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502화 (502/634)

502.

숀 시나가 말했다.

[더블 타이틀 매치에서 패배하면 저는 모든 걸 내려놓고 은퇴하겠습니다.]

예의를 갖춰 말했지만.

그 말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일단 나부터가 구토감을 느꼈다.

‘거기서 은퇴를 걸어?’

말도 안 되는 링 세그먼트였다.

순간 열이 받았다.

시나가 거기에서 은퇴를 걸어버린 순간 각본의 밸런스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야기의 ‘당위성’을 생각해보자.

현실적인 조건들을 더한 당위성을.

지금 이 더블 타이틀 매치에서 시나가 패배하고 은퇴하는 게 과연 옳을까?

비록 육체적인 전성기는 지났으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돼버린 바로 그를?

아니면.

자신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거대한 존재를 앞에 두고 팬들과 함께 각성한 시나가 이겨내는 전개는 과연 어떨까.

그것이 맞겠지.

맞는 그림이겠지.

시나가 내거는 가치가 인정받고.

그런 시나의 거대한 벽으로 훌륭하게 싸웠던 나 역시도 박수를 받게 되고.

그게 아마 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르고 무난한 그림일 터였다.

시나가 지금 은퇴할 리 없었으니까.

현실적으로 봐도 그렇고.

각본으로 봐도 그랬다.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3월 3주차, 월요일 밤의 버닝콩이 끝난 다음 날부터 뉴튜브를 비롯한 SNS 사이트에 ‘팬 챌린지’가 개최되었다.

시나의 팬들이 Let’s Go Cena! 라는 메시지가 적힌 종이를 들고 촬영한 사진을 업로드하며 해시태그를 걸었다.

뉴튜브에는 은퇴를 걸겠다고 한 시나의 모습을 본 아이들의 반응이 업로드되면서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Noooooooooooooo!!]

[시나가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Yeeeeeeeeeeeeessss!]

소년이 눈물을 엉엉 흘리며 말했다.

조그마한 아이가 입고 있는 숀 시나의 티셔츠와 리스트밴드, 캡 모자까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소년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시나의 액션 피겨였다.

그런 아이들이 전 세계에 수천만.

그 누구도 시나가 레슬 임페리움에서 패배해 은퇴하는 결말을 바라지 않았다.

‘빌어먹을.’

알아서 각본이 만들어지는군.

나로서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은퇴를 걸어?

WWF 측에서도 난리가 났다.

랜스 오튼이 전해준 말에 따르면 티파니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 시나가 무시했다던가.

그럴 만도 했다.

회사에서 벌금을 먹이더라도 할 말이 없는 문제였다. 은퇴를 건 시나의 세그먼트는 정말 돌발행동 그 자체였다.

우리 쪽에서도 황당해했다.

시나가 은퇴를 걸었다.

“말인즉슨.”

한숨을 내쉬는 러셀 오메가.

ACW 나이트로가 시작하기 전.

락커룸에서 만난 우리는 시나의 은퇴 공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러셀은 그걸 이렇게 평가했다.

“질 수 없다는 뜻이겠지.”

“……시나가 큰 걸 걸었어.”

“그러게 말이다. 각본 아니라며?”

“그래, 돌발이지.”

일단 WWF 측에서 함구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외부로 알음알음 기사가 나가며 모든 사실이 밝혀진 상황이었다.

“이런 전개가 되면 다들 시나가 나를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욕하는 이들도 많지만.”

러셀이 쓰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시나가 은퇴를 건 순간부터 레슬 임페리움의 경기는 녀석이 이기는 길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을 비판했다.

아니.

각본도 아니면서 그렇게 말한 건 완전히 신을 묻어버리려는 공작 아니냐.

이랬는데 신이 이길 리도 없고 시나가 자기 욕심 채우려고 이 대립의 균형추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고 말았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 웃었다.

“재미있지 않아? 러셀.”

“응? 뭐가?”

“시나는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내게 맞선다고 말했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놈이 주도하는 시대는 그 소외된 자들이 주류가 되었다는 게, 좀 재밌네.”

“……그런가.”

“맞아. 인터넷에 올라온 해시태그 운동을 보라고. 다들 시나가 이기는 것을 바라고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 사실 그게 ‘각본’으로서는 옳은 길이지.”

‘각본’은 시나가 옳았다.

나에게 비판을 당하고 한 번 꺾였던 영웅이 팬들의 응원을 받고 일어섰다.

‘현실’은 시나가 틀렸다.

놈은 이 업계의 끝판왕과도 같은 존재였고 은퇴를 걸면서 자신이 패배하는 결말이 나오지 않도록 술수를 부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업계의 모든 걸 아는 나는.

“시나는 정말 은퇴할 생각인 거야.”

“그렇겠지.”

