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
사각의 링을 불꽃의 벽이 가뒀다.
푸화아아악-!!
치솟은 불길은 순간적으로 링 위에 서있는 선수들의 모습을 가려버렸다.
팬들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스트리트 파이트.
TLC.
그리고 인페르노에 이르기까지.
세 경기를 연속으로 치르는 쓰리 스테이지 오브 헬을 연상시키는 매치.
하지만 힘든 경기임에도 달리 아직 핀 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게 팬들을 경기에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쓰러지지 않았다.
링 안에 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오튼은 당황했고, 이 경기를 준비한 듯 보이는 신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한순간 크게 치솟은 불길은 조금씩 천천히 잦아들어 이내 모닥불처럼 1단 로프의 언저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Yeeeeeeeeeeeeeeeeeaaaahhhh!!]
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가 바라던 화끈한 싸움.
이 시대에서 오직 신과 오튼이기에 할 수 있는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서 불길 앞에 선 심판이 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는 링 아래에 쳐진 커튼을 들어서 순간 불길을 막아냈고 심판을 보기 위해서 링으로 들어오고자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푸화아아아악-!!
불길이 거세게 치솟아 벽이 되었다.
[Uoooooooooooooooooohhhhh!!]
팬들이 놀라 소리쳤고 심판이 불길을 막기 위해 올려둔 커튼에 불이 옮겨 붙어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링 바로 앞까지 나와 있던 소방 요원 하나가 간이 소화기를 들고 커튼에 붙은 불을 진화했다.
순간 당혹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바로 그때.
링 위에서 싸움을 이어가던 신이 오튼을 로프 쪽으로 크게 밀었다.
오튼은 침착하게 로프 반동을 했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신이 힘껏 위로 뛰어올라 그대로 드롭킥을 날렸다.
퍼억-!
거기에 맞아 쓰러지는 오튼.
두 사람이 링 위에 떨어지는 순간.
푸화아아아아악-!!
다시 불길이 치솟았다.
[Uoooooooooooooooooohhhhh!!]
불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잠깐 뒤로 빠졌던 심판이 다시 돌아왔다.
언제 가져왔는지.
그는 신의 가죽 재킷을 입은 채였고 손에는 테이블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
테이블로 불길을 덮었다.
푸화아아아악-!!
순간 불길이 치솟았지만, 코팅된 테이블은 약간 그을렸을 뿐 견뎌냈다.
그 짧은 틈을 타, 심판은 링 위로 미끄러지면서 올라갔고, 그 남다른 프로의식에 팬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 직후, 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살갗이 붉어져 있던 그는 심판이 자신의 재킷을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가가 억지로 벗겨냈다.
황당해하며 재킷을 벗는 심판.
하지만 그 안에 이미 토시를 덧대어 제대로 불길에 대비를 해둔 상태였다.
신은 재킷을 입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이 그 이름을 외쳤다.
반대편의 오튼은 이미 후드티를 입고 있는 상태. 아예 모자까지 뒤집어써서 뜨거운 불길을 막아내려 했다.
그렇게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뻐억!
신은 곧바로 헤드벗을 날렸다.
거기에 비틀거리며 물러난 오튼은 이를 악물며 신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크흑……?!”
순간 신이 놀란 틈을 타.
“크아아앗!!”
오튼이 그를 들고 내던졌다.
로프 근처로 내동댕이쳐지는 신.
투콰앙-!!
그 순간 치솟은 불길이 신의 재킷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팬들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불꽃의 연기와 그을린 냄새가 경기장 안을 묘한 형태로 잠식해나갔다.
신은 옆으로 굴러 일어섰다.
열기에 그을린 재킷의 표면이 일그러졌다. 그는 고통에 표정을 구긴 채로 다가오는 오튼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뻐억!!
유로피언 어퍼컷이 턱을 강타했다.
신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오튼은 계속 유로피언 어퍼컷을 갈기며 그를 코너까지 몰아붙였다.
발 바로 뒤쪽에 불길이 온 상황.
뒤로 물러선 오튼은 그대로 코너의 신을 덮치기 위해 힘껏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신은 오튼을 바라보았다.
멍한 눈.
분명히 이 열기와 연이은 공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챔피언에 대해 팬들이 걸고 있는 기대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스텝을 밟고.
나아가 옆으로 발을 들었다.
