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
“확실히 말해두죠.”
티파니 맥센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아 고와 몇몇 선수들이 저지른 습격 행위는 저와는 관련이 없어요.”
냉정하고 단호한 태도였다.
다들 거기에 반응하지 못했다.
한 사람을 제외하면.
“티파니 맥센, 내 사랑.”
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당신은 역시 바트 맥센의 딸답군.”
“보다 더 영리한 버전이죠.”
티파니가 씨익 웃었다.
그제야 팬들은 깨달았다.
티파니 맥센이 지금껏 조용히 감춰두었던 자기 자신의 엄니를 드러냈다.
악당으로서 그녀는 바트 맥센과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았다. 자신의 말대로 더 세련되고 영리한 버전이었다.
그녀가 다른 두 단체를 깔보는 발언은 확실하게 팬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특히나, 티파니가 WWF의 후계자가 되기 전까지 함께했던 PWA 팬들의 역린을 크게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Boooooooooooooooooo……!]
쏟아지는 야유.
하지만 티파니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튼, 신. 당신이 저를 위해 나서준 것은 정말로 로맨틱한 일이지만.”
그건 그거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죠.”
티파니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제 입장은 견고해요. 굳이 두 단체와 분쟁을 빚고 싶지는 않아요. 말했듯이 저희에게 손해일 뿐이니까요.”
“그게 아니라, 티파니.”
케인이 씨익 웃었다.
“넌 단지 두려울 뿐이겠지.”
“멋대로 생각하세요.”
티파니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여유롭다 못해 지금 이 상황을 심드렁하게 느끼는 모습이었다. 그게 순간적으로 케인의 입을 다물게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하죠.”
티파니는 선언했다.
“앞으로, 다른 단체에서 WWF를 ‘침공’한다는 명목하에 무단 침입이나 영업 방해 등의 행위를 하면 저희는 반드시 법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
[Booooooooooooooooooooo-!]
야유가 쏟아졌다.
티파니의 방식은 모든 것을 링 안에서 정한다고 하는 프로레슬링의 기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실망한 팬들이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티파니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마이크를 던진 뒤, 퇴장했다.
바로 그때였다.
워-어! 워-어! 워-어! 워-어!
[Uooooooooooooooooohhhh!!]
사모아 고가 PWA로 돌아왔다.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팬들이 음악에 맞춰 그의 이름을 외쳤고, 티파니도 순간 당황해 링으로 나오는 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는 티파니를 완전히 무시하고 링에 올라와 내게 이야기했다.
“한판 붙자. 오늘.”
[Yeeeeeeeeeeeeeeeeeeeaaahhhh!]
그 카리스마에 팬들이 환호했다.
‘법적 대응’이니 뭐니 순간 죽어버렸던 링 안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티파니는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다시 링에 올라온 그녀는 그에게서 마이크를 빼앗고 명령을 했다.
“돌아가요. 고. 제가 방금 한 이야기를 못 들으셨나요?”
“아니, 아주 똑똑히 들었지.”
“그러면……!”
“Size, Doesn’t Matter.”
고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중요한 건, 여기 이 개자식이 내가 지금 가장 붙고 싶은 상대라는 거야.”
[Yeeeeeeeeeeeeeeeeeeaaahhhh!!]
“그리고 그건 아무도 막을 수 없어. 아가씨. 다치기 싫으면 물러나라고.”
“하, 나는 안중에도…….”
“당연히 너는 안중에도 없지!”
케인 맥센이 뭐라 볼멘소리를 내려고 하자 고가 곧바로 그를 제지했다.
“너는 빌어먹을 새끼니까! 돈, 돈, 돈. 돈으로 업계를 사려고 했으니까!”
[Uooooooooooooooooooohhh!!]
“그게 이 전쟁을 불러왔어!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는 좋은 일이지!!”
고가 다시 날 돌아보았다.
“다시 이 새끼의 엉덩이를 걷어차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야!!”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내가 너에게 도전한다! 신! 넌 이 도전을 거절하지 않을 개새끼고, 나는 그게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군!!”
자신의 감정과 캐릭터를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나를 도발하는 사모아 고.
나와 헤이건.
케인과 티파니.
마지막으로 그까지.
이 링 세그먼트는 분명히 사모아 고를 띄워주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 * *
물론 세그먼트와는 별개로 오늘 경기는 PWA의 왕인 내가 가지고 갔다.
경기 초반부터 치고받기 시작한 고와 나는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브루털한 스타일의 경기를 선보였다.
