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
결과는 다음 날 오전에 나왔다.
동시기 개최된 ACW의 여름 페이퍼뷰, ‘대시 앳 더 비치’와의 정면 대결.
페이퍼뷰 시작 직전까지 집계된 구매수는 근소하게 ACW가 앞섰으나 실질적인 시청률은 엎치락뒤치락했다.
숀 시나와 빅죠의 경기에서 완전히 넘어왔고 러셀 하트와 랜스 오튼의 메인이벤트 경기 직전까지 벌어졌다.
말인즉슨 실질적으로 신과 바트의 경기에서 최고점을 찍었다는 뜻이었다.
그게 시사하는 바는 간단했다.
‘내 티켓 파워가 강하다는 거지.’
더불어 숀 시나도.
다시 말해 나는 로건이 데드볼을 노리고 던진 직구를 전성기의 베이브 로스처럼 완벽하게 좌측 담장을 넘기는 공으로 쳐낸 것이었다.
그렇게 2009년 여름은 분명 WWF 쪽에 미소를 지어주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남아있었다.
애프터 쇼.
대립을 마무리 짓기 위한 쇼.
쇼의 중반.
나는 바트와 계약식에서 맺은 약속하나를 이행하기 위해 링에 올랐다.
내가 패배한다면 업계를 떠날 것.
반대로 바트가 패배한다면 나를 인정하는 뜻에서 발등에 입을 맞출 것.
물론 경기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내 승리였으므로…… 그럴 예정이었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Waaaaaaaaaaaaaaaagggghhhh!!]
경기장을 찾은 팬들이 일어섰다.
찢어진 이마에 테이핑을 한 채 입장로 위로 모습을 드러낸 나는 씨익 웃으며 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바로 마이크를 쥐었다.
팬들이 내게 박수를 보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지난 경기는 환상적이었다.
그런 뜻이 담긴 박수와 챈트.
나는 손을 들어서 팬들의 호응에 응답해주고는 이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딱 한마디를 했다.
“멋진 밤이었지.”
[Yeeeeeeeeeeeeeaaaaaahhhh!!]
하지만 돌아오는 환호는 엄청났다.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이것이 일류 선수였다.
팬들의 호응을 이끌며 대립하고 경기에서도 끝내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의 모두가 인정했다.
이 드라마의 승자가 나라는 사실을.
하지만 혼자만의 승리는 아니었다.
“한 남자가 더 있지.”
나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내 승리에 큰 도움을 준 레전드!”
모두가 그 이름을 외쳤다.
[HBB! HBB! HBB! HBB! HBB! HBB! HBB! HBB! HBB! HBB! HBB!]
하트 브레이크 보이.
“바로 여기에 왔다고!!”
[Yeeeeeeeeeeeeeeeeeaaaahhhh!!]
팬들의 환호와 함께.
불길한 인트로가 깔렸다.
“……?”
바트 맥센의 테마.
[Boooooooooooooooooooooo-!!]
팬들의 야유와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낸 바트는 목에 깁스를 한 상태였다.
안티크라이스트를 맞고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
실제로는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머리에 손을 감아 보호를 해주었기 때문에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눈가에 멍은 들었지만.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바트가 링 위로 올라오자 팬들이 어마어마한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황당해 그를 바라보았다.
난 분명 존 마이클스를 의도하고 불러낸 건데, 왜 바트가 여기 나왔는가.
“뭐, 당신도 신나게 줘터지면서 내 승리에 기여한 건 맞긴 한데…….”
“닥쳐라. 신.”
마이크를 쥔 바트가 소리쳤다.
[Boooooooooooooooo……!!]
“나는 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이클스와 네 협공에 맞서서 잘 싸웠지.”
“혹시 치매라도 오셨나? No DQ 룰에 먼저 난입한 건 케인이었는데.”
“그놈은 선수가 아니므로 논외다.”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러자 바트는 특유의 논리를 전개하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그걸 정리했다.
“어, 그러니까 당신 말은. 현역 선수인 내가 당신을 상대로 마이클스를 불러낸 게 잘못된 일이라는 뜻인가?”
“그렇지! 내 말이 그 말이다!”
“마이클스는 이미 은퇴했는데.”
“그놈은 레전드지! 이 업계에서 별처럼 빛났던 슈퍼스타 중 하나라고!”
“흐음.”
“지금 당장 돌아와도 제 몫을 해낼 놈이다! 그러니까 네가 그놈을 데려온 건 남자로서 비겁한 짓이었단 거지!”
“그렇군.”
나는 피식 웃어보였다.
“뭐야. 바트. 이제야 인정하는군.”
[Uoooooooooohhh……!]
“무, 무슨 말이냐?”
“존 마이클스. 그가 절대로 실패한 레슬러가 아니라고. 사실, 당신 말고는 모두 인정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나는 마이크를 머리 위로 들었다.
[HBB! HBB! HBB! HBB! HBB! HBB! HBB! HBB! HBB! HBB! HBB!]
