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
신은 스스로가 프로레슬링이 잃어버린 순수성을 되찾기 위해서 싸우겠다고 팬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러셀 오메가는 확실히 그 말에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서 할리우드 로건과 싸워 이기고 싶어 했다.
마지막으로 할리우드 로건은 신과의 관계는 정리했으며, 만약 원한다면 러셀을 도와주겠다고 입장을 표했다.
복잡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현실과 가상을 절묘하게 줄타기하고 있는 각본은 분명히 프로레슬링 업계 전체에 던지는 메시지와도 같았다.
스크류잡이나 스타게이트 사건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분명히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는 각본이었다.
하지만 러셀은 그 문제에 뛰어들기에 앞서 경기를 하나 치러야만 했다.
바로 크리스 젠코와의 경기였다.
11월 말에 개최된 월드 워 3.
WWF의 링 서바이벌에 대항해서 만들어진 ACW의 대형 페이퍼뷰로, 무려 60명의 선수가 동시에 참여하는 ‘배틀 로얄 매치’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
부사장인 데릭 비숍이 ‘WWF가 30이면 우리는 딱 두 배만 하자.’라고 해서 60명이나 참가하게 된 것인데.
경기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막아보겠답시고 링을 세 개로 늘리면서 완전히 혼돈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
거기다 로스터가 60인을 채우는 경우도 드물었기에 몇몇 선수들은 탈락하고도 다시 출전을 해야만 했다.
급하게 가면 같은 걸 써서 신인 루차도르 선수인 것처럼 속이고 말이다.
nWo 각본이 먹힐 때만 해도 월드 워 3는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때는 정말 ACW가 뭘 해도 다 먹히던 황금 같은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ACW는 예전과 달랐다.
그때처럼 파격적이고 과감함으로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던 때와는 달랐다.
그렇기에 배틀 로얄 매치의 참가 인원을 60인에서 30인으로 크게 낮췄다.
링도 하나로 줄여서 팬들이 부담감 없이 집중할 수 있도록 정상화했다.
하지만 물론, 월드 챔피언이었던 러셀은 배틀 로얄에 참여하지 않고 메인이벤트에서 크리스 젠코와 맞붙었다.
경기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크리스 젠코와 그 매니저로 나온 잭 스웨어의 악역 운영 속에 팬들은 러셀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경기의 막바지.
젠코를 쓰러뜨리고 그를 돕기 위해 난입한 스웨어마저도 날려버린 러셀은 그대로 탑 턴버클 위로 올라섰다.
15만에 이르는 팬들의 성원이 가득한 가운데, 그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크레센트.
근육질의 거대한 몸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앞으로 돌아 지면에 쓰러져 있는 젠코의 위로 떨어졌다.
투콰앙-!
[Yeeeeeeeeeeeeeeeaaaahhhh!!]
팬들의 환호와 함께 이어진 핀 폴.
[1……!]
[2……!]
젠코는 겨우 벗어났다.
숨을 몰아쉬며 일어난 러셀은 그를 끝장내기 위해 곧바로 목말을 태웠다.
원 윙드 앤젤.
[Uooooooooooooooooohhhh……!]
그 준비 자세를 본 팬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고, 러셀은 모두에게 보란 듯이 옆으로 돌아섰다.
바로 그때.
젠코가 몸을 숙이며 휘두른 팔이 아래에 서 있던 심판의 눈을 긁어냈다.
심판은 눈을 가리며 돌아섰다.
그때를 노렸다는 듯 러셀에게 공격을 받고 나가떨어진 잭 스웨어가 젠코를 돕기 위해 링 위로 올라왔다.
러셀이 젠코를 목말에 태우고 있는 상황이 독으로 작용하는 순간이었다.
“크윽……!”
당황한 러셀이 이를 악물었고, 관객들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기에 순간 링으로 들어온 거구의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Uoooooooooooooooohhhhh!!]
검은 셔츠에 두건, 그리고 청바지.
바로 할리우드 로건이었다.
그가 스웨어를 공격해 링 아래로 내보내고는 러셀을 힐끗 돌아보았다.
순간 교차하는 시선.
이런 행동의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러셀은 로건이 밖으로 나가자 곧바로 원 윙드 앤젤을 사용했다.
투콰앙-!!
[Yeeeeeeeeeeeeeeeeeaaaahhhh!]
지면에 추락하는 젠코.
팬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러셀은 그대로 핀 폴을 시도했고 때마침 시야를 회복한 심판이 다가와 링 바닥에 대고 카운트를 셌다.
[1……!]
[2……!]
[3……!]
땡땡땡!
[Yeeeeeeeeeeeeeeeeeeaaaahhh!!]
