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54화 (354/634)

354.

분명히 나는, 단순히 악역의 음모에 당하기만 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악당이 악독한 수단을 써서 거기에 당한다면 똑같은 행동으로 돌려준다.

또한 쉽게 당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엿을 먹이는 일도 많았지.

그게 나였다.

‘정확히는 현실의 김준호를 비틀어서 만들어진 가상의 캐릭터지만.’

좀 더 난폭하고 자신만만했다.

현실의 김준호는 보다 영악하고.

찌질하지.

그걸 감추려고 자기 암시를 거는 건데, 남에게는 말하기 힘든 사실이다.

‘티파니 정도나 알지.’

어쨌거나.

그렇기 때문에.

내가 헌터의 음모에 당하는 것은 분명히 그 캐릭터의 확장에 도움이 될 터였다.

나 역시도 알고서 준비를 해갔지만, 결국 당한다는 점에서 헌터의 영리함이 더 부각될 수 있는 각본이겠지.

나는 젊고 강하다.

하지만 헌터는 경험이 있다.

그런 대비를 보여주기 위한 각본.

그게 시작되려고 했다.

3월 2주차의 버닝콩.

쇼의 오프닝부터 메인이벤트까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며 각각의 선수들이 대립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리고 중간중간마다 방송에서는 오늘 메인이벤트에서 나와 헌터가 새로운 계약식을 할 거란 광고가 나갔다.

물론.

준비는 완벽했다.

“그렇죠? 헌터.”

“…….”

같은 락커룸에서 내가 물어보자니 정장 차림의 헌터가 날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벌써 들어갔군.’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있다.

“신.”

“예, 헌터.”

나는 빙긋 웃었다.

“오늘 밤은 잘 부탁한다.”

“저야말로.”

“아니,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헌터가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정말로, 잘 부탁한다.”

이거 원.

아무래도 쉽게 끝나진 않을 듯했다.

하지만 바라던 바였다.

“절대 봐주지 말라고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 * *

시간은 흘러 메인이벤트 직전.

광고가 나가는 사이, 링 위에 고급 카페트가 깔리고 테이블이 올려졌다.

이어 그 좌우로 의자가 놓였다.

그렇게 준비가 끝났고 광고가 끝난 뒤 다시 라이브 화면이 연결되었다.

그리고.

녹색의 조명이 경기장을 비췄다.

[Time To Play The Game……!]

[Booooooooooooooooooooo-!!]

위클리 쇼의 2만 명 관객들의 야유를 받으며 먼저 링으로 나가는 헌터.

오늘도 정장 차림에 머리까지 깔끔하게 묶은 채, 계약 때 쓸 서류 봉투를 손에 쥐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링 위로 올라간 헌터는 마이크를 쥐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고했던 대로, 오늘 WWF는 신과 새 계약서를 하나 작성할 예정이야.]

더없이 젠틀한 태도가 재수 없었다.

[아무리 신이 야만적으로 굴어도 우리까지 그렇게 구는 건 미련한 선택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라고.]

[Boooooooooooooooo……!]

[그러니까, 신. 나는 링 위에 혼자야. 나와서 일 이야기를 해보자고.]

헌터가 반대쪽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Yeeeeeeeeeeeeeeeaaaaahhhh!]

팬들의 환호에 맞춰 입장로 커튼을 걷고 나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의 끝을 바닥에 질질 끌어 보였다.

슬레지 해머였다.

팬들의 환호가 더 커졌다.

나는 분명 준비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게 바로 그거였다.

긴장감 속에 계속되는 음악.

링 위로 올라간 나는 헌터와 마주보고 앉아 준비된 마이크를 들었다.

“요청하신 대로 와드렸수다.”

“그런 흉흉한 물건은 딱히 계약식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당신 자동차 트렁크에 있던 거야.”

나는 어깨에 슬레지 해머를 댔다.

슬레지 해머는 트리플H의 상징.

거기에 분명 그가 흉계를 꾸미고 있을 거라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디스.

그나저나.

이거 역시 무겁다.

공사 현장에서 사용되는 실제 해머라면 툭 치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갈 수 있어서 특수제작품을 사용하는데.

그마저도 끄트머리가 고무로 만들어진 것을 제외해도 너무 위험해서 반드시 손으로 감싸 쥐고 때려야 했다.

트리플H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피식 웃었다.

“버린 줄 알았는데.”

“예전에는 이걸 써서 어떻게든 승리를 낚아채는 게 당신이었잖아?”

“그랬었지. 일 이야기를…….”

“지금은 영 순해졌지만.”

나는 헌터의 말을 끊었다.

[Uooooooooohhhhh!]

“사람이 참 놀라워. 그런 정장 차림이 되더니 싹 바뀌어서. 이제 늙어서 고추도 잘 안 서고. 뭐 그러시나?”

