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56화 (356/634)

356.

2009년 3월 3주차.

광고가 끝나고 버닝콩이 시작됐다.

그리고 나온 것은 미리 촬영해두었던 백스테이지 세그먼트 영상이었다.

주차장 안으로 들어오는 리무진.

그리고 거기에서 정장 차림의 트리플H가 내리자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Boooooooooooooooooooo-!!]

CEO라는 새 기믹을 이제 팬들이 완벽하게 받아들였다는 느낌이었다.

거만하게 정장 깃을 정리하며 링 쪽으로 움직이는 트리플H. 쇼의 오프닝 음악이 자연스레 오디오에 섞였다.

[트리플H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난주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죠. 오늘은 과연 또 무엇을 이유로 쇼에 등장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바트 맥센을 축출해내고 이제는 명실상부 이 버닝콩의 1인자가 되어버린 그인데요!]

해설자들의 이런저런 코멘터리 속에서 천천히 링으로 입장하는 트리플H.

바로 그때였다.

끼기기기기긱-!

요란한 타이어 소리와 함께 방금 리무진이 내려온 길을 통해 검정색 픽업트럭 한 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Uooooooooohhhh……!]

팬들이 놀란 듯 소리를 냈다.

거기에 기대감까지 더해져.

트리플H가 신경이 쓰인다는 듯 돌아보았고 카메라가 주차장을 크게 도는 차량을 계속해서 잡아주었다.

그리고 차가 리무진의 옆면과 수직이 된 채 멈춰 섰고 그 안에서 검은색 재킷을 입은 누군가가 내렸다.

바로 나다.

[Uooooooooooooohhhhh……!!]

순간 큰 충격에 빠졌던 팬들은.

[Waaaaaaaaaaaaaaaaagggghhh!!]

이어 어마어마한 환호성을 보냈다.

충격에 빠진 헌터의 얼굴과 상처 입은 내 얼굴을 번갈아 보여준 뒤, 화면은 그대로 오프닝으로 넘어갔다.

“좋았어!”

“최고야!!”

고릴라 포지션의 직원들이 달 착륙에 성공한 나사 직원들처럼 환호했다.

그걸 뒤에서 지켜보던 나와 헌터는 말없이 주먹을 툭, 하고 부딪혔다.

연출적으로 좋은 그림이었다.

오프닝 영상 이후 다시 백스테이지 세그먼트 영상이 라이브처럼 나갔다.

실제로 On Live 스크린을 작게 띄워서 이게 지금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연출을 가미했다.

오프닝이 중간에 섞여서 내가 헌터를 쫓아가 붙잡는 장면은 아쉽게 잘렸지만, 이후의 장면이 정말로 좋았다.

[크헉!]

퍼억!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지!!]

헌터를 공격하는 나.

그렇게 리무진 전체를 돌고 이어서 나는 트렁크에서 슬레지 해머를 꺼냈다.

예전에 슬레지 해머를 헌터의 자동차 트렁크에서 가져왔다는 농담이 멋지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콰직!

쨍그랑!

콰앙!!

나는 호쾌하게 해머를 휘두르며 리무진을 그야말로 박살 내기 시작했다.

화면이 흔들리는 효과와 함께 보자니 직접 저 짓을 한 나도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Yeeeeeeeeeeeeeeaaaaaahhhhh!!]

팬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내가 헌터를 리무진에 밀어 넣고 픽업트럭으로 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라이트가 번쩍거렸다.

끼기기기긱-!!

그리고 차량이 곧바로 돌진했다.

부우우웅-!

둔탁하고 힘 있는 엔진 소리와 함께 달려간 트럭이 그대로 리무진의 옆면을 들이박으며 크게 날려버렸다.

투콰앙-!!

[Uooooooooooooooohhhhhhhh!!]

팬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리무진의 옆면은 완전히 박살이 났고, 트럭의 닫힌 보닛 위에서는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에서 내려 리무진의 뒷문을 벌컥 열었다.

헌터는 완전히 박살 난 상태였다.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고 정장도 조금 전의 공격으로 찢어져서 눈만 겨우 꿈벅거리며 뜨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녀석을 질질 끌고 갔다.

화면 밖으로.

사실 굉장히 공을 들인 촬영이었다.

내가 차에 타서 금방이라도 차를 발진시킬 것처럼 소리를 낸 뒤 감독이 컷을 하고 두 가지 작업이 이뤄졌다.

헌터가 차에서 내리고.

나는 보호 장비를 착용했다.

그리고 돌진해 처박은 뒤.

헌터가 다시 차에 타고.

나도 보호 장비를 벗었다.

‘아무런 도움도 안 됐지만.’

그냥 무지막지하게 아팠다.

하지만 나는 훌륭하게 해냈다.

나중에 직장을 잃으면 자동차 충돌 실험 인형에 지원해도 될 정도로 멋지게 리무진을 들이받는 데 성공했다.

영상은 그렇게 끝났고.

