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
이 끔찍한 배신에는 경기가 개최된 조지아 아틀랜타의 지명을 따, ‘아틀랜타 스크류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커리어가 시작된 도시의 이름이 러셀 하트에게 있어 흑역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스크류잡이 일어나고 몇 주.
선수들은 서서히 회사로 돌아왔다.
이유는 다양했다.
가족을 위해.
은행 빚을 위해.
그리고 러셀의 권유로.
제각기 다양한 이유로 결국 바트 맥센의 배신을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다.
바트 맥센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가는 상황에 안심하면서 회사의 메인 이벤터들을 직접 만나서 설득했다.
숀 시나.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어린이, 가족 팬들을 위해서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랜스 오튼.
그는 실제로 회사를 나가겠다고 통보했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생각해보라는 설득에 응해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신.
그와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PWA 쪽에 직접 연락을 타진해도 본인이 받을 마음이 없다는 식으로 나와서 전언을 말하는 정도가 고작.
바트 맥센은 계속 이렇게 말했다.
“월드 챔피언이 되라. 신. 너를 위해서 내가 모든 걸 준비해뒀으니까.”
하지만 연락이 돌아온 것은.
녀석에게 당한 상처가 모두 낫고.
거진 3월이 다 되어서였다.
기다릴 대로 기다려 지친 바트는 전화를 받자마자 일단 소리부터 질렀다.
“뭐 이렇게 연락이 늦어!”
[…….]
“애새끼야?!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아니었어! 그만 징징대고 돌아와!”
그러자 전화가 뚝 끊어졌다.
“어?”
바트는 황당해 순간 말을 잇지 못했고 이내 자신이 조금 흥분했다고 반성하면서 다시 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려 일부러 좀 뜸을 들였으나 신은 대답하지 않았고 바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사과하마.”
[……저한테요?]
“제기랄, 러셀 하트에게도 사과하겠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어.”
[돌이킬 생각은 없으시죠?]
“인간은 잘못된 행동을 통해서 성장하는 법이니까.”
바트는 그렇게 변명했다.
“회사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잘못이었다. 회사로 돌아와라.”
[…….]
“널 위해 준비한 무대다. 네가 10년 동안 꿈꿔왔던 최고의 순간을 무려 레슬 임페리움에서 맞이하는 거라고!”
[그 이상인데…….]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 말을 잠시 듣고 있던 바트는 이윽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복귀할 거냐?”
[그러죠. 뭐. 제가 더 이상 어쩔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러셀 역시도 그만하자고 말했으니까요.]
“좋아.”
그는 만족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신이 지금 상황에 열이 받았다고 한들 바트 맥센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서 무마시켰다.
그가 가진 욕망.
월드 챔피언.
황금의 타이틀.
최강의 증명.
그것도 최고의 순간을 거쳐.
최고의 자리에서.
최강의 상대와.
그야말로 거절하면 바보인 제안.
그 모든 것을 내건 바트 맥센은 이 전쟁에서 신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신을 계속해서 붙잡아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트는 모르고 있었다.
신이 이렇게 뻔하디 뻔한 챔피언 로드를 밟을 인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 * *
바트 맥센과의 전화가 끝난 뒤.
나는 눈앞에 모여 있는 팀장급 인사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으셨죠?”
스피커폰으로 진행된 통화.
내가 이들에게 바트 맥센과의 대화를 들려준 이유는, 지금부터 내 계획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나를 따라와 달라고.
“……참으로 뻔뻔한 사람이군.”
“미안합니다. 그렉. 제가 괜히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듣게 한 것 같군요.”
“아니, 괜찮다.”
그렉이 쓰게 웃었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에 나를 빼놓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군.”
“그야, 이건 앞으로 저희 PWA가 나가야 할 방향과도 관련이 있으니까요.”
“음…….”
모두가 날 돌아보았다.
티파니, 할리, 바쿠, 그렉, 베이다, 헤이건, 그리고 사업부의 각 팀장들.
개중 눈치가 빠른 티파니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냥 넘어갈 생각이 아니군요?”
“그래,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트 맥센은 이 업계의 신뢰를 깨뜨렸어.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이 남자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느꼈지.”
자연스럽게 눈썹이 찡그러졌다.
이 일, 다시 말해 프로레슬링이라는 스포츠는 엄청나게 위험한 짓이었다.
멍을 입거나 피가 나는 일은 예사였고, 우리는 링 위에서 ‘죽지 않기’ 위해 모든 기술을 철저하게 연마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신뢰였다.