WWF에서 하이 카더 레벨로 정체기를 맞이하고 있던 그는 이 경기를 통해 더 거대한 존재로 거듭났다.
하지만 역시.
경기의 내용과는 별개로 고를 상대하는 건 나도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Waaaaaaaaaaaaaaaaaaggghhh!!]
환호 속.
경기의 후반부.
주도권은 고가 가진 채였다.
덩치를 이용해서 몰아붙이는 그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나는 코너로 내던져져 거기에 양팔을 걸치고 섰다.
“우어어어!!”
그러자니 달려온 고가 그대로 옆으로 몸을 틀며 체중을 실어 충돌했다.
퍼억!!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가자 거만하게 등을 돌리고 서있던 고가 그대로 뛰어오르며 내게 킥을 날렸다.
쩌억!!
CCS 엔지그리.
후두부를 제대로 까였다.
무릎을 꿇고 쓰러진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의 동작을 기다렸다.
그러자니 고는 나를 계속 공격하는 대신 주먹을 쥐고 엄지와 약지를 좌우로 벌리는 특유의 손동작을 취했다.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거기에 쏟아지는 환호.
그 카리스마는 한 단계 진화했다.
애초에, 이 정도의 위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먹는 것이 사모아 고였다.
배짱과 터프함은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레벨.
다소 투박한 외형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는 정말 재능이 있는 선수였다.
물론.
나는 그보다 더 뛰어났다.
‘그렇지?’
나는 씨익 웃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암시를 걸면서 나는 그대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Uooooooooooooooooohhhh!!]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테이커의 싯 업이나 마이클스의 핸드스프링 같은 동작은 아니었지만.
턱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쭉 뺀 채 벌떡 일어서는 내 동작도 나름대로 팬들에게 처절함을 전해주었다.
고가 나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고 나는 손가락을 들고 까닥거리면서 녀석을 도발했다.
거기에 열이 받은 고가 달려들었고 나는 이번에는 당해주지 않았다.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해냈다.
콰앙!
코너에 충돌한 고가 그대로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를 돌려세웠다.
그대로 로프 쪽으로 내던진 뒤.
로프 반동을 한 고가 돌아왔고, 나는 자세를 단단히 잡아 놈을 들어 올렸다.
“크하악-!!”
욕이 절로 나오는 무게.
하지만 버티며 그대로 회전했다.
정지 동작으로 연결.
[Uooooooooooooooooooohhhh!!]
놀란 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안티크라이스트로 연결했다.
투콰앙-!!
지면에 수직으로 꽂히며 튕겨 나간 고가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나는 핀 폴로 이어갔다.
[1……!]
[2……!!]
[3……!!]
땡땡땡!!
이겼다.
나는 짜릿한 승리를 만끽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테마 음악이 흘러나왔고 나는 링 바깥으로 굴려나가려는 고를 붙잡았다.
“뭐야?”
“악수나 하자고.”
“…….”
거기에 일어서는 고.
각본에 없던 내용이라 순간적으로 의아해했던 그는 내가 손을 내밀자 이후로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하지만 팬들은 좋아했다.
두 선수가 격한 싸움 끝에 상대방을 인정한다. 분명히 멋진 그림이었다.
하지만 고는 악수를 하는 대신 내게 다가와 그대로 손을 잡고 번쩍 머리 위로 들어 올려주었다.
[Yeeeeeeeeeeeeeeeeeeeaaahhh!!]
거기에 쏟아지는 환호.
사모아 고다운 모습이었다.
너와 서로를 인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오늘 이긴 건 너다.
그것을 보여주고 내려가는 고.
정말 대단한 센스라고 생각한 나는 그대로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개자식! 저놈을 상대하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야! 사모아 고는 PWA에서도 바로 그런 남자였지.”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GOE!]
“하지만 승자는 나고! 여기는 PWA고! 오늘 오프닝에서는 충분히 남이 떠들게 해줬어. 그러니 이제는 내가 챔피언으로서 한마디쯤 해도 되겠지!”
나는 왼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쳤다.
“여기 뭔가 비어 있잖아?”
바로 ACW 월드 챔피언 벨트였다.
“그걸 그냥 돌려받을 마음은 없다고! 케인 맥센! 그리고 ACW!! 너희가 확실한 대가를 치를 거란 걸 약속하지!!”
[Yeeeeeeeeeeeeeeeeeeeaaahhh!!]
“그리고 티파니.”
술렁거리는 관객석.
“오늘 봤듯이,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네 생각대로는 안 될 거야.”
우리는 분명히 붙게 될 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게 프로레슬링이니까.
