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
2009년 8월 23일 일요일.
15만 명의 팬들이 돔 경기장에 운집한 가운데, 드디어 오후 17시가 되었다.
경기장의 조명이 순간 어두워지며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에 숫자가 떠올랐다.
10!
[Waaaaaaaaaaaaaaaggggghhhhh!!]
팬들이 큰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경기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9!!]
그들의 목소리까지 더해졌다.
그 숫자가 0으로 줄어들었고.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여름의 열기를 상징하는 붉은빛과 노란빛이 뒤섞인 폭죽이 마구 피어올랐다.
그것이 태양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자신의 화려한 색으로 만연하게 물들였다.
한여름 밤의 가장 큰 축제, 섬머 수플렉스는 그렇게 멋진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첫 번째 선수가 나왔다.
[Yeeeeeeeeeeeeeaaaaaahhhhh!!]
여성 팬들의 환호가 특히 큰 남자.
잭 하디였다.
그에 맞서는 건 사모아 고.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그 카리스마를 인정한 남성 팬들을 위주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오프닝 경기.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모아 고는 멋진 실력을 보여주면서 팬들에게 스스로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잭 하디 같은 선수를 상대로 섬머 수플렉스에서 저 정도 실력을 보여주다니.
그것도 지금 이 WWF라는 단체에서는 신인이나 다름없는 선수가 말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사모아 고였다.
‘훌륭하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잘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전생에는 그 육중한 몸집으로 인해서 바트 맥센의 선택을 받지 못했던 고.
하지만 지금은 적당히 지방을 빼고 근육을 불리며 내가 밀어줄 수 있는 근거가 생겼고 자신의 재능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
파워풀한 무브와 섬세한 링 사이콜로지까지.
지금의 고는 완전체였다.
러셀이나 나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밀릴 것이 없는 올라운더형 선수였다.
따라서 멋지게 승리를 따냈다.
잭 하디의 잡을 받아냈다.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열광적인 반응 속에서 거만하게 주먹을 치켜드는 고.
패배한 잭 하디를 보며 충격에 빠진 팬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게 고의 압도적인 캐릭터에 도움이 되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후로도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와이엇 패밀리가 나와서 태그팀 경기를 펼쳤고, 좋은 반응을 얻어내면서 섬머 수플렉스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프로레슬링 단체는 크게 남성부와 여성부, 그리고 싱글 전선과 태그 팀 전선으로 구분되어서 운영되었다.
그리고 와이엇 패밀리는 태그 팀 전선이 싱글 전선만큼이나 큰 화제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전생보다 훨씬 나아진 느낌이었다.
ACW에 맞서 싸웠던 전생의 WWF가 시나라는 영웅 한 사람만을 중심으로 어떻게 해서든 버텨가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시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멋진 반응을 얻고 있는 선수들이 많았다.
그럼에 일반인들이나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계속 ACW의 우세를 점쳤는데.
지금 당장 ACW가 WWF를 앞설뿐더러 선수들의 네임벨류가 훨씬 더 높았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당장 지금으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아 그 분석은 완전히 박살난다.
왕좌는 다시 탈환 당한다.
새로운 시대의 새 선수들에 의해서.
그리고 나는.
거기에 어떤 기여도 하지 못했던 전생과 달리, 이번에는 그래도 그 중심부에 서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트 맥센과의 경기.
분명히 멋질 것이다.
* * *
시간은 흘러.
오후 9시 7분.
태양이 저물고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몇 개의 조명이 더 경기장에 더해졌다.
이제 우리의 차례였다.
직전에는 숀 시나와 빅 죠의 유니버스 타이틀을 건 경기가 치러졌고 랜스 오튼과 러셀 하트의 경기가 남았다.
즉.
우리 두 사람의 경기 또한 전후 치러지는 경기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경기 내적으로는 내 은퇴와 바트 맥센의 인정이 걸렸고, 외적으로는 ACW에서 전향한 팬들이 주목했으니까.
하지만 이 경기에서 한 가지 불안한 부분은 바로 바트 맥센이 상대라는 것.
프로레슬러였던 적도 없고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그가 나와 과연 제대로 된 경기를 치를 수 있을 것인가.
팬들을 열광하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난 걱정하지 않았다.
‘프로레슬링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건 프로레슬링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느 정도는.’
숀 시나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관객들을 얼마나 열광하게 할 수 있는가. 거기에 사실 경기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경기가 잘 풀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를 믿고.
바트를 믿었다.
케인도 믿어주고.
그리고 음악이 나왔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나팔과 북의 콜라보.
그 가운데에서 시원시원한 메탈 기타의 사운드와 함께 음악이 시작되었다.
[Waaaaaaaaaaaaaaaaaggggghhh!!]
환호를 보내는 팬들.
입장로에 분사되는 연기.
피어오르는 불꽃.
나는 커튼을 걷고 앞으로 나갔다.