“그 자식이 머리가 그렇게 좋은 놈도 아니고. 진짜 자기가 이기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란 말이지.”

“단지, 자신이 내거는 그 가치가 퇴색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걸어둔 일종의 심리적 장치.”

절대로 지지 않겠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그렇기에 시나는 은퇴를 걸었다.

관계자들은 모두 납득했다.

시나의 팬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위상은 공고하지.’

나는 벨트를 어깨에 들고 일어섰다.

슬슬 나갈 차례였다.

오늘 나이트로의 오프닝에서 나는 시나가 그랬듯이 링 세그먼트를 통해 메시지를 하나 던질 예정이었다.

쇼가 시작하기 전 몸을 풀어두고 감정을 정돈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아무 말 없이 나가려던 순간.

“신.”

러셀이 날 불러 세웠다.

“결과는 어떻게 되는 거냐.”

“…….”

“너희 둘 경기.”

“몰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는 러셀.

정말로 그랬다.

시나와 나는 아직 경기 결과에 대해 제대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러셀이 다시 물었다.

“질 생각이야?”

“아니, 절대로.”

나는 단언했다.

* * *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시작되는 음악.

[Waaaaaaaaaaaaaaaaaaggghhhh!]

이어지는 환호.

나는 커튼을 걷고 링으로 나갔다.

일련의 입장 과정은 오랜만에 복귀한 챔피언을 환영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ACW 팬들이 내 이름을 외쳤고 나는 링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가볍게 심호흡.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바로 이거였다.

“정말 역겹군. 시나. 네가 던지는 메시지를 보면 가슴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구토감이 올라온단 말이야.”

[Uooooooooooooooooooooohhh!]

“이유가 뭐겠어? 그 열 받는 메시지 때문이지. 나에게 진다면 은퇴하시겠다? 좋아. 원한다면 하게 해드려야지.”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마이크워크.

하지만 나는 한마디를 더 얹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다들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시나는 은퇴할 수 없단 거야.”

그 상품성, 팬들의 열망.

안타깝지만 시나는 본인이 그렇게 말해도 은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고? 넌 숀 시나잖아. 무적의 아이콘. 어린아이들의 영웅. 미스터 허슬, 로열티, 리스펙트. 네버 기브 업 등.”

그렇기에 시나 본인도 알 터였다.

“넌 은퇴하지 못해. 시나. 그러니 그 말을 꺼낸 순간부터 너는 체크메이트에 걸려든 셈이지. 아주 간단한 이유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관객석과 링을 바로 옆에서 촬영하는 메인 카메라 앞으로 다가간 나는 로프를 붙잡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널, 은퇴시킬 테니까.”

[Uooooooooooooooooooooohhh!!]

“다들 놀란 모양이군! 지금쯤 회사로 항의 전화가 몰려오고 있겠지! 죄다 내 말을 끊으려고 난리를 피울 테고!!”

어린아이들의 꿈을 부술 생각인가!

정말로 시나를 이길 생각인가!

“당연하지! 난 이러려고 레슬링을 해왔거든!! 전무후무할 단체 간의 더블 타이틀 홀더이자 숀 시나를 꺾은 남자가 되기 위해서 바로 여기까지 왔다고!!”

그게 나의 꿈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희망이 될 생각은 없어. 시나. 나는 이 링에 오르는 모든 이가 그러하듯 나를 위해서 싸우니까.”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우리는 저마다 그런 이유를 가지고, 그걸 표현하면서 링에 오르지. 하지만 너는 항상 그렇듯 그걸 부정하는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시나는 프로레슬러라는 직업으로 자신의 이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그리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수많은 선수가 희생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선과 악의 대립이었으니까.

우리는 고전적인 가치를 말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기에 선이 승리하고 악이 패배하는 그림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만들어낸 세계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나는 불멸을 이루겠어.”

프로레슬링의 가치를 바꿀 거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쿵!

마이크를 내던지듯 바닥에 떨어뜨린 나는 곧바로 링을 빠져 나와 퇴장했다.

그런 내게 쏟아지는 환호.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이걸로 깨달았다.

내가 던진 메시지는 시나의 메시지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박혔다.

누가 뭐라고 한들.

나는 내 목표를 향해서 전진한다.

시나는 분명 불변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시대가 원하는 슈퍼 히어로였다.

프로레슬링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전생의 WWF가 그랬듯이 시나 하나만을 믿고 업계 전체를 굴리더라도 분명 회사는 엄청난 수익을 벌 터였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런 시나도 언젠가 은퇴를 했고, 그 시스템에 길들여진 WWF는 방황을 반복하다 결국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

난 그런 결말을 바라지 않았다.

프로레슬러로서, 아니, 한 명의 인간으로서 초인의 영역에 다다른 시나가 아니라 내가 그 대표가 되었으면 했다.

