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
방송 시작으로부터 1시간 5분 뒤.
몇 번의 세그먼트와 경기, 광고가 지나간 끝에 그 남자가 화면에 나왔다.
“오, 나왔다!!”
킴이 흥분해 소리쳤다.
2년 전 한국에서 유학을 온 그녀는 예전부터 신의 팬이었고, 미국에 도착해서는 그런 마음이 훨씬 더 강해졌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동양인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직접 느껴보자, 그걸 이겨내고 주류에 선 신을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최근 그 마음이 더 강해졌다.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일단 룸메이트로 지내는 애슐리로 인해서였다.
남부 출신의 그녀는 ACW의 광팬으로 크로우를 지지했으며, WWF에 대해 시시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왔다.
신뿐만 아니라 러셀, 오튼, 시나까지도 좋아하는 킴으로서는 열이 받고 무시를 받는다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하나였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월요일에는 ACW, 수요일에는 PWA, 그리고 금요일에는 WWF를 시청하기로 타협한 그들이었는데.
그리고 각자 좋아하는 쇼의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를 설득하려 했는데.
이번 각본을 통해서 애슐리가 ACW를 ‘손절’하면서 문제가 바로 해결되었다.
그녀는 신의 팬이 되었다.
겉보기로만 배드애스한 척하는 놈들과 달리 진짜인 남자라서 그렇단다.
문제는 애슐리가 그때까지도 WWF에 대해 나쁜 기억을 가져서, 그 외의 부분은 시청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지만.
유치하다나.
그래도 오늘은 좀 나았다.
신이 나올 때만 부르라며 다른 방에서 과제를 하던 애슐리가 언제 신이 나올지 모르니 계속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에이 씨…….”
광고가 끝나자 바로 방으로 들어갔던 애슐리가 신과 바트 맥센의 대립 스토리를 보기 위해 바로 달려 나왔다.
[우리의 경기? 별거 없지.]
[말씀이신즉슨…….]
[있을 수도 있고.]
거만하게 이야기하는 바트 맥센.
애슐리가 분통을 터뜨렸다.
“저, 저저 빌어먹을 놈!”
“……너무 몰입하는 거 아니야?”
킴이 황당해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에서 엄마가 주말 연속극 볼 때와 같은 반응을 보이다니.
하지만 애슐리도 이유는 있었다.
“저번에 뉴스 기사 봤어? WWF에서 해고된 선수들이 의료 고발 했잖아. 저 자식, 실제로도 순 나쁜 놈일 거야.”
“그건…….”
확실히 그랬다.
한국에 있을 때는 정보가 적어서 잘 몰랐는데, 미국에 도착해서 알게 된 바트 맥센은 정말로 악독한 사업가였다.
존경을 받기도 했지만, 언제나 불편한 이야기가 뒤따른다고 해야 하나?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솔직히 지금까지 알던 WWF라는 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 날 정도였다.
그와는 별개로 선수들이 링에서 하는 노력을 알자 팬심은 더 강해졌지만.
어린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싸우는 그들을 볼 때만큼은 킴 자신도 인종차별이라던가 현실에서 겪은 불편한 일들을 모두 잊게 된다고 해야 할까.
그래, 그게 좋았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잠시 잊고, 선과 악을 ‘연기’하는 두 명의 선수가 사실은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며 그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좋았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트위티 같은 SNS에서 선수들과 직접 소통할 수도 있어서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이게 모두 연기고 드라마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걸 연기하는 연기자의 실제 모습 또한 이야기에 담기는 것이었다.
그 좋은 예시가 바로 숀 시나였다.
[Your Time Is Up-!]
“아, 슈퍼 구리네.”
“어, 자, 잠깐!”
“신 나오면 불…… 뭐야?”
“시나 보자. 시나.”
“시나는 구리다니까.”
“잘생겼잖아.”
“남자가 수염도 없고 저게 뭐야?”
“…….”
미국인들의 취향은 이해할 수가 없다.
킴은 멋지게 챔피언 벨트를 걸치고 나오는 시나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멋진데.
예전에는 킴도 좀 마르고 얄쌍한 남자가 취향이기는 했으나, 요새 들어서는 저런 근육질이 더 좋았다.
힘 스탯만 찍었을 거 같은 몸과는 다른 순박한 미소와 착한 성격, 실제로도 인성이 굉장히 훌륭하다 알려진 시나.
어린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위시메이커 재단에 나가고 사회 활동도 꾸준히 계속해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유치해.”
애슐리는 저렇게 말했지만.
“자자, 그러지 말고. 저러다 또 언제 신이 나올지 모르는 거잖아?”