연기를 헤치고 나가자 15만의 팬들이 날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챈트가 이어졌고 나는 몸에 아드레날린이 돌기 시작하는 감각을 느꼈다.
가슴을 힘껏 후려쳤다.
쿵-!
심장 박동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좋다. 이거지.
팬들이 내게 보내는 이 압도적인 환호성만으로도 지금 스스로가 여기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 수 있었다.
팬들은 나를 보기 위해서 왔다.
내가 이기는 걸 보기 위해 왔다.
그렇게 링으로 올라간 나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관객석을 향해 휙 던졌다.
그리고 이어 바트가 링으로 나왔다.
[Booooooooooooooooooooooo-!!]
검은 정장 바지와 검은색 러닝셔츠.
도무지 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엄청나게 크고 두툼한 근육질의 소유자.
팬들의 야유를 들으며 꿋꿋하게 링으로 나온 바트는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듯 보디빌더처럼 근육 포징을 해보였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을 해보더라도 바트와 내가 일대일로 맞붙는 건 제대로 된 그림이 성립되지가 않았다.
나는 젊고 잘 나가는 선수.
바트는 늙고 선수도 아니다.
그렇기에 다들 이 경기를 기대했다.
분명 뭔가 일이 터질 것이었으므로.
땡땡땡-!!
팬들의 큰 주목과 함께 시작된 경기.
우스꽝스러운 레슬링 자세를 취한 바트가 천천히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아니, 그러다 뒤로 물러났다.
“…….”
[Waaaaaaaaaaaaaaagggggghhhh!!]
팬들의 환호 속에 잠시 바트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슬쩍 움직이자마자 곧바로 바트는 뒤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지.
[Boooooooooooooooooooooo-!!]
쏟아지는 야유.
하지만 바트 맥센은 링 아래로 허겁지겁 내려가 김빠지게 시간을 벌었다.
“1!”
텐 카운트를 시작하는 심판.
나는 곧바로 바트를 따라 링 아래로 내려가,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링을 빙글빙글 돌며 도망치는 바트.
그걸 성큼성큼 걸어 따라갔다.
[Boooooooooooooooooooo-!]
그렇게 온갖 허세를 다 떨어놓고 도망부터 치기 시작하는 바트의 모습에 팬들은 엄청난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나인 것을.
바트는 무척이나 추하게 굴었다.
내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경기를 찍고 있던 카메라맨을 밀어내고 다시 도망치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사이 카운트는 계속 이어졌다.
“6!!”
[Booooooooooooooooooooo-!!]
한숨을 내쉰 나는 링으로 올라갔다.
“7!!”
계속해서 이어지는 카운트.
링을 고정하는 기둥 뒤에 숨어 내 눈치를 살피던 바트가 텐 카운트가 세어지기 직전 링으로 올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앞으로 내달린 나는 몸을 쭉 뻗어 슬라이딩을 하며 바트의 안면을 걷어찼다.
뻐억-!
[Yeeeeeeeeeeeeeeeaaaaaahhhh!!]
터져 나오는 환호.
바트는 그대로 바리게이트 앞까지 떠밀려 크게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놀라 나를 바라보던 심판이 어설프게 마지막 카운트를 셌다.
“10!!”
땡땡땡-!
그 순간 환호가 딱 멎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팬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다들 물음표가 떠올랐다.
“?”
다들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 연출의 일환으로서 한 박자 늦게 내 음악이 흘러나왔다.
37초.
역대 최단 기간 경기에 가까운 기록을 세우며 나는 그렇게 바트 맥센의 카운트아웃으로 승리를 챙겼…….
“음악 끊어!! 당장!!”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꺼버리라고!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빌어먹을 음악 치워!!”
어느 샌가 마이크를 쥔 바트 맥센이 마구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흥분해 말을 이어갔다.
“경기는 안 끝났다! 아직 저 자식의 승리가 아닌데 음악을 왜 트는 거야!”
“……?”
거기에 다시 의아해하는 사람들.
어.
분명히 내 승리가 맞았다.
카운트아웃.
링 밖으로 나가서 텐 카운트가 이루어지는 동안 복귀하지 못하는 선수가 패배하는…… 분명한 규칙이었다.
하지만 황당해하는 사람들의 앞에서 바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쳤다.
“오늘 경기에는 카운트아웃이 없네! WWF 회장의 권한으로 경기 시작 전에 추가된 새 규칙이야.”
[Boooooooooooooooooooooo-!!]
야유가 쏟아졌다.
황당할 정도의 발상이었다.
자신이 카운트아웃을 당했다고 즉석에서 경기에 카운트아웃을 없애다니.
하지만 바트는 뻔뻔했다.
[BULL SH-T! BULL SH-T! BULL SH-T! BULL SH-T! BULL SH-T!]
팬들의 챈트에도 아랑곳 않고 링으로 올라오더니 다시 싸울 자세를 취했다.
나는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이어지는 링 아나운서의 룰 변경 소개를 들었다.
