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403화 (403/634)

403.

쇼의 마지막은 혼란 그 자체였다.

러셀 하트는 링 코너에 머리를 대고 누워서 숨을 몰아쉬며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돌처럼 굳어졌고.

그 가운데에서 더 팍은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 것을 감지하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벨트를 바닥에 던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팍! 제발! 관객들이 보고 있어!”

“지랄하지 마! 지금 이 상황을 속여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일단 넘어가자고! 벨트 들어!!”

다들 병신 같은 요구를 해왔다.

모두 바트 맥센의 명령이겠지.

링에 돌아오자마자 이 꼴을 당한 그 역시도 분명한 피해자였다. 팍은 분통을 토해내며 벨트를 들고 퇴장했다.

패자가 링에 남고 승자가 먼저 퇴장을 한다는 이상한 상황. 팬들은 상황이 이질감을 느끼고 러셀을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이미 그를 찍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이가 없어 허탈하게 웃은 러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되었군.’

회장은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러셀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미안하다. 신.’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그동안 러셀 하트의 커리어를 지켜봐 준 팬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하늘을 가리키는 러셀. 거기에 팬들이 박수를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리고 카메라는 그걸 찍지 않았다.

퇴장하며 러셀을 슥 돌아보는 더 팍과 그 손에 들린 WWF 월드 챔피언 벨트를 가리키며 쇼는 마무리가…….

되지 못했다.

고릴라 포지션은 난장판이었다.

“시, 신!!”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신이 바트 맥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를 떼어놓기 위해 안에 있던 직원들이 모조리 달려들었지만 눈이 돌아간 신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빠악-!

바트 맥센의 안면에 꽂히는 펀치.

뒤로 나가떨어진 바트는 그대로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턱은 박살이 났고 이가 부러졌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침착한 얼굴로 다른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쇼 마무리해!”

“어, 어……!”

“빨리!!”

혀를 씹어서 발음이 줄줄 새는 데도 명령은 정확했다. 거기에 정신을 차린 몇몇 직원들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너, 이……!!”

그게 신의 분노를 더 부추겼다.

열 명이 넘는 직원들을 달고도 그는 마치 황소처럼 바트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을, 때마침 고릴라 포지션으로 들어오던 더 팍이 보게 되었다.

“신?!”

“……?!”

거기에 돌아보는 신.

팍마저 순간 몸을 흠칫 떨 정도로 살기가 어린 눈빛. 그런 신이 직원들을 어린애처럼 떼내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벽에 밀어붙였다.

“너도 알고 있었어?!”

“뭐? 잠……!! 진정해!!”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그는 분노를 토로해냈다.

“이 업계의 가장 큰 불문율이 어겨졌어!! 그것도 이 쇼를 통제하는 개자식의 손에 의해!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지?! 뭘 기준으로 싸워야 하냐고!!”

그 말을 모두가 들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신을 따라 고릴라 포지션으로 왔던 WWF의 선수들.

그들은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물론, 신 역시도 이전에 테이커와의 대결에서 각본에 없던 일을 벌이기는 했다.

그로 인해서 신이 하는 말이 자가당착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신은 선수와 선수 간의 거래였고 그 일에 대해서는 테이커가 자신이 먼저 제안을 한 것이었다고 확실히 말했다.

하지만 이건.

회사가 나서서 선수와 한 계약을 완전히 짓밟고 바보로 만든 것이었다.

이제 당장 다음 주부터 선수들은 바트 맥센의 심기를 거스르면 러셀과 같은 꼴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할 터였다.

WWF는 선수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신은 바트 맥센을 향해 다가갔다.

얼굴을 집중적으로 얻어맞고도 근성으로 버티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얼굴을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상황을 정리했다.

“변한 건, 없다.”

“아가리 닥쳐.”

“너는 레슬 임페리움에서 챔피언이 되는 거야. 더 팍이라는 걸물을 상대해서.”

그 말에 한숨을 내쉬는 팍.

그는 어찌 보자면 러셀만큼이나 이번 사건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이 업계로 돌아와서 치른 첫 경기가 이런 식으로 끝나버리다니, 그야말로 최악의 사건에 휘말리고 만 것이었다.

“러셀은 특수한 경우다. 회사를 나가게 될 놈에게 그런 기회를 줄 순 없었어.”

