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
로스 엔젤러스 국제공항.
무려 열두 시간에 가까운 비행이 끝나고, 나는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미국.
공항에 딱 내린 순간 내가 느낀 것은 뭔가 형언하기 힘든 묘한 냄새였다.
뭔가, 음. 어.
‘이거였군.’
한국인들이 미국에 오면 반드시 느낀다고 하는 이 묘한 냄새…… 다시 말해 ‘누린내’가 말이다.
반대로 내 몸에서는 마늘 냄새가 나겠지. 한국에 있는 동안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먹어댔으니까.
‘뭐, 금방 적응되겠지.’
그래도 반갑기는 했다.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나는 이 기름의 냄새가, 왠지 모르게 미국인들의 병든 식습관을 느끼게 해주었다.
마중 나온 회사 차량에 탑승한 나는 곧바로 티파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고 이내 딸칵, 하는 소리의 뒤를 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아, 신. 도착했어요?]
“응, 지금 회사 차 타고 출발했어.”
[미안해요. 마중 못 나가서.]
“바쁘잖아.”
나는 미소를 지었다.
현재 그녀는 PWA와 S&T를 운영하는 동시에 WWF 주주들까지도 만났다.
말인즉슨,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뭐 하나 슬쩍 이야기하면 곧바로 이해하고 처리해줘서 나로서는 정말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도 마음 편히 다녀왔지.
참고로 말하자면, 무안도전 관련 촬영은 굉장히 스무스하게 잘 풀렸다.
다들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구색은 갖추게 되었고, 내가 없더라도 일이 잘 풀릴 수 있도록 다 연결을 시켜놓았다.
선수로서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한국 레슬러들이 계속 도와주기로 했고.
심지어 원래의 계획보다 쇼가 훨씬 더 거대해져서 한국 레슬러들까지 출연해 경기를 펼친다는 모양이다.
좋은 일이었다.
‘다들 처음에는 죽으려고 했지만.’
그리고 내가 떠나기 직전까지도 고통스러워했지만, 분명히 잘 해내겠지.
나는 씨앗을 심어두고 왔다.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내 ‘친구’들이라면 분명히 꽃을 피우리라고 믿는다.
나 역시도 앞으로 잘 해나가야겠지.
내가 미국에 없는 사이, 프로레슬링 업계에 파격적인 복귀가 이루어졌다.
‘더 팍.’
업계의 그 어떤 선수와 비교하더라도 부족할 것이 없는 엄청난 선수.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아이콘이라고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이콘은 자신의 시대를 만들고, 그 시대를 흥행시키면서 오래도록 이끄는 선수들을 뜻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캐스켓-테이커가 위대한 선수라고 해도 절대 아이콘이라고 불릴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그는 기믹의 한계로 인해 항상 ‘주인공’ 역할은 될 수 없었기에.
팍은 반대로 기믹은 출중했다.
Great One.
The Most Electrifying Man in All of Entertainment.
People’s Champion.
붙은 별명들만 보더라도 그는 분명히 업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선수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아이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시대를 연 기간이 너무도 짧았기 때문이었다.
락콜드로부터 시대를 이어받은 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할리우드로 떠났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더 팍을 아이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그는 전생에도 이런 식으로 파트타이머로 WWF에 복귀했다. 그리고 분명 시청률 상승에 큰 도움을 주었지.
하지만 문제는, 그와 대립을 하면서 떠오른 스타가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스타성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선수들을 모욕했다.
그리고 다시 업계를 떠났다.
‘이번에도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물론 그 모든 게 더 팍의 잘못은 아니었다. 부킹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승인한 바트 맥센에게 존재했다.
그렇기에 나는 더 팍이 전생보다 더 이 업계를 위해 헌신하는 커리어를 보낼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전생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의지를 이어받은 선수가 업계에 남아 이어질 수 있도록.
그를 위해 이루어진 미팅.
“신~! 내 친구!”
영화 촬영을 마치고 자신의 트레일러 차량에서 쉬고 있던 더 팍은 나를 두 팔 벌려 격하게 환영해주었다.
“그리고 팀 메이트!”
“참 오랜만이군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팍은 씨익 웃어 보였다.
우리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고 그간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별건 없었다.
바트 맥센이 영화 촬영과 병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서 선수 복귀를 제안했고, 팍이 거기에 응한 것뿐이었다.
“네가 주선해준 마벨 쪽 촬영이 있어서 그나마 미뤄졌던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바로 응했을지도 몰라.”
“업계에 대한 미련이 컸나 보군요.”
“그렇지. 내 마음의 고향이니까.”
팍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마음이 거짓은 아니겠지만.
오히려 진심이기에 성가셨다.
