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
팬들은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와 시나 러셀이 각자 경기에서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 보이는 치열한 감정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인베이전이라는 각본에 걸맞은 결말을 준비했다.
경기의 최후반부.
“허억, 허억…….”
체력적으로 한없이 지친 상황.
링 위에 널브러진 나는 이쪽과 마찬가지로 뻗은 두 명이 상태를 확인했다.
시나는 엎드려 있고 러셀은 대자로 뻗은 가운데 팬들이 환호를 보내왔다.
[This Is Awesome!]
짝! 짝! 짝짝짝!
[This Is Awesome!]
짝! 짝! 짝짝짝!
[This Is Awesome!]
짝! 짝! 짝짝짝!
박수와 챈트가 번갈아 이어지자 심판이 곧바로 텐 카운트를 시작했다.
[1!]
이게 지나가면 경기는 마지막 스팟을 끝으로 종료될 예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깊게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2!]
멋진 밤이었다.
지금껏 성장해온 각 단체의 선수들이 한데 뭉쳐서 좋은 쇼를 만들었다.
나는 싸울 용기를 얻었다.
전생의 프로레슬링.
다시 말해, 내가 존재하는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변하지 않고 있는 남자, 숀 시나와 말이다.
내가 없었다면.
러셀 오메가는 트리플H와의 정치 싸움에서 밀려 변변찮은 경력도 갖추지 못하고 은퇴를 했어야 했겠지.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더 나은 랜스 오튼은 없었을 거고, ACW는 멸망했으며, 테이커와 같은 전설들은 아직도 혹사를 당하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내가 전생의 지식이라는 이점을 가지고서 이 업계를 좀 더 나은 방식으로 변화를 시켰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숀 시나는 그대로였다.
녀석이 만든 시대는 업계의 성장과 더불어 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내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시나와의 일전이 가지는 의미가 엄청나게 큰 것을 느꼈다.
나는 시나의 시대를 살았었고.
지금은 그와 맞서려고 했으니까.
죽음으로부터 돌아와서.
‘어디 해보자고.’
몸에 감도는 긴장감.
[8!!]
심판의 카운트를 들으며 나는 로프를 붙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미리 계획해두었던 대로 충격적인 결말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
러셀이 먼저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찹.
쫘악!
[Uooooooooooohhh!!]
팬들이 탄성을 내뱉었고 시나도 내게 달려와 두 사람의 공격이 이어졌다.
러셀은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고 시나에게도 찹을 한 방 날렸다.
쫘악!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시나.
내가 거기에 슈퍼 킥을 날렸다.
쩌억-!!
[Yeeeeeeeeeeeeeeeeeeaaahhhh!!]
쏟아지는 환호.
아직까지 팬들은 경기에서 딱히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이어졌다.
러셀이 뒤로 물러났다.
나는 시나가 무릎을 꿇은 시점에 맞춰서 그대로 달려가 스팅어를 날렸다.
쩌억!!
무너져 내리는 시나.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핀 폴에 들어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러셀 오메가의 존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스팅어를 차넣은 뒤 바닥에 떨어진 나는 핀 폴을 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서 러셀을 확인했다.
녀석이 탑 턴버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크레센트.
공중으로 뛰어올라 뒤로 회전한 러셀의 몸이 쓰러져 있던 시나를 덮쳤다.
투콰앙-!!
[Uoooooooooooooooooooohhh?!]
마치 태그 팀 무브와 같은 공격.
그대로 핀 폴이 이어졌다.
[1……!!]
[2……!!]
여기에서 모두가 생각했다.
내가 분명히 러셀을 밀쳐내서 시나가 핀 폴에 당하지 않도록 할 거라고.
심지어 시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무리해서 킥 아웃을 하지 않고 날 기다려서 체력을 아끼려고 했다.
하지만.
[3……!!]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엿 먹이듯 허망하게 쓰리 카운트가 세어졌다.
시나가 뒤늦게 어깨를 들어 핀 폴에서 빠져나왔지만 한참 늦은 뒤였다.
땡땡땡-!!
심판이 양팔을 머리 위에서 흔들어 경기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자 링 벨이 무참하게 세 번 울려 퍼졌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말.
팬들도 순간 놀라 반응하지 못했고 러셀의 테마가 경기장 전체를 물들이며 결말이 났음을 알렸다.
한 박자 늦게 킥 아웃을 했던 시나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왜 핀 폴을 방해하지 않았는가?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러셀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내 손을 잡고 일어선 러셀은 싱긋 웃으며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건넸다.
“챔피언.”
“…….”
[Uoooooooooooooooohhhhh!]
거기에서 모든 게 확실해졌다.
나는 ACW의 편에 서기로 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나는 ACW 월드 챔피언이었으니까.
