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89화 (389/634)

389.

11월 8일 일요일.

버닝콩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PWA 멤버들은 모조리 시카고로 넘어갔다.

시카고가 어떤 곳인가.

프로레슬링의 성지라고 불리는, 미국 내에서 팬이 가장 많은 도시였다.

원래는 마니아 팬층이 많아 시나를 중심으로 한 WWF보다는 하드코어한 스타일의 ACW를 더 선호했지만.

그건 옛 이야기일 뿐.

프로레슬링을 신성하게 여기는 그들은 비겁한 짓을 저지른 ACW 놈들에게 학을 떼고 내 팬이 되어주었다.

나 또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드코어한 면을 가진 레슬러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WWF의 선택은 탁월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운이 좋았다.

링 서바이벌의 대립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시카고에서 쇼를 개최하게 되었으니 분명 시청률이 오를 터였다.

그러므로.

이번 대립은 중요했다.

링 서바이벌을 통해서 이후 PWA와 WWF가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인가.

그걸 보여주기 위한 경기였다.

“그렇지?”

“맞아.”

내 질문에 러셀이 동의했다.

경기장 근처의 호텔.

녀석이 오늘 일은 다 끝났다면서 찾아와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 내일 진행될 바트 맥센과의 회의에 앞서서 그 내용을 전해주려고 온 것이리라.

“바트 맥센이 원하는 건 하나야.”

녀석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우리가 이기는 거.”

“그러시겠지.”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섬머 수플렉스에서 바트 맥센이라는 ‘거물’로부터 잡을 받은 내 위상은 순식간에 큰 상승을 보였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 경기에 존 마이클스까지 끼어들어 날 도와주면서 나를 그의 후계자로 보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WWF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으로서의 포지션을 확실히 구축하게 되었지.

그렇기 때문에 WWF는 더 이상 내게 패배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긴다면 내 위상은 상승할지언정 남는 게 없어지니까.

‘WWF도 이득을 봐야지.’

그렇게 두 적대하는 그룹이 서로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면서 끝내 더 높은 위치까지 상승하는 게, 지금 우리들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었다.

그를 위해서 다른 선수들…… 다시 말해 러셀 하트와 바트 맥센 간에 거리를 두는 작업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ACW 팬들이 증오의 대상인 바트 맥센만을 미워하고 WWF 선수들에게는 관심을 가질 테니까.

솔직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었지만 의외로 그런 게 먹히는 법이었다.

증오의 대상을 한정해두는 거지.

문제는.

‘그런데도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건 돈을 버는 바트 맥센이라는 거지만.’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역시 ACW가 한 번 확실하게 몰락할 때까지는 이쪽 편을 들어주는 게 맞는 흐름이겠지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져줘야겠지.”

영 나쁜 흐름은 아니었다.

러셀이 선수 구성을 잘해왔다.

다들 이 업계에서 나름대로 큰 획을 그을 만한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었다.

사모아 고.

C.M. 펑크.

브로큰 와이엇.

코디 로스까지.

그래서 기대가 됐다.

러셀이 그런 나를 보면서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뭐가?”

“납득할 줄 알았다고.”

“애초에 그런 흐름이었는데, 뭘.”

“아니 그런데, 그런 기사들 있잖아? 네가 사실 과대평가된 선수라고.”

“아, 그런 거 있지.”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런 기사가 있었다.

전설적인 선수들을 차례대로 큰 무대에서 격파한 나는 사실 꽤 좋은 부킹을 받고 있는 선수라고 말이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위상 보호에 철저하다는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 납득하기 힘들지.”

왜냐고?

나는 현 시대의 주연 배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업계를 이끌어나갈 터였다.

그런 내가 다른 선수에게 쉽게 져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거대한 드라마의 흐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패배도 중요하다.

아니, 오히려 가장 중요했다.

아직 그럴 때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아직까지 확실한 잡은 아니지.”

“그런가?”

“응. 내가 지는 게 아니라 팀이 패배하는 거니까. 뭐, 내 위상에 그다지 손해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응?”

“아니, 너도 뭘 요구하면 어떨까 싶어서 이렇게 이야기해주러 온 건데.”

“아, 그건 확실히 요구할 게 있지.”

“어떤 거?”

“나서지 말라고.”

“아하.”

러셀이 곧바로 내 말을 이해했다.

제거 매치의 포인트가 무엇일까.

그런 내 질문에 러셀이 대답했다.

“두 가지겠지.”

하나는 Dream Team.

다른 하나는 SMP.

“바로 그거야.”

스팟 몽키 파라다이스.

천천히 감정을 섞고 피치를 올려가는 일반적인 경기와 달리 화려하고 강렬한 기술들 위주의 경기를 말했다.

