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
신 VS 러셀 오메가.
우리가 그토록 원해 마지않던 대진이 2월 4주차의 ACW 나이트로에서 내가 크로우를 이기며 확정되었다.
이제는 무를 수조차 없었다.
남은 기간은 한 달.
그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나와 러셀은 몇 번인가 화상 통화를 이용해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지속될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회의는 굉장히 스무스하게 진행되었고 ACW와 PWA에서 각각의 각본팀장까지 참여해 분위기도 좋았는데.
정작 나는 딱히 이렇다 할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그냥 듣고 있기만 했다.
각본은 내가 승리해서 타이틀을 획득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흘러갔다.
그 모든 게 내 공식적인 첫 월드 타이틀은 자신이 넘겨주고 싶다고 말한 러셀 오메가의 의견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생각을 깊어지게 했다.
그리고 3월 1주차, 월요일.
나이트로가 시작되고 링에 오른 러셀 오메가는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나에 대한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드디어 토너먼트의 우승자가 정해졌군. 사실, 여기 있는 모두가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나 싶은데.]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그래, 우승자는 바로 신이야.]
러셀이 씨익 웃어보였다.
[물론…… 토너먼트에 참가한 선수들 모두가 쟁쟁하기는 했지.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의외로 누가 더 필사적인가란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녀석에게는 토너먼트에 참가한 그 어떤 선수보다 강한 이유가 있었어.]
싸우기로 했다.
[러셀 오메가와 신은.]
이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가장 거대한 무대 위에서 싸우기로, 약속했다.
‘재작년’에 말이다.
[물론, 그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 나는 빌어먹게도 그때 챔피언으로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고…….]
끔찍한 배신을 당한 끝에.
이곳에 왔다.
그리고 다시 증명했다.
[러셀 오메가의 커리어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너희에게 보여주었지.]
[Yeeeeeeeeeeeeeeeeeeeaaahhh!]
[그리고 다시, 이 벨트를 따냈어.]
ACW 월드 챔피언.
커리어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
이후로도 러셀 오메가는 수많은 강적을 만나 승리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뿐만이랴.
반대편에서 신 역시도 ACW 팬들에게 자신이 어떤 남자인지를 보여주면서 결국에는 당당히 권리를 따냈다.
[뭐, 그놈이 좀 재수 없는 짓을 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이 벨트에 아무도 딴 소리를 못하게 된 건 사실이잖아.]
[Yeeeeeeeeeeeeeeeeeaaaahhh!]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다 됐어. 신. 우리는 원하던 대로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큰 무대에서 가장 큰 벨트를 둔 채 싸울 거야.]
러셀은 고개를 들었다.
조명이 비추는 링 위.
남자는 결국 이곳에 서있었다.
하트 던전 출신의 작은 소년.
20세를 갓 넘겨 GCW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이제 월드 챔피언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노력한 대가를 받았다.
아니, 그에 과분했다.
팬들의 사랑.
벌어들이는 돈.
프로레슬러로서의 명예.
그 모든 게.
[정말…… 과분할 정도야.]
러셀은 씁쓸하게 웃었다.
[왜냐면 앞선 것들은 내가 프로레슬링을 꿈꿀 때 바라던 게 아니거든.]
그리고 러셀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 너를 기다리고 있으마. 레슬링에서 가장 거대한 무대에서 말이야.]
[Uooooooooooooooooooohhh!!]
팬들의 환호는 심상치 않았다.
모두가 러셀의 이름을 부르고, 나의 이름을 부르고. ACW의 이름을 부르고 프로레슬링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가운데, 러셀 오메가는 천천히 마이크를 던지고 링 아래로 내려갔다.
“…….”
방송을 보던 나는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드는 것을 느꼈다.
뭐랄까.
잘 설명은 못하겠다.
지금 내 이 벅찬 감정을.
아니, 정확히는.
방금 러셀의 마이크워크를 통해서 깨닫기는 했는데, 그걸 내 머릿속에서 조금 더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결국.
저녁을 먹고.
씻고.
잠자리에 들고.
근데 잠은 오지 않아.
한참 동안 뒤척이다가 티파니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끄응…….”
나도 이거 중증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대충 소파로 가 텔레비전을 틀고 내가 옛날에 했던 경기 영상들을 불도 켜지 않고 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가 회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브라운관 TV를 보고 반가워했는데.
이제는 슬림한 LCD TV를 통해서 그때의 영상들을 보고 있다니 놀라웠다.
난 아직 그때의 나 같은데.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저때는 무려 10여 년 전이었다.