팬들에게 큰 흥분감과 기대감을 안겨준 채 경기장으로 화면이 이어졌다.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회사 측에서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응 방침을 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나와 헌터는 팬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될 즈음 나갈 준비를 마쳤다.

“좋아. 가볼까.”

백스테이지 세그먼트를 촬영했을 때처럼 분장한 헌터가 내게 다가왔다.

이마의 피와 상처는 분장이었다.

경기 도중이면 여러 여건상 칼날로 찢는 게 빠르고 편해 그렇게 했지만.

그게 아닐 땐 역시 찢는 것보다는 분장이 선호되었다. 아프지 않으니까.

이마가 찢어져 흐른 피가 정장 셔츠 위쪽에 묻었고, 그 비싼 아르마니 정장 여기저기가 마구 찢어진 상태.

나는 헌터를 붙잡고.

헌터 역시 내게 매달리며.

링을 향해서 힘껏 내던졌다.

커튼 사이로 날아간 헌터의 모습이 어땠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Uooooooooooooooohhhhh!!]

경악을 금치 못하는 팬들.

쿵-!

그리고 들려오는 큰 소리.

옆에서 직원이 건네주는 페트병의 물을 머리에 쏟아낸 나는 그대로 헌터를 따라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이마를 타고 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땀에 흠뻑 젖은 것처럼 연출되었다.

헌터는 바리게이트에 부딪힌 뒤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

나는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이 내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대로 헌터를 데리고 링 위로 올라간 나는 곧바로 마이크를 잡았다.

두 개나.

일단 그중 하나를 청바지 뒤쪽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사실 ‘액션’이라면 백스테이지 세그먼트를 통해서 많이 보여주었으므로.

지금은 주로 대사를 칠 생각이었다.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몰아쉰 나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트리플H의 위에 선 채 놈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이 얼마나 위험한 남자를 건드린 건지…… 이제 좀 알겠지?”

[Yeeeeeeeeeeeeeeaaaaahhhh!!]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닐 거야. 헌터. 당신은 분명히 돌아올 테고. 나를 계속해서 방해하겠지. 권력을 쥐고.”

사실 정말로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한 남자가 성장해서, ‘왕 중의 왕’이라는 네임을 자칭하며 끝내는 권력까지 쥔 그 모습이.

“하지만 헌터! 당신은 아직 선수 시절의 야수성을 버리지 못했어. 셔츠라니. 참으로 웃기는 짓을 하는군.”

아무리 셔츠를 입어서 감춰도.

트리플H는 피로 얼룩진 길을 걸어온 야수. 쉽게 사라질 리가 없었다.

뭐든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그 본성이, 정장 따위에 감춰질 리가 없다.

그러므로.

“럼블 매치에서 우승하고 받은 권리를 당신을 박살 내는 데 사용하겠어.”

[Uoooooooooooohhhhhhh!!]

In The Wrestle Imperium.

You And Me.

One On One.

그렇게 외친 나는 그대로 마이크를 내던지고 천천히 링을 내려갔다.

음악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씨익 웃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남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겨우 마이크에 입을 댄 트리플H.

[신. 그대로, 돌려주지. 날 박살 내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분명 후회할 거다.]

[Uoooooooooooooooooohhhhh-!]

탄성을 내뱉는 팬들.

지난 주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나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 뒤쪽에 꽂아두었던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이래서 두 개를 받은 거다.

트리플H 정도 되는 남자라면 분명히 그 정도로 쓰러지진 않을 테니까.

나는 짧게 이야기했다.

“그래보던가. 등신아.”

사실 그걸 바라고 있었다.

마이크를 휙 내던지고 돌아서는 날 보고 다들 어안이 벙벙해진 듯했다.

* * *

WWF에서는 중요한 경기에는 반드시 ‘경기 계약식’ 세그먼트를 가졌다.

복싱과 같은 스포츠에서 하는 것처럼 경기 전에 두 선수가 만나서 중재 아래에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스포츠에서의 그것이 일종의 ‘스포츠맨십 아래에 싸우겠다’라고 말하는 서약인데 반해서.

우리는 좀 달랐다.

정확히 말해 헌터와 나의 경기는 그런 걸 다 배제해두겠다는 계약이었다.

언셍션드 매치.

경기 후 어떤 상해가 남더라도 절대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계약서.

그 경기는 온갖 무기를 다 사용하는 하드코어 매치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런 양상을 가지는 게 보통이었다.

3월 4주차의 버닝콩.

링 위에 선 헌터와 나는 또 다시 대비되는 복장을 입은 채였다.

헌터는 잘 빠진 회색 정장.

타이를 매지 않은 검은 셔츠 아래로 터질 듯한 근육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선수로서 그 몸만큼은 끝판왕.

가슴 근육의 모양이 역삼각형이라는 소소한 단점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타고난 거라서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반대로.

나는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

가죽 재킷을 입은 평범한 모습.

보다 사람들에게 친근감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청년 같은 옷이었다.