왜냐면 나는 결국.

프로레슬링이라는 꿈을 가지고 이곳으로 돌아온 동양인 청년일 뿐이기에.

그건 내가 선수로서 아무리 더 큰 위상을 쌓더라도 불변하는 사실이었다.

난 이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로.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시나에게 져줄 마음은 없었다.

* * *

한편.

신과 시나의 대립이 심화되는 동안 다른 선수들 역시 레슬 임페리움을 향해 계속 대립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신과 숀 시나만큼이나 강한 파급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대립이 바로 테이커와 크로우의 대립이었다.

대-앵-!

만종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수호신.

죽음의 천사.

ACW에 나타난 그를 본 다른 단체의 팬들은 경외감을 표하듯 인사를 했다.

두 손을 쫙 뻗어 머리 위로 들고는 그대로 상반신을 숙여서 인사하는 전통적인 리스펙트의 행위.

그렇게 링으로 나온 테이커는 크로우를 불러냈고 그와 링 위에서 마주했다.

까악-! 까악-!

[Waaaaaaaaaaaaaaaaaaaaggghhh!]

모두가 그를 믿었다.

테이커가 WWF의 수호신이라고 한다면 크로우는 ACW의 수호신이었다.

두 사람의 Face To Face.

테이커가 10센티미터 이상 더 거대했지만 페이스 페인팅을 칠한 크로우도 그에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뽐냈다.

대립은 간단했다.

테이커가 자신을 가리키고.

크로우를 가리켰다.

그러자 쏟아지는 환호성.

[Waaaaaaaaaaaaaaaaaaaggghhh!!]

제대로 된 진검 승부가 남았다.

테이커는 패배했지만 이를 갈고 자신의 영역으로 크로우를 초대했고 크로우가 거기에 응하며 경기가 성사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테이커의 한마디.

“In The Wrestle Imperium……!”

You.

Will.

[Rest!! In!! Peace!!]

팬들이 다 함께 외쳤다.

그런 식으로 끝난 세그먼트.

두 사람은 이제 레슬 임페리움까지의 대립을 완벽하게 끝내는 데 성공했다.

“축하드립니다! 테이커!”

“고생 많으셨어요!”

ACW의 직원들이 나와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온 데드맨을 환영해주었다.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 테이커는 자신에게 주어진 락커룸으로 가 자리에 털썩 앉은 뒤 위스키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홀짝.

“후우.”

예정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걸 거절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이건.

모두가 바라는 거니까.

그래서 테이커도 거기에 응해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싸움을 위해 찾아왔다.

상대는 ACW의 수호신.

양대 전설들이 맞붙게 된 레슬 임페리움은 정말로 거대한 쇼가 되리라.

하지만 그마저도 세미 메인이벤트가 될 만큼 더 큰 경기가 하나 존재했다.

바로 신과 숀 시나의 경기였다.

지금 당장, 건너편 채널에서 개최되고 있을 WWF 버닝콩. 그곳에서 두 사람의 경기 계약식이 열리고 있을 터.

‘어떻게 되려나.’

고민하고 있자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크로우였다.

“늦었군.”

“자네야말로.”

테이커는 크로우를 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술병을 꺼내서 휙 집어던졌다.

그걸 받아든 크로우가 한 모금 마셨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커가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나?”

“시나가 이겨야겠지.”

얼마 전 만났지만, 생각 외로 마음이 잘 맞았던 두 거물은 이제는 서로를 인정하고 친근하게 지낼 정도였다.

그리고 단연 그들의 가장 큰 화두는 과연 지금 시대를 이끄는 두 주역의 싸움이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였다.

두 사람 다.

근거는 충분했다.

시나는 자신을 롤-모델로 삼아 살아가는 소외된 이들을 위해 싸우기 위해 그야말로 걸 수 있는 모든 걸 걸었고.

신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숀 시나라는 영웅이 제시하는 시대가 업계를 망치고 있다며 깔아뭉개기에 바빴다.

시나의 시대를 옆에서 지켜봐온 테이커로서는 솔직히 복잡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였다.

그 말이 맞았다.

테이커는 1990년, 전설적인 악역 선수였던 밀리언 달러 가이의 소개를 받고 악역으로 링에 데뷔했다.

그때는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어린아이들을 엉엉 울게 만든 그였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테이커는 독보적인 역할을 가진 레슬러로 평가 받았다.

팬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도 이 업계에 20년 넘게 헌신했기 때문이었다.

신이 옳았다.

분명.

레슬링은 앞으로 그와 함께 보다 현실에 걸쳐진 채로 살아가는 게 맞겠지.

하지만.

시나는 그런 현실에서 어떤 누구보다 동화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남자였다.

바로 그렇기에 일어난 충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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