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61화 (361/634)

361.

이후.

시나와 러셀, 빅 죠의 트리플 스렛 유니버스 챔피언 매치를 끝으로 2009년의 레슬 임페리움이 종료되었다.

나는 이십만 명의 관객들, 그리고 수천 만의 시청자들 모두가 오늘 밤을 죽는 그 순간까지 기억하길 바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이 인류 역사의 한순간으로 기억될 즈음.

당시 소년이었던 남자가 조부가 되어 손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다.

‘하부지! 신은 어떤 선수였어?!’

‘거기 앉아봐라. 손주야. 지금부터 개 쩌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그리고 역사는 이어지겠지.

하지만 그 후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모든 일정이 끝난 뒤 늦은 새벽.

‘조용하군.’

나는 병원 로비를 걷고 있었다.

심판의 판단대로 오른손에 금이 간 게 맞았고, 당연히 깁스 판정을 받았다.

그로 인해 나는 새벽 내내 졸린 의사 선생과 간호사들을 귀찮게 했다.

1개월 아웃.

무모하다 못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던 스팟에 비하자면 싸게 먹혔지만.

오히려 헌터가 정말 깔끔하게 날려준 덕분에 후유증은 없을 거란다.

멸치 많이 먹고 우유 많이 먹고 해서 뼈가 빠르게 붙기를 기도하자고.

어쨌든.

뼈가 빠르게 붙으려면 일단 잠부터 푹 자두는 게 우선일 테고, 실제로 무지막지하게 피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처럼.

몸에 남은 이 열기가 수면으로 인해 곧바로 지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했지.’

그 열광 속에서 나는 트리플H에게서 훌륭하게 깃발을 이어받은 걸까.

아니,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지만.

서로 스타일이 달랐다.

그는 이기적으로 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역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 혼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남자의 말로를 알기 때문에.

역시 이게 더 나았다.

헌터를 빛나게 해주고.

나 또한 빛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 밤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론에 다소 흥분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옆을 돌아본 나는 병원 로비에 있는 관상어 수조를 발견했다.

크기도 꽤 커서, 한쪽 벽을 아예 유리로 해둔 그 안에 생태가 있었다.

뭔가 익숙한 풍경이었다.

‘죄 이렇나?’

그러고 보니 방문한 종합 병원이란 곳은 모두 이렇게 한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수조 속에서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을 보자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걸 노린 것일까.

‘내가 의사가 아니라 모르겠군.’

피식 웃은 나는 코끝을 감도는 한기를 느끼고는 병실로 돌아갔다.

2인실.

‘슬슬 잘까.’

반대편에는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전문의에게 호송될 남자가 진통제에 의지해 어떻게든 자고 있었다.

“……어딜 다녀오는 거냐.”

아니, 깨어 있었나.

“잠이 안 와서요.”

“나도 그렇군.”

헌터가 억지로 일어서려고 했다.

그 곁으로 다가간 나는 거의 죽기 직전의 몰골을 한 그를 다시 눕혔다.

“무리하지 말고요.”

“끄응.”

“어때요? 많이 아프시나?”

“그래, 여기서 고칠 수가 없으니까.”

헌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는 두 번.

이번 생에는 이걸로 세 번째.

허벅지의 대퇴사두근이 뼈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수술 방법도 어려워서 회사에서 알고 있는 전문의에 맡기는 것이 안전.

그렇기에 오늘은 효과가 강력한 진통제를 맞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외로운 밤이지.”

헌터는 그렇게 말했다.

“내일부터 링에 오르지 못하는 공포를 견뎌내며 자신을 책망하는 밤.”

부상을 당해버린 자신을.

불가항력임에도 상관없이 분노를 느낀다.

그게 바로 프로페셔널.

“그리고 비어버린 내 자리를 오튼 같은 멍청한 놈이 차지하면 분해서 며칠은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지.”

“……오튼도 좋은 선순데요.”

“아니, 그 개자식은 프로의식이란 게 없는 놈이야. 자신을 통제할 마음도 없어서 죄 징징거리기나 하고.”

역시 두 사람은 상극이었다.

“뭐, 요즘은 좀 나아진 것 같다만.”

“좋은 친구입니다.”

“흥, 너는 너무 물러.”

“제가요?”

“그래. 링 위에서 했던 이야기…… 흥분해서 아무 소리나 한 건 아니지?”

“그야 물론.”

“오그라들어 죽는 줄 알았다.”

“사람이 낭만적으로 살아야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니 헌터는 고개를 내저었다.

“날 죽였어야 했다. 트리플H는 더 이상 링에서 가치가 없는 선수니까.”

그 판단은 얼핏 냉정하게 느껴졌다.

다른 이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스스로 욕심을 부리는 만큼, 헌터는 지금 자신에게도 그렇게 했다.

