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418화 (418/634)

418.

그렇게 여러 가지 일로 인해 파란만장했던 4월이 지나가고 찾아온 5월.

러셀 오메가는 계속 고전 중이었다.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ACW 선수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상대가 하는 ‘너는 ACW를 무시한다.’는 말이 팬들에게 먹혔으며.

거기다가 그들이 기대하는 새 피니시 무브는 쓸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스탠 슈타이너는 러셀을 완전히 개무시하고 의견조차 듣지 않았으며 매주 대립마다 정말로 슛에 가깝다 싶을 정도로 러셀을 강하게 공격했다.

링에서는 입을 다물고 그걸 견뎌내던 러셀은 백스테이지로 돌아오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탠 슈타이너에게 싸움을 걸고 두들겨 맞았다.

사실, 러셀이 완벽하게 진다고 볼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가 그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일단 러셀은 링 위에서 맞고 지친 상태로 내려와서 싸워야만 했고, 선방은 무조건 스탠 슈타이너가 쳤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러셀이 잘 밀어 붙인다 싶으면 현 월드 챔피언인 잭 제럿이 꼭 합류해 함께 공격했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은 항상 패배했고 얼굴이 퉁퉁 불은 채 돌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부커와 거트는 끼어들기도 난감하다고 생각하며 러셀을 계속 지켜주었다.

이건 러셀의 싸움이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계속 스탠에게 덤벼드는지 알았기 때문에 차마 말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인정을 받고자 했다.

이 업계는 거친 마초들로 가득한 곳이었고, 올드맨들 위주로 구성된 ACW는 특히나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일종의 무리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ACW 사람들은 2천만이라는 거액의 연봉을 받는데다가 WWF에서 팽을 당해 넘어온 러셀을 무시했고.

그런 상황에서 재수 없게도 스탠 슈타이너가 나서서 직접 러셀을 조지고 있을 뿐, 나머지 사람들도 다 그것을 즐긴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러셀은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이곳의 왕에게.

하지만 문제는.

그 왕이라고 할 수 있었던 캡틴 로건이 회사를 떠나, 무리가 완전히 엉망진창이라는 사실로부터 기인했다.

ACW는 완전히 무법지대였다.

협력을 통해 쇼를 꾸려가야 하는 프로레슬링 회사로서는 최악의 상황.

그럼에도 러셀은 꿋꿋했다.

매번 얼굴에 밴드를 붙이고 제 시간에 나와 훈련을 수행했으며, 그때만큼은 스탠이 거는 시비도 무시했다.

그가 스탠을 공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링 위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점차.

러셀의 그런 노력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조금씩이지만 나오기 시작했다.

러셀은 ACW에서 거의 유일하게 10분 이상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선수였고, 그래서 매주 경기를 뛰었는데.

이번 주에는 스탠 슈타이너가 아니라 로건 이후 ACW의 아이콘, 크로우와 경기를 가지게 될 예정이었다.

선수로서는 슬슬 은퇴를 바라보아도 될 나이였지만 그 카리스마는 여전했고, 팬들로부터 여전히 환호를 받았다.

락커룸 내에서도 평판이 좋은 크로우는 러셀의 상황을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듯 줄곧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와 경기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러셀은 출근을 하자마자 크로우를 찾아가 곧바로 말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크로우.

흰색의 페이스 페인팅으로 프로레슬링 업계에 큰 족적을 남긴 그는 WWF 바깥의 아이콘으로도 유명했다.

nWo에 홀로 대적한 각본을 수행했던 그는 로건이 불미스러운 일로 회사를 나간 뒤로도 계속 남아있었다.

문제는 각본팀이 그를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면서 반쯤 방치해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주어진 각본 또한 개막장이었다.

크로우는 러셀에게서 승리할 계획이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선수를, 현재 WWF로부터 이적해온 가장 핫한 스타를 먹게 만든다고?

아무 이유도 없는 각본이었다.

그렇게 해서 뭘 어쩔 텐가.

러셀은 크로우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를 받을 테고 이적으로 인해서 얻은 주목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 테지.

거기다 경기 시간도 10분.

선수로서 확실하게 화를 내야만 하는 타이밍이었으나, 크로우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어차피 죄다 병신인데 앞으로 각본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던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러셀은 달랐다.

그게 좀 크로우의 흥미를 끌었다.

“경기, 어떻게 할까요?”

“적당히 해. 너랑 나랑 기술 주고받으면서 니어 폴 몇 번 보여주다가 내가 스콜피온 데스 드랍으로 널 쓰러뜨리고 커버, 원, 투, 쓰리. 끝.”

“그것보다는 제가 탭 아웃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팬들이 ‘슈터’ 대결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

크로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가장 불편한 이야기를, 지금 눈앞에 있는 젊은 레슬러가 꺼낸 것이었다.

