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471화 (471/634)

471.

상황은 생각보다 커졌다.

PST 기준으로 8월 15일 자정에 마감된 투표에는 무려 삼억칠천만이나 되는 대인원이 참가해서 투표했다.

개중에서 거의 오백만 표 가량이 나의 모국에서 나온 표라고 해서, 그곳에서의 내 인기가 실감이 갔다.

남한 인구가 오천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거의 십분의 일 정도가 나를 위해 투표를 해준 셈이니까.

그것을 영광스럽게 느끼며 나는 투표 결과를 가지고 각본 미팅을 했다.

거기에 참여한 사람은 총 여섯 명.

PWA&ACW 연합에서 세 명.

나와 비숍, PWA 각본팀장.

WWF에서 세 명.

티파니와 오튼, WWF 각본팀장.

미팅은 중간 지점에 위치한 PWA에서 이루어졌고, 우리는 결과를 확인하며 경기의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일단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Single Match – 4%

Inferno Match – 28%

Street Fight Match – 17%

Iron Man Match – 5%

TLC Match – 46%

반올림은 제외하고 나온 결과는 그러했다. 팬들은 오튼과 내 경기가 TLC로 치러지기를 가장 바라고 있었다.

아니, 거기다.

우리가 초반에 좀 귀여운 사기(?)를 쳐서 넣은 득표수가 4%대까지 밀리다니. 새삼 정말 많이도 참가를 했군.

어쨌거나.

“TLC로군요.”

티파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테이블, 래더, 체어.

프로레슬링에서 자주 사용되는 무기 세 개를 묶어서 개최되는 기믹 매치.

규칙은 크게 두 가지였다.

앞서 언급한 도구들을 사용하고.

핀 폴은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그렇게 가면 될까요?”

“음.”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오튼도 쓰게 웃었다.

“난 왜 저 자식하고 매번 기믹 매치만 하나 몰라. 이번이 세 번짼데.”

“그러게요. 이상하게 그렇게 되네.”

“하하, 워낙 두 분이 터프하시니까 팬들도 그런 경기를 바라는 거겠죠.”

“맞는 말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순간 화기애애하던 회의실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다들 날 돌아보았고.

특히나 오튼은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뭐, 뭐냐. 너?”

“…….”

“야, 불안하게 하지 말고 얼른 말해봐.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응? 어, 아니.”

사실 별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스토리를 약간은 늘여가면서 전개를 해온 만큼 팬들의 기대감 또한 높아져 있을 듯해서.

그래서 아무래도.

“하나로는 부족할 거 같은데.”

“뭐……?”

“봐봐, 다들 지금쯤 투표 결과를 굳이 쇼가 아니더라도 뉴튜브에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고 있을 거란 말이야.”

“……신.”

티파니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생각할수록 확신이 드는 걸 느꼈다.

하나로는 부족했다.

“어때, 오튼.”

“시, 싫어.”

“인페르노 매치도 같이 하자.”

내 생각은 이러했다.

경기는 백스테이지에서 시작된다.

경기장 여기저기를 오가며 온갖 위험한 스턴트를 하다 입장로로 나오는 거지. 입장로에는 테이블, 래더, 체어가 한가득 쌓여 있고 말이다.

그걸 가지고 또 입장로 위에서 신나게 된통 주고받다가 경기 마지막쯤에는 링 위로 올라가서.

“Boom-!”

불이 피어오르는 거다.

인페르노 매치.

링 주변이 불꽃으로 뒤덮이고 두 선수가 그 안에서 경기를 펼치는 건데.

“아니, 안 한다니까.”

“야, 챔피언 줄게.”

“그걸 내가 왜 가져!”

“내가 다시 가져오면 되잖아!”

“싫다니까!”

“자, 자자. 진정하시고.”

비숍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 신 선수?”

“응?”

“정말 하실 겁니까?”

“난 경기로 장난 안 해.”

나는 씨익 웃었다.

“물론, 방책도 확실히 있다고.”

“아니…….”

“링 안에 들어서서 불길이 치솟으면 심판들이 링 밖에서 내연 처리를 한 링 기어를 던져주는 거야. 네가 입는 후드 티나 내 가죽 재킷 같은 거.”

“…….”

“재미있겠지?”

“빌어먹을.”

오튼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머지도 모두 그랬다.

하지만.

분명 내 제안은 매력적이리라.

* * *

그런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오튼은 이 방면의 전문가(?)를 만나서 한 번 의견을 들어보자고 날 설득했다.

바로 카인이었다.

WWF의 프로레슬러.

캐스켓-테이커와 함께 회사의 양대 거물급 빅 맨으로 유명한 가면 레슬러.

그가 왜 오튼에게 하자고 설득하고 있는 인페르노 매치의 전문가인가.

이유는 간단했는데.

카인의 ‘설정’이 어렸을 적에 얼굴에 화상을 입고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테이커의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옛날이란.’

그래도 그 거구 특유의 카리스마와 함께 연출이 절묘해서 카인은 현실 세계에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어쨌든, 그런 카인을 위해서 만들어진 매치가 바로 인페르노 매치였다.