러셀 하트 VS 신.
GCW 챔피언십 경기.
스틸 케이지 매치.
그때 나는 악당이었고, 내 친구인 윌리를 각본에 이용하며 러셀과 다퉜다.
에보니 모녀도 경기장에서 저 경기를 지켜봤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그랬었지.’
하지만 저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렉 하트.
킹스 럼블의 리드 보이.
랜스 오튼.
다시 러셀 하트.
케인 맥센.
디 캐스켓-테이커.
캡틴 로건.
트리플H.
그야말로 엄청난 난적들이었다.
‘그랬지.’
문득.
코끝이 순간 찡해졌다.
TV에는 케인과의 경기가 끝나고 들것에 실려 나가는 내 모습이 나왔다.
격렬했던 헬 인 어 셀 매치.
6.5미터 아래로의 추락 범프.
해설자가 날 이렇게 표현했다.
[시대가 원하는 선수입니다. 신은 지금 그야말로 이 업계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만들어냈습니다. 업계에 이전까지 없었던 유형의 남자가 말이죠.]
그건 분명 각본에 의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 각본을 수행하는 나를 향해서 던지는 메시지였다.
테이커가 말했다.
너는 미국의 정신을 표현했고, 그렇기에 팬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
한 번의 삶에서 실패한 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돌아왔다.
아마 그렇게 된 이유는 죽은 이후에야 밝혀지지 않을까 싶었다. 프로레슬링의 신이 나타나서 내게 회귀의 이유를 말해주고는 사인을 부탁하겠지.
하지만 일단은.
이렇게 해두고 싶었다.
다시 이 일을 하기를 잘했다.
그리고 내 커리어의 모든 부분이 잘 풀려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로 인해 전생과는 내가 아는 역사가 상당수 많이 바뀌게 되었다.
엣지라는 링네임으로 활약했던 내 친구 애덤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 인디 단체를 설립했다고 들었고.
캐스켓-테이커의 연승은 브룩 레스너가 아니라 나로 인해 깨졌다.
그 연승이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가졌던 의미를 생각하자면 누가 내게 ‘넌 이기적인 새끼’라고 말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테이커의 연승 기록.
아무도 그 불멸의 기록에 범접할 수 없는 식으로 흘러가더라도 좋았겠지.
하지만.
나는 그게 받고 싶었다.
그래서 테이커에게 인정을 받아 개새끼가 되어 그 연승을 끊어냈다.
물론 그건 현재에도 많은 내 안티들에게 비판을 받는 일이었다.
굳이 신에게 그걸 넘겨줬어야 했나.
그냥 테이커를 아름답게 보내주는 길도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나는.
그렇게 되고 싶었다.
내 욕심이었다.
나는 그걸 이뤘다.
그리고 그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내 커리어는 다른 어떤 선수와도 다른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애덤처럼 그런 커리어를 보내지 못하고 지는 수많은 별들이 존재했지만.
그 가운데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그럴 만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내 목에 팔을 휘감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귓가에 잠에 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해요……?”
티파니였다.
그래, 이것도 잘한 일이었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이 세상에서 나라고 하는 남자를 누구보다 더 깊게 이해해주는 사람.
이 여자가 아니면 그 어떤 누가 남편이 6.5미터 아래로 추락하는 범프를 이해해주고 지켜봐줄까.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레몬향이 났다.
나는 그 팔을 장난스럽게 당겼다.
소파를 넘어온 티파니는 그대로 내 무릎 위에 누워 다시금 잠이 들었다.
“옛날 경기는 왜, 봐요?”
아니, 안 자는군.
“정리를 좀 했어.”
“후후, 이번에는 긴장 좀 했나 봐.”
“그렇지.”
나는 적절한 말을 찾아야만 했다.
이번에는 다른 때와 의미가 달랐다.
위대한 선배들이 이루어놓은 금자탑의 도움을 받았던 그때와는 다르게.
이 대립은 함께 커리어를 시작해 여기까지 온 러셀과 나만이 존재했다.
그래서.
“내 커리어를 되돌아봤지.”
“어땠어요?”
“죽여줬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티파니가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제가 아는 최고의 레슬러에요.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불러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내가, 또?”
“그래요. 저희가 항상 꿈꾸던 시대.”
프로레슬링만 생각해도 되는 시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하지만 왜일까.
그 말은 내 가슴을 깊게 울렸다.
티파니는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그 금색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계속해서 그 말을 곱씹었다.
