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
코디와 더스티의 경기가 끝났다.
고전적인 경기였던 만큼 그것을 수식하기 위한 말로는 다소 지리멸렬한 표현이 오히려 좀 더 어울릴 터였다.
그렇기에 러셀은 생각했다.
정말로 ‘환상적인’ 경기였다고.
코디는 어엿한 사내로서 팬들의 인정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자기 아버지와 연합을 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모두가 신의 작품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몰라도 러셀 오메가만큼은 확실히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8월의 초대형 페이퍼뷰에서 상대할 선수를 멋지게 키워냈다.
이전까지, 다시 말해 WWF 시절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코디 로스를 결코 좋은 선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Not Bad 정도.
평범한 미드 카더 정도로 그 누구도 그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조연 캐릭터 중 하나.
딱 그 정도라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코디는 자신이 그때와는 다른 선수라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WWF라는 족쇄를 벗어나 새장 밖으로 나온 그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거기에는 더스티 로스라는 거물 아버지가 옆에서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부분 역시 클 터였다.
하지만 그걸 캐치하고 이렇게 디테일이 좋은 각본을 통해 풀어낸 건, 그러한 능력을 갖춘 신의 영향이 컸다.
그로 인해 코디는 애송이에서 단숨에 모멘텀을 가진 선수로 탈바꿈했다.
남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결국 신은 자신이 이후 대립해나갈 상대방을 보란 듯이 탄생시킨 것이었다.
자신뿐 아니라 상대까지도 생각하고 부킹하는 그의 모습을 생각한 러셀은 강한 의지가 깃드는 걸 느꼈다.
질 수야 없지.
“……좋아.”
그는 자신을 다잡듯 중얼거렸다.
오늘 러셀은 그간 ACW에서 선수들과 대립하며 쌓아온 모멘텀을 바탕으로 크로우에게 승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8월에는 ACW 월드 챔피언인 잭 제럿에게 도전해 타이틀을 따내는 초특급 푸시가 예정된 상태였다.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ACW로서는 젊고 재능도 있는 러셀을 회사의 차세대 간판스타로서 미는 것이 정말로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그걸 팬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느냐는 어디까지나 러셀 본인의 능력에 달려있는 상황이었다.
심호흡을 한 러셀은 그렇게 세미 메인이벤트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코디가 그랬듯이.
신이 그랬듯이.
자신도 자신을 증명한다.
그 생각에 흔들림은 없었다.
아무렴.
확고한 목표가 있으니까.
올해를 무사히 넘기고 내년 스타게이트에서 자신이 누군지를 증명해낸다.
이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친구이자 라이벌로 같이 해온 남자와 함께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다.
바로 그게.
지금 러셀이 살아가는 이유였다.
“러셀 선수!”
명상을 하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헤드셋을 낀 채로 서있던 영상팀 막내가 소리쳤다.
“가시죠!”
고개를 끄덕인 러셀이 일어섰다.
흰색에 붉은 라인이 들어간 코트.
롱팬츠 역시도 비슷한 디자인이었고 엉덩이 부분에는 오메가 마크가 붙어서 지금 러셀이 누군지를 말해주었다.
그는 복도를 따라서 이동했다.
“러셀!”
그리고 돌연, 문에 기대어 서있던 스탠 슈타이너가 러셀을 불러 세웠다.
“Break A Leg.”
“감사합니다.”
행운을 빈다.
그런 뜻이 담긴 말에 러셀은 싱긋 웃어주고는 계속해서 복도를 걸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의 도움을 받아 러셀은 어렵지 않게 ACW에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스탠 슈타이너와는 아직까지도 사이가 영 좋지만은 못했으나, 그래도 서로 존중은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러셀 오메가는 나아가고 있었다.
* * *
다이너마이트는 그럭저럭 선방했다.
‘좀 한숨을 돌리게 된 셈이지.’
나는 그렇게 평가를 내렸다.
ACW는 이제야 좀 위험한 불을 끄고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새싹들을 천천히 키울 여지를 얻게 된 셈이었다.
WWF에게 전반적인 시청률이나 판매량은 분명 밀렸으나, 그래도 완전히 망하리라는 예측으로부터는 벗어났다.
그 모든 게 러셀과 코디 같은 새로운 슈퍼스타들의 약진 덕분이었다.
그들이 펼친 대립과 경기는 ACW에 이전까지 없었던 활력을 불어넣어주었고 전문가들로부터는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WWF를 사랑하는 코어 팬들이 시기하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사건은 프로레슬링 전문 기자인 데이브 렐처의 라디오 방송에서 발생했다.
