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
훈련장에 모인 세 명의 링 프로듀서들과 폴 헤이건은 지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데몬 발로의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아서 다들 짜증이 배로 났을 거다.
그런 상황에서 바쿠가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거라서 퇴근도 못 하고 남아있으라고 한 거냐?”
“……완성은 됐지?”
“그야 물론이죠.”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내면의 악마를 소환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맥이 빠지는데.”
한숨을 내쉬는 바쿠와 그렉.
나는 미소와 함께 링을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그 위로 올라왔다.
핀 발로.
테마 음악은 없다.
페인팅 외외의 추가 복장도 아직까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분명 시선을 잡아끌었다.
“…….”
“…….”
“…….”
다들 불만이 쏙 들어갔고, 표정에 생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발로의 멋진 몸매에 마치 악마가 잠식한 듯한 페인팅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바쿠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신.”
“예?”
“소환진은 어디에 그려놨냐?”
“핀의 마음속에 있었죠.”
나는 재치 있게 받아쳤다.
마치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것 같기도 한 외양에 이빨과 붉은 라인을 써서 악마적인 캐릭터를 표현해냈다.
‘내면의 악마를 깨울 수 있다.’
얼핏 유치하게 들리는 기믹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인간의 내면에 어쩌고저쩌고 악마가 어쩌고저쩌고. 확실히 좀 만화 같지.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캐릭터도 인류의 죄악을 상징했다. 이 업계와 팬들이 쌓아온, 미국과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동양인이 ‘남자’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죄악이었다.
그렇기에 나의 성공은 인종 사회의 편견과 차별, 주류에 맞선 저항이었고 분명히 기존 질서에 반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피니시 무브의 이름이 안티크라이스트고…….
뭐, 그런 중2병 같은 건데.
그걸 멋지게 포장했을 뿐이었다.
핀 발로의 기믹도 비슷했다.
내면의 악마를 중요한 순간마다 이끌어낸다는 기믹이었지만 대부분은 그걸 핀의 워 페인트로 생각할 터였다.
중요한 전투에 나설 때 전사들이 얼굴에 칠하곤 하는 그것 말이다.
“핀!!”
내가 핀을 링 아래로 불렀다.
다들 그를 둘러싸고 데몬 스타일의 바디 페인팅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거 정말 멋진데.”
“이런 걸 숨겨두었을 줄이야.”
“근데 이거 떨어지는 거지?”
“예, 경기가 격렬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장치로서 사용되어줄 겁니다.”
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들 의심을 거둔 눈초리였다.
핀 밸러의 데몬 분장에는 그만한 힘이 존재했다. 여기에서 제대로 된 음악과 복장이 더해지면 완벽하겠지.
나는 확인 차 물었다.
“어떠십니까?”
“말할 것도 없다.”
“이거라면 당장 쇼에 내보내더라도 압도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겠지.”
다들 거기에 동의했다.
핀 발로는 좋은 선수였다.
하지만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게 큰 단점이었다.
대니얼 라이언 같은 경우랄까?
대니얼이 작은 키에도 어떻게든 팬들의 리스펙트를 쌓으며 업계에서 선수로서의 위상을 확립해온 것처럼.
원래대로라면 핀도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했을 터였다.
실력은 출중했지만 선수로서 보이는 겉모습에 결함이 있는 만큼 그런 식의 성장 과정이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데몬 기믹이라면 달랐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혁신적인 기믹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막말로 그냥 멋졌고.
핀만의 아이디어였다.
“그럼, 이 기믹을 어떤 식으로 대중들에게 공개할까 이야기해보죠.”
“야근이로군.”
“피자라도 시켜 먹자고.”
기대감을 잔뜩 심어주는 핀의 모습을 본 팀원들은 생기가 가득한 채로 자발적으로 야근을 자청했다.
……근데 난 외박하면 혼나는데.
* * *
슬슬 날씨가 쌀쌀해진 게 느껴졌다.
말인즉슨 PWA와 WWF가 맞붙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4대 페이버뷰 중 하나인 ‘링 서바이벌’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그 제거 매치에 참가할 다섯 명의 선수 선발도 슬슬 막바지가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는 모든 패를 보여주지는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팬들도 희미하게 ‘어떤 선수가 잘하나.’를 느끼고 있을 뿐. 링 서바이벌의 암시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착실하게 팬들의 반응을 조종하며 계속 준비를 해나갔다.
그건 WWF도 마찬가지였다.
팀 캡틴을 맡을 러셀 하트는 사모아 고, C.M. 펑크 같은 선수들과 맞붙으면서 선발에 대한 복선을 깔았다.
그렇게 셋에.
브로큰 와이엇.
마지막으로 코디 로스까지.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링 서바이벌의 팀 대전에서 태도 불량 시대의 선수들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테이커, 헌터, 카인, 빅 죠 같은 선수들이 사실상 모두 링을 떠난 상황.