“…….”

헌터의 얼굴이 굳어졌다.

팬들이 다시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빤히 노려보던 녀석이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걱정은 말고. 일 이야기나 하는 게 어때? 나는 정리를 하고 싶은데.”

“그래, 좋아.”

나는 그가 내미는 서류를 받았다.

검은색 가죽 파일철.

그것을 펼쳐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아무것도 없다.

“이게 무슨…….”

계약서의 내용은 텅 비었다.

“뭐하자는 거지, 트리플H? 지금 이 계약서에는 아무것도 안 쓰여있는데?”

“바로 그게 내가 제안할 계약이다.”

“뭐?”

“네놈에게 줄 건 아무것도 없어.”

그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사자가 엄니를 드러냈다.

“그냥 돌려보낼 생각은 없지만.”

아니.

하이에나다.

트리플H의 명령을 받아 관객석을 지키고 있던 보안 요원들이 돌아섰다.

어쩐지 숫자가 많다고 생각했더니.

모두 이걸 위함이었나.

거기에 순간 시선이 팔렸던 나는 트리플H가 링 바깥으로 빠져나가 그들 사이로 숨어드는 것을 알아차렸다.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Boooooooooooooooooooo-!!]

팬들도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링 주변을 포위한 검은 티셔츠를 입은 보안 요원들의 숫자는 대략 열 명.

덩치도 꽤 됐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는 이내 슬레지 해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마치 장작을 패듯 테이블 위에 놓아둔 서류를 힘차게 내리쳤다.

쩌억-!

반으로 갈라지는 테이블.

팬들이 그것을 보고 환호를 보냈다.

[Waaaaaaaaaaaaaaaagggghhhh!!]

사실 어느 정도 뻔한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내 트리플H를 완전히 떡이 될 정도로 짓밟아댔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열 명의 보안 요원들에게 맞서 슬레지 해머를 들어보였다.

그들이 한꺼번에 링으로 올라왔다.

[Waaaaaaaaaaaaaaggggghhhh!!]

나는 팬들의 환호성에 힘입어 열 명의 보안 요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퍼억-!

일단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녀석에게 슬레지해머 샷을 날리고 뒤로 돌아 한 명 한 명 쓰러뜨려 나갔다.

하지만 그 수가 많기는 했다.

“큭?!”

뒤쪽에서 누군가 날 붙잡았고 그대로 무게를 사용해서 바닥에 짓눌렀다.

“이거, 놔……!”

철컥!

내 손을 등 뒤로 당긴 보안 요원들이 수갑을 채워서 완전히 구속했다.

“큭!”

“거기까지 해둬.”

트리플H가 링 위로 올라왔다.

[Boooooooooooooooooooo-!!]

팬들이 야유를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인 녀석이 이윽고 보안 요원들을 물러서게 하고 내게 다가왔다.

“걸려들었군. 신. 매번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간 탓에 이 순간이 정말로 그리웠는데 말이야.”

녀석이 씨익 웃으며 명령했다.

”다들 내려가. 상황은 이제 내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으니 말이야.”

링 아래로 내려가는 보안 요원들.

수갑에 양손이 묶여 꼼짝도 못하고 있는 나를 헌터가 그대로 조롱했다.

“우스운 꼴이군. 신. 기분이 어때? 그동안 제 잘난 맛에 살았던 네가 이렇게 굴욕적인 상황에 놓이다니.”

헌터는 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마이크를 내 앞으로 툭 걷어찼다.

엎드린 상태로 있던 나는 그 앞에 입을 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지? 고추 안 서는 거.”

“……?”

“아주 겁쟁이가 다 되셨어. 옛날의 당신 같았으면 직접 나섰을 텐데.”

[Uoooooooooooooooohhhhhh!!]

그런 상황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소리치는 내 모습에 팬들이 경악했다.

하지만 올바른 선택은 아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은 헌터가 자신의 재킷을 벗어던지며 이야기했다.

“……보여주지.”

그리고 이어진 것은.

상대가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머리채를 붙잡혀 억지로 일으켜 세워진 내 안면을 헌터가 후려쳤다.

쫘악-!

날카로운 통증.

셀링 같은 건 필요없었다.

거기 맞은 내 몸이 반대편으로 휙 넘어갈 정도로 강력한 타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상태에서 더.

헌터는 몇 번이고 내 머리채를 틀어쥐고 일으켜 세워 뺨을 갈겨댔다.

쩌억!

쫙!

짜악!

퍼억!!

뺨이 붉게 달아오르고 이내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허억, 허억…….”

봐주지 않는다더니.

진짜였군.

하지만 그게 더 좋았다.

[Booooooooooooooooooo-!!]

이 잔혹한 태도로 인해 트리플H는 앞으로 더 큰 야유를 받을 것이며.

