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
스산한 음악과 어두운 조명 아래.
무언가 바닥을 기어 다녔다.
Crowling Beast.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오래된 설화를 떠올리며 화면 속에 시선을 빼앗겼다.
자욱한 연기 속을 기어 다니는 그것은 붉은 조명에 따라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유령이 내지르는 비명이 이어졌다.
[oh-oh-ooooooooohh……!]
유령조차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자.
The Demon King.
그가 연기 속에서 팔을 펼치며 대중들 앞에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작되는 음악.
콰광-! 콰광-콰광-!!
날카롭게 귓가를 후려치며 시작되는 에픽 메탈은 팬들의 심장을 붙잡았다.
그야말로 Catch Your Breath.
테마곡의 제목에 딱 걸맞은 등장.
검은 페인팅으로 상반신 전체를 칠하고 붉은 라인으로 윤곽을 그려낸 그 모습에 팬들이 시선을 빼앗겼다.
거기다 포인트는 이빨이었다.
마벨 코믹스의 심비오트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은 핀 발로의 존재감을 단번에 각인시켰다.
삐죽삐죽하고 잔혹한 이빨.
그리고 탐욕스럽게 내민 혀.
검은 페인팅 사이로 드러나는 안광은 정말 그 괴물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착각을 팬들에게 안겨줄 정도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벨트 정도 되는 길이의 가죽을 여러 개 엮어서 팔을 묶고 머리에 왕관처럼 뒤집어쓰기까지 한 기괴한 모습.
팬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핀은 마치 짐승처럼 기어서 링으로 향했다.
링 위에 서있던 브로큰 와이엇은 그런 핀의 모습을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괴물의 등장으로 인한 흥미와 공포가 그 눈동자에 동시에 깃들었다.
거기에 더해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의 시선이 집중되어있는 가운데 핀 발로가 서서히 링 안으로 들어섰다.
신이 핀 발로의 입장에서 요구한 것은 카리스마보다 공포를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두라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작전은 훌륭하게 먹혔다.
소년이 울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모두가 전율을 느꼈다.
카메라가 울음을 터뜨린 소년의 얼굴을 비추는 부분에서 쇼를 지켜보고 있던 관계자들 모두가 생각했다.
‘Insane.’
미쳤다.
미친 반응이었다.
모두들 데몬 킹의 모습에 압도되어 제대로 된 반응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음악이 끝났다.
음산하게 퍼져 있던 연기가 링 위를 희미하게 떠돌았고 핀 발로의 모습이 그제야 제대로 팬들의 눈에 비췄다.
그가 왕관처럼 쓰고 있던 가죽 모자를 벗어 던졌고, 그대로 와이엇의 앞에 다가서서 페이스 투 페이스를 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서.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보는 건.
와이엇이 아니라 데몬 킹이었다.
키는 와이엇이 10cm는 더 컸다.
하지만 데몬 킹에게는 그런 차이를 따위로 만드는 카리스마가 존재했다.
그리고 불현듯.
팬들 사이에서 챈트가 터져 나왔다.
[Holy Sh-t!!]
[Holy Sh-t!!]
[Holy Sh-t!!]
[Holy Sh-t!!]
[Holy Sh-t!!]
등장만으로도 그랬다.
* * *
확실히 내가 생각한대로 되었다.
[What A Insane Moment……!]
[Who The Hell Is He?!]
[He is Finn Balore! Finn, WOW?!]
해설자들이 놀라 소리쳤다.
다짜고짜 공격이 이어졌다.
핀 발로는 특유의 가벼운 몸을 장점으로 활용해 와이엇을 공격했다.
타격기도 킥 위주로 날리면서 프론트 드롭킥으로 와이엇을 날려버렸다.
투콰앙-!
[Waaaaaaaaaaaaaaagggghhhhh!!]
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카리스마와 재빠른 공격을 보면서 핀 발로의 캐릭터에 빠져들었다.
PWA로부터 온 습격자.
거기에 대한 악의는 없었다.
그 정도로 핀 발로는 지난 북미 프로레슬링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선수였다.
기껏해야 부기맨 정도?
하지만 거기에서 기괴함을 많이 줄이고 카리스마를 탑재한 캐릭터였다.
아마 핀이 여기에서 키가 10센티미터만 더 컸더라면 프로레슬링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없더라도 지금 핀에게 쏟아지는 환호는 상상을 초월했다.
드롭킥을 맞고 나가떨어진 와이엇이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러자 핀 발로는 자신의 야성을 드러내듯 엎드린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다시금 이어지는 공격.