쫘악-!!
슈퍼 킥.
[Uooooooooooooooooooohhhh!!]
거기에 턱이 들린 오튼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신은 그대로 달려 나가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었다.
스팅거.
쩌억-!!
경기를 뒤집는 화려한 니 킥.
불길의 벽이 크게 치솟았다.
순간 두 거체가 뒤엉키며 함께 링 위를 나뒹굴었다. 팬들은 이어지는 카운트를 세기 위해 준비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안 돼.’
그렇게 생각한 신은 불길이 다시 잦아드는 타이밍에 맞춰서 일어났다.
그리고 탑 턴버클 위로 올라갔다.
가는 과정에서 뜨거운 불길과 체력적인 문제로 인해 몇 번이고 고꾸라졌지만 끝끝내 신은 그 위로 올라갔다.
불길 속에서.
그는 링 아래에 드러누워 있는 오튼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힘껏 뛰었다.
피닉스 스플래시.
하지만 이번에도.
The Viper는 반격을 준비했다.
[Uooooooooooooooooooohhh?!]
신이 뒤로 돌아 힘껏 뛰어오른 시점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서는 오튼.
그는 옆으로 회전해 자신을 향해 한 바퀴 돌아 떨어지는 신의 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앞으로 힘껏 뛰었다.
R.K.O.
투콰앙-!!
푸화아아아악!!
치솟는 불길 속에서 링 바닥에 떨어지는 두 사람. 심판이 그걸 보고 놀라 링 바닥에서 펄쩍 뛰었을 정도였다.
반격 R.K.O.
피니시 무브.
경기를 끝내는 기술이 터졌고 팬들은 머리를 감싸 쥐며 순간 절규했다.
끝났다.
이 기술은 너무 크다.
숨을 몰아쉰 오튼이 위로 기어 올라가 엎드린 채 쓰러진 신을 뒤집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핀 폴.
[1……!!]
[2……!!]
절체절명의 순간.
모두가 이 폭력의 끝이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신이 어깨를 들었다.
[Yeeeeeeeeeeeeeeeeeeaaahhhh!!]
팬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R.K.O.
이미 그것만으로도 빠져나올 수 없는 기술이었다. 거기에 탑 턴버클에서 떨어져 내리던 충격까지도 더해졌다.
그걸 빠져나왔다.
“허억, 허억……!”
신이 어깨를 드는 충격으로 튕겨져 나온 오튼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뒤로 물러나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있을 수 없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충격에 충격을 더한 반격 R.K.O.를 그야말로 완벽한 방법으로 벗어났다.
이게 챔피언이다.
바로 그걸 보여주듯이.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이 그의 이름을 외쳐댔다.
그런 상황에서 어깨를 들며 동시에 다시 엎어져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신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 했다.
그걸 확인한 오튼이 먼저 일어섰다.
그 표정은 잔뜩 굳어진 채였다.
하지만 의지를 잃지는 않았다.
한 번이 아니면 두 번.
두 번이 아니면 세 번.
쓰러질 때까지.
R.K.O.를 꽂아 넣는다.
그런 각오로 다시 일어선 오튼.
신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아직 움직이는군.’
단순히 찢어졌을 뿐이다.
단순히 힘들 뿐이다.
아직 경기를 끝내기 위한 마지막 한 방을 먹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튼과 마주보았다.
경기의 마지막을 향해 내달리는 듯 이어지는 신과 오튼의 난타전.
뻐억!
빠악!
퍼억!
쫘악!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환호는 신에게 몰렸다.
단순히 이 경기가 ACW의 페이퍼뷰에서 열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분위기 자체가 신에게 완전히 넘어왔다.
흐름을 가져오는 헤드벗.
쩌억!!
로프 쪽으로 밀려난 오튼의 발이 순간적으로 불길 가까이에 닿고 말았다.
“크윽?!”
순간 열기를 느끼고 화들짝 놀란 오튼이 링 중앙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신은 이미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허리를 숙인 채 서있던 신은 그대로 방심한 채 다가오는 오튼을 붙잡았다.
[Uoooooooooooooooooohhhh?!]
스쿱 포지션으로 오튼을 들어 올리는 신을 보고 팬들이 놀라 소리쳤다.
이어지는 기술은 단 하나.
