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72화 (372/634)

372.

링 세그먼트는 완벽했다.

하지만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뒤, 바트 맥센은 진이 빠져서 내게 물었다.

“꼭 이렇게 해야만 했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져 대답했다.

시비는 그쪽에서 걸어왔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더니 결국 내가 안 될 놈이라며 존 마이클스의 예시까지 들어가며 날 공격했지.

그런 이야기를 호구처럼 가만히 앉아 듣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전 정당하게 자기 보호권을 행사했을 뿐입니다. 아니면 거기서 팬들이 마이클스를 죽였다고 이야기할까요?”

“…….”

그렇게 말하니 웬걸.

바트는 피식 웃어 보였다.

“한마디도 안 지려고 드는구먼.”

“만약 져줬다면 제가 시나처럼 보스의 말을 잘 듣는 대리인이 됐겠죠.”

“그랬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기믹을 줬을 텐데 말이야. 아쉽게 됐군.”

“쿵-퓨리 같은 거요.”

“아니, 시나보다 더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나이가 자네에게는 맞겠군.”

그건 좀 소름 돋는군.

난 그런 캐릭터 소화 못 한다.

태생이 글러먹어서.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은 순간.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시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는 유니버스 챔피언 벨트.

가까이 다가온 녀석과 피스트 범프를 주고받은 나는 잠시 변명을 했다.

“널 욕하려는 건 아니었어.”

“알아. 내가 아는 신이 그럴 리가.”

시나는 상쾌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바트를 깐 거지. 네가 얻는 안 좋은 반응들은 전부 다 이 영감이 잘못된 부킹을 했기 때문이라고.”

“……나 아직 자리에 있다.”

“글쎄,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시나가 벨트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이 가관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련과 고난이 크면 클수록, 어쩐지 더 기운이 나더라고.”

“미친 자식.”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직접 자신의 부킹이 ‘시련과 고난’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트는 어딘가 무척 토라진 얼굴이 되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게 2002년부터 시작해 지금껏 이어져온 숀 시나라는 선수였다.

역대급의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은 브룩 레스너의 탈단 이후, 회사의 차세대 탑 가이로 낙점을 받은 시나.

하지만 그는 브룩 레스너에 비해서 한참 모자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몸은 뻣뻣했고 기술은 엉성했으며 경기를 만들어가는 능력도 부족했다.

더군다나 시나를 탑 가이로 밀며 기존의 레전드들을 모조리 그 희생양으로서 삼는 각본도 역시 문제였다.

그렇기에 시나는 심판대에 올라, 그곳에서 혹독한 비평을 들어야만 했다.

거기에서 진가가 드러났다.

시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 저주에도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자신을 믿어주는 팬들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건 분명 ‘어려운 길’이었다.

그 길이 시나라는 남자가 되었다.

러셀과 같은 악당들의 보조도 있어 그래도 이제는 꽤 자리를 잡은 상태.

단순히 올곧을 뿐인 남자에서 이제는 꽤 유머러스함을 겸비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마이클스와는 달랐다.

“좋아, 다녀올게.”

시나가 나를 지나쳤다.

그런 녀석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어 바트를 놀리듯 말을 걸었다.

“고난과 시련이라는데요.”

“……너에게도 그렇게 해줄까?”

“제가 당하겠습니까.”

“하긴, 그렇겠지. 내가 오랜만에 그렇게 큰 열변을 토했는데도 팬들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바트는 뜻밖에도 솔직히 인정했다.

“물론, 다 바보들이라 그렇지만.”

“링에서 진심을 말씀하셨군요.”

“하나만 빼고 그랬지.”

바트는 손가락을 들었다.

“나는 자네가 꽤 좋은 선수라고 생각해. 업계에서 퇴출되어야 할 오물은커녕, 여기 계속 있어주었으면 하지.”

“그거 참 눈물 나네요.”

“하지만 그건 남을 속여서 만든 결과가 아니던가. 자네는 스스로를 소수로 포장해서 팬들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능하지. 그게 가장 큰 장점이고.”

나는 언제나 그렇다.

바트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테이커, 그렉, 헌터.

내가 지금껏 그렇게 수많은 레전드들과 싸워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도전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팬들을 설득했기 때문에.

그리고 팬들이 거기 속았기에.

“ACW 놈들의 밑천이 다 드러날 때까지, 여기에서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선동가 짓을 잘해줬으면 좋겠군.”

“보통…….”

“응?”

“그런 걸 두고 새 시대가 열린다고 하죠.”

나는 빙긋 웃으며 받아쳤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떠나야 할 시기가 왔을 뿐이지요.”

“……애송이.”

“물론, 제가 말은 이렇게 해도 악역으로서 회장님은 믿고 있습니다.”

나는 얼른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러자니 바트가 피식 웃었다.