“……내가 말하지 않았나?”

신이 주먹을 들었다.

“죽여버리겠다고.”

바로 그때였다.

“신.”

관객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러셀 하트의 등장에 신이 놀라 돌아보았다.

바트의 모습만으로도 지금의 상황을 알아차린 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 고맙다.”

“…….”

사과와 감사.

동시에 만류.

신은 어쩔 수 없이 주먹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했다거나 바트 맥센을 용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침착하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마음이 확실히 정해졌다.

이 남자와는 양립할 수 없다.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킹스 럼블 다음 날.

버닝콩은 난리도 아니었다.

예정되었던 위클리 쇼에 무단 불참하는 스타들의 수가 반을 넘어갔다.

모두가 이 배신을 역겹게 여겼다.

그렇기에 택한 보이콧이었다.

시나도, 오튼도.

다들 러셀의 편에 서서 바트 맥센의 배신을 비난하는 가운데 나 역시도 당연히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PWA 쇼에 참가하려 한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침착하게 다른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지금까지의 일을 모조리 파악했다.

그를 위해 만난 게 그렉 하트.

이 문제에 대해 감정적으로 러셀보다는 이야기하기 편할 것 같았던 그는, 내 생각대로 모든 일을 털어놔 주었다.

그간 하트 패밀리의 재정이 완전히 파탄 났고, 그로 인해 러셀 하트는 돈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트는 모욕적일 정도의 연봉을 제시했고 그로 인해 계약은 결렬되어 ACW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랬군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나는 이 끔찍한 배신에 대해 깊은 분노를 느꼈다.

여러 문제가 혼재되어 대체 어느 쪽으로 화를 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이 업계의 문제와 앞으로 일어날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다.

선수에 대한 예우.

타 스포츠에 비해 정말 형편없이 적은 연봉으로 제대로 된 의료 보험 하나 없이 굴리면서, 정작 선수를 소모품으로만 생각해버리는 WWF의 문제점.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낮아진 시청률을 회복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화제성만 큰 인물들을 돈으로 데려와 경기를 시키고.

그들이 낸 성과로 주주들을 속이고.

그렇게 현역 선수들의 위상을 깎아먹으면서 회사는 점점 몰락한 것이다.

나도 인정한다.

그들의 효과는 대단했다.

과거, 전설적이었던 선수들이 다시 나와 경기를 치르다니. 프로레슬링을 끊은 팬들이라도 경기를 보고 싶겠지.

하지만 그게 뭐?

그들은 더 이상 그때의 그들이 아니었다.

늙고 나이도 먹어 경기력도 최악에, 현역 활동 역시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팬들은 그 화제성에 기대 쇼를 보다가도 그 레전드 선수들에게 얻어터지는 현역들을 보면서 ‘에이, 요즘 레슬링도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하며 시청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업계에 들어오는 인재 풀이 줄어들고,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놈들이 바트의 선택을 받아서 위로 올라갔다.

악순환.

그리고 악순환.

빌어먹을 프로레슬링의 멸망.

그게 드러난 킹스 럼블.

“…….”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프로레슬링이라는 콘텐츠가 지닌 폐쇄성과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바트 맥센의 배신은 킹스 럼블의 다음 날부터 곧바로 만천하에 알려졌다.

데이브 렐처의 칼럼으로 인해서 이 일이 세상에 알려졌고, 곧바로 다른 언론에서 그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바트 맥센이 한 짓은 멍청했다.

더 이상 그가 알던 올드 프로레슬링이 아니었다. 프로레슬링이라는 콘텐츠에 요구되는 도덕성은 더 커졌다.

괴상한 불륜 각본이나 죽은 사람을 모욕하며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는 각본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트는 그에 버금가는 사고를 쳤다. 그리고 그게 회사의 목을 조르기 위해 서서히 다가왔다.

킹스 럼블 애프터 쇼.

링에 오른 바트 맥센은 곧바로 마이크를 잡고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일에 관해서 변명을 시작했다.

[Boooooooooooooooooooo-!!]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 빌어처먹을 자식은 그것조차 자신의 캐릭터와 각본으로 사용해서 교묘하게 비난을 피해가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맞서 나온 건.

[If You Smell-!!]

더 팍.