신에게 온갖 전설적인 경기에서 승리를 안겨주었던, 동시에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그 상징과도 같은 기술.
역십자.
안티크라이스트.
반역의 상징.
수직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순간 정지한 신이 그대로 힘껏 뛰어 올랐다.
그리고 떨어졌다.
투-콰앙-!!
바닥에 정수리부터 충돌하고 튀어 오른 오튼의 몸이 링 바닥에 떨어졌다.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악-!!
안티크라이스트가 가진 위상과 상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불길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크고 길게 타올랐다.
신은 곧바로 핀 폴로 이었다.
모두가 다 함께 카운트를 셌다.
[1……!]
[2……!!]
[3……!!!]
땡땡땡-!!
[Waaaaaaaaaaaaaaaaaaggghhh!!]
그렇게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불길이 잦아들었고 신의 테마 음악이 흘러나오며 팬들은 치열했던 경기의 완벽한 마무리에 박수를 보냈다.
결국 신이 한 발자국 앞섰다.
반격 R.K.O.를 맞고도 버텨낸 그는 인페르노 매치라는 콘셉트와 걸맞게 불길을 통해 안티크라이스트를 썼다.
그리고 승리했다.
그 테마곡이 이어졌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이 자신의 이름을 계속 외치는 가운데 오튼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던 신은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시원하군.’
불길이 잦아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경기를 중간에 멈추지 않고 원하던 대로 마무리 지었기 때문일까.
속이 시원했고, 분명 오튼과 자신이 보여줄 수 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을 팬들에게 보여줬다고 확신했다.
거기다.
두 사람 다 무사했다.
테마곡이 이어지며 심판이 챔피언 벨트를 가지러 간 사이, 신은 자신의 아래에 깔린 오튼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분간 태닝 안 해도 되겠군.”
“하냐?”
“해야지. 여자를 홀리는 섹시한 구릿빛 피부는 거저 얻는 게 아니거든.”
“말은 잘하는군.”
피식 웃은 신은 천천히 손을 들어서 그대로 오튼의 목 뒤를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당겨서 가볍게 안았다.
그걸 본 팬은 지극히 소수였다.
하지만 신은.
지금 팬들이 이 열기에 취해서 미쳐 날뛰고 있는 사이에 진심을 말했다.
“정말 고맙다.”
“재수 없어, 새꺄.”
“…….”
“크헉!”
사람이 모처럼 진심을 말했더니.
신은 오튼의 머리를 놓고 명치에 엘보를 먹은 뒤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심판이 벨트를 가지고 왔다.
최강의 상징.
ACW 월드 챔피언 벨트.
그는 이 가치를 지키고, 더 드높이 빛나게 하기 위해 이런 싸움을 했다.
신은 마치 어린애가 자신의 보물을 대하듯이 벨트를 감싸 쥐었고, 그것은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렬한 일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꿈을 키워온 소년.
그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이 길로 들어와, 마침내 챔피언이 되었다.
그게 신의 드라마.
하지만.
“……이봐, 신.”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오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신이 시선을 흘낏 보냈다.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운 오튼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나와 싸우러 가.”
“…….”
그것은 순간 말을 잊게 했다.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어울리지도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한 오튼이 링 밖으로 나갔다.
남은 건 챔피언 하나.
엔딩 세리모니를 남겨두고 있는 상황에서 잠시 멍하니 있던 신은 옆에서 심판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이봐, 신.”
“예, 예?”
“세리모니 해야지.”
“……아.”
그 말에 순간 당황해 셀링도 잊고 벌떡 일어선 신은 그대로 생각해두었던 대로 코너 쪽으로 움직였다.
2단 로프에 양발을 걸치고 위로 올라간 그가 챔피언 벨트를 들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폭죽이 터져 올랐고 신은 숨을 몰아쉬며 챔피언으로서 위용을 보였다.
190이 넘는 거한.
개성 있고 잘생긴 얼굴.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
선수로서 가진 레슬링 스킬.
스스로의 생각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마이크워크와 캐릭터의 개성. 그리고 개인의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김준호는 만들어왔다.
‘SIN’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하지만.
‘이거 어쩐다.’
왠지 시나의 앞에서는.
그게 전부 무너질 듯했다.
왜냐면.
숀 시나.
그는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지금껏 줄곧 김준호라는 사내가 그 뒤를 쫓아온 아이콘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