팬들의 챈트가 다시 이어졌다.
모두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이 딱 좋은 시기였다.
쿵쿵쿵쿵-!
Uh~! Uh~! John~!
[Yeeeeeeeeeeeeeeaaaaahhhhh!!]
팬들의 거센 환호성과 함께.
화려한 조명이 입장로 위를 비췄다.
그리고 나오는 남자.
카우보이 모자와 조끼, 청바지.
텍사스 출신의 터프 가이.
동시에 섹시 보이.
존 마이클스였다.
이제는 은퇴한 후 시간이 오래 지났건만 팬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이클스는 거기에서 각본이 아니라 실제로 꽤 큰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카우보이 모자를 푹 눌러써서 눈을 감춘 그가 곧바로 링 위로 올라왔다.
‘봤지?’
나는 보란 듯이 팔을 펼쳤다.
곁으로 다가온 마이클스가 내게 포옹을 하고는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고맙다.”
별말씀을.
오히려 도움을 받은 건 나였다.
전설적인 선수였던 마이클스가 지금도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면서 나는 바트의 말이 틀렸음을 입증해냈으니까.
그는 절대 실패한 선수가 아니었고, 나도 성공하지 못할 그릇이 아니었다.
“이 소리가 들려?”
[Yeeeeeeeeeeeeeeeeaaaaahhhh!!]
“당신은 틀렸어.”
“크윽…….”
이를 가는 바트.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순간 작렬하는 스윗 친 뮤직.
쫘악-!
[Waaaaaaaaaaaaaaaagggghhhh!!]
바트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내가 깜짝 놀라 돌아보자 어깨를 으쓱한 마이클스가 그대로 바트 맥센의 목덜미를 붙잡은 뒤 질질 끌고 왔다.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박수를 보내는 팬들.
아무래도 지금 여기에서 나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군.
피식 웃은 나는 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마이클스가 마치 도장을 찍듯이 내 발등에 바트 맥센의 얼굴을 그대로 가져다 댔다.
그로서 이루어지는 인정의 키스.
“우욱?!”
[Yeeeeeeeeeeeeeeeaaaaahhhh!!]
굴욕감에 발버둥 치는 바트를 보고 팬들이 엄청난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대충 세리모니(?)를 마치고.
진이 빠져 쓰러진 바트의 앞에서 마이클스가 내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의 환호가 이어졌고.
대립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위클리 쇼가 끝난 뒤.
당분간은 출연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바트는 홀가분함을 느꼈다.
아주 제대로 밀어주었다.
신은 그럴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비록 놈이 ACW 팬들을 WWF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팬으로 삼으면서 한 방 크게 먹은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옳은 선택이었다.
ACW 팬들은 WWF라는 회사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신을 통해서 이쪽 방송을 보게 만들고 반감을 서서히 줄이면 그만이었다.
비록 ‘관객 난입 사건’을 통해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이 커졌지만.
통제할 수 있다.
바트 맥센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래 직원들은 그런 바트의 생각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회의가 스무스하게 지나간 뒤.
‘점심이라도 같이하실까요?’라며 따라붙은 회사의 2인자, 존 로이타스.
그가 이야기했다.
“너무 크게 띄워주신 거 아닙니까?”
“그럴 만한 놈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WWF는 이미지 손상이 불가피하지 않을까요.”
“괜찮네. 그 정도야.”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리 그 ‘ACW 난민’ 놈들이 회사와 나를 미워하더라도. 신을 좋아하는 이상 우리의 봉이라는 이야기야.”
그러므로.
“‘전향자’를 만든다면. 분명히 WWF에 대한 반감을 지울 수 있을 걸세.”
“……예?”
“전향자. 누가 좋을까. PWA 출신의 두 사람이 어떨까. 아니면 러셀이라던가 오튼도 나쁘지 않겠구먼.”
바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타스는 그 뒤에서 순간 당황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지만.
신은 그런 바트의 의견에 대해서 확실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 직후 한 통화에서였다.
[슈퍼 구리네요.]
“뭐?”
[무슨 약 하십니까? 그렇게 각본 짜면 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당연히 자네 쪽으로 전향한 선수들에게도 호감을 가지고 좋아하…….”
[유다라고 생각하겠죠.]
아무리 그들이 WWF를 싫어한다고 한들 다짜고짜 그쪽을 배신한다고 해서 좋은 반응을 보일 리는 없었다.
그것이 신의 생각이었다.
[아, 유다가 누군지는 아시죠?]
“내가 바보로 보이나?”
[뭐, 시키신다면 하겠지만 과연 그걸로 ACW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아니, 하지만 우리 팀원들은…….”
[회장님 앞이니까 말 못 하겠죠. 못 믿겠으면 해보실래요? 러셀의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보죠.]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냥 싸우면 되죠.]
“뭐?”
[다음에 링 서바이벌 아닙니까.]
“설마…….”
[Team PWA VS Team WWF로 한판 크게 벌리면 어떨까 싶은데요.]