* * *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레슬링 월드 시리즈의 충격적인 결말은 그러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설마 경기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배신을 하고 ACW 측에 붙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물론 팬들이 보기에는 다소 맥이 빠지는 결말일 터였다. 시나가 나를 믿고 있다가 킥 아웃을 못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위상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결말을 최대한 뒤로 미뤄 팬들의 결제를 유도하려는 계략이었다.
왜 신은 ACW에 붙은 것일까.
다들 그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며 그 다음 날 이어진 나이트로를 시청했다.
쇼의 오프닝 영상이 끝나고 경기장의 전경과 함께 한 남자의 테마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Yeeeeeeeeeeeeeeeeeeeaaahhh!!]
마지막 경기에서 ACW의 승리가 정해지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나를 격렬하게 반겨주는 관객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커튼을 걷고 입장로로 나선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손에 쥔 채 어제 내가 한 행동의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어제 이 비즈니스의 역사상 최초로 세 개의 단체가 함께 페이퍼뷰를 개최했지. 여기에 모인 모두가 그 광경을 봤을 거라고 일단 생각하겠어.”
[Yeeeeeeeeeeeeeeeeeaaahhh!!]
“그래, 좋아. 이야기하기 편하겠군.”
나는 싱긋 웃었다.
다들 의문을 느낀다면.
아마 여기일 터였다.
왜?
대체 왜, 신은 PWA의 대표로 출장해 마지막에 ACW를 도운 것일까?
“직접 보는 게 낫겠지.”
그렇게 말한 나는 입장로를 향해 손을 까딱거리며 누군가를 불러냈다.
그러자 이어지는 음악.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바로 러셀 오메가였다.
[Waaaaaaaaaaaaaaaaaaggghhh!!]
녀석이 계략을 썼다.
링으로 나오는 녀석의 손에는 ACW 월드 챔피언 벨트가 들려 있었다.
거기에서 모든 게 설명되었다.
나는 링으로 올라온 러셀의 손에서 챔피언 벨트를 건네받아 번쩍 들었다.
[Uooooooooooooooooooohhh!!]
그러자 쏟아지는 환호.
나는 ACW 월드 챔피언이었다.
“바로 이게, 그 이유야.”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나는 차근차근 설명을 해나갔다.
PWA를 배신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ACW 월드 챔피언으로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물론, 나와 ACW 사이에 문제가 좀 있기는 했지.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케인 맥센과의 문제였다고.”
“나도 보면서 좀 열이 받더라고.”
러셀이 설명을 거들었다.
“빌어먹을 케인 맥센이 대체 뭐라고 ACW 월드 챔피언을 축출하는 거지?”
녀석이 내 벨트를 손으로 가리켰다.
“넌 내게서 이걸 가지고 갔어. 반드시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고.”
“눈물이 다 나는군. 러셀.”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 티파니가 맞았다고 링에 트럭을 끌고 들어온 건 미친 짓이었지만.”
[Uooooooooooooooooohhh!!]
“또, 그런 티파니에게도 까였지.”
“그러니까 졌지. 만약 티파니가 다른 단체를 조롱하지 않았더라면 난 그쪽 편에 붙었을지도 모른다고?”
“이미 다 끝난 일이야.”
결과는 이렇게 되었다.
“ACW는 승자의 권리를 갖게 되었지. 그리고 나는 거기에…….”
바로 그 순간이었다.
[Here Comes The Money-!]
경기장 전체가 돌연 달러의 녹색빛으로 물들며 케인 맥센의 등장 테마가 들려왔다.
[Booooooooooooooooooooo-!]
자동으로 나오는 야유.
러셀과 내가 입장로를 돌아보자 잔뜩 열이 받은 표정을 한 케인 맥센이 몇몇 선수들을 데리고 나왔다.
[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 회사의 지분을 샀어! 너희는 이 단체의 오너인 내 명령을 들어야 한다고!]
[Booooooooooooooooooooooo-!]
[그런데 감히 내 뒤통수를 쳐?!]
“어디 보자.”
나는 로프에 기대어 섰다.
케인 맥센의 뒤에 서있는 선수들은 내가 트럭을 타고 링에 쳐들어왔을 때부터 적극적으로 싸운 놈들이었다.
스탠 슈타이너.
악역 태그 팀인 FTL.
크리스 젠코와 잭 스웨어까지.
“거기 있는 친구들은 돈에 혹한 것 같은데. 일단 승자의 권리를 쓰기 전에 저것부터 정리를 좀 해야겠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로프에 팔을 걸친 나는 뒤쪽의 러셀을 돌아보았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군.”
기나긴 커리어의 초창기처럼.
우리는 지금 눈앞의 악당들에 맞서서 도망치지 않고 싸울 생각이었다.
* * *
레슬링 비즈니스에 어떤 식으로든 몸을 담았던 이들은, 대부분 인베이전 각본을 정말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그 결말이 레슬링 월드 시리즈로 났나 싶었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12월 초순.
각 단체에서는 내부의 문제들을 해결하며 각본의 깊이를 한층 더해갔다.
