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
러셀 오메가.
바트 맥센에게 배신당해 명예롭지 못한 방법으로 WWF를 떠난 그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Uooooooooooooooooooohhhhh!]
관객석은 완전히 난리가 났고 그 등장을 본 해설자들도 순간 당황했다.
[어?]
[러, 러셀……?]
어디까지나 연출이었지만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는 러셀의 출연이 진짜 사고처럼 보이게 했다.
사실 그러했다.
바트 맥센이 일선에서 물러난 건 아직까지 엠바고가 걸려있는 정보였다.
그렇기에 충격적이었다.
ACW의 테마곡을 사용하고, 그게 지금 버닝콩에서 재생되고 있다는 점이 이게 각본임을 각인시키고 있을 뿐.
그렇게.
러셀이 WWF에 돌아왔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시나는 마이크를 내린 채로 입을 열었다.
“Welcome Back.”
그것은 각본이 아닌 실제 시나가 돌아온 러셀을 환영하며 하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러셀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각본은 각본.
각본 상의 숀 시나는 러셀의 귀환을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당하게 마이크를 쥔 러셀은 그대로 첫마디를 내뱉었다.
“오랜만이군.”
[Uooooooooooohhhh……!]
“여기에 오는 것도, 너와 마주서는 것도. 사실 물리적인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 시간이 마치 영겁처럼 느껴졌었지.”
러셀은 그렇게 설명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여기는 그대로더군. 시나, 너는 언제나 그렇듯 어린아이들의 영웅이었어. ……사실, 이보다 더 큰 코미디가 어디 있을까?”
러셀은 맹렬하게 시나를 디스했다.
“바트 맥센은 최고의 스타였던 내 커리어를 묻어버리고 내쫓았어. 그리고 그때도 시나 너는 링에 올라가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소리쳤지.”
러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재미있게도 그 정의가 진짜 불의를 겪은 나를 위하지는 않더군. 이제 좀 확실해졌어. 너는 위선자에 불과해.”
[Waaaaaaaaaagggghhhh……!]
시나를 싫어하는 팬들 사이에서 환호가 나왔다. 그것을 들은 러셀은 이번에는 팬들을 디스하기 시작했다.
“너희라고 뭐 다를 거 같아? 여기 모인 등신들은 척수 반사적으로 시나를 까지만 그중에서 날 위해 한 명이라도 목소리를 내준 놈이 있었나?”
순간 관객석이 다시 조용해졌다.
러셀의 분노는 진짜처럼 느껴졌다.
“아니지! 만약 그랬다면 진작 이 더럽고 역겨운 쇼 대신 ACW를 택했을 테니까! 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시나와 다를 게 뭐야?”
[Boooooooooooooo!]
그런 러셀의 이야기를 참다못한 팬들 사이에서 야유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내가 너무 팩트로 너희를 두들겨 팼나? 할 말은 없으니 야유를 보내는군. 그런 너희가 시나를 부정하기 위해 나에게 환호하다니 참 역겨워!”
러셀은 야유를 보내는 팬들을 맘껏 조롱하고는 다시 시나에게 다가갔다.
“마치 지금 너 같은데.”
“……한 가지만 확실히 해둘까.”
시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온 짧은 이야기는 지금 이 상황을 함축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널 뭐라고 부르면 되겠나?”
하트인가.
오메가인가.
그런 시나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러셀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러셀 오메가.”
그게 지금 자신의 이름이다.
러셀은 당당하게 밝혔고.
이로서 ‘The Champ’ 숀 시나는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 * *
버닝콩에 모습을 드러낸 러셀 오메가는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배신을 당하고 이곳에서 쫓겨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시나와 팬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각본 상의 러셀과 달리, 실제 본인은 그 문제에 대해 ‘바트 맥센이 쓰레기 짓을 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거기에 도움을 주지 못한 선수들은 시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러셀에게 부채감을 느꼈지만, 본인은 쿨했다.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라면서.
그래도 역시 그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바트 맥센이 우리 시대에 남긴 최악의 유산이었다.
우리는 그걸 수습해야만 했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많은 것이 바뀌었고.
바뀔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일단 과거의 좋지 못한 유산을 청산하는 것이 먼저였다.
러셀 본인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ACW와 WWF의 첫 번째 협업이 성사되었다.
물론 고생을 좀 했다.
두 단체는 아직도 경쟁 상태였다.
그렇기에 두 단체가 모두 승리하는 그림을 만드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특히나, 러셀은 ACW가 계속해서 밀고자 하는 아이콘이었으므로 시나에게 패배하는 그림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예정에 전혀 없던 일이 한 가지 성사되었는데.
바로 이 남자였다.
“오, 오오.”
캠핑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내 옆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으로 열심히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이 남자.
바로 랜스 오튼이었다.
어쩌다 보니 또 옛날처럼 되어서 같이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시나와 러셀이 출연한 버닝콩을 보는 사이, 같이 모니터링을 할 생각은 않고 계속 게임만 했다.