“안 돼!”
바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건 절대로 안 돼!”
[왜죠?]
“너희 쪽만 좋은 일 아니냐!! 링 서바이벌을 그렇게 개최하면 분명 반응은 너희 쪽에서 가져갈 텐데!”
[흐음…….]
“안 돼. 너는 이번 링 서바이벌에서 랙다운 쪽에 붙어줘야겠다.”
[그럼 그렇게 하시던가요.]
신은 전화를 뚝 끊었다.
“……?”
바트 맥센은 갑작스러운 통화 종료에 당황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았다.
* * *
‘영감이 귀찮게.’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갑자기 전화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싶었다.
하지만 잠시 그 통화 내용을 상기하자 어이가 없어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자기 선수들을 못 믿는군.’
그랬다.
지금 바트 맥센은 마치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는 스크루지 맥 독 같았다.
내가 가진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회장이 자신들을 믿어주지 않는데 선수들이 힘이 날까 싶군.
‘그 녀석들은 괜찮겠지만.’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놈들.
오튼이나 러셀, 시나 같은 친구들이라면 분명 여기에 대해 크게 분노하겠지.
되도록 긍정적으로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누구 전화였나?”
할리우드 로건.
날씨가 더웠는데도 끝까지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 엄마요.”
“……?”
“김치 보내준대서.”
“아, Kimchi.”
킴추이.
발음이 인상적이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로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내가 아까 거절했던 계약서를 다시금 내밀었다.
WWF를 버리고 ACW로 올 것.
계약금은 일천만.
그리고 머천다이즈 판매 순수익의 약 60%를 쉐어하지 않고 직접 지급.
1년에 최대 100일 일하며, 추가 계약에 따라서 출장 수당을 더 지급한다.
미국의 그 어떤 스포츠 스타도 이와 같은 연봉은 제안 받지 못했으리라.
“일단, 묻겠는데요.”
“뭔가?”
“왜 직접 오셨죠?”
“그야 뭐, 끝나고 같이 카지노라도 갈까 해서 말이야. 이번 주에 스케줄이 없어서 엄청 널널하게 지내고 있거든.”
아하.
거기에서 접대를 하며 ACW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꿀 같은지 가르쳐주겠다?
나를 잘 모르는군.
“어떤가? 같이 가자고.”
“죄송하지만, 저녁에 일이 있어서.”
“안타깝군.”
로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좋게 거절하고 싶었으나 ACW에서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바람에.
그것도 로건이 직접 말이다.
사업과 관련되어 있지도 않은 그가 직접 나를 찾아와 이런 제안을 했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로건이 그만큼 힘이 있으며.
동시에 ACW 측에서 나라는 흥행 카드를 그만큼 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로건, 식사는 하셨습니까?”
“응? 아니, 아직 못했지.”
“그럼, 근처에 좋은 식당이 있으니 같이 점심이라도 어떠십니까?”
“아쉽게나마 그렇게 할까.”
쓰게 웃은 로건이 일어섰다.
“계약서는 잘 생각해보게나.”
“그렇게 하죠.”
“우리 측에서도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금액이니까 말이야. 이걸 거절한다면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셈이지.”
로건은 그렇게 날 계속 설득했다.
모두가 나를 원하고 있다.
날 대하는 로건의 태도가 돌연 온건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건 바트 맥센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좋은 카드가 되어줄 것 같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나온 주차장.
로건의 설득이 이어지던 중, 멀리 쳐진 펜스 앞으로 돌연 시선이 갔는데.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에 몇몇 소년들이 모여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나와 로건을 단박에 알아보더니 신이 나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오! 우오오!!”
“신! 이쪽이에요! 이쪽!”
“와서 사인 좀 해주세요!!”
근처에 사는 아이들인가?
그렇게 생각하자니 흥분한 소년들이 펜스를 넘어오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먼저 움직인 건 내가 아니었다.
할리우드 로건.
“크하하! 이 자식들, 기운도 좋군!”
나보다 먼저 크게 웃음을 터뜨린 그가 펜스 앞으로 다가가 무리해서 넘어오려는 소년을 번쩍 안아들었다.
“로, 로건?!”
“오 마이 갓!!”
비명을 질러대는 소년들.
“이 자식들, 악당을 앞에 두고도 겁이 없구먼! 나중에 크게 자라겠어!”
로건이 멋진 팬 서비스를 보였다.
‘미워할 수만도 없다니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로건은 정치 싸움 때문에 백스테이지 내부의 평판도 좋지 않았고, 확실히 업계인 사이에서 이미지가 엄청 좋은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팬들에게는 친절했다.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프로레슬러도.
내가 쓰레기라고 평가했던 이들 역시 거의 다 팬들에게만은 친절했다.
바로 그게 이 업계의 정상에 서있는 이들의 의무였다.
하지만.
‘이건 이용할 수 있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로건보다 소년들에게 우리 두 사람을 봤다는 이야기를 신문사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로건과 내가 회동을 가졌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이 전국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