불꽃 속에서 싸움.

현재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는 각본으로 잠시 집에서 쉬고 있는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런 미친 짓 안 해도 될 텐데.”

카인.

본명은 글렌 제이콥.

마스크를 벗은 그는 프로레슬러로서 은퇴한 뒤에는 도시의 시장직까지도 맡게 되는 하이퍼 인텔리였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우리를 점잖게 타이르듯이 말을 건넸다.

테이커와 그는 90년대 중반, 인페르노 매치를 치른 전적이 있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 그렇죠?”

“불꽃 속에서 싸우는 건 평범한 담력으로는 힘들어. 뜨겁고, 아프지. 평생 장애가 남을 수도 있고.”

“…….”

“그때는 시대가 그런 걸 원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는 너희 둘이 그런 식으로 경기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하리라고 생각한다.”

글렌은 내 어깨를 툭 쳤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 너희의 프로레슬링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그거 열 받네요.”

“응?”

“야, 야……!”

“내가 알던 카인과 테이커의 경기를 폄훼하지 마시죠. 글렌 제이콥 씨.”

“…….”

“그리고 내가 더 잘할 수 있어요. 팬들이 이걸 원한다면, 저희는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하.”

그런 내 말에 카인이 웃었다.

“사과하지. 팬 보이.”

그는 쿨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일견 그렇게 들릴 수도 있었어. 테이커에게도 무례한 말이 되었군.”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 사실.

오튼과 여기 오기 전에 테이커에게도 살짝 물어봤는데. 정말 하기 싫어서 도망칠까 진지하게 고민했단다.

의외로 터프가이와 겁쟁이는 종이 한 장 차이인 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했기에.

나는 겁쟁이가 아니라 터프가이 행세를 하며 글렌에게 맞설 수 있었다.

환상적인 과거의 스릴라이드가 나를 더 높은 경기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자니.

“너희들.”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걸 알고 있나?”

카인이 흰색 가루를 꺼냈다.

투명한 봉투에 든.

흰색 가루.

순간 당황했다.

“……?”

“어, 카인. 이런 건 좀.”

“난연제라는 거다.”

카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플라스틱 같은 거에 첨가해서 불에 잘 타지 않는 재질로 만드는 거지만, 몸에 바르면 짧은 시간 정도는 불에 타지 않도록 도와줄 거다.”

“그걸, 왜 가지고 계시죠?”

“등신아, 경찰에게 변명…….”

“아니, 진짜다.”

농담이 안 통하는군.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카인.

“이거하고 경기복 아래에 내연 패드를 덧대. 그러면 아마 죽도록 뜨거워도 불이 쉽게 옮겨붙진 않을 거다.”

“호오.”

한 가지 꿀 팁을 얻었다.

“그리고 하나 더.”

카인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연기가 부는 방향에 서있지 마라. 지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연기를 들이마시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글렌 제이콥.

‘카인’이라고 하는 또 다른 자아를 가진 그는 그렇게 우리에게 인페르노 매치의 팁을 여럿 전수해주었다.

* * *

그렇게 경기의 구성이 정해졌다.

백스테이지에서 스트리트 파이트.

입장로 위에서 TLC.

그리고 링 위에서 인페르노까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각본에서 경기가 그런 식으로 여러 형태를 가지고 진행될 것임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2011년 8월 17일, 금요일.

경기를 정하는 과정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려서, 나와 오튼의 마지막 세그먼트는 PWA에서 열리게 되었다.

나는 먼저 링에 올랐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오늘도 엄청난 환호였다.

당연했다.

뉴튜브를 통한 투표는 전 세계에 프로레슬링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를 알리는 지표였고.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팬들이 내 등장을 손꼽아 기다린 것은 당연했다.

마지막으로.

광고주도 엄청 좋아했다.

듣자하니 우리와 일을 시작하고 페이지뷰가 몇 배는 더 뛰었다던가.

뉴튜브 같은 거대 기업에서 그 정도의 광고 효과가 발생한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쪽하고 처리할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실시간 방송이 아니라 대시 앳 더 비치에 참가한다고 하니 큰 실망을 금치 못하더군.”

[Uooooooooooooooohhhh!]

“그래도 잘 해결했어. 그리고 하는 김에, 이 일이 끝난 후에도 뉴튜버로서 활동을 좀 해볼까 싶기도 하고.”

[Yeeeeeeeeeeeeeeeeaaaahhhh!]

“좋아, 그러면 어디 결과를 볼까.”

나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러자 15일 자정을 기점으로 집계가 종료된 투표 결과가 떠올랐다.

1위는 TLC 매치.

2위는 인페르노 매치.

3위는 스트리트 파이트 매치.

[TLC! TLC! TLC! TLC! TLC! TLC! TLC! TLC! TLC! TLC! TLC! TLC!]

팬들은 엄청나게 좋아했지만.

나는 반대로 눈썹을 찡그렸다.

“저걸로 만족해?”

다들 순간 놀랐다.

자, 여기에서.

‘각본’의 지향점은 언제나 팬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좋은 부분을 추가시키며 나아가는 게 중요했다.