정신을 못 차리고 얻어맞던 와이엇이 이내 바닥에 대자로 뻗고 말았다.
핀은 탑 로프로 올라갔다.
무슨 기술이 나올 것인가.
팬들이 놀라 바라보는 가운데.
공중으로 힘껏 뛰어오른 핀이 그대로 지면으로 떨어지며 누워 있던 와이엇의 가슴을 양발로 찍어버렸다.
[Uooooooooooooohhhhhhh-?!]
다이빙 더블 풋 스톰프.
쿠 데 그라.
죽어가는 병사의 고통을 덜기 위해 숨통을 끊어준다는 뜻의 프랑스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절로 웅크리게 되는 엄청난 고난이도의 기술.
아무리 프로레슬러로서 마른 편에 속하는 핀이었으나 떨어져 내리는 충격을 단단한 레슬링 부츠 바닥에 집중 시켰으니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리키수이’가 질펀한 엉덩이로 얼굴을 비비는 스팅크 페이스만큼이나 맞기 싫은 기술 순위권을 다투었다.
“어우…….”
“저거 죽겠는데.”
보고 있던 이들이 다 아파할 정도.
어쨌든 핀은 그로서 자신의 임무를 멋지게 수행하고 PWA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진 쇼에서.
더없이 평범한 청년의 모습으로 링에 오른 그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솔직히 말해 특유의 영어 발음으로 인해 그다지 말이 와닿지는 않았지만.
그러면 뭐 어떻단 말인가.
핀은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잘 만든 기믹 하나로 인해서.
“딱히 아부를 떨고자 한 행동은 아니야. 단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리려면 확실한 무대가 필요했을 뿐이지.”
[Yeeeeeeeeeeeeeeeeeaaaahhh!]
팬들은 그에게 매료되었다.
이걸로 팀이 완성되었다.
드류 맥킨마이어와 핀 발로.
두 명의 뉴 페이스에 더해서.
기존부터 인기를 얻고 있던 대니얼 라이언과 쟈니 에이스라는 카드까지.
그 시작을 위해.
나는 링으로 나섰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Waaaaaaaaaaaaaaaaagggghhh!]
환호를 보내는 팬들.
개중에는 아마 나와 데몬 킹의 승부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처리할 일은 아니었고, 그렇기에 나는 웃으며 물었다.
“뭐야. 그건. War Paint?”
그런 식으로 기믹에 현실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더해주면서 핀 발로의 기믹이 자칫 유치해지지 않게 한다.
그것이 중요했다.
이 무대 위는 특별한 장소다.
그렇지만 그 특별함이 현실에 발을 걸쳐야만 사람들이 호응하는 법이었다.
특히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현대로 갈수록 그 경향은 점차 증대되었다.
따라서 나는.
굳이 핀 발로가 정말로 내면의 악마를 깨워내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캐릭터로 보일 수 있도록 여지를 주었다.
핀이 웃으며 대답했다.
“워 페인트라.”
전쟁 전에 하는 화장.
적을 위협하는 동시에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고대의 전사들이 했던 의식.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나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악마를 잠시 깨워내는 것뿐이야.”
“장르가 변했군.”
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누구나 내면에 악마를 감추고 있어.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길들여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지.”
핀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내가 원하면 그 어떤 때라도 잔혹해질 수 있는 그런 놈이고. 데몬 킹은 말하자면 내 또 다른 자아야.”
“랩퍼들이 자주 하는 그런 건가. 나쁘지는 않군. 사실 제대로 된 경기는 가지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천천히 핀에게 다가섰다.
‘한번 붙어볼까?’
내 쪽에서 흥미를 가지고 핀에게 제안을 하는 모습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Uooooooooooooooohhhhh!]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팬들.
그로서 핀 발로는 순식간에 나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까지 위상이 상승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보고 있나. 바트 맥센?’
이게 부킹이라는 거다.
한 선수를 원하는 위치까지 끌어올리면서 상품성을 갖추게 만드는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핀이 나를 이긴다는 말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는 그래도 충분히, 이 PWA의 멤버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경기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전개로 이제부터 가야 했다.
“……제기랄, 하지만 네가 제대로 사고를 쳐준 덕분에 밀리게 되었군.”
“무슨 소리야?”
“원치도 않게 네가 ‘선봉장’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야. 핀. 너는 이미 우리 쪽 ‘멤버’로 확정되었어.”
그 말에 미소를 짓는 핀.
내가 어이가 없어 물었다.
