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
GCW 방문은 꽤 유쾌한 경험이었다.
예정되지 않은 방문이라 쫓겨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감격스러울 정도로 큰 환영을 받았고 멋진 시간을 보냈다.
바트 맥센이 로만에게 꽤나 큰 흥미를 느껴서 그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순리에 맡기기로 했지만.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고.’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로만은 전생에 받은 바트의 과도한 사랑(?)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환경에 놓이겠지.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기억을 떠올렸다.
시나와 나의 첫 만남 말이다.
회귀한 직후.
나는 전생에 날 속였던 인디 시절의 동료, 애덤을 역으로 엿 먹인 뒤 GCW 선수 선발 시험을 치르려고 했다.
그때 만난 게 바로 시나였다.
‘깜짝 놀랐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놈이 미래의 아이콘이라니.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당시 내 기억에 의하면 시나는 1년 뒤에 입사 시험을 치러 GCW에 입사하는 걸로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때 시험에 떨어졌을 뿐 보기는 한 모양으로, 나는 그런 시나와 함께 당당히 GCW에 합류했다.
……사실 내가 귀염둥이로 바쿠의 사랑을 받아 반쯤 억지로 넣어준 거지만.
어쨌거나.
그때 당시 동기가 여럿, 있는데.
에디 모리스였나.
그 친구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채 은퇴해 지금은 어디 플로리단가에서 컵 스카우트 캡틴을 한다고 들었고.
‘러셀과 시나는 말할 것도 없지.’
그런 식이었다.
아.
애덤도 이후로 딱히 빛을 보지는 못하고 그저 그런 선수로 남은 채 은퇴해 지금은 친구인 크리링과 함께 프로레슬링 팟캐스트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그 또한 내가 바꾼 일이었다.
나는 시나를 합격시켰고.
애덤을 버렸으며.
티파니 맥센과 사랑에 빠졌고.
테이커의 연승을 가져왔으며.
이 업계 전체의 판도를 뒤엎었다.
모두 내가 했다.
그리고 나는, 어, 찌질이니까.
그런 사실에 대해 아주 약간의 부채 의식을 가지기도 했다. 내가 괜히 원래의 역사를 바꿔놓은 게 아닐까 해서.
하지만.
이번 인베이전 각본을 통해 나는 결과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프로레슬링 업계가 더 나아졌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걸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젠장, 내가 그렇다는데 어쩔 텐가.
‘꼬우면 링에서 붙던가.’
쿵-퓨리가 신이 되었다.
프로레슬링의 쿵-퓨리가 아니라.
프로레슬링의 신.
뭐, 대충 그런 걸 생각하고 왔다.
추운 겨울은 인간의 몸에 깃든 감성을 연주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봤을 때 아주 환상적인 오케스트라였다.
시나에게 어떤 말을 할지.
내가 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싸울지.
확실한 결론이 섰다.
우리는 그때, 분명 좁고 더러운 기숙사 방에 앉아 비타민 음료를 나눠 마시면서 웅대한 꿈을 나눈 사이였지만.
그 꿈은 달랐다.
대립은 거기에서 시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일단은 2월의 일정을 소화할 때였다.
시나와의 대립은 3월부터.
지금껏 충분히 대립을 빌드 업 해왔으므로 그 이상의 시간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PWA와의 문제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선수들 간에 알아서 파벌이 형성되면서 싸우고 있었다.
드류 맥킨마이어와 핀 발로를 중심으로 하는 젊은 선수들이 나를 지지했고.
반대로 나와 함께 PWA를 창설한 선수들은 큰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거나.
어느 쪽이든.
나는 선상 반란을 제압해야만 했다.
……라는 건 각본의 이야기였고.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GCW에 다녀오고 며칠 뒤.
훈련을 위해 출근해 옷을 갈아입고 있자니, 쟈니 에이스가 내게 다가왔다.
“신,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아, 쟈니. 무슨 일이죠?”
“요새 들어온 놈들 있잖아.”
“예, 이번에 선발된 친구들이요.”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전생에는 딱히 본 적이 없었던 친구들이 네 명인가 새로 들어왔지.
거기까지 신경을 쓸 겨를은 없어 적당히 기억만 해두자 싶은 상태였는데.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 자식들이 건방지게 굴잖아.”
“음, 어떤 식으로요?”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내 수염이 구리대.”
누군가 끼어들었다.
쾅!
“…….”
“…….”
그렇게 말한 건 어느 샌가 옆에서 나와 락커를 박살 내버릴 기세로 닫은 수염 마니아, 대니얼 라이언이었다.
“뒤에서 말하는 걸 들었어.”