내가 탑 로프에서 몸을 던질 때.
상대가 정수리부터 지면에 꽂히는 안티크라이스트 같은 기술을 접수할 때.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게 바로 이 스포츠였다.
하지만 바트 맥센은 그걸 깨뜨렸다.
러셀을 포함해서, 이 업계에 헌신하고 있는 모두를 기만하는 행동이었다.
“더 이상 못해먹겠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는 방금 바트 맥센에게 돌아가겠다고 말을 했지.”
할리가 지적했다.
그는 조금 전 나와 티파니가 한 말로 인해 뭔가 불길함을 캐치해낸 듯했다.
“스크류잡을 또 할 셈이냐?”
“그렇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인가.”
“하지만. 너도 똑같은 짓을 한다면 바트와 별반 다를 게 없어지지 않나?”
“상관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확실히 해두죠. 제가 이번 스크류잡에서 엿을 먹일 것은 어디까지나 바트 맥센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럼……?”
“팍에게 협조를 구할 겁니다.”
“응할까?”
“제가 한다는데. 안 끼면 손해죠.”
나는 확신했다.
내가 레슬 임페리움에서 다시 한 번 스크류잡을 해 바트 맥센을 엿 먹인다.
팍이 현재 스크류잡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반드시 이 일을 할 생각이었다.
ACW로 가서 흐름을 다시 끌고 와 바트 맥센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 거다.
이건 러셀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었다.
녀석과 같은 현역 선수로서, 내가 바트 맥센과 프로레슬링 업계, 그리고 전 세계에 대고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었다.
스크류잡은 역겨운 일이었고, 나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며, 이 업계의 선수들은 그 어떤 선수보다 뛰어나다고.
“저는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혼자서라도.
“그러니까, 만약 여러분이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PWA를 나가 개인 신분으로 ACW에 가겠습니다.”
그런 선언.
거기에 잠시 멍하니 있자니, 폴 헤이건이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 같은 미친놈은 처음 본다.”
“ACW의 숨통을 끊기 위해 WWF에서 칼을 빼들었는데, 굳이 그 타이밍에 ACW로 가서 WWF와 싸우겠다고?”
그 말이 맞았다.
내가 하는 건 미친 짓이다.
특히나, 프로레슬링 업계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빠삭하게 꿰뚫고 있는 나는 확실하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았다.
레슬 임페리움에 맞선 2010년의 스타게이트 이후, ACW는 몰락을 한다.
내부 정치에 염증을 느낀 선수들의 보이콧으로 할리우드 로건을 비롯한 선수들이 모조리 회사를 나갔고.
그 이후 등장한 신예들을 중심으로 ACW는 다시 WWF에 맞서서 싸웠지만.
결국 왕좌를 재탈환하지 못한 채 제국에 먹혀 그대로 역사에서 사라진다.
알고는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그딴 역사에 겁을 먹고 바트 맥센에게 꼬리를 말고 그의 충실한 개가 되면.
과연 내가 회귀를 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무엇을 생각했지?
동양인이라는 불리한 신분으로 이 업계에 다시 도전해서 무엇을 이루고 어떻게 하고 싶다고 느꼈지?
나의 성공.
동시에, 이 업계의 변화.
유치한 촌극에 불과하다고 평가 받던 프로레슬링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인정을 받는 것.
그게 나의 꿈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바트 맥센과 함께 서있을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느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헤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는 변했어. 너로 인해서.”
나로 인해.
동양인의 성공으로 인해.
메인 스트림에 올라서면서.
프로레슬링은 더 이상 그 유치한 저질 드라마를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고인을 모독하고 근친상간에 불륜 각본을 남발하기에는 프로레슬링이라는 스포츠에 요구되는 도덕성이 커졌다.
“그러니까 보여줘야지.”
헤이건이 손을 내밀었다.
“이 스포츠에 팬들이 기대하는 것은 그런 막장 드라마가 아니며, 우리들도 거기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고.”
“좋아. 해보자고.”
베이다가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생각해보니 열 받네. 바트 맥센은 규칙을 어겼어. 그러니까 그놈과 일하는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거다.”
다들 그런 식이었다.
“무슨 하이틴 스포츠 드라마로군.”
할리도 껄껄 웃었다.
“하지만 좋아! 이 빌어먹을 새끼. 그래서 우리가 널 따를 수밖에 없는 거다.”
“마음이 시키는 걸 하자고.”
바쿠.
“해적답군요.”
티파니도 손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그렉까지.
“다들 고맙다.”