WWF에서는 티파니 맥센과 숀 시나를 중심으로 한 대립이 더 커졌으며.
ACW에서는 신-셀 태그에 맞춰 악역 레슬러들과 케인 맥센이 싸웠다.
두 단체 모두 비슷한 양상.
하지만 디테일이 완전히 달랐다.
ACW가 보다 선수들의 현실에 입각한 방식으로 각본을 전개해 나갔다면.
WWF에서는 티파니 맥센이라는 거대한 시련에 맞서는 영웅, 숀 시나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사이.
PWA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폴 헤이건이 나와서 패배를 시인하고는 그대로 선수들 간에 다시금 랭킹전을 벌이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WWF와 ACW에서 레슬링 월드 시리즈의 영향을 받아 각본을 전개해나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2월 말에 개최될 단체 간의 페이퍼뷰가 끝난 이후의 전환점이 충격적으로 느껴지기 위한 연출.
말하자면 PWA는 지금 몸을 웅크린 채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12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어가는 각본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묘한 이야기 하나가 떠돌기 시작했다.
일단 거의 삼십 년 가까이 이 업계를 지켜본 프로레슬링 전문 기자, 데이브 렐처부터가 호기심을 느꼈다.
“숀 시나와 신 말이야.”
[그래. 더블 아이콘.]
평소 하던 라디오 방송은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했고, 그렇기에 렐처는 전화로 먼저 그에 대한 떡밥을 던졌다.
과연 이걸.
동료 기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해?”
[나는 시나.]
“그래?”
[너는 어느 쪽인데?]
“나는 신이지.”
역시 첨예하게 의견이 갈렸다.
렐처는 의아해 물었다.
“신이 더 영향력이 크잖아?”
[하지만 아이콘이라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의 시대를 정의하는 선수니까.]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렐처의 동료 기자는 시나를 더 낫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시나는, 기존까지 업계에서 소외되던 계층을 자신의 팬으로 만들었다.
[누가 상상했겠어? 시대는 점점 자극적인 걸 원하는데 시나는 그와 반대되는 길을 걸어서 성공을 했잖아.]
방송이 전체이용가로 바뀐 뒤, 팬들은 프로레슬링이 하락세를 타게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숀 시나라는 시대의 아이콘을 중심으로 뭉친 WWF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업계에서 유례가 없던 일이지.]
현대 프로레슬링의 역사는 대략 오십 년 정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는 작은 단체가 지역 별로 난입하던 춘추 전국.
바트 맥센이 그걸 통일하고 왕조를 세워 북미 전체에 프로레슬링의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바로 ‘황금시대’.
그리고 90년대.
스테로이드 파동으로 회사가 크게 휘청거리며 나온 그렉 하트와 존 마이클스가 주축이 되었던 ‘신세대’.
[물론 그렉의 시대는 그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어서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태도 불량 시대’.
락콜드 스티비 스틴.
그리고 더 팍.
두 명의 아이콘 스타가 폭력과 유혈을 통해서 회사를 이끌어나갔던 시대.
그 뒤로 트리플H나 테이커 같은 노장들이 힘을 썼던 과도기를 거쳐서 숀 시나라는 걸출한 스타가 탄생했다.
[재미있지 않아? 그동안 프로레슬링이 성공한 시대에는 정확히 팬들이 원하는 걸 캐치했다는 공통점이 있지.]
하지만 시나는 그렇지 않았다.
시나는 온전히 자신의 타고난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단점을 극복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이콘이 되었다.
시나가 있고.
거기에 맞서는 신이 있다.
동료 기자는 그렇게 평가했다.
“두 사람이 참 흥미로운 게, 지금까지 커리어에서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지.”
[그렇지, 한국 투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공식 경기는 아니고. 시나가 랙다운일 때 신은 버닝콩이었고.]
시나가 메인타이틀을 거머쥐고 버닝콩으로 이적하자 신은 또 기다렸다는 듯이 랙다운으로 둥지를 옮겼다.
말인즉슨 간단했다.
“시나와 신이 그 시절부터 회사에서 생각하는 더블 아이콘이었단 거지.”
[바트 맥센은 안 그랬을 텐데.]
“물론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안했겠지만, 그래도 내심 인정은 했을걸.”
안 그랬다면 신에게 그런 식으로 좋은 부킹을 줄 리가 만무했을 테니까.
[제기랄, 사람은 죽은 뒤 미화되는 법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데…….]
“아직 안 죽었어.”
렐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쨌든 그랬다.
맞는 말이었다.
시나가 거둔 성공은 이례적이었다.
시나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그건 신도 마찬가지였다.
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동양인 남자가 미국 사회의 주류를 당당히 꿰찰 거라 생각했을까.
“상상할 수 있겠어?”
그는 모든 미국인이 선망해 마지않는 꿈을 정말 최악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이루어낸 것이었다.
시나가 새 시대를 만들었다면.
신은 불가능한 시대를 이룩했다.
렐처는 그렇기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신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