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
팬들의 환호와 러셀의 테마 음악.
그 가운데에서 나는 링 위에 서있는 러셀 오메가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벨트를 머리 위로 치켜드는 러셀.
[Waaaaaaaaaaaaaaaaaagggghhh!]
거기에 팬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녀석은 아주 잘 해주었다.
내가 원하던 대로.
ACW 월드 챔피언십의 가치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로건은 확실하게 자신의 커리어를 마무리 지었다.
이대로 팬들의 반응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은퇴식을 열면 아주 멋지게 끝을 맺을 수 있겠지.
스테로이드 파동으로 WWF에서 커리어를 좋지 못한 형태로 마무리 짓고 ACW에 복귀한 그는, 원래 역사에서는 똑같이 좋지 못한 형태로 자신의 커리어를 끝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최강의 악당이 카우보이의 손에 쓰러지면서, 우리는 그를 계승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얻었다.
‘이렇게 되어야지.’
이게 프로레슬링이었다.
다양한 선수들이 경쟁을 통해 자신을 연단하고, 그로써 더 나은 콘텐츠를 팬들에게 제공한다.
거기에 다른 요소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것을 원했다.
전생에는 트리플H의 정치질에 당해서 커리어를 마감했던 러셀 ‘하트’.
이번에도 똑같이 바트 맥센의 추악한 짓으로 인해 그렇게 될 뻔했지만.
나는 녀석을 믿었다.
팬들도 녀석을 믿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시대의 주역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러셀 오메가.
녀석이 천천히 벨트를 내리고 날 돌아보았고 팬들의 반응이 이어졌다.
[Uooooooooooooooooohhhh……!]
피식 웃으며 박수를 보낸 나는 천천히 링으로 올라가 녀석과 대면했다.
아직 소울 아웃은 끝나지 않았다.
러셀과 나, 로건이 함께한 이 각본의 제대로 된 결말을 보여줘야 했다.
[Waaaaaaaaaaggghhh……!]
[Booooooooooooooo……!]
환호와 야유가 뒤섞였다.
팬들은 로건을 다시 링 위로 올려보낸 내 진의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러셀의 곁으로 다가선 나는 다리를 절고 있는 녀석을 부축했다.
[Waaaaaaaaaaaaaaaagggghhhh!!]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
눈썰미가 좋은 팬들은 내가 러셀을 챔피언으로 인정했음을 느끼겠지.
그렇게 링을 내려가면서 녀석과 나는 각본을 벗어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일단 내가 먼저 물었다.
“좀 괜찮냐?”
“아, 죽는 줄 알았다. 정말.”
“짜식이, 엄살은.”
“그럴 거면 왜 괜찮냐고 물어봤어?”
“…….”
그러게.
그러자니 입술을 슬쩍 말아 올리며 웃은 러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여기가 우리의 무대였다.
“고맙다.”
녀석은 갑자기 감사를 표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거야. 진심으로 고맙다. 신.”
“별말씀을.”
나 역시도 쓰게 웃었다.
[Waaaaaaaaaaaaaaaagggghhhh!]
팬들의 환호를 계속 들으며 우리는 그렇게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왔다.
소울 아웃은 그 막을 내렸다.
직원들이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벌떡 일어선 비숍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러셀! 신!”
“비숍.”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멋졌습니다! 환상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어떨 것 같나요?”
“이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엄지를 치켜세우는 비숍.
낙관적인 분석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은 멘탈을 위해서라도 그런 낙관적인 말이 필요했다.
그런 면을 보자면 또 괜찮은 보스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으나.
“이야, 로건이 다리를 공격할 때 연기가 장난이 아니던데요. 멋졌습니다.”
거기에서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르는군.’
내가 왜 고릴라 포지션으로 들어와서도 계속 러셀을 부축하고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러셀은 실제로 무릎이 안 좋았다.
아무리 로건이 배려해서 기술을 시전했다고 한들, 경기 내내 집중적으로 당한 부위가 멀쩡할 리가 만무했다.
러셀은 실제로 고통스러워했다.
경기가 끝나고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계속 끙끙 앓았고, 내 부축을 받아 겨우 의무실에 도착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팀 닥터는 러셀의 몰골을 보자마자 한숨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내가 크레센트 쓰지 말라고 했죠.”
“팬들이 쓰라고 해서.”
러셀은 쓰게 웃었다.
녀석이 침대 위에 앉았고 닥터는 얼음찜질을 하며 통증을 가라앉혔다.
무릎은 참 성가신 부위였다.
거기에 더해 척추나.
관절이나.
……사실 모두가.
프로레슬러는 터프하다는 인상이 있지만 사실은 무모한 것에 가까웠다.
