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
솔직히, 인정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역시 ‘할리우드’다운 카리스마였다.
‘할리우드 로건’.
할리우드 최고의 슈퍼스타와 같다고 자신을 칭하며 붙인 이름이었다.
모든 이들의 ‘캡틴’이 아닌 ‘할리우드’. 그것이 바로 현재의 로건이었다.
‘대단하군.’
팬들의 야유를 받는 그 모습이 로건을 더 거대한 남자로 보이게 했다.
내가 커리어를 이어가며 그 악역으로서의 카리스마를 절반이라도 따라가면 다행이겠다 싶을 정도였다.
선역으로서도 아이콘.
악역으로서도 아이콘.
‘미친 인간이야.’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누가 저 남자가 보이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따라갈 수 있을까.
나는 심호흡을 하고.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링으로 나섰다.
[Boooooooooooooooooooooooo!]
그렇다고 로건의 카리스마나 그 스타일을 카피할 마음은 절대로 없었다.
그에게는 그의 길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으니까.
팬들의 야유 속에 입장로로 나아간 나는 먼저 로건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를 보란 듯이 가리켰다.
[Boooooooooooooooooooooo-!]
야유가 더 거세졌다.
그래, 팬들이 혐오할 상황이었다.
링 위에서 악당 둘이 의기양양해 자신들끼리 서로 잘했다, 잘했다, 하면서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링에 오른 나는 마이크를 쥐고 곧바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드디어 모두 원래대로 되었군.”
[Booooooooooooooooooooooo-!]
“여기에 있는 이 할리우드 로건에게 벨트가 돌아오면서 ACW 월드 챔피언십의 계보는 다시 이어지게 되었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팬들은 당장에라도 링 위로 난입해 우리를 린치할 기세였다. 나는 그러한 광경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이 틀렸나? 맞잖아! 지난 스타게이트에서 로건은 분명히 월드 챔피언십 벨트를 따냈다고!”
“그 말이 맞아. 신.”
로건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그리고 자네가 내게 그걸 가르쳐주었지. 나는 아직 ACW 월드 챔피언이며,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
로건이 벨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야유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불길이 퍼지듯 팬들 사이에 우리를 향한 증오의 감정이 흩뿌려졌다.
‘생각보다 빠르군.’
원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좀 더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팬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생각이었는데.
야유가 워낙 심해서 말을 이어가기는 힘들었고, 여기에서 슬슬 다음 사람이 링에 나와야할 것 같았다.
바로 데릭 비숍이었다.
[그만, 그만!]
그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순간 야유가 뚝 멎었고 입장로를 통해 마이크를 손에 쥔 비숍이 등장했다.
[로건, 적당히 합시다. 제발요. 이제 와서 대체 뭘 어쩌자는 겁니까?]
링으로 올라오는 비숍.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나와 로건은 피식 웃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당신이 친 사고를 수습하는 것만 해도…….”
“내가 친 사고라고?”
로건이 위협적으로 굴었다.
“너희가 날 엿 먹여놓고서는 내 탓으로 돌려? 비숍? 어디 말해보라고.”
사건은 이러했다.
2010년 스타게이트.
챔피언 잭 제럿과 도전자 할리우드 로건 간의 챔피언십 매치가 열렸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로건은 자신이 챔피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설득을 포기한 비숍과 제럿이 한패가 되어 그를 속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제럿은 링 바닥에 드러누웠다.
‘금딱지 벨트가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라. 이 욕심 많은 돼지 새끼야.’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잠시 당황하던 로건은 이내 제럿을 밟아서 핀 폴 해 타이틀을 따냈다.
물론, 그 사고의 모든 디테일을 지금 이 각본에 이용할 수는 없었다.
‘프로레슬링은 각본이 존재하는 드라마다.’라는 사실은 쇼의 존속을 위해서 직접적으로 말해선 안 될 금기였다.
물론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우리는 절대 그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너와 제럿이 짜고선 날 엿 먹였지! 날 늙은 개라며 무시하고 제대로 시합조차 치르지 못하게 만들었어!!”
우리는 그 사건을 사용하되,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각색할 생각이었다.
“로, 로건……!”
흥분한 로건에 의해 코너까지 내몰리게 된 비숍은 비참하게 애걸했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고 한들 로건은 엄청난 거한이었다. 비숍 같은 남자는 단숨에 찢어 죽일 기세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 로건이 사건의 피해자라고 포장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팬들의 반발을 살 터였다.
“지금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비숍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먼저 억지를 부렸잖아! 부킹에 끼어들고 회사의 CEO들에게 뇌물을 먹여 온갖 비겁한 짓을 해서 따낸 월드 챔피언십 도전 자격이면서!”
[Booooooooooooooooooooooo-!]
“당신 같은 남자를 영입하는 게 아니었어! 당신은 이 단체를 타락시켰다고! 빌어먹을……!”
절묘한 비유였다.
