황은 간단했다.
나는 화가 난 상태였다.
CEO 트리플H의 갑질로 인해, 킹스 럼블 우승자로서 당연히 받았어야 할 도전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열이 받았고.
난 레슬 임페리움 직전의 가장 중요한 경기를 망치면서 복귀를 선언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사실 각본 외적으로는, 다른 선수들도 대립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고.
각본 내적으로는.
이제부터 보여줄 예정이었다.
2009년 2월 23일. 월요일.
버닝콩이 시작되었다.
페이퍼뷰 이후의 애프터 쇼.
팬들은 자연스럽게 네버 이스케이프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쇼의 오프닝이 끝난 이후 등장한 것은 바로 트리플H였다.
[Time To Play The Game……!!]
녹색의 조명이 번쩍이며 파워 메탈의 사운드가 경기장 전체를 뒤덮었다.
2만 명의 팬들이 야유를 보냈다.
[Boooooooooooooooooooooo-!!]
시나를 응원하는 가족 단위 팬들.
그리고 그 외의 일반적인 팬들.
양쪽 모두가 야유를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 트리플H는 어제 싸움의 여파를 강하게 받은 얼굴이었다.
선글라스로 감추었지만.
눈에는 크게 멍이 들었고 입술은 찢어졌으며 눈썹 위에는 밴드를 붙였다.
강렬한 경기 더불어 마지막에는 슬레지 해머와 철제의자로 마구 공격당했으니 사실 멀쩡한 게 더 이상했다.
링에 오른 헌터는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뭐라 할 말이 없군.]
[Booooooooooooooooooooo-!!]
[왜 다들 내게 야유를 보내는 건지 모르겠어. 문제는 내가 아니잖아?]
헌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이 일에 대해서 신과 PWA 측에 책임을 물을 거야.]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다.
그런 식으로 운을 뗀 헌터는 또 나름대로의 논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인해 신은 자신의 밑바닥을 완전히 드러냈지.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된 셈이야.]
[Booooooooooooooooooo-!!]
[아니, 봐.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경기에 난입해서 그렇게 깽판을 부린 놈을, 회사가 어떻게 믿어야 하지?]
헌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한 이야기잖아. 놈은 단지 주목을 받기 위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것에 불과해. 또 이제 나와서 피해자인 척하며 동정을 사려고 들겠지.]
헌터가 입장로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팬들이 챈트를 시작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물론, 그럴 용기도 없겠지만.]
헌터가 나를 비웃었다.
바로 그때가 타이밍이었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경기장에 내 테마가 울려 퍼졌다.
[Yeeeeeeeeeeeeeeaaaaahhhhh!!]
팬들의 환호와 함께 헌터가 순간 당황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곧바로 커튼을 걷고는 입장로 위로 나아갔다.
경기장 조명이 나를 비추는 가운데.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은 내게 환호를 보내주었다.
내가 바로 어제 네버 이스케이프의 메인이벤트를 망쳤음에도 반응이 좋은 이유는 모두 트리플H의 덕이었다.
그가 반대되는 위치에서 그만큼 어그로를 끌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시나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가족 단위 팬들은 불편한 눈치였지만.
일단 내 귀에는 환호만이 들렸다.
나는 그렇게 링 위로 올라갔다.
헌터는 굳어지는 표정을 감추려는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나는 그 손에서 곧바로 마이크를 낚아챘다.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관객들도 환호를 멈추고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나는 곧바로 헌터의 논리를 부수기 시작했다.
“미안한데 말이야. 헌터. 듣는 내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오더군.”
나는 녀석을 향해 다가섰다.
“내가 룰을 어겼다고?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전후 관계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지 않겠어?”
헌터는 침묵을 지켰다.
“내가 슬레지 해머를 휘두른 게, 어떤 탐욕 넘치는 레슬러가 벨트에 환장해서 휘두른 것하고 같은 짓인가?”
[Uoooooooooooooooohhhhh!!]
팬들이 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지금 대놓고 트리플H라는 선수를 깠고, 거기에서 한술 더 떴다.
“아니지! 미국에서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부른다고! 헌터! 총을 먼저 빼든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잖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네가 그 같잖은 양복 차림으로 나와서 헛소리로 내 우승을 훔쳐 갔지!”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똑같이 돌려주기로!”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상황은 ‘억제하려는 헌터’와 거기에 ‘저항하려는 나’로 쉽게 구성되었다.
마이크를 쥔 채 힘껏 주먹을 날린 나는 그대로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
펑-!
마이크를 통해서 크게 난 소리.