거기다가 연습 모드로 내 캐릭터에게 자기 피니시만 30분째 쓰고 있다.
“…….”
“왜 그러냐?”
“아니 아무것도.”
“같이 할래?”
“내가 이길 텐데.”
나는 게임 패드를 잡았다.
오튼이 설정을 진행해 우리는 각자 캐릭터를 선택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버닝콩 VS 랙다운 2011.
2010년 말에 출시된 이 게임에 안타깝게도 내 캐릭터는 없었다. ……오튼이 멋대로 만들어서 넣었을 뿐.
그래서인지 능력치가 완전 구렸다.
“87이라고?”
“후하게 쳐줬지.”
“야, 너는 94잖아.”
참고로 말하면 시나는 95.
더 팍도 똑같이 95였다.
원래 러셀이 WWF를 나가기 전까지는 94를 마크하는 캐릭터였는데. 놈이 사라지고 오튼이 다시 올라왔다.
레슬링 게임은 전반적으로 그런 식이었다.
선수의 위상에 따라 능력치를 구분하고, 서로 캐릭터가 가진 기술로 공격하면서 노는 전형적인 파티 게임.
“87이면 후하게 쳐줬지.”
“그냥 ACW 게임으로 붙어.”
“거기서 네 능력치가 94잖아.”
“ACW 게임이니까.”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의 챔피언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인 러셀 오메가의 능력치 총합 평균은 95에 달했다.
하지만 이긴 건 나였다.
싱긋 웃은 나는 옆에 조심히 보관해둔 ACW 월드 챔피언 벨트를 보았다.
그리고 87의 능력치를 가지고 오튼에게 반격을 하며 경기를 풀어나갔다.
“어? 야, 야! 잠깐만!”
당황하는 오튼.
계속해서 기술이 이어진 끝에 내 캐릭터는 안티크라이스트를 사용했다.
[투콰앙-!!]
이어지는 핀 폴.
1, 2, 3!
땡땡땡!
[Waaaaaaaaaaaggghhh!]
구린 그래픽의 관객들이 일어나 박수를 보냈고, 구린 그래픽의 내 캐릭터가 일어서서 세리모니를 펼쳤다.
아쉽게도 게임 내에서 오튼이 직접 만든 캐릭터라서 그런지 테마 음악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긴 건 이긴 거다.
“너 아직도 못하는구나.”
나는 의기양양해 물었다.
“야, 인마! 이건 사기지!”
“사기는 무슨 사기야.”
나는 단지 오튼이 설정해둔 대로 플레이해 경기에서 이겼을 뿐이다.
링 위에 드러누운 구린 그래픽의 오튼을 보여주면서 경기가 종료되었다.
나는 게임 패드를 내려놓았다.
짧은 한판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생이건 아니면 그 전이건.
이런 게임류에서 가장 높은 능력치를 마크하는 것은 언제나 테이커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트리플H, 시나.
그런 식으로 이어졌지.
그들이 은퇴한 뒤에도 WWF의 게임에서는 언제나 전성기 버전의 테이커와 말년의 테이커를 구분하면서 전성기 테이커의 능력치를 높게 주었다.
그게 그 시절을 가장 깊게 기억하고 있는 팬들에게 어필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트리플H는 90.
테이커는 92.
지금 인기가 많은 현역 로스터들이 최고의 능력치로 나오면서 자연히 팬들에게 어필을 하고 있었다.
그게 과거를 발판으로 우리가 좀 더 나아진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인정처럼 느껴져서 왠지 좀 기뻤다.
그러므로.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뭐야?”
“뭐?”
“넌 레슬링보다 레슬링 게임을 좋아하는 놈이잖아.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나를 상대하러 오셨냐고.”
“글쎄.”
녀석이 게임을 껐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내년에도 게임 나오잖아.”
“……?”
“거기서 능력치 좋게 나오려면 아무래도 어필을 해두는 게 좋을 듯해서.”
“하.”
“진짜야. 인마.”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제기랄.”
오튼이 쓰게 웃었다.
“그래, 러셀이 WWF로 돌아가서 시나랑 다시 붙는다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싶어서 말이야.”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뭐, 덕분에 시청률은 비등하게 나왔고 재방송 시청률도 환상적으로 상승했으니 좋은 구도가 나오는 듯했다.
말인즉슨, 생방송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단체의 쇼를 본 시청자들이 재방송으로 나머지 방송을 봤다는 거니까.
자기 ‘팀’에 소속된 선수가 상대 단체로 가서 깽판을 놓는 짓을 말이다.
ACW 팬들은 러셀을 보기 위해 버닝콩을 봤고 PWA와 WWF 팬들은 나와 오튼을 보기 위해 나이트로를 봤다.
아주 멋진 구도였다.
이런 식으로 팬들이 좀 더 많은 프로레슬링 쇼를 볼 수 있게 한다면 앞으로 업계는 더 성장을 하겠지.
동시에.
오튼과 나는 이번에 팀을 맺어서 러셀과 시나를 상대하게 되는 셈이었다.