오늘 랙다운에서는 딱히 신과 바트 맥센의 계약식이 언제 있을 건지 방송에서 말해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 * *
그렇게 시간은 흘러 메인이벤트.
나와 바트는 순서대로 링에 올랐다.
일단은 내가 먼저였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Yeeeeeeeeeeeeeeeaaaaahhhh!!]
환호를 보내는 팬들.
그 성원을 받으며 입장로를 지나 링에 오른 나는 일단 계약서를 확인했다.
이 계약서는 사실 보여주기 용으로, 그냥 적당히 ‘누가 어디에서 경기를 갖는지 서로 합의한다.’는 내용이었다.
테이블 앞에 서있던 아나운서가 의자를 가리켰고 나는 곧장 거기에 앉았다.
내 음악이 끝나고.
뒤이어 불길한 인트로와 함께 입장로 위의 조명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팬들의 야유가 이어졌다.
[Boooooooooooooooooooooo-!!]
그리고 나오는 한 남자.
바트 맥센.
회색 정장 차림의 그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링 위로 올라왔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미 테이블 위에 발을 올리고 있던 나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바트도 자리에 앉았다.
각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마이크를 쥐고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도망치지 않고 나오셨군. 영감.”
“흥,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바트가 받아쳤다.
“너야말로 도망치지 않았구나. 신. 기어코 내게 맞서 싸워야겠다는 거겠지.”
“태생이 그래서 말이야.”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누군가 나를 부정한다면 반드시 그걸 박살 내면서 여기까지 올라왔거든.”
“그거 흥미롭구나. 나도 그런데.”
바트도 똑같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지만.”
“왜, 발기부전이라도 오셨나? 괜찮아. 그 나이대면 보통 대부분 그렇지.”
“아니.”
조롱이 통하질 않는다.
바트 맥센은 잔학하게 웃어보였다.
“내 위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네. 신.”
[Booooooooooooooooooo-!!]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지. 자네보다 훨씬 더.”
그렇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냉정하게 이야기한 바트는 이윽고 테이블 위의 계약서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고로, 조항을 몇 개 추가하지.”
“……?”
“걱정 말게나. 이런 조정도 다 경기 전이니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복선을 깔았다.
바트 맥센이 경기 중에 무언가를 조정하리라는 것을 이를 통해 암시했다.
그리고 바트 맥센이 제안해왔다.
“자네는 이 경기에서 진다면 당장에 프로레슬러를 그만둬줘야겠어.”
[Uooooooooooooooohhhh……!]
술렁거리는 관객석.
바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연한 거 아니겠나? 나 같은 늙은이한테 진다면 프로레슬러로서 탑 가이라는 말이 거짓이라는 게 되니까.”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
그렇게 기묘한 논리를 펼치는 바트의 앞에서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군.
“그럼 당신도 걸어주셔야겠어.”
“뭘?”
“경기에서 패배하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당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인증하는 거야. 발등에 키스도 하고.”
[Yeeeeeeeeeeeeeeeeaaaaahhhh!!]
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는 바트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왜, 슬슬 현실이 보이시나?”
“……좋아. 원하는 대로 해주지!”
바트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대신! 경기에서 패배한다면 너도 내 Kiss My A-s Club에 가입해라!”
[Booooooooooooooooooooooo-!]
야유가 터져 나왔다.
바트 맥센의 Kiss My A-s Club.
권력자인 바트의 지독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스토리적 장치.
……간단히 설명해서 자의건 타의건 바트 맥센이 엉덩이를 까고 거기에 입술을 맞춘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받아들였다.
“좋아, 그렇게 가자고.”
먼저 펜을 들었다.
사인을 한 뒤, 반쯤 내던지듯 서류를 내밀자 바트도 거기에 서명을 했다.
그로써 성사된 경기.
특수 규칙이 없는 싱글 매치였다.
* * *
사실 좀 우스운 이야기였다.
바트 맥센은 노인에 프로레슬러 출신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기는 경기였다.
좋은 경기를 위해서는 팬들이 양쪽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승기가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부킹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바트와 내 대립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일방적으로 승리할 것처럼 느껴지는 경기 방식을 골랐다.
업계의 전문 비평가들인 뉴스레터의 기자들부터 거기에 의문을 표시했다.
그리고 대충 알아차렸다.
[바트가 뭔가를 숨기고 있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만약 그러지 않고 평범한 싱글 경기 방식을 고수한다면 둘 중에 하나가 되겠지.]
스쿼시 매치.
[신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고 이기는 거야. 하지만 그랬다면 이런 식으로 바트가 당당할 이유가 없었겠지.]