애초부터, 인간의 몸은 그렇게 오랜 충격을 오래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점이었다.
그렇기에.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슈팅스타 프레스’를 사용해온 러셀의 무릎은 이미 망가져 가고 있었다.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지만 격렬한 경기를 뛰고 나면 이렇게 자기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였다.
그걸 고치려면 한 2년 정도는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서 쉬어야 하겠지만.
이를 어쩌랴.
애석하게도.
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멍청하다며 핀잔을 주는 팀 닥터와 달리, 나는 반대로 그 기분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경기는 뛸 수 있지?”
“……누굴 뭘로 보고.”
러셀이 미소를 지었다.
닥터는 그런 녀석과 나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뭐 어쩌랴.
주사위는 던져졌다.
* * *
다음 날 이어진 애프터 쇼.
오프닝 영상이 끝나고 러셀 오메가의 테마 음악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Waaaaaaaaaaaaaaaaaaggghhh!]
빗발치는 환호.
허리에 ACW 월드 챔피언 벨트를 두른 채 링으로 올라간 러셀은 팬들의 성원에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드디어 결착이 났군.]
[Yeeeeeeeeeeeeeeeeaaaahhhh!!]
[나는 ACW에 오랫동안 묻어있던 때를 벗겨냈어. 아, 로건을 말하는 건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는 이 회사가 가장 빛나던 시기의 스타니까.]
그 말이 맞았다.
그 당시 ACW는 피카레스크였다.
악당이 나나타서 누구든 가리지 않고 때려 부수던 게 그때의 ACW였지.
‘잘도 말하는군.’
나는 커튼 뒤에서 러셀이 말을 이어가는 걸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폄하할 마음은 없어. 내가 묵은 때라고 말한 건, 그런 로건을 확실히 끊어내지 못했던 환경을 말해.]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팬들은 내 이름을 외치고, 태양은 빛나며, 이렇게 여기 ACW 월드 챔피언이 있지.]
러셀이 벨트를 풀어 위로 들었다.
그래, 이로써 ACW는 묵은 때를 벗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할리우드 로건이라는 과거를 쓰러뜨린 러셀은 벨트의 가치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 챔피언으로서, 나는 일단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군.]
[SIN! SIN! SIN! SIN! SIN……!]
큰 소리로 이어지는 챈트.
딱히 설명은 더 필요 없었다.
러셀이 싱긋 웃으며 입장로를 돌아보았고 난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Waaaaaaaaaaaaaaaaaaggghhh!]
팬들은 환호를 보냈다.
내가 지난 밤 러셀을 부축해 들어간 것이 이미지 변화에 도움을 주었겠지.
‘착각이지만.’
그런 생각과 함께 커튼을 걷고 나간 나는 천천히 링으로 나아갔다.
할리우드 로건은 사라졌다. 바트 맥센의 패러디를 한 것도 밝혔다.
하지만 내 복장은 아직까지 정장이었다. 코트는 거추장스러워 벗었지만.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내 이름을 외치는 팬들.
하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 챈트는 결국, 러셀의 ‘조력자’로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링으로 올라간 나는 마이크를 쥐고 곧바로 시비를 걸었다.
“이거 원, 대관식이로군.”
내 말에 집중하는 팬들.
“멋지잖아. 러셀. 잘 빠졌어. 그 벨트도 이제 잘 어울리고. 이거 원, 작년에 질질 짜던 네 모습과는 다른데?”
[Uooooooooohhhh……!]
순간 놀라는 팬들.
그렇다.
나는 작년에 벌어진 스크류잡에 대해 러셀에게 직접 말을 꺼낸 것이다.
거기에 피식 웃은 러셀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 작년 이맘때와 비교하면 확실하게 달라졌지. 하지만 너도 그렇잖아. 양복 입은 게 꼭 그놈 같군.”
“널 엿 먹인 그 남자 말이야?”
“맞아. 그래서 말인데, 네 철학적인 퍼포먼스가 끝난 시점에서 굳이 그 옷을 입을 필요가 있을까?”
“아니지, 네가 이걸 보고 심경이 불편하다면 난 얼마든지 입어주겠어.”
나는 넥타이를 여미며 말했다.
[Booooooooooooooooooooooo-!]
그런 내게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러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넌 항상 그런 식이었지.”
“……?”
“테이커를 이기고 WWF를 나갈 때도 그랬어. 남들이 하지 않는 파격적인 일을 벌이면서 꼭 그 진의를 밝히지는 않고 능청스럽게 받아넘겼지.”
러셀은 그렇게 놈밖에 말할 수 없는 식으로 나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남들이 널 오해해도. 그렇게 생각하라면서 넘겼지. 그때도 넌 테이커를 이겼기 때문에 회사를 나갔던 거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
“그쯤 해두라고. 러셀.”