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와 함께 자신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긴 싸움으로 지친 러셀은 바닥에 벌러덩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나쁘지 않은 경기였다.
젠코는 기술 구사력도 뛰어나고 경기를 만드는 능력 역시도 훌륭했다.
그렇기에 감사를 느끼며 러셀은 자신의 옆에 뻗어 있는 젠코에게 나지막이 한마디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젠코.”
“……야, 진짜 아프다. 이거.”
거기에 대해서도 감사를 느꼈다.
원 윙드 앤젤은 피폭자의 유연성이 받쳐주지 않으면 접수하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끙끙 앓던 그가 옆으로 굴러 링을 나갔고 러셀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경기는 끝났지만.
그로써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 여기.”
누군가 말을 거는 소리에 돌아본 러셀은 자신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로건의 모습을 발견했다.
“자네의 벨트네.”
“…….”
그가 황금빛의 벨트를 건넸다.
관객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했는지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고 러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로건은 그가 일어서자 등 뒤로 다가와 허리에 벨트를 감아주었다.
완전히 러셀 오메가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러셀은 자신의 옆에 선 로건을 여전히 의심하며 보고 있었다.
* * *
월드 워 3 다음 날의 나이트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링에 오른 러셀은 젠코와의 대립이 어땠는지를 설명하며 대립의 에필로그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팬들은 큰 성원을 보내주었다.
러셀 오메가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걸 팬들이 증명해주었다.
“어려운 싸움이었어. 특히,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게 영 피곤하더군.”
비릿하게 웃는 러셀.
“하지만 벨트는 여전히 여기에 있지. ……아, 그리고 뭔가 영 껄끄러운 일도 좀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Boooooooooooooooooooooo-!]
“그것만큼은 확실히 해둬야겠군. 로건이 없었어도 나는 젠코 따위에게 벨트를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거야.”
러셀은 진지한 눈으로 이야기했다.
할리우드 로건의 난입.
그를 통해 잭 스웨어의 난입이 저지되었고 러셀이 손쉽게 젠코로부터 승리를 따낼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로건의 난입이 없었다고 해도 젠코에게 패배하지 않았을 거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러셀.
[Yeeeeeeeeeeeeeeeeeeaaaahhh!]
팬들 역시도 그런 러셀을 믿고 호응을 보내주는 가운데, 한 남자의 테마가 좋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할리우드 로건이었다.
쟈니 핸드릭스의 Voodoo Child.
그 전설적인 기타 리프를 자신의 테마곡으로 사용하는 로건은 팬들의 야유를 받으며 링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Booooooooooooo……!]
[Yeeeeeeaaahhh!]
로건이 에어 기타를 치자 미미했지만 순간적으로 환호가 나왔을 정도.
그만큼 할리우드 로건이라는 남자가 가진 카리스마는 대단한 것이었다.
한 시대의.
아니, 두 시대의 아이콘.
선역과 악역, 두 가지 모습으로 회사를 이끌어보았던 전무후무한 선수.
링으로 올라온 그는 마이크를 쥐고 러셀의 앞에 서서 먼저 축하를 건넸다.
“멋진 시합이었네.”
“…….”
“물론, 내가 돕지 않더라도 자네는 혼자서 잘 해냈겠지. 하지만 나는 말했듯, ‘쉬운 길’을 보여준 것뿐이야.”
“여기는 무슨 일이지?”
러셀은 계속 로건을 경계했다.
말투에서 전설적인 선배에 대한 예의를 갖추던 게 사라졌고, 로건의 진의를 무척 의심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로건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 한번 하지.”
[Boooooooooooooooooooo!]
“왜 그러나? 설마 자네 정도의 선수가 신이 한 말을 신경 쓰고 있지는 않겠지? 그 녀석은 입만 살았어.”
“왜 갑자기 두 사람 사이가 보니 앤 클라이드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됐는지부터 먼저 설명하시지.”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러셀. 난 단지 내게 더 맞는 친구를 택했을 뿐.”
“그게 나라고?”
“맞네.”
“나는 받아들인 적 없는데.”
“그렇게 될 거야.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지. ……여기 있는 팬들 모두에게! ACW 월드 챔피언! 러셀 오메가!”
[Boooooooooooooooooooooo-!]
계속 야유가 쏟아졌다.
거기에 어깨를 으쓱하는 로건.
“다들 날 안 좋아하는군.”
“그러게 말이다.”
“무관심보다는 낫지. 이 모든 관심이 내게는 돈이 되거든. 그것도 여기 있는 멍청이들의 생각보다 더 큰돈이.”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팬들의 야유가 계속 이어졌지만 로건은 전혀 개의치 않고 끈질기게 러셀의 관심을 얻고자 했다.