“잘해보자고. 오튼.”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배신을 당한 러셀이 WWF로 돌아가는 각본은 물론 엄청나게 흥미로웠다.
하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이 만들어나갈 관계만큼이나 오튼과 나의 대립도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 * *
2011년 6월 2주차의 버닝콩.
목이 빠져라 이날을 기다렸던 팬들을 위해서 우리는 제각각 ‘반대’의 단체에 출연하기로 했다.
말인즉슨.
시나와 러셀은 ACW 나이트로에.
나와 오튼은 WWF 버닝콩으로 가서 각각 대립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장소가 바뀌었다는 말은 상대를 공격하는 입장도 반대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자신을 위선자라고 욕한 러셀의 메시지에 반박하기 위해 시나가 나섰고.
나도 반대로 R.K.O.를 날린 뒤 링을 떠난 랜스 오튼의 행동에 답을 던지기 위해서 WWF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일단 쇼의 초반.
[오늘 밤! 랜스 오튼이 링에 나서서 자신이 ACW 월드 챔피언을 공격했던 이유에 대해서 밝힐 예정입니다!!]
[채널 고정!]
그런 식으로 선행 광고를 보낸 뒤, 위클리 쇼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3시간의 쇼.
그 마지막 10분을 책임지게 된 나와 오튼은 다른 동료들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천천히 감정을 끌어올렸다.
랜스 오튼.
그리고 신.
두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은 대립과 경기를 통해서 서로를 좀 더 높은 위치까지 끌어올려줄 수 있는가.
사실 오튼과 나는 나와 러셀만큼이나 커리어 초창기부터 계속해서 대립을 이어온 상대였다.
커리어가 시작된 시기가 비슷한데다가, 둘 다 쇼의 메인 이벤터였던 만큼 정말 지긋지긋하게 싸움을 해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기에서 하드코어 요소가 많이 들어간 게 특징이었다.
몸에 압정이 박히는 범프라던가.
불을 붙인 테이블에 내리꽂는 R.K.O. 같은 거.
정말 잔혹하게 싸워댔지.
이후로 내가 ACW로 떠나면서 딱히 큰 접점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전조도 없이 ACW에 난입한 오튼이 그대로 R.K.O.를 쓰고 사라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팬들은 궁금해했다.
오튼이 날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I Hear Voices In My Head-!!]
그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해, 랜스 오튼이 먼저 링으로 올랐다.
[Waaaaaaaaaaaaaaaaagggghhhh!]
거기에 쏟아지는 팬들의 환호.
큰 키와 근육질의 몸.
팔뚝과 어깨를 뒤덮은 문신.
머리는 빡빡 밀고 뺨과 턱에는 수염을 짙게 기른 배드애스한 스타일.
오튼은 확실하게 팬들의 눈길을 끌만한 외모를 지닌 레슬러였다.
그런 모습으로 어슬렁, 어슬렁.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독사처럼 단숨에 먹잇감을 낚아채는 녀석의 스타일은 분명히 큰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링에 오른 오튼.
마이크를 쥔 녀석은 귀찮은 듯 손가락으로 귀를 쑤셔대다가 이내 길게 하품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뻔하잖아.]
[Waaaaaaaaaaaaaaaaaaggghhh!]
[윗선에서 내가 왜 신을 공격했는지 밝히라고 하던데. 뭐 딱히 말할 게 없군. 너무나도 뻔한 이유라서 말이야.]
[Orton! Orton! Orton! Orton! Orton! Orton! Orton! Orton! Orton!]
[거 더럽게 시끄럽네.]
[Booooooooooooooooooooooo-!]
선역과 악역을 자유롭게 오가는 트위너식 마이크워크. 거기에 팬들도 반쯤 장난식으로 야유를 보냈다.
[이유는…… 그냥 녀석이 존나 싫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제 신이 나와서 내 얼굴에 무릎을 꿇고 분위기 좀 잡다가 다음 주로 쇼가 넘어가겠지.]
오튼이 입장로를 돌아보았다.
[온 거 알아. 신. 너는 한 방 먹으면 반드시 돌려주는 남자고. 분명히 왔겠지. 그러니까 음악 틀어. 쿵쿵거리는 거.]
“푸하-!”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고릴라 포지션 안.
입장을 준비하고 있던 찰나에 오튼의 연기가 너무나도 능청스러워서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정말 멋진 놈이다.
[Waaaaaaaaaaaaaaaaaaaggghhh!]
팬들도 좋아하고 말이다.
그래, 우리에게는 이게 적절했다.
클리셰대로 붙는 게 아니라 그걸 파괴하면서, 어디까지나 오튼과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대립이 존재했다.
바로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신!”
뒤를 돌아보자 헤드셋을 쓰고 있던 바트 맥센이 내게 중지를 뻗었다.
거기에 피식 웃고 마찬가지로 중지를 올린 나는 ‘그것’을 손에 들었다.
바로 슬레지 해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