더 팍의 존재가 새로운 슈퍼스타를 키워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 제기랄.’
이것도 결국 바트의 문제지만.
어쨌든 성가신 건 사실이었다.
팍으로부터 직접 그 이야기를 듣자니 머릿속의 생각이 확실해졌다.
역시 경계를 좀 해야겠다.
돌아온 그는 이 업계를 통틀어 분명 최고의 슈퍼스타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남는 게 없다.
팍이 만약 최고의 선수로 포장된다면 없는 동안 시청률이 떨어질 테고.
있을 때만 시청률이 오르니 멍청한 바트는 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그에게 의존하려고 들겠지.
그렇기에 처음이 중요했다.
그가 복귀 후.
‘아마 킹스 럼블이 되겠지.’
최초로 붙을 상대는 과연 누구인가.
“팍, 복귀는 언제죠?”
“다음 주 버닝콩에서 하기로 했어.”
“대립 상대는?”
“러셀 하트.”
“……?”
러셀이라고.
순간적으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러셀은 나와 레슬 임페리움에서 월드 타이틀을 걸고 맞붙을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킹스 럼블에서 더 팍으로부터 타이틀을 지키게 된다는 말인데.
‘바트가?’
그 부킹을 용인한다고?
“당신이 질 예정이라고요?”
“그렇게 됐어. 러셀이 떠나기 전에 너하고는 꼭 붙고 싶다고 말해서.”
“……? 예? 잠깐, 뭐라고요?”
“어라, 모르고 있었나?”
몰랐다.
러셀 하트가 떠난다고?
재계약이 결렬되었다는 말인가?
* * *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내가 한국에 떠나있는 사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러셀 하트가 WWF를 떠난다.
그 소식은 아직까지 대립 상대인 더 팍과 정말로 소수의 관계자들만이 알고 있는 정보라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나는 곧바로 진상을 파악해야겠다는 마음에 버닝콩 현장팀과 함께 이동한 러셀을 찾아갔다.
일은 전부 끝난 듯했다.
“어, 신. 오랜만이야.”
“너 나간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됐어. 별일은 아니야. 너도 전에 WWF를 나갔었잖아?”
말과는 달리 씁쓸하게 웃는 러셀.
나는 그 이유를 모조리 들었다.
녀석에게 제시된 800만의 연봉.
그조차 분할 지급이라는 굴욕.
“기왕 이렇게 된 거. ACW로 넘어가 바트 맥센을 후회하게 해줘야겠다 싶어서 말이야. 계약서를 찢어버렸지.”
“…….”
“그래도 마지막으로. 너에게는 벨트를 전해주고 가고 싶어서. 레슬 임페리움까지 단기 계약을 맺게 됐어.”
“약속이랑 틀리잖냐.”
나는 분을 삼키며 이야기했다.
“서로 동등하게 싸우기로 한 거 아니었어? 지금 여기서 네가 이적을 하면 벨트는 그냥 내 거가 되잖아.”
왜냐면.
그동안 아무리 반응이 좋았더라도, 다른 단체로 이적을 하는 선수가 벨트를 지킬 가능성은 없었으니 말이다.
러셀이 말한 것처럼 불공정했다.
“네가 따라오면 되잖아?”
“아니…….”
“농담이야. 농담. ……아니, 나쁘진 않겠는데? 네가 WWF와 계약이 끝나면 넘어와서 제대로 한판 붙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내가 어쩔 수는 없었다.
이건 녀석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800만이라는 연봉을 제시 받은 녀석에게 남으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그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 터였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러셀의 행동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녀석이 날 위해서 레슬 임페리움까지 남아준다고 하니 고마웠다.
“……경기는 제대로 할 거지?”
“그야 물론이지.”
“간다고 막 하면 안 돼.”
“아니, 야. 선수 생활 끝난 것도 아닌데 내가 그럴 이유가 어디 있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는 녀석.
그런 식으로 대충 진상을 파악한 내가 향한 다음 장소는 사무실이었다.
바트 맥센의 사무실.
다행히 그는 평소처럼 업무를 수행하던 중이라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러셀의 앞에서는 꾹 참아냈던 분노가 그 얼굴을 보자 다시 치밀었다.
“러셀 하트가 고작 그 정도 취급밖에 못 받을 남자였습니까?”
“……이건 자네 문제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이야기나 하지.”
“아뇨, 계속 이야기해야겠는데요.”
“무슨 결론을 내려고?”
바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봉은 못 올려주네. 자네와 팍에게 들어가는 돈만 벌써 4,000만이야.”
“…….”
“그런 상황에서 러셀에게 쓸 돈은 더 없어. 마침 ACW 측에서 좋은 연봉을 제시했다고 하니 나는 별 미련 없이 그를 보내주는 것뿐일세.”