“자네가 날 의심하는 건 알아. 하지만, 나는 이제 나이도 먹었고 내 유산을 이 업계에 남기고 싶다는 말이네.”
그로 인해 택했던 게 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로건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약하고 무능했다.
“링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정정당당함을 찾으려고 들지를 않나. 옛날의 그 치열함이 놈에게서 사라졌어.”
“그래서 내게 오시겠다?”
“그렇지. 실제로 자네는 보여줬잖나. WWF 시절, 행동을 통해서 말이야.”
“…….”
“그랬던 러셀이 오메가가 되더니 이제는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역이라.”
로건은 ACW와 러셀이 불편하게 느낄만한 부분을 대놓고 지적했다.
그게 바로 디스였다.
“너무 아름다운 동화 아닌가?”
“뭐 어쩌자는 거야?”
“자네에게 제안을 하고 싶어서.”
“미리 말해두지만, 당신을 매니저로 두라는 제안이라면 사양해두겠어.”
“그런 제안이었지.”
로건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자네는 분명 듣지 않을 테고. 그래서 방법을 좀 바꾸기로 했네.”
“……?”
“자네가 신의 말을 신경 쓰고 있다면, 확실히 그 벨트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면 될 일 아닌가?”
“무슨 말이야?”
“내가 시합의 주선자가 되지.”
“무슨 권리로?”
“한때 이 회사를 지배했던 nWo의 수장이었던 자의 권리라고 해둘까.”
[Uoooooooooooooohhhhh……!]
러셀의 계속된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로건의 모습에서 팬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각본 외적인 일로 엄청난 사고를 쳤던 로건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카리스마는 아직까지 유효한 것이었다.
팬들은 흥미를 느꼈다.
로건의 제안에.
그것을 알아차린 러셀은 일단 들어나 보자는 생각에 곧바로 질문했다.
“시합은 언제지?”
“바로 오늘. 바로 이 미국에서 가장 남자다운 도시인 휴스턴 텍사스에서.”
[Yeeeeeeeeeeeeeeeeaaaahhhhh!]
결국 환호가 터져나왔다.
일부러 로건이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하는 것도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그가 제시하는 경기나 현재의 각본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므로 러셀 오메가로서는 딱히 거절하기 어려운 그림이 계속 나왔다.
“상대는?”
“이 친구를 빼놓을 순 없지.”
로건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내 팬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대진을 입에 담았다.
“거트 엔젤.”
[Yeeeeeeeeeeeeeeeeaaahhhh!!]
경기장이 떠나가라 환호가 나왔다.
러셀 오메가 vs 거트 엔젤.
테크니션 vs 테크니션.
두 선수의 대진은 분명, ACW의 메인타이틀을 걸고 붙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러셀 오메가는 로건의 주도 아래에 챔피언십 방어를 해나가게 되었다.
* * *
미국 내의 프로레슬링에 대한 인기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냐면, 어디든 간에 프로레슬링이 ‘가짜 쇼’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의 시대가 이뤄낸 가장 큰 성과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이들이 힘을 보태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업계의 초석을 닦은 이들.
그렇기에 그들로부터 시대를 넘겨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로부터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실을 팬들로부터 의심받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부킹, 다시 말해 내가 테이커를 이기는 게 옳다고, 또 그것을 기대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러셀 오메가의 이번 부킹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
러셀은 좀 더 전설적인 선수들에게 이겨야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나나 시나, 심지어 오튼마저도 꽤 많이 이겼건만.
악역이었기 때문일까.
WWF 시절의 러셀은 위상에 비해서 그다지 좋은 부킹은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트라는 이름과 경기력, 자신의 카리스마만으로 계속 모멘텀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각본은 먹혀들었다.
12월 1주차.
20분 넘게 이어진 치열한 경기 끝에 러셀 오메가는 거트 엔젤로부터 힘겹게 승리를 쟁취해냈다.
시청률 기록은 다음과 같았다.
ACW
평균 시청률 : 9.5%
최고 시청률 : 10.3%
그리고 동 시간대에 방영하는 WWF는 이런 시청률이 나왔다.
WWF
평균 시청률 : 10.2%
최고 시청률 : 13.2%
어떻게든 따라가고는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두 개를 같이 시청하는 인원들도 물론 있겠지만, 수치만 놓고 봤을 때 월요일 밤만 되면 미국인들의 5분의 1이 프로레슬링을 보기 위해 소파에 앉는다는 말이었다.
‘미쳤군.’
일단 시청률 분석에 앞서서 나는 감격스러운 기분이 드는 걸 느꼈다.
매일 밤, 그리고 매일 밤.
우리의 시대는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문득 사람들은 과연 이 시대를 무엇이라 부를까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