나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테이커의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네가 신경 쓸 문제가…….”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 너는. 나에게 이 벨트의 가치를 되찾게 해주려고 일부러 그런 연극을 벌인 거잖아.”
“날 오해하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오해하지 마. 나는 고작 너 따위를 위해서 행동한 게 아니라고, 러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러셀은 벨트를 들었다.
“네 목표는 이거잖아.”
[Uoooooooooooooooooohhhh!!]
“넌 사실 누가 이기든 아무 상관도 없었던 거겠지. 그래, 이 벨트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서 로건과 나를 붙였던 거라고도 말할 수 있겠어.”
하지만.
“너는 날 믿었을 거야.”
“……내가?”
“그래, 작년에도 그랬었잖아. 아니, 이제는 제작년이군. 기억은 하시나?”
러셀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한판 붙기로 했잖아. 프로레슬링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무대에서.”
[Uoooooooooooooooooohhhhh!!]
Face To Face.
챔피언, 러셀 오메가.
그 앞의 새로운 악당. 신.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선 채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버텨냈다.
그렇다.
분명히 그랬었다.
녀석과 나는 한판 붙기로 했다.
단순한 표현이었지만.
우리가 그동안 새겨온 시간과 만들어온 가치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신 VS 러셀 오메가.
러셀 오메가 VS 신.
분명.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길이 남을 라이벌리가 우리에게는 분명 존재했다.
녀석과 나는 데뷔 초창기 때부터 얽혔고, GCW를 지나 WWF에 데뷔했을 때도 얽히며 계속해서 붙어왔다.
녀석이 나를 이겼고.
내가 녀석을 이겼다.
“그거 아나, 신?”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네가 나보다 강하다고 착각을 하지만, 상대 전적은 내가 더 앞선다는 걸 말이야.”
러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분명히 그랬다.
또한, 녀석이 나에게서 이긴 경기는 대부분 그 의미가 깊은 시합들이었다.
GCW 타이틀전.
U.S. 타이틀전.
그리고 링 서바이벌 제거 매치.
타이틀이 걸리거나 중요한 때에 녀석은 항상 내게서 승리를 거뒀었다.
그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링 위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팬들은 환호를 보냈다.
러셀은 그걸 근거로 말했다.
“지금 여기 이 환호성만 봐도 느껴지겠지. 팬들은 내 승리를 지금,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야.”
“…….”
“솔직히 먼저 감사를 표하지. 넌 내가 이 단체에서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 했어. 하지만 그것과 네가 타이틀에 도전하는 건 별개잖아.”
러셀은 손가락을 들었다.
“잘 들어, 알파.”
그리고 오메가는 날 그렇게 불렀다.
“넌 증명해야 돼. 내가 그랬듯이.”
“그래?”
거기에서 순간 미소가 나왔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녀석은 나, 알파를 첫 번째로 두고 자신이 마지막에 서 있는 자라고 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 표현에 의하자면 앞으로 베타와 감마를 거쳐 오메가에 도달해야 하는, 말하자면 1번이었다.
[Omega! Omega! Omega! Omega! Omega! Omega! Omega! Omega!]
팬들도 그걸 느낀 듯했다.
경기장 가득 떨어지는 오메가 콜.
ACW의 최종 보스.
그런 포지션을 잡은 러셀은 나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내가 만약에 녀석과 그 벨트를 걸고 붙으려면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했다.
녀석이 그랬듯이, 이곳에 있는 선수들을 쓰러뜨리면서 날 보여줘야겠지.
하지만.
한 가지 틀린 게 존재했다.
나는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이게 뭐라고 생각해?”
“1번.”
그 의미를 이해한 러셀이 대답했고 나는 그 상태에서 손가락만 바꿨다.
검지에서 중지로.
[Uooooooooooooooooohhhhh!!]
“이제 의미가 좀 달라졌지?”
“……아니.”
러셀은 표정이 굳어져서 대답했다.
분명 열이 받을 텐데도 끝까지 저러는 꼴을 보자니 슬쩍 웃음이 나왔다.
“이건 알파야. 우두머리라는 뜻이지. 1번이 아니라, 1등이라는 말이야.”
[Booooooooooooooooooooo-!]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좋아.
이렇게 되어서야 다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실감들을 좀 하신 모양이었다.
확실히.
러셀 오메가가 말한 대로 알파가 1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겠지.
저기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같은 경우에는 그런 뜻으로도 사용했겠지.
하지만 여기는 아니었다.
여기는 현대 미국이고.
지금 그 이름을 쓰는 건 나였다.
그러므로.
그건 분명히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손가락처럼, 1번이 아닌 1등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