바트는 합리적으로 말했다.
그게 나를 더 열 받게 만들었다.
그는 우리를 가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가족의 의미는, 바트 자신과 회사를 위해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을 뜻했다.
그 반대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러셀 하트라는 선수를 이런 식으로 내보내는 바트의 행동에 엄청난 불만을 느꼈다.
하지만 그 말이 틀리진 않았다.
“신, 결국 세상은 돈이야. 나는 울더라도 뉴욕의 거렁뱅이들처럼 아스팔트를 적시는 게 아니라 벤틀리의 시트를 적시지. 물론, 그게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아. 분명 그렇지.”
하지만.
행복의 척도는 돈이 아니지만.
“불행의 척도는 돈이지. 그러니까 나는 러셀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네.”
그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나 역시도 철저한 비즈니스에 의거해, 일을 진행하고 있다네.”
그 말에 틀린 건 없었다.
맞는 말이다. 그래.
바트 맥센이 러셀을 위해 2,000만이나 되는 연봉을 지불할 리도 없으니.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회장님.”
“……뭔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러셀은 떠나기 전에 저와 레슬 임페리움에서 결전을 치르게 되는 거군요.”
“그 말이 맞네. 그리고.”
바트가 천천히 일어섰다.
“자네가 월드 챔피언이 되겠지.”
“…….”
“러셀이 떠나는 건 나도 마음이 아프네만. 앞으로 잘 부탁하네. 신.”
“회장님.”
“또, 뭔가?”
“그 말씀은 진심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자네 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를 선물해주겠네.”
“뭐죠?”
“자네가 한 번 더 우승하게나.”
킹스 럼블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월드 챔피언에 도전하게.”
“…….”
바트는 날 위로하듯이 말했다.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2년 연속 우승.
역사상 단 세 명밖에 할 수 없었던, 푸시의 끝판왕과도 같은 각본이었다.
그렇게 되면 러셀과 나의 경기는 분명히 큰 의미를 지니게 될 터였다.
내가 러셀에게 도전하기 위해서 2년 연속 우승이라는 어려운 업적을 기어이 해낸 셈이 되니까.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가 걸렸다.
이 회사를 나가는 선수들은 대부분이 이미지를 망치는 굴욕을 당했다.
그렇게 해야만 다른 단체에 가서 회사의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개 같은 짓이었다.
회사가 선수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팬들이 안심하고 프로레슬링을 시청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 프로파간다에 질려서 몰입을 하지 못하고 결국 시청을 그만두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러셀이 회사를 떠난다면 분명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시간에 걸맞은 경기와 예우를 보이며, 떠나는 그의 앞길에 행운을 빌어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한 경고.
“제가 눈물로 간청하건데, 만약 당신이 이번 일을 하면서 저를 엿 먹인다면 당신을 죽여버릴 겁니다.”
“…….”
침묵하던 바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 대답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 * *
그래,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나는 러셀 하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있었다.
녀석은 실패자였으니까.
바로 나와 같은.
그렇기에 나는 녀석이 실력을 인정받아서 성공하는 데 묘한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대립을 했던 것이다.
왜냐면 다른 선수들은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성공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러셀은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오는 동질감.
녀석은 모를 테지만.
언더독.
패배자.
그런 생각에서 오는 성공에 목마른 자들 간의 라이벌리로 인해 러셀과 나의 대립이 잘 먹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내가 어쩌겠어.’
러셀은 전생과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었고, 그로 인한 이적을 나는 알지 못했으니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이천만은 큰돈이었으니까.
프로레슬러의 삶이 끝나더라도 인생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 이후를 위해서 현역 시절에 최대한 많은 몸값을 받아두는 건 어찌 보자면 상식이었다.
‘그렇지, 그래.’
그런 생각 속에 일정이 진행되었다.
1월 3주차의 버닝콩.
킹스 럼블까지 2주를 남긴 상황.
[If You Smell-!!]
[Waaaaaaaaaaaaaaagggghhhh!!]
더 팍의 귀환은 그야말로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이루어졌고, 놀랍게도 그는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링 위에 서서.
[러셀 하트, 네 삼촌인 그렉 하트에게는 정말로 많은 신세를 졌었지.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로 이 더 팍이 네 엉덩이를 걷어차주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한 것만으로도 도전할 이유가 충분히 생겼고, 러셀 하트와 더 팍의 월드 타이틀을 건 챔피언십 매치가 곧바로 성사되었다.
나는 말했듯, 럼블 매치에서 14번으로 깜짝 복귀식을 치르고 그대로 우승까지 하게 되는 각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러셀과 붙는 거지.
그런 계획이 모두 면밀하게 정해진 상태에서 킹스 럼블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