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2010년 1월 15일.
새해가 찾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프로레슬링 업계가 발칵 뒤집히는 초대형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러셀 하트의 연봉 ‘이천만 달러’ 기사가 나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날을 위해 WWF 측에서는 마치 프로 미식축구팀의 슈퍼스타가 이적하듯이 기자 회견을 열 정도였다.
업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일.
말인즉슨, 이 남자가 현재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가지고 있는 파급력이 그만큼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젊디 젊은 나이에, ‘태도 불량 시대’에서 전설을 세우고 할리우드로 진출해 여러 해 동안 고배를 마셨지만.
‘마벨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패스터 앤 퓨리어스’ 시리즈라는 걸출한 프랜차이즈에서 각자 중요한 역할을 따내고 현재는 할리우드에 정착한 남자.
바로 더 팍.
드와이트 존슨.
바트 맥센으로부터 직접 소개를 받은 그가 기자회견장 안으로 들어섰다.
프로필 상으로는 196cm.
실제로는 187cm였으나, 신고 있는 농구화와 엄청난 근육질의 몸매로 인해 그보다 훨씬 더 크게 보였다.
그렇기에 WWF의 선수 프로필에서도 196cm라고 표기를 한 것이었다.
그게 바로 이 남자였다.
WWF의 4대 아이콘 중 하나.
캡틴 로건, 락콜드 스티비 스틴, 숀 시나와 함께 한 시대를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 네 사람의 선수 중 하나.
그가 돌아왔다.
거의 10년 만에.
그럼에도 아직 30대 중반.
말인즉슨, 더 팍은 20대 중반에 이미 WWF를 한 번 정복하고 ‘아이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말이었다.
기자들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숀 시나.
신.
러셀 하트.
랜스 오튼.
태도 불량 시대 ‘이후’에 나타나 현재 압도적인 스타가 된 이들이 돌아온 더 팍에게 맞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질문이 이어졌다.
“팍, WWF로 복귀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제 집이니까요.”
Home.
팍은 그런 표현을 썼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언젠가 할리우드에서 ‘슈퍼스타가 되기에는 너무 몸이 크다. 벌크를 줄일 필요가 있다.’는 논지의 비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때까지 인기를 얻던 슬림한 스타들에 비해서 팍은 거의 둔중해 보인다 싶을 정도로 덩치가 거대했다.
하지만 팍은 그런 비판에 대해 ‘내가 항상 큰 벌크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언제라도 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크게 챙겼다.
그 말이 100% 진실은 아니었으나 팬들은 거기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런 팍이었기에 언젠가 반드시 링으로 돌아온다고 믿었고, 지금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면, 프로레슬러로 복귀하신 뒤 가장 붙고 싶은 선수는 누구인가요?”
“물론 숀 시나죠.”
더 팍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슬랭’이었다.
드와이트 존슨과 더 팍은 달랐다.
드와이트 존슨은 쾌활하고 좋은 매너를 지닌 사내였으나 더 팍은 반대로 상대방을 슬랭을 써서 거침없이 까버리는 엄청난 입담의 소유자였다.
“왜냐면 ‘유캥씨미’나 하는 놈이 회사의 간판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기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을 들은 팍이 다시금 드와이트로 돌아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농담입니다. 시나는 정말 훌륭한 선수죠. 그 어떤 누구도, 그가 지금 WWF를 견인하고 있는 선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기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았다.
비록 역반응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했지만, 그와 반대되는 압도적인 팬층 역시 거느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러한 팬들은 시나의 시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프로레슬링을 전혀 시청하지 않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프로레슬링의 팬으로 만들어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시나는 명실상부한 업계의 아이콘이었다.
ACW의 공세를 WWF가 버텨낸 데에도 바로 그 시나의 이질적인 상품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 이 남자도 그러했다.
더 팍.
젊은 나이였음에도 자신의 압도적인 상품성을 증명하면서 순식간에 회사의 아이콘으로 치고 올라간 천재.
그 화려한 언변과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는 프로레슬러로서 역대급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더 팍과 숀 시나의 대결.
아니.
더 팍과 신.
더 팍과 러셀 하트.
더 팍과 랜스 오튼.
더 팍이라는 자의 존재 하나만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드림 매치.