일단 그 시작은 그들이 ACW 다이너마이트를 칭찬하면서 이루어졌다.
[어메이징한 쇼였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좋아, 또 신이나 빨자고.]
[갑자기?]
[코디의 성공을 설명하려면 그것 말고는 없어. 솔직히 말해서, ACW가 이런 좋은 각본을 쓸 리가 없잖아?]
[……그건 맞는 말이군.]
거기에서 나는 쓰게 웃었다.
코디와 러셀을 칭찬해야 할 시점에서 나부터 걸고 넘어가다니.
누가 보면 내가 이쪽 방송에 자금이라도 주는 줄 알겠다. ……물론 조금 알고 지내는 사이긴 하지만서도.
[우리 구독자 중 몇몇은 너무 과하다고 말하지만, 그 친구는 그럴 가치가 있어. 확실한 이 시대의 스타지.]
[이전 회사로부터 나온 뒤 포지셔닝을 아주 영리하게 했고. 로건을 끌어들여서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었어.]
[다들 그렇게 생각했잖아?]
[그동안 ACW의 구심점과 같았던 할리우드 로건이 회사를 나가면서 솔직히 망할 거라고 봤는데.]
[그렇게 무책임한 짓을 한 로건을 어떻게 다시 회사로 끌어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대단한 친구야.]
[확실하게 회사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지. 코디에 대한 부킹도 그렇고. 어, 잠깐. 여기 실시간 코멘트가 하나 왔는데. ……안녕하세요. 데이브. 어떻게 신이 자신의 모든 부킹에 관여했다는 걸 확신하고 말하죠? 당신은 편향적이야. 음, 이거 참 재미있는 의견이로군.]
[아니, 하지만.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잖아? 신은 지금껏 자기 부킹을 스스로 해왔다고.]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남들이 구린 짓을 해대는데 자기 혼자서만 좋은 각본으로 치고 올라갔겠어?]
[아 뭐, 그래. ‘좋은 각본’은 확실히 개인 감상의 영역이기는 해. 그래도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건, 신이 있는 단체는 언제나 성장을 했다는 거야.]
[우리 구독자 여러분들 중에 WWF의 팬 보이들이 많은 건 알아. 그렇기 때문에 구독료를 위해서 좀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느끼기는 해.]
[그래서 일부러 그 보도 이후 ‘그 사건’에 관해서도 언급을 자제하고 있잖아? 사실 그게 지금 이 업계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이야기인데.]
아틀란타 스크류잡.
확실히 WWF에 충성심이 깊은 팬들은 그 사건을 자신들의 흑역사로 느끼고 언급조차 싫어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레슬 임페리움이라는 신성한 무대에서 엿을 날리고 떠난 나를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혐오하고 있지.
하지만 지금은 굳이 거기에 대해 언급하는 게 아니었는데도 이들이 먼저 발끈해서 렐처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러므로 렐처와 그 동료 기자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은 오히려 WWF 팬들을 의식하면서 발언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그들로부터 시비가 걸려왔으니 말이다.
당연히 좋은 말도 안 나오겠지.
[제기랄, 근데 이미 말해버렸군.]
[WWF 팬 보이들은 애써 외면하려는 사실이지만, 신은 회사를 나가면서 확실히 전 세계의 프로레슬링 시청자들에게 말했어. 나는 절대로 이런 부조리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게 먹혔지. 사실 신이 얼마나 ACW의 부킹에 관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내가 대신 말해주지. 코디는 분명 애송이에서 남자가 되었고, 앞으로 신과 좋은 대립을 해나갈 거야.]
그들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번 방송이 현재의 프로레슬링 업계를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고 있다.
사실 내가 WWF를 버리고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WWF에게 엿을 날리고 ACW 측과 붙으면서 불이 붙어버렸다.
두 단체의 팬들은 상대 단체를 살벌하다 싶을 정도로 디스했다. 프로레슬링 업계는 그런 식으로 양분되었다.
‘아마 다들 느끼고 있는 거겠지.’
프로레슬링 업계가 곧 다가올 큰 이벤트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하리라는 것을.
그 예감이 맞았다.
어떻게든 이번 싸움을 통해서 바트 맥센과 내 싸움은 결판이 날 터였다.
그리고 그건.
그다지 먼 일은 아닐 테지.
* * *
다이너마이트가 끝나고 며칠 뒤.