로건이 회사 내부에서 자신이 가진 정치적인 힘을 경기를 부킹하는 데 썼다는 설명과 함께 흘러가는 각본.
거기에 내가 끼어들었다.
“이야, 비숍. 로건의 부역자였던 당신이 말하니 설득력이 장난 아닌데?”
그 말이 맞았다.
비숍은 한때 이 회사가 nWo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어갔을 때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변절했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로건과 척을 지게 되자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니.
“재미있네.”
“You……!”
“조용히 하고 듣게나. 비숍.”
로건이 눈을 부라렸다.
거기에 비숍은 찍소리도 하지 못했고 덕분에 나는 편히 말을 이어갔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로건은 챔피언십 기회를 얻고 챔피언이 되었어.”
그 과정에서 제럿은 등신처럼 그냥 자리에 누워서 쓰리 카운트를 내주는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거기에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로건이 굴욕을 느껴 회사를 나간 뒤로 그들은 벨트를 다시 가져와 제럿을 챔피언으로 내세웠다.
“이게 말이나 돼?”
“그럼 단체를 나간 챔피언이……!”
“아니지! 당신은 로건의 집에 찾아가서라도 설득해야 했고, 어떻게든 이 남자를 쓰러뜨릴 사람을 찾았어야 했어! 그래야 하는 게 바로 챔피언 벨트라고! 강함의 상징이잖아!”
완전히 억지였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 듯한 말처럼 느껴졌지만 내가 하는 말은 자세히 따지고 들자면 밑도 끝도 없는 억지였다.
그럼에도.
“로건은 쓰러지지 않았어.”
이 말 하나는 확실했다.
“챔피언십의 권리는 이 남자에게 있지. 그래서 내가 이제야 이 벨트에 가치가 돌아왔음을 느끼고 있는 거야.”
챔피언.
그것은 최고를 뜻하는 상징.
“스스로 챔피언임을 포기한 잭 제럿 따위에게는 그 자격이 없다고. 비숍.”
[Boooooooooooooo……!]
야유가 약해졌다.
팬들 모두가 설득되는 것이었다.
챔피언은 최고의 상징.
그렇기에 러셀 오메가는 ACW의 상징이었던 할리우드 로건을 쓰러뜨려야 비로소 챔피언이라 말할 수 있었다.
“내 말이 틀렸나? 어디 대답해봐.”
야유가 계속 이어졌다.
로건이 벨트를 머리 위로 다시 치켜들었고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영웅이 필요했다.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리고 악당들에게 멋진 한방을 날려줄 존재가 링으로 모습을 드러낼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음악.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Yeeeeeeeeeeeeeeeeaaaaahhhh!!]
팬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러셀 오메가.
입장로 커튼을 걷고 링으로 나온 녀석은 뜻밖에도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링으로 올라오는 러셀.
벨트를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겼지만 녀석은 뜻밖에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손에 쥔 녀석은 로건이 아니라 먼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벨트에 가치가 돌아왔나?”
“……그야 물론이지.”
나는 야유 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은 러셀은 옆에 서 있던 로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당신도, 끝까지 그 벨트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할 셈인가?”
“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네.”
“좋아, 그럼 이야기는 쉬워지는군.”
순간 러셀이 눈을 부라렸다.
“한판 붙어보자고. 그 벨트를 걸고.”
[Uooooooooooooooooooohhhh!]
곧바로 경기를 승낙하는 러셀의 모습에 팬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그래도 벨트를 다시 가져오거나 할 거라고 다들 예상했는데, 러셀은 ‘쿨’하게 경기를 받아들였다.
거기에 제일 놀란 건 비숍이었다.
“안 돼! 러셀!!”
그가 마이크를 든 채 다가섰다.
“그만둬! 저 남자는 뱀이야!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챔피언은 저 아닙니까?”
“챔피언이 문제가 아니라……!”
“신의 말이 맞습니다. 챔피언은 분명히 그 링에서 가장 강한 남자죠.”
러셀은 팬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는, 여기 모인 팬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습니다.”
[Yeeeeeeeeeeeeeeeeeeeaaahhh!]
“이 링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여기 서 있는 저라는 사실을 말이죠.”
“아니, 하…….”
한숨을 내쉬는 비숍.
그리고 뒤를 이어 로건이 정말 뱀처럼 낄낄대며 러셀을 대놓고 비웃었다.
“이거 완전 영웅이로군.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정정당당하고 완벽한 정의의 선역이 되었어.”
“…….”
“하지만 러셀, 모든 영웅은 타락함으로써 완성되는 법이야. 자네에게도 분명히 그 순간이 찾아올 걸세.”
“아쉽지만 로건, 나는 저기 있는 시나처럼 정의의 편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뭔가 오해하고 있군.”
러셀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내가 왜 당신과 싸우겠다고 말했는지 알아? 그건 바로, 열이 받아서야.”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로건이 아닌 나를.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간단했다.