“설마 그걸 의도했나?”
“PWA는 일본에서도 핫하지. 러셀과 너의 일이라면 진즉에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도 단지 내가 상대할 만한 선수를 찾아가서 공격한 것뿐이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핀을 보고 팬들은 배드애스하다고 생각한 듯했다.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챈트가 길게 이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선언했다.
“뭐야. WWF를 박살내러 갈 Team SIN이 벌써부터 만들어지고 있군.”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키키이잉……!
[Now Listen!]
쟈니 에이스의 음악이 나왔다.
[Waaaaaaaaaaaaagggghhhh!!]
팬들의 엄청난 환호 속에 특유의 털 코트를 걸치고 링으로 올라오는 녀석.
다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중에서 나만큼이나 WWF에게 반감을 가지고 싸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쟈니 에이스라고 하는 사나이였다.
그가 이야기했다.
“날 빼놓고 가시려고?”
“안 될 이유라도?”
“난 너만큼이나, 아니, 너보다 훨씬 더 놈들에게 보여줘야만 하니까.”
이유가 있다.
놈들에게, 그리고 그 팬들에게 쟈니 에이스가 누군지를 보여줘야만 했다.
나는 관객석을 돌아보았다.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팬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슬쩍 손을 내밀자 쟈니는 결연한 얼굴로 그런 내 손을 맞잡았다.
그걸 신호로 다음 선수가 나왔다.
대니얼 라이언.
“날 빼놓고 가시면 섭하지.”
난 이번에도 딱히 더 이야기하지 않고 팬들의 반응을 통해서 확인했다.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딱히 내가 어떻게 결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팬들은 이들을 원했다.
그런 식으로 짜온 부킹이 빛을 발하면서 마지막 선수까지 링으로 나왔다.
스코틀랜드 백파이프의 전조.
그리고 시작되는 느릿한 메탈.
쿠궁쿵쿵쿵……!!
쿠궁쿵쿵쿵……!!
쿠궁쿵쿵쿵……!!
전쟁을 알리는 워 드럼 사운드.
드류 맥킨마이어가 링으로 나왔다.
이번에도.
딱히 말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 다섯 명 중 가장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이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Team SIN은 손쉽게 완성되었다.
드류 맥킨마이어.
대니얼 라이언.
쟈니 에이스.
핀 발로.
거기에 마지막으로 팀 캡틴.
SIN.
우리들은 하이틴 무비에 나오는 미식축구 팀처럼 손을 모으진 않았지만.
확실히 지금 PWA에서 모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인재들인 건 맞았다.
* * *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WWF 측에서도 움직임을 보였다.
금요일 밤의 랙다운은 고행을 하듯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브로큰 와이엇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되었다.
쿵-!
[끄흑!!]
쿵-!
[끄하악!]
쿵-!
[크아아아악!!]
고통에서 분노로.
그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러셀 하트였다.
[아주 단단히 열이 받았군.]
[날 비웃으러 온 거냐?!]
[아니야. 이 멍청아.]
러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등장이 암시하는 것을 느낀 팬들이 서서히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Waaaaaaaaaaagggghhh……!]
팬들로부터의 리스펙트가 충분히 쌓인 러셀은 딱히 악독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야유를 받지는 않았다.
그가 쌓아온 신과의 드라마는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였다.
그런데, 각자 위치에서 나름대로 성장을 거쳐 온 두 사람이 마침내 하나의 팀을 만들어 맞붙는 것이었다.
결국 시대는 훌륭하게 이어졌다.
선배들에게서 신이.
그런 신과 다른 선수들이.
모두가 아는 태도 불량 시대의 레전드 선수들이 쇼에서 빠진 상황임에도.
팬들은 지금의 시대에 열광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러셀 하트는 천천히 와이엇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요일 밤의 PWA는 봤겠지?]
[…….]
[그쪽에서 선전포고를 해왔는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도 없잖아?]
[너와 팀을 맺으란 건가?]
[그래, 와이엇. 왜냐면 너 역시 나처럼 싸울 이유가 충분해 보이거든.]
[나머지 팀원들은?]
[모두 각자 이유가 있는 자들이지.]
러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카메라가 이동하며 러셀과 와이엇을 포함해 총 다섯 명이 되는 WWF의 멤버들이 나타났다.
드류와 맞붙을 사모아 고.
대니얼과 맞붙을 C.M. 펑크.
쟈니와 맞붙을 코디 로스까지.
그렇게 5 대 5.
링 서바이벌을 향한 대립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