“나도 선수로서 자네는 믿고 있네.”

그랬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지만.

ACW라는 공공의 적을 앞에 두고 있기에 우리는 계속 협력할 생각이었다.

*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바트 맥센은 신에게 꽤나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악역과 악역의 대립이라더니.’

결국 놈은 반쯤 사기를 치다시피 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갔다.

신은 이제 ACW에 실망하고 이쪽으로 이주해온 팬들의 스타가 되었으며.

그렇기에 건드릴 수가 없었다.

실제로 수치가 그러했다.

일단, WWF를 통해서 판매되는 신의 머천다이즈 판매량이 이전 주와 대비했을 때 300% 가까이 상승했다.

솔직히 말해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왜냐면 그전부터 판매 순위가 꾸준히 5위권 내를 오가면서, 기본적인 판매량 자체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WWF가 제어를 해 어떻게든 순위를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계약했을 때는 어디 한번 크게 밀어보자면서 신의 새 상품을 계속 찍어냈던 바트 맥센과 WWF였지만.

그 성장세가 위험하다고 느꼈고, 최근에는 새 상품을 발매하지 않았다.

따라서 순위가 낮아지는 게 마땅했으나 오히려 신의 상품 판매량은 더 상승했다.

더군다나 ACW 팬들이 새로 유입된 이번 주는 정말로 위험했을 정도였다.

탑 가이인 시나의 머천다이즈 상품을 추가 발매하고 할인, 떨이 판매 들어가 겨우 1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시나가 졌다.

총 137개의 상품이 판매되고 있는 시나가, 32개인 신에게 지는 것이다.

아무리 신이 이쪽과 계약을 맺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외부 단체의 선수.

그런 선수가 WWF의 머천다이즈 판매량 1위를 기록하는 건 단체의 이미지에 좋지 않았다.

하지만 신은 이번 일을 통해 시청률 부분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지난 랙다운 방송에서 신이 출연했을 때의 순간 시청률이 가장 높았다.

말인즉슨 그를 보기 위해 WWF 방송을 트는 시청자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이번 일을 통해 신은 지금 WWF에 소속된 다른 그 어떤 선수도 가지지 못한 티켓 파워를 보유하게 되었다.

ACW에서 이주해온 팬들.

하지만 가슴이 아닌 머리로 생각해보면, 그건 분명히 ‘옳은’ 선택이었다.

ACW 팬들은 WWF에 적대적이다.

그렇기에 ACW가 재미가 없고 그들에게 실망했다면 프로레슬링 시청을 그만두지 넘어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신이 자신들을 대변할 수 있는 영웅이 되었기에 그들은 프로레슬링 시청을 그만두는 대신 채널을 돌렸다.

WWF로.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엇이 가장 좋은 선택일까?

답은 간단했다.

신을 통해서 끌어들인 시청자들을 WWF의 팬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들이 더 많은 선수들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각본을 계속 전개해야 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신이 직접 그런 제안을 해왔다.

* * *

2009년 8월 1주차.

섬머 수플렉스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대립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티파니와 함께 방송을 시청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WWF의 주요 선수 라인은 이러했다.

일단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지만 딱히 벨트를 따내지는 않은 채 커리어를 이어가는 레전드급 선수들.

디 캐스켓-테이커, 카인, 빅죠, 크리스 젠코, 레이 미스테리우스.

다섯 명.

그리고 한창 젊으며 앞으로 회사를 오랫동안 이끌 메인 이벤터 라인.

숀 시나, 랜스 오튼, 러셀 하트, 그리고 잭 하디까지.

이렇게 네 명.

메인 이벤터들과 싸울 때도 있지만 한 끗빨 떨어지며 중간급 벨트나 태그 팀 벨트를 놓고 싸우는 미드 카더들.

롤프 지글러, 코디 로스, C.M. 펑크, 사모아 고, 코피 퀸스턴.

다섯 명.

펑크와 고가 용병 같은 느낌으로 이적해오면서 WWF는 레전드들의 이적으로 인한 선수 부족을 좀 해소했다.

로스터는 이제 좀 구색을 갖췄다.

이렇게 모인 선수들 중에서 몇몇이 잘 성장해주며 WWF는 몰락할 ACW를 제치고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보자.

여기서 내 역할은 무엇일까?

내 위치는 어디일까?

그야 물론, 메인 이벤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비슷한 위상의 메인 이벤터나 레전드 선수들과 대립해 흥행을 이끌고, 상승세를 갖고 있는 선수들을 돕는다.

그들이 또 다른 메인 이벤터가 되어 이 쇼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메인 이벤터가 좀 비었다.

정확히는 그럴 예정이었다.

왜냐면.

‘이번 섬머 수플렉스를 기점으로 잭 하디가 회사를 나가지.’