다들 아는 사실이듯이, 프로레슬링은 격투기적인 퍼포먼스가 가미된 드라마였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발전을 거듭했다.

그 일환으로, 선수들은 제각기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방법이 먹히자 다른 선수에게 사용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예를 들자면 이러했다.

존 마이클스의 ‘스윗 친 뮤직’은 앞뒤로 들어가는 마이클스의 독특한 퍼포먼스를 제외하면 사실상 그냥 슈퍼 킥이라는 일반적인 기술이었다.

옆으로 서서 다리를 들어 상대방의 안면이나 가슴팍을 걷어차는 기술.

그렇기에, 마이클스가 로스터에 있으면 그 특별함을 지켜주기 위해서 다른 선수들의 슈퍼 킥은 봉인되었다.

하지만 러셀이 이적을 해오면서 그런 식의 문제가 하나 생긴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피니시 무브가 겹쳤다.

정확히 말하면, 러셀의 ‘하트 슈터’는 샤프 슈터의 변형기였으나 크로우는 원본을 피니시 무브로 사용했다.

‘스콜피온 데스락’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봤을 때 후배인데다가 나중에 단체에 들어온 러셀이 기술을 버리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지난주에 스탠에게 사용한 그 기술을 피니시로 밀고 나가려는 거냐?”

“예? 어,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건 정말 우연히 나온 뭐 그런 거고.”

“하지만 사람들은 기대할 텐데.”

“그것보다야 선배님이 스콜피온 데스락을 써서 절 탭 아웃 시키는 것을 더 기대하지 않을까요.”

“…….”

이걸 뭐라고 해야 한담.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고작 10분짜리 경기에서 길게 잡아야하는 서브미션으로 경기를 끝내자고 말하지를 않나. 그것도 자기가 거기에 당해준다고 먼저 말해오지를 않나.

야망이 없는 놈인가?

“네 이미지에 안 좋을 텐데.”

“선배님 이미지에는 좋을 겁니다.”

러셀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방어적으로 이야기를 하려던 크로우도 가만히만 있을 수 없어지는 법이었다.

“왜?”

“네?”

“너는 이적해서 한창 주가를 올려 자리를 잡아야 할 시기 아니냐. 왜 위클리 쇼에서 그런 식으로 나에게 패배하는 각본을 받아들이는 거지?”

“어, 그냥 지시니까요.”

“지시라서 한다고?”

“프로 아닙니까.”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우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ACW 락커룸은 완전히 전쟁터였다.

모든 선수들이 하나 있는 파이의 큰 부분을 가져가기 위해 총만 안 들었지 그야말로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적해온 러셀이 스콜피온 데스락에 당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네 이미지에 안 좋을 텐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러셀은 고개를 내저었다.

위대한 선배의 기술에 당해 패배하는 것은 절대로 부끄러운 게 아니다.

게다가.

“그 경기가 끝은 아닐 테니까요.”

“허어.”

크로우는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맥이 딱 풀렸다.

사실.

‘무시하려고 했는데.’

그러려고 했다.

러셀 오메가가 지금 락커룸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잘 알았다.

하지만 크로우는 거기에 딱히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상태였다.

로건이 나간 이후로, 락커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크로우가 그러니 스탠 슈타이너가 미쳐 날뛰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제대로 뭔가 일을 해보려는 러셀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거기에 동화되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아주 약간은 이쪽에서도 맞춰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러셀 오메가는 지금, 크로우가 잊고 지냈던 한 가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선수로서의 긍지였다.

협력해 쇼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래.’

나간 로건은 로건이고.

쇼는 계속 되어야겠지.

일단.

“잠깐 기다리고 있어라.”

“어, 옙.”

“맥스하고 담판을 짓고 오겠어.”

맥스는 ACW의 현재 총괄 프로듀서인 맥시밀리안 루카스를 말했다.

그래도 경기 시간이 20분은 되어야지 싶었던 것이다.

* * *

러셀은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Waaaaaaaaaaaaaaaggggghhhh!!]

며칠 뒤 펼쳐진 ACW 나이트로.

월요일 밤의 버닝콩 정면으로 대결을 펼쳐야 하는 프로그램. 러셀 오메가는 압박감 속에 링으로 올라갔다.

[Omega! Omega! Omega! Omega! Omega! Omega! Omega! Omega!]

팬들의 새로운 챈트 속에 러셀은 몸을 풀고 상대가 나오는 걸 기다렸다.

경기복도 바꿨다.

숏 팬츠에서 롱 팬츠로.

흰색 컬러에 붉은색 라인은 캐나다의 국기를 상징했고, 엉덩이에 오메가 사인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었다.

러셀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크로우가 링으로 나왔다.

[Waaaaaaaaaaaaaaagggghhhh!!]