원래는 서사를 보여줄 여지가 적고 팬들의 기억에 남아야만 하는 인디 스타일 매치를 비판하는 용어였지만.

열 명이나 참가하는 경기에서는 한정된 시간에 맞춰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 그런 식으로 경기를 짜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바트의 아이디어가 끼어든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지겠지.”

경기 중간에 저질 개그를 섞어서 선수의 이미지를 망치려고 든다던가.

아니면 누군가 당하는 역할의 선수를 하나 넣어서 병신을 만든다던가.

“동의한다.”

러셀이 앓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 역시도 바트 맥센의 아이디어로 그런 식의 고생을 참 많이 했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각본 아래에 있으면서 이 정도 되는 위치까지 성장한 게 참으로 용한 일이었다.

내 목적은 간단했다.

지더라도 좋다.

우리 쪽 선수들의 이미지만 챙겨갈 수 있다면 나로서는 남는 장사였다.

사모아 고와 C.M. 펑크의 뒤를 이어 선수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두 회사에 대항할 수 있는 큰 카드가 되어줄 테고.

안 그래도 공고한 프로레슬링 업계 내에서의 내 위상은 더 상승하겠지.

드라마의 신이 아니라.

현실의.

프로듀서로서의 준호-킴이 말이다.

그걸 위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러셀.”

“또 뭐냐.”

녀석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야. 그 얼굴은.”

“아니, 네가 그렇게 실실 웃으면서 말을 꺼내면…… 분명히 또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나온다는 말이지.”

“틀린 말은 아니군.”

“그리고 난 ‘당장 하자.’라고 할 테고.”

분명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대가 변했으니 우리도 좀 새로운 경기 방식을 가져보면 어떨까 싶어서.”

“어떤 건데?”

“말하자면 Only Team Captain Can Pin Match쯤 되겠는데. 거기다가 Falls Count Anywhere까지 더해서.”

러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진짜 병신 같은 생각이네!”

그리고 확실히 대답했다.

“당장 하자.”

물론 바트 맥센도 수락했다.

* * *

Team SIN과 Team Russell이 맞붙을 경기의 룰은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오직 팀 캡틴만 핀 폴을 당한다.

즉, 다른 선수들을 핀해도 카운트는 세어지지 않고 탈락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든 간에 핀 폴이 가능하다. 즉, 경기가 펼쳐지는 장소가 다양해진다는 말이었다.

이로써 다른 제거 매치와는 다른 특별함이 부각될 것이고, 지더라도 선수들의 이미지 손상이 덜하겠지.

그리고 나도, 마지막에는 집중 공격을 당해서 쓰리 카운트를 내주는 만큼 딱히 위상 하락은 없을 테고.

반대로 WWF 측에서는 내가 이런저런 기술에 당하는 걸 보여주면서 팬들의 시선을 끌고 인기를 모을 수 있고.

‘정말 최적의 룰이로군.’

우리가 원하는 반응에 딱 걸맞았다.

다들 내 의견에 동의했고, 그런 규칙을 내세우기 위해 각본이 전면 수정된 채로 월요일 저녁이 찾아왔다.

월요일 밤의 버닝콩.

지난주 데몬 킹에게 습격을 당한 브로큰 와이엇의 모습을 리플레이로 보여주면서 쇼가 시작되었다.

시카고 일리노이 주.

[월요일 밤의 버닝콩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Waaaaaaaaaaaaaaaaggggghhhh!]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팬들 모두가 오늘 PWA와 WWF의 대립이 시작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했다.

게다가 여기는 프로레슬링의 성지.

시카고.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C.M. Punk! C.M. Punk! C.M. Punk! C.M. Punk! C.M. Punk!]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자신들이 기대하는 선수들의 이름을 외쳐댔다.

나와 러셀, 그리고 펑크까지.

여기에서 펑크의 챈트가 나온 건 펑크가 바로 이곳 시카고 일리노이 출신의 ‘홈타운 보이’라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가 되었다.

쇼의 오프닝에서 숀 시나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시점이었다.

이게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보통 WWF에서는 쇼의 시작 때 시나와 같은 메인 이벤터들이 나와서 전반적인 스토리 라인을 정리했는데.

[Booooooooooooooooooooo-!!]

[Cena Su-ks! Cena Su-ks! Cena Su-ks! Cena Su-ks! Cena Su-ks!]

어마어마한 야유가 쏟아졌다.

시나는 호불호가 극심한 캐릭터였고, 그 존재로 인해서 ‘호’ 성향을 보이는 관객들이 WWF를 시청하게 만들도록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으나.

여기에는 그런 팬들이 적었다.