그렇게 복장부터가 서로에 대한 대비를 갖춘, 정말 완벽한 대립이었다.

중재자로 링 아나운서인 릴리 가르시아가 나서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먼저 헌터가 입을 열었다.

“언셍션드 매치라. 내가 몇 번인가 가졌고 모두 승리했던 경기였지.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고 있나?”

[Booooooooooooooooooo-!]

거만을 떠는 그에게 쏟아지는 야유.

나는 피식 웃었다.

“말해봐.”

“보다 비정했기 때문이지. 나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네 그 팔 한쪽도 아무렇지 않게 부러뜨릴 수 있지.”

“그거 놀랍네. 나도 그렇거든.”

똑같이 받아쳤다.

“물론 당신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헌터. 당신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서.”

[Uoooooooooooooooooohhhh!!]

“왜일까? 좀 고민을 해봤어. 당신이 고작 PWA 소속이라는 것만으로 날 공격한 건 솔직히 말이 안 되거든.”

“왜지?”

“이 회사로서도 큰 타격이잖아? 지금까지 잘 지켜온 킹스 럼블의 전통을 부정하는 짓을 저지르다니 말이야.”

그게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게도.

그걸 내가 지키려고 했다.

“재미있지 않아? 내가 당신에게 도전한다고 말하면 문제는 없어지지. 왜냐면 당신 허리에 황금 벨트가 감겨 있지 않아도, 당신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레슬 임페리움에서.

트리플H를 쓰러뜨린다.

그건 메인 챔피언을 지내는 것 이상의 가치가 분명히 존재하는 일이었다.

각본 외적으로도 그랬고.

내적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문제. 왜 당신은 나를 그토록 배재하려고 했던 걸까?”

“그야 물론…….”

“PWA라고? 아니지. 헌터. 결국 상황이 극단까지 치달으면 남는 건 우리 둘뿐이야. 당신과 나. 나와 당신. 우리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말인즉슨, 벨트가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를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벨트가 선수의 가치를 재단하는가.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로.

선수가 벨트의 가치를 재단하는가.

정답은 당연히 후자였다.

그러므로 헌터는 날 질투했다.

“내 허리에는 언제나 벨트가 감겨 있거든. 당신은 그걸 인정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나를 공격한 거지.”

“내가? 너를 질투한다고?”

“그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니, 애초부터, 네 허리에 벨트가 감겨 있다고?”

“착한 어린이에게만 보이는데.”

장난스럽게 웃은 나는 티셔츠의 밑단을 잡아 걷고 복근을 보여주었다.

내 노력의 상징.

내가 프로로서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항상 해왔던 고행의 증거품이었다.

“어때, 다들 보이나?”

[Yeeeeeeeeeeeeaaaaaaahhhh!!]

팬들이 내 이야기에 공감해주었다.

그래.

오히려 메인타이틀을 아직 가져보지 못했기에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갈 길이 남았다.

그리고 그런 내 이야기를 들은 헌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하지만 신, 네가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어.”

12회.

트리플H는 지금까지 총 12회의 메인 챔피언을 지낸 역사에 남을 강자.

“그런 내가 뭔지도 모를 네 허리에 감겨 있는 그 타이틀을 질투한다고?”

“그렇지.”

“어째서? 정말 이건 놀라운 이야기군. 12회의 메인 챔피언을 지낸 내가 네 허리에 감긴 가상의 벨트가 가지고 싶어서 이런 짓을 벌였다고?”

“그래. 네 벨트는 ‘과거’니까.”

나는 그렇게 받아쳤다.

트리플H는 이제는 과거의 인물이다.

그 표정이 순간 굳어진 것만 봐도 이 말이 가지는 파급력이 증명되었다.

[Uoooooooooooooohhhhh!!]

누구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자신이 늙어간다는 건.

왜냐면 인간은 보통 한 번 늙거든.

나 같은 경우를 빼면.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트리플H라는 남자가 가진 욕망과 공포를 이해했다.

특히나 신체적인 부분을 단련해서 지금껏 수많은 명예와 영광을 누려온 우리 같은 종류의 인간들은 더더욱.

받아들여야만 한다.

빼앗기는 것을.

그리고 난 빼앗는 쪽이었다.

………….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트리플H는 이 링 세그먼트를 계획하면서 했던 만남에서 내게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가르쳐주마.]

깃발을 넘겨주겠다고 말했던 테이커와는 달리, 녀석은 내게 분명히 무언가를 가르쳐주겠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사실.

그건 딱히 유쾌한 말은 아니었다.

나에게 뭘 가르쳐주겠다는 말은, 반대로 봤을 때 내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걸 헌터가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면서 나는 헌터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건넸다.

“그리고 확실히 알아두라고.”

“……뭘 말이지?”

“빼앗기는 건 내가 아니야. 당신이지.”

그 선수로서 가진 위상.

아무런 책임도 없이.

가져온다.

레슬 임페리움에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