회견장에 있던 기자들은 의기양양하게 앉아있는 바트를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그는 천재적이었다.
지금까지는 단지 ACW의 공세에 맞서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난 링 서바이벌을 기점으로 WWF가 공세로 전환하게 되자, 무서울 정도의 사업 능력을 뽐냈다.
바트 맥센은 체크메이트를 불렀다.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러셀 하트의 이적 관련 기사는 반쯤 잊히고 말았다.
* * *
더 팍의 연봉은 2,000만.
그마저도 4대 페이퍼뷰 전후만 출장해 경기를 가지고, 나머지는 협의 하에 추가 수당을 받는다는 계약이었다.
정말로 파격적이었다.
어찌 보자면 신보다 더했다.
신은 WWF 이외에도 PWA에서 지속적으로 활동을 했고, 그렇기에 계속해서 볼 수 있는 풀타임 선수였다.
하지만 더 팍은 달랐다.
그는 아마 계약 외의 시간에는 영화 촬영으로 업계에서 모습을 감출 터다.
그렇기에 더 팍의 계약은 정작 업계인들에게는 그다지 환영 받지 못했다.
더 팍으로 인해 다른 풀타임 레슬러들의 입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뿐이랴.
팍으로 인해 재계약을 앞둔 선수들은 회사로부터 ‘이해를 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통보를 듣게 되었다.
더 팍과의 계약으로 인해 연봉을 많이 올려줄 수 없게 되었다고 말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싶었지만, 그것이 바트 맥센의 스타일이었다.
선수들은 자신의 가족.
그러므로 당연히 회사의 사정에 어느 정도는 맞춰줄 것이라고, 바트 맥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그로 인해서 러셀 하트는 거의 굴욕 수준의 연봉에서, 더욱이 굴욕 수준의 계약을 제시받았다는 점이었다.
[연봉을 분할 지급한다.]
“…….”
그 문장을 읽자마자 가슴에 무거운 사슬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연봉을 분할 정산 받으면 집안 빚의 원금 상황은 할 수 없었다.
러셀은 곧장 바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응답은 없었고.
그 후로도 몇 번인가 더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바트 맥센은 받지 않았다.
연봉 800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보다 더 더러운 조건을 받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를 어쩐다.’
고민이 많아졌다.
신과 결전을 치르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걸려온 전화.
바트 맥센이었다.
“예, 보스.”
[그래, 러셀. 계약 때문인가?]
“만약 제가 지금 주신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Final Offer일세.]
최종 제안.
이 이상으로 해줄 수는 없다.
더 팍을 영입하며 ACW로부터 승리를 확신한 바트 맥센은 배짱을 부렸다.
지금껏 회사에 헌신해온 러셀 하트를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그 또한 나름의 근거가 있어 하는 말이었다.
바트는 러셀 하트가 신과의 승부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 라이벌리가 없으면 러셀 하트 자체는 딱히 아이콘 급에 가까운 재능을 가진 선수는 결코 아니었다.
경기는 잘하기는 했으나, 그것뿐.
그 혼자만의 드라마는 부족했다.
따라서.
바트 맥센은 최악의 경우에는 러셀이 ACW로 넘어가는 것까지 상정했다.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이제는 ACW가 아닌 WWF에게도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전화를 끊은 뒤.
“후우.”
러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러셀은 바트 맥센과 계약에 대해 다시 대화를 나눴다.
“제가 이적을 하게 된다면…….”
WWF와 러셀 사이의 계약이 만료되는 날은 2010년 킹스 럼블 이후였다.
“타이틀을 내려놓고 가야겠지.”
“누구에게 말입니까?”
“더 팍.”
“……신은 안 되겠습니까?”
“아니, 대관식이란 것은 본디 레슬 임페리움에서 치러져야 맞는 법이지.”
바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므로 자네가 계약을 포기하고 떠난다면, 팍에게 타이틀을 줘야겠네.”
바트 맥센은 신과 팍, 시나까지 포함한 3인을 이미 WWF의 ‘트로이카’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신의 계약도 이번 레슬 임페리움을 끝으로 갱신을 해야 했지만 그것은 월드 타이틀로 잘 풀릴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러셀이 떠난다면 그 타이틀을 팍이 이어받고 신에게 레슬 임페리움에서 잡을 해주면서.