[그래, 지금 WWF에서 스쿼시 매치를 암시하고 있다면 바트가 신을 대립 내내 엿 먹이다가 억지로 경기를 하게 되는 스토리가 나왔겠지.]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오히려 바트는 꽤나 배드애스하게 묘사가 됐어. 이런 적이 전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악역 경영인으로서 뭔가 진일보한 느낌이야. 솔직히 몰입하게 되더군.]
[그래. 재능 있는 선수…… 굳이 말하자면 신 같은 선수를 무시한 전적이 있어서 정말 진지하게 화가 나더군.]
[응? 굳이 말하자면 신이 바트가 가지고 놀다 실패한 선수는 아니지 않나?]
[그렇지. 하지만 그 덕분에 가시밭길을 자처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어서.]
[시나처럼 로얄 로더를 밟아도 될 재능의 선수인데 바트 맥센의 개입으로 힘들게 가고 있다는 건가.]
[실제로 월드 챔피언십 기록은 한 번도 없잖아. 통제를 하고 있는 거겠지.]
[그건 확실히 안타까워.]
[그래, 어쨌든……. 스쿼시 매치 말고 제대로 두 사람이 일대일 경기를 갖는다면 그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기가 되겠지.]
[그래 맞아. 신은 테이커도 이겨본 놈이라고. 그런 놈이 바트 맥센 같은 영감을 제압하지 못하는 게 말이나 돼?]
[그래, 뭐. 지금까지 신이 행동한 걸로 봐서는 아마 그렇게 가지는 않을 거 같긴 한데 말이야.]
[그래서 바트 맥센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스토리가 예상된다는 거지.]
[뭘까?]
[케인일까? 신에게 패배하고 그대로 스토리 라인에서 사라져버렸잖아.]
[그래, 케인이 난입하는 건가.]
[아니면 이건 어때. 바트가 숨겨둔 무기를 써서 신을 공격한다던가.]
[심판 몰래? 뭐,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건 바트 맥센의 캐릭터에는 영 맞는 방식이 아닌데.]
[그럼 뭐가 있을까.]
[글쎄다.]
결국 그들도 딱히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리라.
심지어 바트 본인도 그랬다.
“경기 중간에 룰을 추가하라고?”
“예, 당신 권력을 보여주는 거죠.”
거기다 그렇게 해야 내가 일방적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균형 있게 경기를 치를 수 있으니 말이다.
단순한 일대일 싱글 매치로 붙는다면 내가 압도적으로 바트를 몰아붙여서 이기더라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이건 WWF의 4대 페이퍼뷰인 섬머 수플렉스의 세미 메인이벤트였다.
팬들이 극적인 스릴 라이드에 올라탄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경기를 적당히 길게 구성해야만 했다.
그를 위한 작은 반전이었다.
“뭐, 영감님 체력도 있고 해서 케인도 반쯤 경기에 참가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가면 어떻게든 15분 정도는…….”
“15분?”
바트의 목소리에 짜증이 깃들었다.
이런.
자존심을 건드렸군.
“20분으로 가도 돼.”
“아니, 죽을걸요.”
“하, 내가 아무리 늙었어도 너희들 하는 거 보고 하는 말이다. 20분 정도라면 충분히 마지막까지 뛸 수 있어.”
“그 후 쓰러지시겠죠.”
“괜찮다.”
“마지막을 위해서 체력을 안배할 필요가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뭐?”
“맞으셔야죠.”
안티크라이스트.
그를 위해서는 상대방 쪽에서도 어느 정도 체력이 남아 있어줘야만 했다.
드는 건 나였으나 버텨서 다리를 쭉 들고 중심을 잡아줘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트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할 수 있다니까!”
“…….”
“저, 저기. 아버지.”
결국 보다 못한 케인이 중재를 위해 나섰다.
현재, 우리 둘의 경기에 난입자로 참가할 예정인 그는 이 회의에도 참석해 내 아이디어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바트보다 훨씬 더 나를 많이 도와주게 될 터였다.
“신이 전문가니 그 말을 듣죠.”
“나도 전문가야!”
“……신, 나는 못 하겠다.”
케인이 항복을 선언했다.
상황에 지금이 이르러 갑자기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바트. 아무래도 기저귀를 갈아줄 때가 온 모양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응?”
“저하고 링에서 한판 붙어서 20분 동안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신다면 그쪽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죠.”
“후흐하하하! 좋아! 내가 지금까지 운동을 헛으로 한 게 아님을 보여주지!”
바트 맥센은 호기롭게 소리쳤다.
물론 결론은 쉽게 났다.
바트는 내가 링 위에서 마구 던져대자 10분도 채우지 못하고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