소위 ‘마니아’로 뭉뚱그려 불려지는 이곳의 골수 레슬링 팬들은 시나를 혐오하는 성향이 짙은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 그 타고난 성실함과 힘으로 어찌어찌 인정을 받아가던 상황인데.

‘역시 이렇게 되었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궁합이 맞지를 않았다.

마니아 팬들의 트롤링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다들 화가 많이 나셨군.]

[Boooooooooooooooooooo-!!]

[알아, 다들 뭐가 보고 싶은지.]

시나가 재치를 부리기 시작했다.

[Team SIN의 등장을 바라는 거군.]

[Yeeeeeeeeeeeeeeeaaaahhhhh!!]

환호가 나왔다.

시나는 즉석에서 마이크워크의 내용을 바꾸며 팬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환상적인 화제 전환이었다.

[하지만 다들 잊지는 말아줬으면 하는데! 우리에게는 러셀 하트! 그리고 이 도시 출신의 C.M. 펑크가 있지!]

[Waaaaaaaaaaaaaaaggggghhhh!!]

[C.M. Punk! C.M. Punk! C.M. Punk! C.M. Punk! C.M. Punk!]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내친 김에 확인해볼까! 내 이야기를 들어봐! 분명 재미있을 테니까!!]

관객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미친놈.”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팬들 모두가 자신을 적대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녀석은 페이스가 무너지지 않고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Team SIN을 응원하는 쪽은 ‘Let’s Go SIN!’을. 그 다음에는 러셀을 응원하는 쪽이 ‘Let’s Go Russell’을 외치는 거야! 한번 테스트를 해보자고!!]

시나가 팬들의 챈트를 유도했다.

[Let’s Go! SIN!]

[Let’s Go! Russell!]

[Let’s Go! SIN!]

[Let’s Go! Russell!]

[Let’s Go! SIN!]

[Let’s Go! Russell!]

팬들의 목소리가 번갈았다.

반응은 정말 놀라웠다.

각각 나와 러셀을 지지하는 팬들이 목소리를 더 크게 내면서 완전히 경기장이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역시 시나였다.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팬들이 자신의 주도 아래에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면서 엄청난 반응을 모았다.

팬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쪽을 위해서 더 크게 목소리를 냈고, 그로 인해 경기장은 순식간에 열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로써.

시나는 팬들을 순식간에 쇼에 몰입시켰고, 어렵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갈 수가 있었다.

팬들의 욕을 묵묵히 듣던 2006년의 시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저거야말로 재능이지.’

3년.

고작 3년만에 시나는 자신을 향해서 쏟아지는 이 압도적인 야유를, 설득해내는 데 성공했다.

더 팍도 선역으로 시작해 팬들의 반감을 사 악역으로 전환했었다.

하지만 시나는 아니었다.

오직 시나만이…….

‘아니지.’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녀석이 기껏 넘겨준 열기였다.

이걸 최고의 모습으로 돌려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쇼의 메인이벤트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시나가 팬들의 반응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주었기 때문인지 다들 이후로는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이게 일반적인 링 서바이벌이었다면 WWF 선수들이 PWA 선수들의 습격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시대다.

그렇기에 나는 고전적인 방식으로부터 탈피해 우리만의 새로운 대립 방법을 보여주기로 했다.

쇼의 메인이벤트.

광고 타임이 끝나고 난 뒤, 백스테이지 세그먼트 영상이 흘러나왔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모아 고.

사모안 디스트럭션 머신.

[Yeeeeeeeeeeeeeeeeaaaahhh!!]

팬들이 곧바로 환호를 보냈다.

TMA 시절부터 쌓인 리스펙트에 더해 PWA를 거쳐 WWF에 온 그는 팬들이 가장 믿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 거만한 태도에 걸맞은 실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사모아 고는 WWF의 슈퍼 헤비급 전선을 책임지는 빅맨 중 하나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물론.

PWA 측에서도 멋진 카드가 나섰다.

화면 바깥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주변의 스태프들을 순간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게 만들 정도로 큰 키.

다부진 근육질의 몸매와 검은 머리칼을 길러 하나로 묶고 있는 사나이.

그는 사모아 고와는 정반대로 WWF에서 시작해 PWA에서 그 커리어의 시작을 당당히 선언한 남자였다.

드류 맥킨마이어.

[…….]

[드디어 오셨군.]

사모아 고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Uooooooooooooooohhhhhh!!]

경악을 금치 못하는 팬들.

마침내.

두 멋진 사내가 서로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며 마주보는 것을 시작으로.

PWA와 WWF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음 화면’에서는.

한창 핀 발로와 브로큰 와이엇이 서로 페이스 투 페이스를 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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