즉.

트리플H는 에고가 강한 선수다.

자기 존재감.

스스로 노력도 하고 자부심이 있는 만큼, 프라이드가 높고 웬만한 선수에게는 져주려고 하지 않는 거였다.

그렇기에.

떠날 때가 되었다고 느낀 시점에서 자기 자신도 가치가 없다고, 그렇기에 내가 욕심을 부려야 했다고 하는 거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젠장.

이거 완전 링 위에서 했던 이야기의 반복인데. 좀 깨닫게 해줘야겠군.

“아직 마무리가 덜 됐잖습니까?”

“……어떤 부분에서?”

“아직 태도 불량 시대의 마지막 불꽃 두 사람이 사라지지 않았죠.”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헌터.

그래.

캐스켓-테이커와의 일전.

전생에서도 두 사람은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현역 생활을 끝마치고 은퇴를 결정했다.

헌터는 어린애처럼 웃었다.

“이거, 열심히 재활해야겠군.”

“안 되면 연금도 나오고 좋죠.”

“저주하는 거냐?”

“그냥 질 나쁜 농담이었습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니 거기에 허허, 웃던 트리플H가 침대 옆의 캐비닛을 가리켰다.

“저거 좀 열어봐라.”

“저 손 못 쓰는데요.”

“빨리.”

재촉에 하는 수 없이 캐비닛을 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 사람 진짜 이거 계속 들고 다니나?

“슬레지 해머네요.”

“오늘 사용한 거지.”

“이건 왜……?”

“내게서 빼앗아가라.”

“예?”

“이제 네 무기다. 신.”

헌터가 손을 뻗었다.

슬레지 해머를 들고 있던 나는 엉겁결에 그것을 헌터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내가 쥔 목 부분 아래쪽을 쥐고는 그대로 다시 내 가슴으로 밀어냈다.

“아니 잠깐. 내년에는 어쩌려고요.”

“……아, 그럼 그때부터?”

“그냥 같이 쓰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슬레지 해머라.

내가 쓸 일이 있을까 싶지만.

* * *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캘리포니아 말리부의 맥센 저택을 빌려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 지역은 부자 동네여서 의료 퀄리티도 높은 편이었고, 친구들도 많아서 쉬는 데는 편했다.

중간에는 바트로부터 허가를 받아 부모님을 포함해 자주 왕래하는 한인 가족들을 여기 초대하기도 했는데.

다들 도착하자마자 휘황찬란한 저택의 위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웜메…….”

“이게 다 뭐시다냐.”

“호호, 준호 색시네 집이야!”

“준호 장인어른이 이렇게 돈을 잘 벌어? 요새 옷 장사가 할 만한 갑네.”

“도매상이라잖아. 도매상.”

……아직도 바트 맥센을 단순한 티셔츠 판매상으로 오해하고 계시는 그들의 사정은 일단 좀 제쳐두고.

아니, 근데 그럴 수 있나.

하긴 내가 딱히 ‘맥센’에 대해서 강조해서 이야기는 안 했으니까 그런 부분을 오해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저택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아버지가 다가왔다.

“준호야.”

“아, 예. 아버지.”

“팔은 좀 괜찮냐.”

“예. 뭐, 낫는 속도가 빠르대요.”

“그거 다행이구나.”

그리고 감도는 건.

부자 사이의 미묘한 침묵.

아무래도 분위기를 주도하시는 어머니가 안 계시면 우린 이렇단 말이지.

아, 그거나 물어볼까.

“아, 맞다. 아버지. 그 한국에서 제가 편지 받아온 거는 뭐였어요?”

극동 투어에서 은퇴한 군인 한 명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지.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집으로 부쳤는데, 잘 읽으셨나 모르겠다.

그러자니.

아버지는 시선을 피했다.

“옛날이야기다.”

“어, 그렇겠죠?”

“알 거 없다.”

아무래도 ‘애송이’인 나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할 어른들만의 깊고 느와르적인 사정이 있는 것 같군.

‘내가 이걸 알 날이 올까.’

그러고 보니 이 영감.

덩치가 전보다 커진 것 같은데.

나는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뭐, 그런 것과는 별개로 가족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한 건 좋았다.

나중에는 티파니까지 와서 가족들과 인사도 나누며 좋은 시간을 가지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쉬는 동안 마냥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가 맥센 저택이란 걸 간과했다.

말하자면 나는 아귀의 입속에 사과를 문 채로 입장해있는 셈이었다.

각자 스케줄이 다른 3MF(Three 맥센 패밀리)는 돌아올 때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날 귀찮게 굴었는데.

케인은 나와 그런 경기를 하고도 몸이 근질근질한지 요새 파쿠르를 시작했다며 좀 봐달라고 하지를 않나.

티파니는 자꾸 밤에 찾아오고.