다음 위클리 쇼가 열릴 경기장에 도착한 나는 웬일로 여기에 와있던 부사장, 데릭 비숍의 부름을 받고 찾아갔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가만히 앉아있던 그는 나와 인사를 나누고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해왔다.
“어떻게 보십니까?”
“……뭐가요?”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어, 그래. 뭐.
도치법으로 말하는 게 좀 더 극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남이 하는 걸 듣자니, 그것이 또 데릭 비숍이라는 사고뭉치다 보니 왠지 모르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요새는 술을 안 마시는 듯했지만.
대충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바트 맥센 못지않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해대서 주변이 아주 피곤하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뭔고 하니.
“이번 다이너마이트를 어떻다고 보십니까? 저희가 WWF를 다시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제가 은행 상담원은 아니거든요.”
“알고 계시잖습니까.”
미소를 짓는 비숍.
물론,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이런저런 예상이 과거의 전생의 일도 있고 해서 대부분 맞아떨어지기는 했었다.
그래도 무슨 샤먼에게 점 봐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물어오자 솔직히 좀 당황스럽기는 했다.
“확실히 말하죠. 미스터 비숍.”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다이너마이트로 인해 ACW가 회복세에 들어선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럼 언제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죠?”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방금 한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서 이 업계의 일에 임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영 덕스나 젠코도 이적을 해오지 않은 상황에서 무어라고 단언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저요?”
“그럼 당신 말고 있습니까.”
이거 대화가 안 이어지는군.
내가 입을 다물자 뭔가 고민하듯 눈썹을 찡그린 비숍이 입을 열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낙관적이시군요.”
“……지려나요?”
“비관적이시네요.”
“아, 아니. 저보다는 현업에 계시는 신 선수가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이건 뭐.
완전히 감을 잃었군.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나는 머릿속에 그런 격언을 잠시 떠올리고는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더 이야기하기도 귀찮고.
비숍이 어떤 포지션을 잡고 있는지 대충 감이 왔으니 그걸 확정지을까.
“그럼, 확실히 말씀을 드리죠.”
“예, 뭡니까?”
“저희 쪽에서 앞으로 드리는 제안을 잘 받아들여주신다면…… WWF를 이길 확률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요?”
“그럼 믿고 맡기겠습니다!”
활짝 웃는 비숍.
그렇게 회의랄 것도 없는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온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며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옛날이랑 똑같군.’
그랬다.
ACW가 초창기에 삽질을 했던 이유는 데릭 비숍이라는 실무자 말고도 프로레슬링에 문외한인 이들이 권력을 가지고 단체를 이끌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단체가 산으로 갔다.
이후 데릭 비숍이 체드 터너의 신임을 받아 실무를 총괄하면서 겨우 ACW는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과거 프로레슬링 업계에 잔뼈가 굵던 비숍이 문외한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집이 필요 이상으로 세지고 삽질을 반복하면서 자신감이 떨어진 상황이라 저런 거겠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가 믿고 맡겨준다면 적어도 내 각본에 한해서만큼은 별다른 문제없이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
일단은 코디와의 대립부터.
훈련장으로 들어서자 러셀과 코디가 열심히 치고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
쿵-!
‘나쁘지 않군.’
러셀 오메가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기술 시전이 깔끔하기로는 수위에 꼽히는 선수였다.
그 말인즉슨 속도를 얼마든지 빠르게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코디는 잘 버텨내고 있었다.
그걸 좀 지켜보던 나는 이윽고 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지는 것을 보고는 두 사람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좀 쉬고 해!”
그 말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두 사람이 링 아래로 천천히 내려왔다.
물과 수건을 건네고.
코디가 좀 호흡을 정돈할 때까지 기다린 나는 이내 말을 걸었다.
“기분은 좀 어떠냐.”
“아주 좋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예, 솔직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래?”
“선배님을 믿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지만, 도중에 너무 팬들 반응이 안 좋아서 과연 계획한 대로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멋지게 해냈지.”
러셀이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정말로 좋았어. 코디.”
“가,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대답하는 코디.
그러더니 녀석은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뭘 했다기보다도 아버지와 신 선배가 많이 도와주셔서 잘됐다고 생각하지만요.”
“지금까지는 그랬을 수도 있지.”
나는 다소 낯간지러운 코디의 이야기에 동의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부터야.”
“……예.”
“이참에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어떻게든 올해 말까지 코디, 너와 러셀이 이 단체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팬-페이보릿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제, 제가요?”
“그럼 누구겠어.”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코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할 수 있어.”
링 위에서 우리는 서로 할 말 못 할 말 다 해가며 치고받을 예정이었지만.
그 목적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