거기에 얻어맞은 헌터가 나가떨어졌고 나는 관객들의 환호 속에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Waaaaaaaaaaaaaagggggghhhh!!]
사실 각본 외적으로 봤을 때 꽤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내가 헌터를 몇 주 동안 ‘물리적 충돌’에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니.
그만큼 내가 전에 비해 위상이 높아졌다는 뜻이고, 헌터는 반대로 낮아져서 이런 그림이 자연스레 성립되었다.
헌터의 위에 올라탄 나는 우악스럽게 펀치를 날리면서 계속 공격했다.
퍼억-!
퍽! 퍽!
“크윽……!”
지금 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킹스 럼블의 우승을 헌터의 갑질 하나로 완전히 빼앗겨버렸으니 말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부당하게 빼앗겼을 때 절대로 참는 인간이 아니었다.
한동안 계속 주먹을 내리꽂던 나는 헌터를 두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스팅거.
로프를 붙잡고 쪼그려 앉아 자세를 취하고 있자니, 헌터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려고 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그와 함께 이어지는 팬들의 챈트.
관객들이 그 뒤로 작렬할 나의 피니시 무브, 스팅거를 기대하는 가운데.
헌터의 뒤쪽으로 난 입장로에서 한 박자 늦게 보안 요원들이 뛰어나왔다.
그리고 헌터가 링 아래로 도망쳤다.
“쯧…….”
[Booooooooooooooooooooo-!]
가볍게 혀를 차자 팬들이 도망친 헌터에게 야유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도 그래야만 했다.
보안 요원들이 위로 올라오는 시점에 맞춰 빠져나온 나는 그대로 바리게이트를 넘어서 링에서 도망쳤다.
근처의 팬들이 내게 다가왔다.
“신! 빨리 도망쳐!!”
“헌터 저 새끼 죽일 거지?!”
“다음 주에도 또 오라고!!”
“난 널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말을 듣자 기운이 샘솟았다.
혹시라도 팬들이 헌터의 말에 설득되어서 나를 ‘배신자’로 생각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럴 염려는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다들 맥주와 팝콘을 들고선 응원을 보냈고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최정상.
[신!!]
트리플H가 날 불렀다.
놈은 얼굴을 부여잡은 채 보안 요원의 부축을 받아서 겨우 이야기했다.
[네가 이래도 변하는 건 없어!! 조만간 회사로 고소장이 날아갈 거다! 어디 한번 계속 해보던가!]
거기에 피식 웃은 나는.
가볍게 중지를 세웠다.
……물론 전체이용가인 방송에서 절대로 그 광경을 담지는 않겠지만.
[Uoooooooooooooooohhhhhh-!]
관객들의 반응은 죽여줬다.
나는 그렇게 헌터를 비웃으며 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을 암시했다.
* * *
버닝콩이 끝나고 다음 날.
바트 맥센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신과 트리플H를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돌연 라디오를 틀었다.
이유도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연히 벌인 행동에, 신과 트리플H는 모두 의아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라디오 방송이 특이했다.
바트가 튼 라디오는 바로 어제 녹취해둔 뉴스레터 기자들의 방송이었다.
평소 바트는 WWF와 연관된 콘텐츠를 주로 생산하는 이들을 ‘기생충’이라는 모멸적인 이름으로 불렀지만.
오늘은 이걸 틀 이유가 있었다.
[신과 트리플H의 세그먼트에서 마지막에 신이 엿을 날렸다고 하는데?]
[아, 그랬군. 나도 갑자기 신을 너무 가까이서 잡길래 방송에 나가지 못할 손동작을 하고 있나 싶었는데.]
[그게 참 배드애스했어. ……애들 보여주기에 좋은 장면은 아니었지만.]
[아, 그래서 신 바로 옆에 있었던 애 엄마가 애기 눈을 가렸던 건가?]
[맞아. 어쨌든 간에…… 딱히 말도 않고 트리플H를 두들겨 패는 모습이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느껴졌지.]
[솔직히 속이 시원하긴 했는데. 어, 각본 외적으로 봤을 땐 의아했지.]
[어째서?]
[헌터가 저렇게 순순히 당해줄 남자였던가 싶어서. 자기가 원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될 남자인데 말이야.]
[그건 맞아. 헌터가 하기 싫었다면 각본을 거절하거나 분명히 다른 식으로 풀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라디오는 거기에서 꺼졌다.
“……잘 들었느냐.”
바트 맥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신이 먼저 대답했다.
“제가 좀 멋졌죠?”
“그리고 방송에 나가지 못했지.”
눈썹을 찡그리는 바트.