* * *
그렇게 한바탕 이어진 쇼가 막을 내린 뒤, 나는 백스테이지로 돌아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신! 최고였습니다!”
“고마워요, 고마워.”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에서 돌아온 나는 뒷정리를 하고 있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락커룸으로 돌아갔다.
이 순간이 제일 행복했다.
모두 안전하게, 일이 다 끝나고 긴장이 서서히 풀려가는 바로 이 시간.
대충 동료들에게 인사한 뒤 퇴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락커룸으로 들어섰다.
“받아, 신!”
그러자 뭔가가 날아들었다.
캔 맥주였다.
“오늘 멋졌어. 고맙군.”
다들 모여서 얼음 버켓에 가득 담긴 맥주를 홀짝이는 가운데, 날 기다렸는지 사모아 고가 활짝 웃어 보였다.
잠깐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어라 싸웠던 우리였지만 백스테이지에서는 둘도 없는 동료 사이가 되는 것이었다.
“너야말로. 고.”
“아니, 진짜로. 환상적이었어. 날 그렇게 든 놈은 네가 처음이지 않을까.”
“시나도 있잖아.”
“하긴, 시나는 더 쉽게 들지.”
껄껄 웃는 사모아 고.
나는 피식 웃으며 캔 맥주의 뚜껑을 따고는 그와 건배를 하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신!”
누군가 또 불러 돌아보자 드류 맥킨마이어가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는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건배사 한번 해주십쇼.”
“……오늘 무슨 날이냐?”
“당신과 함께 일하는 매순간이 저희에게는 특별한 날입니다.”
“헐겄다. 헐겄어.”
쯧쯧, 혀를 차는 대니얼 라이언.
하지만 그도 캔을 들었다.
“부탁한다고. 캡틴.”
“와, 아직 레슬링 중인 거냐?”
뭐 이렇게 오그라들게 만들어.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러자니 내 뺨이 좀 붉어진 것을 알아차린 다른 선수들이 하나둘씩 캔 맥주를 들면서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좋은 동료를 두었군. 신.”
“…….”
미국 스포츠 드라마로군.
문제아투성이인 학교에 혈기왕성한 선생이 찾아가서 야구나 농구 같은 걸 시키면서 뜨겁게 눈물을 흘리는.
대충 그런 거.
‘내 인생이 그렇구먼.’
쓰게 웃은 나는 캔을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돈 되는 일하자! 새끼들아!!”
[Yeeeeeeaaahhh!]
맥주 파티가 시작되었다.
아까 엔지그리에 맞은 목이 좀 당겨서 캔을 대고 있던 나는 뒤늦게 어떤 의문 하나를 느끼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누가 산 거야?”
“티파니 맥센.”
고가 대답했다.
“멋진 여자야.”
“……그렇지.”
“처음에는 좀 의심했지만.”
“맥센이니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어.”
그리고 나는 PWA를 떠나 WWF에 정착한 고로부터 이야기를 좀 들었다.
일단 티파니 맥센이 후계자가 되면서 발의한 정책들로 인해 선수들의 활동이 크게 편해졌다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링에서의 역할도 거리낌 없이 최대한 수행해주려고 하고 있지.”
고는 이번 각본을 언급했다.
지금 시행 중인 인베이전 각본에서 우리가 가장 중시한 부분은 바로 선수와 업계의 위상을 띄우는 것이었다.
그걸 달성하기 위해 티파니는 기꺼이 악역 경영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자기 아버지와는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아주 기분 나쁜 악역 경영자.
그게 지금의 티파니 맥센.
오늘 링 세그먼트가 좋은 예시였다.
티파니는 자신의 바뀐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팬들의 야유를 받았고, 고가 그것을 받아치며 멋진 그림이 나왔다.
그로 인해 비록 오늘 경기에서는 패배했지만 고의 위상이 한층 더 높아졌다.
앞으로 팬들은 그의 행보에 더 기대를 가지고 상품을 구매하면서 사모아 고라는 레슬러를 응원하게 되겠지.
그렇기에.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일단 PWA가 나를 돕고.
나는 케인 맥센과 적대를 하는 동시에 티파니와도 불편한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그 각본은 이제 개막까지 일주일 정도를 남긴 WWF와 ACW, PWA 최초의 공동 개최 페이퍼뷰.
‘레슬링 월드 시리즈’에서 확실하게 그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
각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티켓의 판매도 최대한 늦춰서 시작했지만 3분도 안 돼서 완판이 되었고.
이제 내일 러셀 오메가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이런 날도 다 오는군.”
맥주 파티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나는 가만히 취기를 느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