마지막으로 바트가 환상적이었는데.

“이 경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매번 과거의 비디오들을 가져와 나와 보면서 감상을 묻고는 했다.

락콜드의 경기는 약과고, 1916년생인 루 테스 선생의 경기까지 나왔다.

이야.

거기다 상대가 일본 프로레슬링의 시조라고 불리는 리키도간이었다.

“뭐, 요즘 하면 진짜로 싸움 난 줄 알고 다들 긴장하지 않을까요.”

옛날 스타일이 그랬는데.

어, WWF보다 더 옛날 말이다.

여기서 또 다시 신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좀 하자면.

그때는 단체랄 것도 없어서, 그냥 누가 흥행을 개최하면 아는 누구를 부르고 하는 식이었다.

그렇기에 프로랄 것도 없어서 실전 싸움이 빈번하게 벌어지고는 했다.

그래서 실전 싸움 능력을 갖춘 폴리스맨의 존재가 중요했고, 루 테스는 그렇게 왕좌에 올랐었다.

게다가.

“그때는 관객들이 링에 난입해서 덤비라고 막 이야기도 했었다면서요.”

“그랬지. 하하, 즐거웠는데.”

“…….”

대체 어느 부분이 즐거웠다는 거지.

“이거 다 짜고 치는 거라면서 올라오는 놈들을 루 테스가 두들겨 패는 걸 네가 눈으로 봤어야 했는데.”

“보셨습니까?”

“아니.”

“그럼 왜…….”

“루 테스가 말했지. ‘난 사람을 패는 걸 좋아해. 특히나 자기가 강한 줄 아는 등신들을 패는 걸 말이야.’라고.”

“들으셨습니까?”

“아니.”

말을 말자.

어쨌거나.

무슨 의도에선지 바트는 스케줄로 바쁘면서도 매번 말리부 저택에 돌아와 나와 경기를 하나씩 보고는 했다.

그러자니 나도 흥미가 생겨 결국 먼저 테이프를 준비하고 마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즐겁기는 했다.

바트 맥센은 프로레슬링을 정말로 사랑하는 인물인 만큼, 나와 시야는 다르지만 이야기가 꽤 잘 통했다.

더군다나 의외로 요즘 세대가 원하는 스타일도 정확하게 캐치해냈다.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거다.

“오튼이 요새 잘 나가긴 하지.”

“러셀도 성장했잖아요.”

“그래, 솔직히 악역인데 환호를 받는 상황까지 와서 슬슬 좀 악독한 행동을 하나 시킬까 하지만…….”

“어, 뭐요?”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게 적중했다.

“러셀이 요즘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좋던데. 여자를 크게 이용하면서 배신하는 각본을 쥐어주면 어떨까.”

“그래서 뭐가 이득이 있죠.”

“시나가 패는 거지.”

“…….”

ACW를 따라가기 위해서 지금 시나를 계속 밀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너무 극단적이잖아요.”

“그래서 이해하기 쉽지.”

바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대중들은 생각보다 멍청해. 신. 그들이 흥미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쉽고 자극적인 각본이 중요하지.”

“기대감만 충분히 준다면 어려운 각본도 알아서 이해할 수 있다니까요.”

“그럼 너는 이 프로레슬링의 선악의 역할론을 끝내 부정하려는 거냐?”

“그게 희미한 걸 원하는 거죠.”

“이해가 안 가는군.”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제가 그 스타일로 지금 얼마나 스타가 됐는지.”

“그래,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바트가 씨익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그래서 네가 싫은 거고.”

“하지만 더 큰 적이 있잖아요?”

“그래, 그걸 위해서.”

바트는 나를 고용했다.

나는 바트에게 고용되었다.

그런 이야기였다.

이후로, 나와 바트는 같이 있는 김에 방영을 시작한 PWA의 위클리쇼까지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웃기는 게.

협력 단체의 회장님께서는 PWA 쇼를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남들한테 관심 좀 가져요.”

“남들 걸 왜 봐?”

“그래야 연구를 하죠.”

“흥, 내 거 하기도 바쁜 것을.”

그렇게 옥신각신하면서 예정대로 이어지고 있는 경기를 보던 때였다.

대니얼 라이언이 링으로 나왔다.

“저 친구가 아주 쓸 만하죠.”

“……중학생이냐?”

키 170cm.

백인 기준으로 평균보다 약간 작은 키의 대니얼을 본 바트가 말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경기에서 대니얼의 실력을 보자 나름대로 인정을 했다.

“미드 카더 라인에서 놀게 하면 딱 괜찮을 선수 같은데.”

거기에 어이가 없어진 순간이었다.

“……?”

“어?”

나와 바트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 루 테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 걸까.

갑자기 링 위로 난입한 한 남자가 대니얼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분명히 각본에 없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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