우리가 꿈꾸던 시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시대는 확실했다.
나는.
챔피언이 되고 싶었다.
* * *
수요일 밤.
PWA.
웅장한 해적 스타일의 오프닝이 끝난 뒤, 이천 명이 운집한 경기장에 한 남자의 테마 음악이 울려 퍼졌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Waaaaaaaaaaaaaaaaaaaggghhh!]
바로 나였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나팔 소리에 맞춰 커튼을 걷고 나간 나는 큰 환호 속에 링으로 올라갔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할 말은 이미 다 정해뒀다.
그럼에도 마이크를 쥔 나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고 팬들을 지켜보았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계속해서 이어지는 챈트.
그런 가운데, 내가 말을 연 것은 보다 못한 고릴라 포지션에서 오더를 내리고 링 아래에 있던 아나운서가 얼른 하라며 수신호를 보낸 뒤였다.
그때쯤 감정도 정리가 되어.
나는 말을 꺼냈다.
“러셀, 너의 메시지는 잘 들었어.”
[Waaaaaaaaaaaaaaaaaaggghhhh!]
“결국 이렇게 되었군. 10년의 시간이 흘러서, 드디어 우리가 이 위치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되었어.”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좀 감상적이라도 이해해줘. 친구들. 내게 있어서 의미가 큰 경기라고. 왜냐면 난 이걸 위해…….”
여기까지 왔거든.
그 말은 사실이었다.
프로레슬링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대와 내가 갖는 드라마가 시너지가 되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나는 지금껏 수많은 위대한 선배들에게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다.
러셀도 마찬가지였다.
과거를 살아온 선수들과 싸우고 팬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만들어졌다.
그게 바로 우리였다.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가장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두 선수.
성장하고 완성되어, 이제는 정말 두 사람이 증명을 해야만 하는 그 무대.
신과 러셀 오메가.
두 선수의 싸움을, 팬들은 어느 정도의 위치라고 생각하며 봐줄 것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해냈는가.
이 경기로 모든 게 증명되었다.
“다들 GCW를 기억하려나? 나와 러셀의 커리어가 시작된 곳인데.”
[Yeeeeeeeeeeeeeeeeaaaahhh!!]
“그때 우리는 애송이였고, 그 컨테이너 같은 방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같이 이런 날을 꿈처럼 이야기했어.”
나는 그 밤을 기억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날이 찾아왔군. 솔직히 말해, 믿기 힘든 일이야.”
한낱 뒷골목 양아치였던 소년.
20세를 갓 넘겨 GCW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이제 하나만을 남겨뒀다.
월드 챔피언.
받아 마땅한 자리.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반대로.
“러셀 너는 과분하다고 말했지.”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가 과분하다는 거냐? 챔피언? 인기? 돈? 명예? 그 모든 게 왜 과분하지?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어.”
왜냐면 러셀 오메가가 원하는 건.
그저 순수한 부딪힘이었다.
녀석은 나와 싸우기를 원했다.
그저 그것만을 원했다.
자신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이 드라마가, 이 사랑하는 업계의 한 페이지에 죽여주는 트로피로써 장식되어 팬들에게 언제나 기억되기를.
단지 그걸 바랄 뿐이겠지.
하지만.
“나는 SIN이야.”
나는 그것보다 더한 걸 원했다.
“프로레슬링 박물관이 세워져. 너는 그 어디에 너와 내가 싸우는 동상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 박물관 건물 자체가 내 얼굴이 되는 거야! 화장실 문고리도 내 얼굴이 박혀있고 우표도 내 것만 팔리고! 접시에도 내 얼굴이 박혀있지!!”
[Waaaaaaaaaaaaaaaaaaaggghhh!]
내가 원하는 건 그 정도였다.
감사했다.
정말로 프로레슬링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이 프로레슬링 전체에 오줌을 싸갈겨 영역을 표시하지 않으면, 정말 후회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2011년 4월 3일! 일요일! 스타게이트! 20만의 티켓은 모조리 판매되었고! 온갖 할리우드 스타들이 나를 보기 위해서 초대되어 찾아오지!!”
나는 거기에서.
“러셀 네 엉덩이를 걷어차고! 반드시 ACW 월드 챔피언이 되어야겠어!!”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한번 해보자고, 러셀! 그날 밤은 분명히 미래에! 미국 교과서에 실리게 될 정도로 멋진 일이 일어날 거야!!”
나는 포효했다.
여기에서 겸손을 떨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이 경기에 대해 내가 가진 꿈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건.
엄청난 반응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