“더욱이 전체이용가 방송에서 그런 짓을 하니까 항의도 많이 들어왔고.”
“뭐어.”
“말인즉슨, 항의하지 않은 쪽은 좋아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스.”
트리플H가 거들었다.
그러자니 바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들아. 대체 뭘 하려는 거냐?”
“평범한 대립입니다.”
“조금 올드한 스타일이지만.”
“그렇게 문제될 짓은 하지 말자고. 응? 적당히 해도 너희라면…….”
“보스.”
헌터가 바트의 말을 끊었다.
“파트-타이머로서는 좀 더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번 경기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것 같습니다.”
“…….”
“이번에 확실히 느꼈습니다. 이 개자식이 저나 테이커의 시대가 이제 저물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죠.”
“아니, 헌터. 그런 의미가…….”
“마지막입니다. 보스.”
헌터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거기에 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바트 맥센은 냉혈한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사람은 스스로의 방식대로 끔찍하게 아끼는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헌터를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남자로서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마지막은 확실히 하고 싶겠지.
그럼에도 일단 확인할 게 있었다.
“그럼 두 사람. 다음 주에는 각본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 예정이지?”
거기에 신이 입을 열었다.
“일단 이번 주 수요일부터죠.”
“그래?”
“예, PWA에 출연한 제가 헌터의 초대를 받고서는 다시 버닝콩으로 돌아가…… 심하게 당해줄 겁니다.”
“초대? 무슨 초대?”
“협상하자는 거죠.”
비즈니스라고 했으니까.
이대로 소모전을 지속하느니 레슬 임페리움 이전에 확실하게 정리하고 싶었던 헌터가 나를 불러낸다.
지능적으로 꾀어낸 거다.
나 역시도 그를 의심해서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지만 통하지는 않고.
“버닝콩에서 헌터가 절 두들겨 패면서 자신의 강점을 보여주는 거죠.”
선수로서 가진 잔혹함과 영리함을.
그 디테일한 각본을 전해 들은 바트는 멋진 내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신이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존재했다.
그로써 대립을 더 큰 영역으로 올리고, ‘언셍션드 매치’를 성사시킨다.
거기까지 일단 생각만 해두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은 채.
* * *
버닝콩으로부터 이틀 뒤.
수요일 밤의 PWA는 월요일 밤에 있었던 사건의 반사작용으로 나쁘지 않은 시청률을 확보한 채 출발했다.
쇼의 퀄리티는 훌륭했고, 시즌 초창기에 각 선수들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메인이벤트에서 AK 스타일스를 이기면서 안정적으로 승점을 확보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세리모니를 마치고 퇴장하려던 나는 입장로 위의 초대형 스크린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발견했다.
트리플H였다.
“……?”
의아해 바라보자니 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내게 말을 시작했다.
팬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는지 무어라 반응을 못 하는 상황이었다.
[아아. 신. 들리나?]
그는 거만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네 쇼에서 미안하군. 제안할 게 하나 있어서 그쪽의 오너에게 부탁했지. 이렇게 우리 방식대로 하는 편이 사람들이 알기에도 더 편하잖아?]
그런 식으로 설명한 트리플H는 미리 준비되었던 대로의 제안을 해왔다.
[그 후로 생각을 좀 해봤는데. 아무래도 스마트한 비즈니스는 아닌 것 같아서. 다음 주 월요일 버닝콩에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좋겠군.]
[Booooooooooo……!]
팬들도 다 알고 있었다.
저게 함정이라는 것쯤은.
하지만 헌터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도망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는 럼블 매치의 우승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은 거잖아? 오라고.]
영상은 거기에서 끝났다.
경기를 끝마치고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던 나는 팬들을 돌아보았다.
아직 방송 시간은 5분 정도 남았다.
이후에 내가 확실히 헌터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끝내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나는 곧바로 마이크를 쥐었다.
그리고 팬들에게 말을 시작했다.
“이거 뭐 고스틴 파워야?”
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초대형 스크린에 얼굴만 나와 이야기하는 트리플H의 모습은 거기에 나오는 악당 캐릭터와 비슷했다.
“바트 맥센을 밀어내고 그 좋아하는 권력을 잡더니 사람이 이상해졌어.”
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분명 현명한 선택이야. 좋아. 헌터. 어디 한번 이야기해보자고. 우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Boooooooooooo……!]
팬들이 야유를 보냈다.
“뭐야. 다들 날 못 믿는 거야?”
그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나는 피식 웃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알아, 분명히 무슨 수작을 부리겠지.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난 겁에 질려 숨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야.”
그렇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헌터와 다시 버닝콩에서.
대립은 더욱 깊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