팬들은 우렁찬 환호를 보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함께 장엄하게 연주되는 그의 테마는 마치 캐스켓-테이커를 정면으로 마주한 듯했다.

크로우는 그 정도의 남자였다.

로건이 떠난 이후, ACW를 어떻게든 지탱하고 있는 보배. 그렇기에 러셀은 지금 시험대에 오른 셈이었다.

그와 마주해서 과연 어떤 경기를 보여줄 것인가. 러셀은 심호흡을 했다.

지금쯤.

자신이 머물렀던 ‘반대편 세계관’에서는 한창 시나와 오튼이 WWF 통합 챔피언십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서 마구 설전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그 시청률은 분명히 ACW를 크게 웃돌고 이쪽을 완전히 삼류 쇼로 느껴지게 만들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러셀은 레슬링을 할 생각이었다.

하트던 오메가던 아무 상관없이.

이 기나긴 여정의 끝에 서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그렇게 의지를 잡았다.

땡땡땡-!

시작되는 경기.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하며 러셀은 일단 링을 크게 돌기 시작했다.

반대편의 크로우를 보자 하얀색 페이스 페인팅 아래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렇기에 티는 잘 나지 않았지만, 그는 캐스켓-테이커보다 무려 5년이나 더 일찍 링 데뷔를 한 노장이었다.

그와 함께 WWF라는 거대한 단체 바깥에서 활동하며 계속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온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팬들의 생각은 어떤가.

Anti-WWF로 요약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러셀이 그와 싸워서 손쉽게 승리를 해버린다면, 분명히 그만한 역풍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러셀은 어쨌든 간에 WWF로부터 넘어왔다는 이미지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러셀 오메가’라는 남자가 ACW 팬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면.

분명히 마지막으로 크로우와 싸워 이김으로써 확실한 회사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될 터였다.

그렇기에.

이 경기는 지는 게 맞았다.

아직 러셀은 이적 초창기였고 팬들은 환호를 보내면서도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이 충돌했다.

쿵!

묵직한 사운드와 함께 이어지는 락 업. 팔과 팔이 엉키며 근육질의 두 사내가 그대로 힘을 겨루기 시작했다.

[Waaaaaaaaaaaaaaaaagggghhh!]

힘을 겨룬다.

굉장히 고전적이면서 동시에 쉬운 방식이었다. 러셀은 크로우와 그렇게 뒤엉켜 다투면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내 밀어붙였다.

[Uoooooooooooohhhh……!!]

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키는 크로우가 조금 더 컸으나 러셀은 젊은 선수 특유의 탄력을 바탕으로 그렇게 상대를 코너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어.

퍼억!!

안면을 긁어내듯 펀치를 날렸다.

[Booooooooooooo-!]

쏟아져 나오는 야유.

팬들은 러셀 오메가에게 호의를 보였으나, 이렇게 초장부터 그가 크로우를 밀어붙이는 그림에 야유했다.

하지만 그건 예상한 대로였다.

러셀은 코너에 기대어 서있는 크로우의 뒤통수에 팔을 휘감고는 그대로 뛰어올라 턱에 니 킥을 먹였다.

빠악-!

휘청거리는 크로우.

다시금 터지는 야유.

뒤로 돌아서 나온 러셀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팔을 펼치며 팬들의 야유에 응답했다.

“어쩌란 거야!!”

[Boooooooooooooooooo-!!]

야유가 한층 더 커졌다.

ACW로 이적해온 이 젊은 WWF 출신의 선수는,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알리며 링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니, 애초에.

WWF에서도 커리어 대부분을 악역으로 보냈던 만큼, 러셀은 이런 식의 반응에 더 익숙한 건지도 몰랐다.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러셀은 크로우가 기대어 서있는 코너로 돌진해 그대로 힘껏 부딪혔다.

콰앙-!

그리고 튕겨져 나오는 크로우의 몸을 들어 올려 그대로 바닥에 던졌다.

보디 슬램.

콰앙-!!

“크아악!”

크로우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뱉으며 그대로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러셀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크로우의 뒤로 다가가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 상태에서 뽑아내며.

[Uooooooooooooooooohhhh!!]

이어지는 저먼 수플렉스.

앤 홀드.

투콰앙-!!

아무리 야유를 보내던 팬들이라도 순간 러셀의 힘과 유연성, 기술력에 감화될 정도로 멋진 무브가 들어갔다.

브릿지 자세를 잡은 러셀은 자신이 잡아 던진 크로우의 허리를 계속 붙잡은 채 그대로 핀 폴에 들어갔다.

[1……!]

[2……!]

어렵지 않게 빠져나오는 크로우.

“후우.”

기존까지의 ACW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젊고 에너지 넘치는 경기 스타일.

그렇기에 팬들은 이적생, 러셀 오메가의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집중했다.

바로 거기에서 러셀은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풀려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 경기는 비록 패배하지만.

이건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한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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