“그게, 사실이야?”
“응, 정말로.”
시무룩해져 수염을 쓰다듬는 대니얼.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일단 좀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아니, 그럴 필요도 없나.
“열죠, 그럼.”
“그럴까?”
“신인들이니까 너무 까지는 말고요.”
나는 그렇게 쓰게 웃었다.
여기에 있는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적당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신인들이 개겨.’
옛날 같았으면 뒤지게 맞았을 놈들인데, 요새는 또 그런 시대가 아니라서.
더욱이 내가 그런 스타일이기 때문인지 PWA는 군기가 좀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문제가 생겼다.
그럴 때마다 선수들은 내게 왔다.
마치 옛날 랙다운에서 문제가 생기면 선수들이 테이커를 찾아가듯이 말이다.
레슬러 법정.
그 묘한 문화는 아직까지도 이어져서 이제는 내가 판사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뭐.
내가 테이커처럼 애들 겁주고 손에서 번개를 쏴서 다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얘들아.”
훈련이 끝난 뒤 개최된 법정.
신인 네 명이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을 위해 PWA 선수들이 모두 모였다.
판사는 나.
변호사는 AK 스타일스.
검사는 쟈니 에이스가 맡았다.
그다지 거창할 건 없었다.
적당히 검사가 피고인이 저지른 죄를 말한 뒤 변호사가 변호를 해주고 마지막으로 내가 구형을 내리면 끝이었다.
“꼬우면 나가도 돼. 누구도 너희보고 여기에서 레슬링 하라고 말한 적 없으니까. 하지만 이거. 너희 꿈이잖아.”
다들 조용했다.
아무리 레슬러 법정이라는 장난스러운 네임을 쓰고 있어도, 어디까지나 업계에서 오래도록 지켜온 전통이었다.
그러므로 다들 진지했다.
“꿈이 아니어도 좋아. 돈 벌고 싶어서 온 거겠지. 그러면 이곳의 룰을 지키려는 모습이라도 보이란 말이지.”
대충 이쯤 해두면 될까.
“너희 넷은 앞으로 일주일 동안 매일 훈련 끝나고 링 청소해라. 청소부 아저씨한테는 내가 대충 말해둘 테니까.”
대충 거기까지가 판결.
네 명의 신인들은 시무룩해져 말이 없었고 나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대니얼, 너도 인마. 수염 좀 깎아.”
“나, 나?”
“그래, 그렇게 덥수룩하게 기르고 다니니까 염소하고 구분이 안 되잖아.”
선수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대니얼의 얼굴이 빨개졌고 신인들도 모두 풀어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슬그머니 웃어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머리 위로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락커룸 안이 고요해졌고 신인들은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는지 다들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가 다시 이야기했다.
“너희 넷 중에서 대니얼 수염 가지고 뭐라고 한 놈 누구야. 누가 내 단체에서 남 뒷말이나 흘리고 다니래?”
“…….”
“차라리 면전에서 말해라. 너희들 중에 누가 그렇게 말한 거야? 나와서 대니얼을 앞에 두고서 직접 말해봐.”
망설이는 신인들.
“나올 때까지 있는다.”
“…….”
그리고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르시?’
모자에 후드까지 푹 눌러쓰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누군지 못 알아봤었는데.
모자를 벗고 앞으로 나선 분홍색 머리의 그녀는 분명 오랜 옛날부터 내 팬이자 스눕-덕의 조카인 메르시였다.
아, 참고로 분홍 머리는 가발이었다.
‘입사했다고?’
근데 왜 나는 몰랐지.
아,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스눕-덕이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내게 보냈는데.
‘그게 설마…….’
고민에 빠져 있자니.
그녀가 대니얼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수염에는 세균이 득실득실하대요.”
“…….”
“…….”
“…….”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하하!!”
“이 새끼, 이거 물건인데!”
“아주 좋아! 아주!”
모두가 그녀를 인정했다.
메르시.
링 네임은 사샤 징크스.
지금부터 그 이름을 쓰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지금 이 한마디로 자신이 욕한 대니얼까지도 웃겨버렸다.
그로서 분위기를 가져왔다.
“이야, 너 용기 있는데?”
리키타가 다가갔다.
대충 그런 식이었다.
내가 없을 때 판사직을 맡는 리키타가 저렇게 인정할 정도면 다른 선수들은 감히 불만을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분위기가 순간 화기애애해졌다.
메르시의 덕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가 날 돌아보며 몰래 윙크했다.
* * *
그 후.
당연한 수순으로 나는 내 오랜 친구 스눕-덕의 조카 딸, 메르시와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왔죠.”