심지어 그에게도 야유가 쏟아졌다.

[You Screwed Russ!]

[You Screwed Russ!]

[You Screwed Russ!]

너는 러셀을 엿 먹였다.

“잠깐, 잠깐 기다려봐.”

그런 팬들의 챈트 앞에서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더 팍은 이윽고 바트 맥센을 향해 벨트를 내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바트 맥센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 팍의 모습에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것으로 인해 러셀이 겪은 사기극은 삽시간에 각본의 일부가 되었다.

팬들에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더 팍은, 이렇게 당신의 콘트롤로 얻은 벨트 따위 필요 없어. 그러니 당장 이거 가지고 내 앞에서 꺼져!]

[팍! 그만해! 이미 일은 일어나고 말았어. 이 멍청이들의 말은 듣지 마! 러셀이 러셀을 엿 먹인 거라고!!]

[Booooooooooooooooooooooo-!]

링 안으로 쓰레기가 날아들었다.

팬들은 마구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들을 대변해, WWF의 슈퍼 히어로 더 팍이 나서서 바트 맥센을 골탕 먹이고 정의를 되찾는 전개.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마치 독재 정권에서 권력자를 엿 먹이는 만화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시키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런 각본으로 인해 팬들은 점차 WWF에 대한 증오를 잊을 테지.

천재 사업가.

바트 맥센의 수완이 발휘되는 순간.

그리고 거기에 맞서려고 해도 현실이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트 맥센은 회사의 메인 이벤터들을 제외하고는 떠날 테면 떠나라는 태도로 나왔고, 거기에 선수들은 점점 꼬리를 내리고 WWF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억지로 버티는 선수들에게 미안함을 느낀 러셀이 전화를 해서 자신은 괜찮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나에게도 전화가 왔다.

[돌아가. 신.]

“…….”

[미안하다. 하, 내가 ACW로 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러셀은 그렇게 사과를 했다.

자신의 커리어가 무너졌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게.

나 역시도 그랬다.

러셀 하트와 계속해서 만들어온 드라마가 바트 맥센에게 박살이 났다.

우리의 레슬 임페리움 매치는 그야말로 역사에 남는 매치 업이 되었겠지.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을 사로잡고 영원히 역사에 남아 우리를 보고 많은 아이들이 꿈을 키우게 될 터였는데.

그런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러셀은 그렇게 말했다.

당장에 이 업계에서 일을 해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의 문제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묻고 지나가자고.

하지만 과연 그래야만 하는가.

나는 그 질문에 대답했다.

“ACW에는 언제 나간다고?”

[다음 주부터.]

“각본은?”

[회사에서는 비열한 WWF의 배신에 당하고 ACW로 넘어온 비운의 영웅을 연기해달라고 주문하는데…….]

“러셀.”

[응?]

“날 믿을 수 있겠어?”

[……그야 당연하지.]

러셀이 힘없이 웃었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잖아.]

이 업계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꿈.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이번 레슬 임페리움이 끝날 때까지 ACW에 출연하지 말아봐.”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겠어?”

[뭐, 그쪽에서 그렇게 해준다면.]

“그건 내가 처리를 하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상황을 정리했다.

더 팍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는 피해자였고,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이 프로레슬링 업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각본을 수락했을 터.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 업계에 독이 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가 다른 선수들을 상대해 이기고 사라지면 팬들의 열기는 식는다.

시청률은 줄어들고, 결국 더 팍이라는 남자만 최강이 되고 업계는 쇠락할 것이다.

그건 내가 꿈꾸는 업계가 아니었다.

나는 이 업계에서 꿈을 꾼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고, 팬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여기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그러지고.

바트 맥센의 통제를 받는다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꿈이 희석된다.

그리고 나는 내 꿈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안 되겠어.’

나는 생각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원하는 대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결국, 바트 맥센이라는 남자를 쓰러뜨려야만 했다.

주주들의 지지고 나발이고.

시대가 변하고.

패러다임이 바뀌어도.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선의 승리를, 악의 패배를 그리는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계획을 주도하고 있는 남자는 정말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쓰러뜨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신이 먼저 겨눈 총이야.’

바트 맥센.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죽여주마.

당신이 패배해 지면에 턱을 처박고 쓰러질 때까지.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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