우리는 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런 구시대의 레전드들이 빠진 상태에서도 과연 우리가 ACW에게 지지 않고 단체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
그런 의미가 담긴 자리였고.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야겠지.
그걸 위한 픽들이었다.
그나저나.
C.M. 펑크와 사모아 고가 나름대로 WWF 내부에서도 빠르게 좋은 평가를 받아가고 있는 것 같아 기쁘긴 했다.
WWF의 자체 내전으로 선수들이 빠지면서 생긴 자리지만, 그로 인해 자신들의 재능을 보여줄 수 있을 테니.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우리 쪽도 잘 준비를 해야겠지.’
그런 상황에서 찾아온 수요일 밤.
한 남자가 PWA에 모습을 드러냈다.
핀 발로.
일본 쪽에서 사용하던 메탈 음악에다 북미의 색채를 입힌 입장 테마곡.
그 불길한 멜로디를 이제껏 숨기고 있는 테마곡을 들은 관객들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Waaaaaaggghhhh!]
우리 쪽에서 심어놓은 몇몇 직원들. 그리고 일본 쇼까지 보는 하드코어 팬들이 미친 듯이 환호성을 보냈지만.
그냥 신인 선수에게 나오는 정도.
링 위에 서서 핀 발로를 맞이한 나는 마이크를 쥐고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든 좋으니 나와서 싸우자.’
그런 부름에 의해 등장한 핀 발로.
팬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저놈은 대체 누구고 뭘 하는 놈인데 여기 나와서 신과 싸우려고 하는가.
만약 팬들이 생각하기에 자격이 없는 선수라면 당장 야유가 나올 터.
그전에 반응을 가로챈 나는 핀 발로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야, 넌. 대체 누구고 어디에서 온 놈이기에 나한테 맞서는 거지?”
그건 모두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좀 낡은 방식이었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널 소개하는 게 정석이겠지만. 사실은 알고 있어. 네가 쓴 계약서를 봤거든.”
나는 피식 웃었다.
팬들도 슬쩍 웃음을 터뜨렸다.
“핀 발로.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그럭저럭 이름을 알렸다지. 그런 친구가 이 링에는 무슨 일로 나오셨나?”
[Waaaaaaaaaaaaaaaaggghhhh!]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PWA 팬들은 나를 거의 맹신했다.
그렇기에 오늘 막 데뷔한 핀을 나와 직접 맞붙게 하는 건 일반적으로 봤을 때 딱히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과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핀 발로는 이제 막 북미 프로레슬링 업계에 데뷔한 초석으로, 말하자면 드라마의 새 등장인물인 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부분의 팬들이 주인공 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아무런 연유도 없이 핀과 경기를 가진다?
다들 납득하지 못하겠지.
그런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산재했지만 나는 일부러 핀 발로를 소개하는 역할을 자청했다.
이유가 무엇이냐.
반대로, 그 이유를 채워준다면 나와 핀이 붙어도 이상할 게 없단 말이다.
그래서 핀은, 다짜고짜 나에게 도전하는 대신 먼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쓰러뜨리고 싶은 남자.”
[Waaaaaaaaaaaaaaaaaggghhh!]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건 핀에게 보내는 환호가 아니라 그가 말하는 나라는 레슬러에게 나오는 환호였다.
일단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핀이 선역임을 확실히 해두었다.
“나도 당장 너에게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 역시 알아. 모든 일에는 과정이 필요하지.”
핀은 그런 식으로 이 PWA라는 단체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관객들도 일단 이 미남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마음을 가졌다.
“그래, 분명히 나는 일본 프로레슬링을 정복한 남자 중 한 명이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들 날 모르지.”
그러므로 행동으로 보여주겠다.
“너와 당장에라도 붙고 싶지만, 그건 날 보여준 뒤로 미루자고.”
“어떻게 하려고?”
나는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올 생각이라면 굳이 여기 나올 이유는 없겠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군.”
“그래, 맞아. 그리고 본디 남자가 집단에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외부의 적과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그렇게 이야기한 핀 발로는.
“내 안의 악마를 보여주지.”
그런 식으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내뱉고는 그대로 링에서 내려갔다.
다시금 그 테마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쇼가 끝난 뒤.
우리는 WWF 측과 연락했다.
미리 공문을 보내둔 대로 슬슬 링 서바이벌까지 이어지는 단체 간의 대립을 진행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첫 타자로 핀 발로가 나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WWF 측에서는 핀에 대해 알지 못했으므로 질문을 먼저 해왔다.
아니 정확히는 바트가 그랬다.
[TV에 처음 데뷔한 그놈 말이냐?]
“예, 바로 그놈입니다.”
[뭔데 처음부터 그런 놈을 내세워?]
“일본 쪽에서…….”
[일본은 난 모르겠고. 그놈 키가 어떻게 되는데? 너무 마른 거 아냐?]
“단점을 커버할…….”
[안 돼. 안 돼. 그런 놈을 제거 매치에 참가시켜서 2미터 떡대들로 가득한 ACW를 어떻게 이기느냔 말이야.]