러셀은 지금까지 계속, 내가 한 말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이 멍청한 자식이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게 짜증이 나. 월드 챔피언십의 가치를 나에게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열 받는 짓이지.”
러셀은 로건을 다시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당신 쪽에서 시비를 걸어온다면 어쩔 수 없지. 로건. 나는 당신의 그 질긴 명줄을 따고 챔피언십의 가치를 증명하고 말겠어.”
[Waaaaaaaaaaaaaaaagggghhhh!]
팬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팬들은 분명히 러셀 오메가가 타락한 로건을 쓰러뜨리고 챔피언십의 가치를 지켜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성립되어가는 경기.
러셀은 다시 날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게 끝나면 그동안 건방을 떨었던 네 엉덩이를 걷어차주지. 신.”
[Waaaaaaaaaaaaaaaaagggghhh!]
팬들이 미친 듯이 환호했다.
결국 이들이 가장 보고 싶은 경기는 신과 러셀 오메가의 싱글 매치였다.
그 말을 듣고 가소롭다는 듯 웃은 나는 옆에 서있던 로건을 가리켰다.
“그것보다는 이 남자를 쓰러뜨리는 게 먼저 같지 않아? 러셀.”
“그렇겠지.”
“손쉬운 일이 아닐 거라고.”
“그야 물론이겠지.”
왜냐면 이 남자는.
“그동안 내 옆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경기를 하는지 연구해왔으니까.”
[Boooooooooooooooooooooo-!]
야유가 쏟아졌다.
로건은 그동안 러셀에게 호의를 가진 척 접근해 그의 스타일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러셀을 공격해 챔피언 벨트를 빼앗아 간 것이다.
분명 만만찮은 상대였다.
비겁하고, 지능적인 방식으로 때를 기다리고, 기회가 찾아오자 곧바로 자기 본색을 드러낸 ACW 최고의 악당.
하지만, 그를 앞에 두고도 러셀 오메가의 눈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WCW 1월의 페이퍼뷰.
‘소울 아웃’에서 반드시 로건을 쓰러뜨린 뒤, ACW 월드 챔피언십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말겠다.
그러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 * *
1월 2주차에 이어졌던 로건과 러셀의 세그먼트가 다시 방송에 나왔다.
[You And Me!]
One On One!
In A Soul Out!
[Yeeeeeeeeeeeeeeeeeaaaahhhh!]
전형적인 대사였다.
하지만 팬들의 환호성은 엄청났다.
‘굉장한데.’
시나는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플로리다에 위치한 대저택.
‘숀 시나’ 정도 되는 거물이 살기에는 검소한 저택이었으나, 혼자서는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홀로 있을 때의 시나는 언제부턴가 이런 식으로 한적한 것을 선호했다.
언제나 도시와 도시를 다니며 수많은 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줘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시나는 짧은 휴식 때마다 철저하게 사람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걸 선호하게 되었다.
[소울 아웃에서 경기가 잡혔습니다! 러셀 오메가와 할리우드 로건이 ACW 월드 챔피언십을 두고 맞붙습니다!]
[아, 이 경우에는 누구를 챔피언이라고 해야 할지 좀 애매하군요!]
[모든 게 정해집니다! 바로 오늘!!]
투콰앙!
폭음과 함께 CG가 떠오르고 두 사람의 매치 카드가 화면에 드러났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러셀 오메가 vs 할리우드 로건.
두 사람이 맞붙는 날.
반대편에서는 킹스 럼블이 열렸지만 어쩐지 시나는 팍이 WWF 월드 챔피언십을 따내는 럼블보다 소울 아웃에 조금 더 마음이 갔다.
그렇기에 텔레비전 채널은 줄곧 소울 아웃을 틀어놓은 채였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정말 굉장한 친구들이야.’
신과 러셀.
그리고 더욱이 신이.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시나는 작년 레슬 임페리움에서 신이 저지른 짓을 용서하지는 않았다.
시나에게 있어 WWF 월드 챔피언십은 긍지의 증거다.
그렇기에 이유가 뭐가 됐다고 한들 그걸 모욕한 남자와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단 한 해.
아니, 3분기 만에.
신은 자신의 부킹 능력과 화제성만으로 다시 ACW를 부흥시켰다.
자신에게 주어진 슈퍼스타들을 활용하는 능력은 바트보다 훨씬 나았다.
‘그렇지.’
왜냐면 바트 맥센은 결국.
ACW와의 결전이 치러질 2011 레슬 임페리움의 메인이벤트를 숀 시나와 더 팍의 타이틀 매치로 정했으니까.
그걸 위해서 2010년 내내 타이틀을 지키던 오튼이 바로 오늘 패배했다.
솔직히, 마음에 들진 않았다.
왜냐면.
시나 역시도 굳이 따지자면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선수와 결전을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ACW가 그러듯이.
신이 그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