“다른 길도 있었을 텐데.”
“아뇨, 전 온리 프로레슬링.”
메르시가 씨익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그래, 나야말로.”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그러고 보면 슬슬 그럴 때였다.
여성 버전의 포-호스라이더가 나와서 위민스 레슬링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는 게 이제 몇 년 안 지나서의 일이었다.
하지만.
‘전생과 많이 달라졌으니 이제 다들 다른 단체에서 출발을 하게 되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걸 보자면 앞으로 내가 그 출현을 알고 있는 다른 선수들도 각기 다른 단체에서 활동하지 않을까 싶었다.
좋은 일이었다.
재능 있는 선수들이 WWF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 제각기 다른 개성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니.
거기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전생에는 프로레슬링을 비웃던 이들도 한 번쯤은 이 길을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지만.’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결국, 이 비즈니스는 방금 내가 만났던 메르시처럼 프로레슬링에 대한 꿈이 없으면 오래 버티는 게 힘들었다.
아무리 티파니 맥센이 혁명을 통해서 선수들의 복지를 상당 부분 신경 써줬다고는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뜻이 있어도 메리트가 없어서 떠난 선수들이 돌아온다는 말 아닌가.
‘나쁘지 않군.’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몸을 씻은 나는 늦은 밤 이어진 회의에 참석했다.
졸리다며 먼저 들어간 할리 대신 바쿠와 헤이건이 함께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 다 기다리던 상태였고 바쿠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핀잔을 주었다.
“늦었구나.”
“아, 법정 하나 있어서요.”
“애들 너무 괴롭히지 마라.”
“어, 적당히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해줘야겠군.
메르시가 얼마나 멋지게 컸는지.
“일단, ACW와 WWF 측으로부터 회신이 하나씩 들어왔다. 둘 다 의견 차이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는 모양이군.”
“어렵군요.”
“아무래도 두 단체 모두 이 경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비숍이 엿을 한 번 먹고 시작한 만큼 불쾌감을 느끼는 거겠지.”
“…….”
그 말이 맞았다.
소울 아웃에서 WWF 선수들을 거리낌 없이 내어준 티파니 맥센은 킹스 럼블도 개최하지 않고 모조리 1월 흥행을 ACW가 가져갈 수 있게 내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레슬 임페리움에서 숀 시나 VS 신과 캐스켓-테이커 VS 크로우를 하고 싶으니 두 선수를 저희에게 빌려주세요.’
“악마야, 악마.”
“능구렁이가 다 됐어.”
다들 그런 평가를 내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비숍이 멍청한 것도 있지만 티파니는 확실히 ACW 측이 벗어나지 못하게 제약을 걸어둔 상태였다.
소울 아웃에서 ACW가 역대급 흥행을 올릴 수 있도록 선심을 쓰고는 4월에 날름 가져가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비숍이 이걸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WWF라는 회사를 다시 적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PWA도 적으로 돌린다는 말이죠.”
“균형의 수호자로군.”
“저희는 어차피 페이퍼뷰가 없으므로 별 상관은 없지만. 돈 되는 일을 마다하는 쪽과 계속 일할 이유는 없죠.”
나는 싱긋 웃었다.
비숍에게도 그 점을 주지시켰다.
티파니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지금 이 기묘한 신뢰 관계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리라.
“어쨌든 그래. ACW 측에서는 선수를 빌려주는 대신 랜스 오튼과 같은 레벨의 선수를 받고 싶은 모양이고.”
“스타게이트를 비슷한 시기에 연속해서 개최를 하겠다는 모양인데.”
“티파니는 그걸 거절했지.”
“왜일까?”
“나는, 좀 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것은 바쿠였다.
바쿠.
그가 누구인가.
GCW 시절부터 나와 함께 얼굴을 마주보면서 항상 대화를 했던 남자였다.
회귀 후, 미래의 지식과 능력을 내보인 날 믿어준 최초의 남자이기도 하지.
또한 그는 티파니와도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왔기에,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 대충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굳이 ACW의 그런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나.”
그 말이 맞았다.
먼저 협업을 통해 이득을 본 건 ACW였으므로 굳이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죠.”
내가 물었다.
우리는 ACW 측과 WWF 측의 안건 중 하나를 채택해서 ‘왕따 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렇게 해.’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자니 바쿠가 물었다.
“난 이게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뭐가요?”
“너와 숀 시나 말이다.”
“……?”
“벨트는 걸 거냐?”
“걸어야죠.”
나는 단언했다.
그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러면 어쩔 거냐?”
“…….”
“누가 이길 거냐.”
곤란한 질문을 하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