“아, 거 참. 말 한번 많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뭐?]
“아니, 그래서. 그 2미터 떡대 놈들이 하는 거라고는 걸어가다가 부상당하고 숨 쉬다 부상당하는 건데. 그럼 그런 놈들 데려다가 경기 해요.”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냐.]
“영감님, 아직도 절 의심하십니까?”
[만약 너와 양치기 소년이 있는데 거짓말쟁이를 총으로 쏴야 한다면.]
“그래요. 절 두 발 쏘시겠죠.”
바트는 능히 그럴 양반이었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입장에서 갑질을 해대시려는 판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료 하나 보낼 테니 보시죠.”
[뭔데?]
“별건 아니고. 그냥 사진입니다.”
그때 분장을 하고 입장복이나 레슬링 기어, 페인팅 같은 게 점점 완성되어가면서 찍은 핀의 기믹 포토였다.
바트 맥센은 떨떠름해하면서도 일단 그런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진을 보낸 뒤.
정확히 25초가 지나고 나서야 바트 맥센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영감은 늙은 나이에 새장가를 들게 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뭐냐! 이건?!]
“뭐긴요. 우리 쪽 선수지.”
[어디서 이런 걸 데리고 왔어!]
“일본이요.”
[제기랄! 아, 아니! 하지만 덩치가 심각할 정도로 작아. 크루저웨이트 급에서는 비교적 쓸 만하겠지만…….]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세요.”
[제기랄, 팔아라.]
“회장님이 쓰시면 망가지죠. 드류도 제대로 못 다루시던 분이 무슨.”
[아, 그, 그래! 드류! 드류 그놈을 좀 돌려다오! 돈은 얼마든지……!]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시고.”
나는 말을 잘라냈다.
“핀은 어떻게 해주실 겁니까?”
물론.
바트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 * *
11월 1주차의 버닝콩.
시작부터 분위기가 묘했다.
슬슬 링 서바이벌의 대립이 시작될 시기로 팬들 역시 기대감을 가지고 시청률이 서서히 상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버닝콩의 분위기가 묘한 이유는 따로 있지 않고, 이전 주에 PWA에서 나온 각본 때문이었다.
막 데뷔한 핀 발로가 내뱉은 대사를 그 직후 이해한 사람도, 다른 곳에서의 해석으로 이해한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로서 두 가지 효과가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버닝콩의 시청자가 늘었고, 핀 발로에게 팬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선수로서 리스펙트를 쌓고 돌아온 이 남자는 지금 각본 하나로 북미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게 신의 의도였다.
그렇게 해서 쌓인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도록, 핀 발로는 준비를 해왔다.
그렇게 시작된 쇼는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 속에 계속해서 흘러갔고.
마침내.
버닝콩으로 이적한 뒤 한창 활동을 하고 있던 브로큰 와이엇이 등장했다.
특유의 느릿한 멜로디의 음악 속에 랜턴을 들고 링으로 등장하는 와이엇.
ACW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부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그는 이제 과도기를 거치고 있었다.
특유의 카리스마도 ‘와이엇 패밀리’가 해체되면서 잃은 채, 현재 대립하는 상대도 없이 방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멋들어진 마이크워크 실력이 어디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멋진 밤이군. 샌프란시스코.”
[Waaaaaaaaaaaaagggghhh!]
“정말 환상적인 밤이야. 그리고. 오늘 내 상대는 코피 퀸스턴이지. 불쌍한 코피. 네게 안식이 깃들기를.”
그런 식으로 기괴한 말을 중얼거린 와이엇이 바닥에 마이크를 내던지고는 코피 퀸스턴을 링으로 불러냈다.
하지만 불현듯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Waaaaaaaaaaaggggghhhh!!]
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경기장이 새까맣게 암전되면서 초대형 스크린으로 영상이 하나 나왔다.
“크헉?!”
콰앙-!!
남자의 비명 소리.
그와 함께 누군가 쓰러졌다.
바로 코피 퀸스턴이었다.
[Uooooooooooooooooohhhhh-!!]
드디어 올 게 왔다.
핀 발로가 왔다.
그것을 알아챈 팬들이 마구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랜 기대 끝에 나오는 환호성에는 엄청난 힘이 존재했다.
그 모든 게 핀 발로라는 선수를 괴물 같은 위상을 지니게 만들었다.
각본의 힘이었다.
핀 발로는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팬들은 기대를 했다.
그렇게 반응이 점점 쌓이며 그들은 어느새 핀 발로를 기다리게 되었다.
남은 건 단 하나.
그 기대에 응하는 것.
화면 속에서는 코피 퀸스턴을 쓰러뜨린 사내가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로우 앵글로 발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스크린이 잠시 꺼졌고.
한 테마 음악이 흘러나왔다.
쿵쿵……!
쿵쿵……!
쿵쿵……!
어둠 속에서 붉은 조명이 번쩍이며 입장로 아래로 자욱한 연기가 깔렸다.
악마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