내 조카를 위해 울어주어서.
“아니죠. 그렉.”
나는 거기에 농담을 건넸다.
“저는 러셀 하트 같은 건 아무 신경도 안 씁니다. 이건 단지 이 업계의 정의를 위해서 하는 일일 뿐이라고요.”
“그러는 네놈이 러셀을 가장 걱정한다는 건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
“……오그라드는 손 모으기나 합시다.”
그렉이 손을 올리고.
그렇게 모두가 테이블 중앙에 손을 모으자 나 역시도 손을 올려두었다.
“자, 그럼.”
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만약 이거 하다가 다 망해서 우리 모두가 길거리로 나앉게 되면 각자 총하고 총알 두 발씩을 준비하죠.”
“그건 왜……?”
“바트를 쏘고 자살하자고?”
“아뇨.”
나는 씨익 웃었다.
바트에게 두 발 쏴야지.
그렇게 유쾌한 분위기 속에 우리들의 마음이 결의되려는 순간이었다.
“…………저기요?”
눈을 가늘게 뜬 티파니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 장인이거든요.”
“……예?”
아니, 언제 그렇게 됐죠.
* * *
더 팍은 효율적인 사람이었다.
인간관계에서도 무난하고 일도 상황에 맞춰가는 편으로, 그런 성격이 이번 일의 대응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틀랜타 스크류잡.
물론, 더 팍은 크게 분노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생각도 못한 피해를 자신이 감내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를 통해서 업계의 전도유망한 선수 하나가 완전히 몰락해버렸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팍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고 바트 맥센에게 계약 해지를 요청할 것인가.
아니면 이 일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고 업계를 위해서 행동을 할 것인가.
팍의 고민은 길지 않앗다.
일단 그는 이 업계를 사랑했고.
동시에, 자신과의 계약으로 러셀 하트의 계약이 어그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복귀를 선택했다.
바트는 팍이 스크류잡의 피해자임을 확실히 해주었고 그렇기에 우려하던 이미지 손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팍은 WWF 월드 챔피언 벨트를 기꺼이 짊어졌고 매주 도전자들을 쓰러뜨리는 각본을 수행하면서 기다렸다.
이 벨트를 이어받아 스크류잡이라는 상처를 팬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낼 선수가 업계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바로 신이었다.
하지만 링 복귀를 선언한 그는 놀랍게도 팍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그리고 그걸 들은 순간.
팍은 신이 일반적인 선수들과 다르다는 사람들의 말을 십분 이해했다.
그는 그냥 넘어갈 마음이 없었다.
“저는 스크류잡을 할 겁니다.”
“뭐?”
팍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팬들과 모두의 마음에 상처이자 흑역사로 남은 스크류잡을 다시 꺼내 대체 무엇을 이루려고 한다는 말인가?
“바트 맥센을 엿 먹일 겁니다. 그리고 이 회사를 떠나서 ACW로 가 놈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있습니다.”
신은 반쯤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저희가 이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프로레슬링 업계는 계속해서 바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말 테니까요.”
“그게 나쁜 거라도?”
팍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트는 분명히 잘못된 선택을 했어. 하지만 그 남자가 있기 때문에 이 업계가 유지되어온 것은 사실이잖아?”
“그렇죠.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바트 맥센은 이번 일을 통해서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 보였죠.”
또 다시 아틀랜타 스크류잡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대체 어느 누가 장담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프로레슬링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와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를 위한 스크류잡이었다.
더 이상 바트 맥센의 더럽고 치졸한 방법은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스크류잡.
또한.
“저는 ACW로 넘어가서 증명하겠습니다. 제가 당신보다 낫다는 사실을.”
“……하.”
팍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선언을 한 신을 감탄하며 보았다.
배짱이 있다.
분명 이것을 말하지 않고 스크류잡을 일으키는 방법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바트 맥센과 확실히 선을 긋기 위해, 오직 그만을 엿 먹이기 위해, 팍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게 일단 마음에 들었다.
팍이 스크류잡을 바트에게 알릴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감내한 것이니까.
거기에 더불어.
팍은 왠지 모르게 이 남자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프로레슬링 업계를 믿고 맡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지금의 팍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건 프로레슬링이 아니라 영화였지만.
그래도 첫사랑에 대한 예우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신을 도와서 그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네가 너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싸움인데, 살살 해서는 안 되겠지.”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일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아틀랜타 스크류잡을 넘어서서.
레슬 임페리움 스크류잡.
그리고.
업계의 미래를 결정지을 싸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