싸움은 더 강렬해질 테니까.

이 모습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 트리플H는 환상적이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자신의 숨겨두었던 야수성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 비겁한 행동에 야유를 보내던 팬들이 점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특히나 여자나 어린아이 팬들은 너무도 잔혹한 폭력에 눈을 가릴 정도.

얼굴을 여러 방 때린 헌터는 이어 날 로프 앞에 눕히고 발로 짓밟았다.

쿠웅-! 쿵! 쿵!!

무자비한 스톰핑이었다.

팔이 수갑에 채워진 상태였던 터라 내 몸은 마치 물고기처럼 꿈틀거렸다.

뻐억-!!

복부를 걷어차이고.

날 일으켜 세운 헌터가 그대로 링 바닥에 대고 스파인 버스터를 시전했다.

투콰앙-!!

정신이 아찔해졌다.

특히나 팔이 뒤로 묶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끄윽……!”

“이제 시작인데 뭘 그래?”

“제, 기랄.”

나는 바닥에 추욱 엎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슬레지 해머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걸 쥘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Uooooooooooohhh……!]

다들 침묵하는 가운데.

트리플H의 모습에 압도된 몇몇 관객들만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 손에 슬레지해머가 들어갔다.

“후우, 후우.”

숨을 몰아쉬던 녀석이 내 앞으로 다가와 해머를 거꾸로 치켜들었다.

뻐억-!

안면에 그것이 내리꽂혔다.

손바닥으로 끄트머리를 감싸 쥐었다고는 하나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뒤따랐다.

나는 버티지 못하고 추욱 늘어졌다.

그렇게 체력을 완전히 빼놓은 뒤.

“허억, 허억…….”

헌터가 날 링 아래로 밀어냈다.

쿠웅-!

단단한 바닥에 팔이 묶인 채로 떨어진 나는 그대로 계속 유린을 당했다.

링 아래로 내려온 헌터가 나를 바리게이트로 몰아붙여서 목을 졸라댔다.

“이제 좀 눈이 뜨이시나?!”

녀석이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주변의 팬들이 소리를 지르는 게 더해져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나는 헌터를 노려보았다.

계속해서.

지지 않고.

거기에 순간 열이 받았는지 순간 녀석이 내 얼굴에 힘차게 침을 뱉었다.

“윽……!”

“넌 아무것도 아니야. 신. 너는 그냥 여기에서 흔하게 반짝 떠올랐다 사라지는 삼류 레슬러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헌터는 내 얼굴에 붙은 침을 손바닥으로 비비면서 모욕을 주었다.

이런 제기랄.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냄새가 너무 심하다.

순간 몸을 뿌리치며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헌터는 그 순간 내 머리를 붙잡고 반대편으로 힘껏 내던졌다.

투쾅-!

링 아래에 설치된 철제 의자로 달려가 부딪친 나는 그대로 몸의 중심을 잃고서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후우, 후우…….”

좀 쉬고 싶었지만.

다가온 헌터가 나를 다시금 링 위로 올려보냈다. 슬슬 이 세그먼트의 마지막이 찾아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링 위로 올라가서도 헌터는 나를 완전히 제압해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마무리는 당연히.

페디그리였다.

투콰앙-!

전반신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기 때문에 낙법을 치는 게 극도로 어려웠다.

거기에 손까지 묶인 상태라서 페디그리를 맞자 나는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뒤의 상황은 보지 않아도 간단했다.

관객들은 공포에 질렸고.

분노를 느꼈으며.

거기에 압도되었다.

그 사자와 같은 카리스마에.

그리고 사자는 다시 정장을 입었고.

머리를 묶으며 신사로 돌아간다.

링을 내려간다.

자신의 음악 속에.

하지만 그 본질은.

The Game.

언제나 승리를 추구해온 최강의 악당.

비열한 수를 쓰기조차 거리끼지 않은 패왕의 길을 걸어온 사나이.

그건 각본도, 현실도 그렇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지고 싶지 않았다.

‘방송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에이, 됐다.

그런 자잘한 걸 신경 써서야.

팬들의 기억에는 남을 수 없겠지.

나는 바닥을 기었다.

목표는 마이크.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것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간 나는 그대로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목청껏, 소리쳤다.

“헌터어어어어어어어어어!!”

로프 사이로 정장을 입은 채 돌아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내가 이러리라고 알아챈 것일까?

음악이 뚝 꺼졌고 헌터가 사납게 뒤를 돌아보는 것이 로프 사이로 보였다.

나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Uooooohhh……!]

몇몇 팬들이 놀라 소리쳤다.

“오늘 밤, 나를 끝장내지 못한다면 반드시 지옥을 보게 될 거다! 헌터!!”

그리고 나는 지옥을 자청했다.

우리는 지옥으로 간다.

그 누구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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