이 경우에 팬들의 기대는 TLC.

하지만 거기에 더해.

스트리트 파이트와 인페르노 매치까지 섞으면서 그들이 원하는 걸 모조리 다 제공하는 것이었다.

“나는 TLC로 괜찮나 싶은데. 글쎄. 일단 그 겁쟁이 놈은 어떻게…….”

바로 그때였다.

[I Hear Voices In My Head-!!]

랜스 오튼의 테마곡이 PWA 경기장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놈을 상징하는 석양빛의 조명이 나왔고 팬들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Yeeeeeeeeeeeeeeeeeeaaaahhh!!]

환호를 보내는 그들.

그 앞에서 나는 피식 웃으며 링으로 천천히 나오는 놈을 바라보았다.

랜스 오튼.

평소처럼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을 한 녀석은 그대로 링에 올라와 건방지게도 나와 얼굴을 마주 하고 섰다.

ACW 월드 챔피언.

동시에.

드리밍 에라의 아이콘.

그런 나와.

[Uoooooooooooooooooooohhhh!]

음악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팬들은 그런 우리를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Face To Face.

단순히 얼굴을 마주볼 뿐이었지만.

거기 담긴 의미는 깊었다.

이후 음악이 끝나고.

내가 먼저 마이크를 건네자 받은 오튼은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놀랍군. 신. 살면서 죽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애둘러서 말하는 놈은 처음 봤어.”

[Booooooooooo-!]

“여기 멍청이들은 널 응원하지만 사실 알고 있겠지. 내가 널 반드시 박살 내고 그 벨트를 약탈할 거란 사실을.”

“놀라운데. 오튼.”

링 아나운서가 던진 마이크를 손에 쥔 나는 그대로 놈의 말에 답했다.

“도망치지 않고 왔군. 하긴, 너로서도 절대 그럴 수 없는 싸움이었겠지.”

“……?”

오튼이 순간 의아해했다.

그래.

원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여기에서 적당히 싸움의 분위기를 돋울 만한 마리아주 스타일의 링 세그먼트를 하기로 했으나.

녀석이 나오는 걸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도 할 이야기는 많았다.

“이렇게 서로 대립하고 서있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는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료야. 이런 관계는 절대 다른 곳에서 찾을 수가 없지.”

뭐. 하. 는. 거 야.

오튼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중요한 게 있어.”

이 업계에 영원한 친구는 없다.

왜냐면 이 업계가 결국에는 투쟁이라는 인간의 역사상 가장 심플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표현하기 때문이었다.

“요는 간단해. 이 싸움은 지금 이 순간, 이 순간까지. 누가 더 우위에 서있느냐를 결정하는 싸움이라는 거야.”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그리고 나는, 내 커리어 초창기에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벨트를 건네줬던 네가 여기까지 성장해 서있는 것을 운명과 같다고 느끼고 있단 말이지.”

거기에 피식 웃는 오튼.

“어느새 감성적이 되셨군.”

“이 정도의 싸움에는 이 정도의 감성이 필요해. 오튼. 너도 좀 허세를 버리고 이야기해보는 건 어때?”

나는 권유했다.

거기에 팬들이 집중했고.

오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 ……솔직히, 내가 처음 백스테이지에서 마주친 건 지금껏 업계에서 ‘본 적이 없던’ 놈이었지.”

동양인.

그 말을 애둘러 표현한 오튼은 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너는 언제나 내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했어. 나는 언제나 그와 반대로 효율적인 움직임을 취했지만. The Viper로서 상대의 숨통을 끊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거든.”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그 말이 맞았다.

랜스 오튼은 그런 남자였다.

레볼루션부터 시작해서.

리갈리아와 같은 스테이블을 만들거나 참여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녀석은 언제나 효율적으로 승리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어째선지 너와 시합을 하게 되면 바뀌게 되더군. 너란 놈을 내 안에서 인정할 수가 없는 거지.”

“…….”

그건 좀 아이러니했다.

현실을 가져온 기막힌 비유였다.

평소에는 효율적인 작업을 추구하던 오튼은 나와 만날 때면 그런 건 다 제쳐두고 자신의 본성을 드러냈다.

이걸 현실로 치환하면.

평소에는 다 귀찮다며 대충대충 하던 녀석이 내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어서 힘을 써준다는 이야기겠지.

그리고.

“지금도 그래. 나는 네가 ACW 월드 챔피언에 걸맞은 사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걸 가져와야만 직성이 풀리겠어. 맞아. 이쯤에서 확실히 너와 나의 상하 관계를 정해둘 필요가 있겠지.”

“나와 생각이 같군. 오튼.”

나는 손을 내밀었다.

오튼이 그걸 덥석 맞잡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그리고 나는, 네가 고작 TLC 하나로 쓰러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Uoooooooooooooooohhhh……!]

그렇게 충분히 떡밥을 뿌린 상태에서 경기 직전의 세그먼트가 끝났다.

우리는 모든 준비를 해두었다.

카인에게서 몸에 좋은 흰색 가루를 어디에서 사는지도 알아왔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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