[어, 관객 여러분께 이번 싱글 경기는 카운트아웃이 없는 조항이 추가되어 다시 시작됨을 알려드립니다.]
[Boooooooooooooooooooooo-!!]
팬들의 야유가 이어졌다.
하지만 링 벨은 다시 울렸다.
땡땡땡-!
그와 함께 접근해오는 바트.
한숨을 내쉰 나는 옆으로 스텝을 밟으며 바트를 향해 슈퍼 킥을 갈겼다.
쿵-!
하지만 녀석은 다시 도망쳤다.
톰 앤 제리도 아니고.
그렇다면 방법을 좀 달리 해야겠지.
피식 웃은 나는 그대로 링 아래로 내려가 다시금 바트를 뒤쫓기 시작했다.
사각의 링 아래를 달려 도망치는 그.
그걸 쫓아가던 나는 바트가 코너를 도는 시점에서 다시 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로프를 타고 위로 올라가.
바트를 향해 몸을 던졌다.
[Uoooooooooooohhhhh……!]
순간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에 깜짝 놀란 바트 맥센이 뒤를 돌아보았고.
그대로 나를 받아내며 우리 두 사람은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Yeeeeeeeeeeeeeeaaaaaahhhhh!!]
드디어 붙잡았다.
속이 통쾌해지는 장면에 환호하는 팬들. 나는 그대로 참교육을 시작했다.
카운트아웃이 없다.
그렇게 바뀐 룰이 바트 맥센에게 있어 악몽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쩌억-!
바트의 머리채를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운 나는 일단 펀치부터 날렸다.
“푸헉?!”
바트의 안면이 위로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찹.
쫘악-!
“끄헉!”
가슴을 얻어맞은 바트가 특유의 찌질한 표정과 함께 내게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 뒤를 쫓아간 나는 힘껏 그 등에 대고 러닝 드롭킥을 날렸다.
뻐억-!
등을 걷어차인 바트가 아까 숨어 있던 링에 힘껏 머리를 부딪치고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Waaaaaaaaaaaaaaaaaggggghhh!!]
완전히 내 독무대였다.
팬들은 비명을 질러댔고 나는 그대로 평소 하던 것처럼 링 아래에 있는 온갖 물품들을 사용해 바트를 몰아붙였다.
철제 계단에 던지는 건 약과였다.
바리게이트 앞에서 번쩍 들어 그 위에 메다꽂는 부분에서 바트는 이미 반쯤 정신을 잃고 바닥에 추욱 늘어졌다.
참교육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트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실컷 두들겨 팬 나는 그대로 그 머리채를 붙잡고 반대편으로 끌고 갔다.
아나운서 테이블 앞.
은퇴 후, 랙다운의 중계진 역할을 맡고 있던 JBL이 나를 막아서려고 했다.
[Booooooooooooooooooooooo-!]
그에게 쏟아지는 야유.
현역 시절 후반기에도 내내 졸부 악역으로 지냈던 그는 실제로 성공한 주식 투자가라 바트와 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너덜너덜해진 바트를 변호하는 게 참 자연스러웠다.
“신, 회장님께 예의를 갖춰라!”
하지만 한심한 소리였다.
바트가 이 기업의 회장이므로 적당히 하라는 소리. 과연 누가 그걸 들을까.
“비켜.”
“으…….”
“그럼 당신이 대신하던가.”
내가 위협을 하자 물러서는 JBL.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고, 경기였다.
나와 바트 사이에 있는 감정의 골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서 이런 식으로 결말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머리채를 붙잡혀 너덜너덜해져 있던 바트를 일으켜 세웠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쩌엉-!!
눈앞에 번쩍 빛이 스쳐지나갔다.
[Uoooooooooooooooooohhhhh-?!]
경악하는 관객들.
나는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끼며 엉덩방아를 찧고 그대로 푹 쓰러졌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났지?
순간 의아한 기분을 느끼고 있자니 무언가 뜨거운 감각이 이마를 스쳤다.
……거기에서 현실이 잠깐 돌아왔다.
‘이 영감탱이가.’
잘못 때렸다.
왠지 생각보다 아프더라니.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각본은 이러했다.
JBL이 잠깐 시간을 벌어준 사이 바트가 내 이마를 링 벨로 힘껏 후려쳐서 반칙패를 당하는 것이었는데.
이 양반.
옛날에 바티스타가 그랬듯이 날카로운 부분으로 때려서 피부를 베었다.
나는 희미한 시야로 반대편에 털썩 주저앉아있는 바트를 바라보았다.
숨을 몰아쉬던 그가 이내 내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거기에서 깨달았다.
‘의도적이라는 거군.’
일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땡땡땡-!!
“반칙! 경기 끝!”
심판의 반칙패 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바트는 마이크를 들고 사악하게 웃더니 한마디를 꺼냈다.
“내가, 깜빡했군.”
[Booooooooooooooooooooooo-!]
야유 속에서 악마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