두 사람의 라이벌리가 시작된다.
분명 먹힐 수밖에 없는 패였다.
거기에 깊은 고민을 하던 러셀은 내장을 짓이기는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저와 레슬 임페리움까지만 단기 계약을 맺어주십시오.”
“자네와?”
“예, 레슬 임페리움에서 신과 일대일로 붙어 타이틀을 주고 떠나겠습니다. ACW 측과도 이야기해두죠.”
“흐음…….”
일견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렇게 되면 신과 더 팍의 카드는 섬머 수플렉스에서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걸 믿을 수 있는가.’였다.
이미 ACW는 온갖 더러운 수단을 다 동원해서 WWF를 묻으려 들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여성 선수가 그쪽으로 타이틀을 가지고 가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퍼포먼스를 보였었지.
그렇기 때문에 바트 맥센은 일단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러셀을 끝까지 믿지는 않았다.
회의가 끝난 뒤.
호텔 방으로 돌아온 러셀 하트는 그간 참았던 감정을 토해내듯 방 안에 있던 의자를 벽으로 힘껏 집어던졌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의자.
“후우, 후우…….”
진창에 빠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신에게 이걸 말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처한 문제를 털어놓는다면 분명히 그는 도움을 주려고 할 터였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문제에 친구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창피한 일이었다.
자신은 800만.
신은 2,000만.
더 팍은 2,000만.
그 잔혹한 가격 매김이 러셀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로서는 솔직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더군다나 집안의 빚은 정말로 개인적인 문제였다. 그렇기에 러셀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하지만 오직 한 가지.
이런 상황에서도 신과 레슬 임페리움에서 반드시 맞붙고 말겠다는 생각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건 전화.
ACW 측의 데릭 비숍은 러셀이 지금 상황에 대해서 말하자 또 다시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나 해왔다.
[혹시 레슬 임페리움 경기에서 신에게 슛을 걸 수 있겠습니까?]
“예……?”
[만약 경기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당신은 여기에 와서 영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신에게 슛을 건다니.
말인즉슨 데릭 비숍은 러셀이 신을 링 위에서 ‘각본을 무시하고 두들겨 패는’ 그림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로서 신의 이미지를 완전히 망치고 ACW로 이적하면 그는 분명 팬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물론 러셀은 단박에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라면서 거절했지만.
문제는, 바트 맥센 쪽에서도 그러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고.
* * *
어쩐지 지금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 팍이?’
그가 WWF로 복귀한다.
그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지금보다 좀 더 늦은 시기에 WWF로 복귀해 숀 시나 같은 선수들과 대립을 했었지.
영화계에서 슈퍼스타가 된 그 파워로 인해 시청률은 더 크게 상승했고.
우리들 역시 지금 그와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찌 보면 딱 좋은 시기였다.
게다가.
‘내가 통제할 수도 있을 테고.’
더 팍은 나나 시나 같은 풀타임 프로레슬러가 아니라 일정 기간만 활동하는 파트타이머였다. 그러므로 그 역할을 너무 크게 줘서는 안 됐다.
파트타이머의 위상이 풀타임 레슬러의 위상보다 높아진다면 팬들이 지금의 레슬링을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전생에는 바트 맥센이 그걸 통제하지 못해서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했지.
결국 시나는 더 팍을 꺾었지만.
그전에 한 번 패배했고.
리벤지 매치를 통해서 팍을 꺾은 시기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였고.
그사이 팍은 WWF에 출연하지 않아 팬들은 풀타임 레슬러를 더 팍보다 훨씬 더 못한 존재로 여겼다.
팍이 현역에 속한 시기였던 태도 불량 시대의 선수들이 최고고, 다음 세대인 우리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시나를 비롯한 WWF의 선수들은 정말 힘든 시기를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딱 좋군.’
일단은 확인을 좀 해봐야겠지만.
나는 이미 WWF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파워를 보유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
옛 시대의 선수가 나오면, 현 시대의 선수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왜냐면 결국 그가 출연을 마치고 나면, 그다음 주부터 팬들이 계속 보게 될 사람들은 풀타임 레슬러들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게 내가 생각하는 프로레슬링이었다.
2010년 1월 21일.
다행히 킹스 럼블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몸은 완전히 회복됐다.
나는 한국 일정을 끝마치자마자 그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