회사는 퇴폐적인 매력과 더불어 큰 상품성을 가진 그를 붙잡고 싶은 눈치였지만 본인의 멘탈 문제가 정말 심각한 수준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냥 깔끔하게 잭 하디에게 잡을 시키고 놔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생각을 했다.

ACW와 싸우기 위해서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선수들 역시 중요했다.

그리고 현재 거기에 딱 맞는 선수가 존재해, 각본을 제안했더니 바트는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이 선수는, 나와 바트가 진행하고 있는 대립에 한 주간 끼어들게 되었고.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함께 끼어든 잭 하디와 퓨드를 갖고 섬머 수플렉스에서 경기를 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기지.

그 이름을 TV 속의 바트가 말했다.

[Booooooooooooooooooooo-!!]

[신! 네가 이번 랙다운에서 상대하게 될 두 선수를 지금 이야기해주지……!]

바트의 픽은 다음과 같았다.

잭 하디.

그리고 사모아 고.

팬들 대부분은 잭 하디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오자 더 큰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아마 금요일 밤의 랙다운이 끝난 뒤에는 나만큼이나 고에게도 멋진 환호를 보내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계획을 짜두었다.

* * *

그렇게 찾아온 금요일 밤.

미리 바트 맥센이 예정했던 대로 메인이벤트의 경기는 신 vs 잭하디&사모아 고가 펼치는 핸디캡 매치였다.

권력을 가지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사리사욕에 사용하는 바트를 보여주면서 계속해서 진행되는 대립.

하지만 거기에.

하나의 변주를 주어서 나 말고 다른 선수를 돋보이게 하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막 WWF로 이적해온 사모아 고에게 딱 필요한 기회였다.

세 선수의 입장이 끝난 링 위.

경기가 시작되기 전, 팬들이 우리에게 환호를 보내며 상황을 알려주었다.

지금 이 링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선수가 누구인지를 말이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Hardy! Hardy! Hardy! Hardy! Hardy! Hardy! Hardy! Hardy! Hardy!]

[GOE! GOE! GOE! GOE……!]

우렁찬 환호성.

내가 하디를 조금 앞서고, 고는 다른 함성에 묻혀서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바트의 명령으로 핸디캡 매치를 치르게 된 고와 하디는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한 눈치였다.

하지만 하디는 될 대로 되란 얼굴.

오직 고만이 얼굴이 심통으로 잔뜩 구겨져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

바트 맥센이 오늘 각본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링으로 나왔다.

[Boooooooooooooooooooo-!!]

야유 속에서 의기양양한 채 마이크를 쥔 바트가 두 사람을 격려했다.

“잭 하디! 사모아 고! 우리 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멋진 인재들이지!”

무슨 대통령 격려식도 아니고.

일부러 지루한 표정과 함께 코너에 기댄 나는 길게 하품을 해보였다.

거기에 팬들이 챈트로 화답했다.

[Bo~ring~! Bo~ring~! Bo~ring~! Bo~ring~! Bo~ring~! Bo~ring~!]

지루하다는 뜻이 담긴 챈트에도 바트는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기대하겠네! 특히나 고! 이게 자네에게 큰 기회가 될 수 있을 거야!”

끝까지 할 말 다 하고 링 아래로 내려간 바트는 아예 아나운서 테이블에 앉아서 중계마저 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바트를 바라보는 사모아 고. 아마 그에 대한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을 거다.

PWA에서 WWF로 오게 된 그가 이전에는 어땠는지. 어떤 경력을 갖고 어느 정도 위상을 가진 선수였는지.

그를 통해 지금부터 사모아 고가 할 갑작스러운 행동에 개연성이 생겼다.

링 벨이 울리기 직전.

핸디캡 매치는 보다 숫자가 많은 쪽이 태그를 통해 한 명씩 링에 나와 경기를 치른다는 규칙이 존재했다.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Porn Star보다는 나았지만.

수가 적은 쪽이 불리한 룰이었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반대편 코너에서 누가 먼저 나를 상대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모아 고와 잭 하디.

바로 그때였다.

퍼억-!

돌연, 입을 다물고 있던 고가 하디를 공격했다.

[Uooooooooooooooooohhh……!]

순간 비명을 내지르는 팬들.

바트 역시도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고는 그대로 자신이 기습한 하디를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링 밖으로 내던졌다.

“후우, 좀 낫군.”

그리고 당당히 어깨를 펴는 고.

“하.”

나는 어이가 없어져 웃었다.

당황하는 심판에게 링 벨을 울리라며 지시를 내린 고가 내게 다가왔다.

나도 다가가서, 우리는 잠시 링 중앙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놈의 돌발 행동으로, 경기는 순식간에 바트 맥센이 개입한 엿 같은 핸디캡 매치에서 트리플 스렛이 되었다.

여기에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잭 하디까지 화가 나 경기에 끼어들 테고.

환상적인 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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