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511화 (511/634)

511.

“그러고 보니…….”

나는 흐르는 땀을 느끼며 말했다.

“너 이번에 선역 된다면서.”

“누구, 나?”

“그래, 너.”

아까부터 땀을 하도 많이 흘려 나무로 된 바닥에 웅덩이가 생길 정도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시작은 며칠 전.

이틀 정도 마음껏 쉬었더니 좀이 쑤시는 것을 느꼈던 내가 세 명의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면서 발생했다.

WWF의 숀 시나.

ACW의 러셀 오메가.

멍청한 랜스 오튼.

이렇게 세 사람.

또 정말 기가 막히게 시간이 맞아떨어져서 지금 통합 연봉이 거의 수천만에 달하는 선수들이 우리 집에 왔다.

처음에는 다들 오랜만에 벌어진 재회를 즐기면서 훈훈하게 덕담을 주고받았는데, 오튼이 뭔가를 발견했다.

그건 바로.

아버지가 엄마를 위해 뒤뜰에 DIY로 만들어둔 자그마한 사우나 하우스였다.

‘야! 누가 오래 버티나 해보자!’

그리고 1시간이 흘렀다.

“…….”

“오튼.”

“어, 그래.”

오튼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붙었음에도 녀석은 쇠사슬에 발이 묶인 듯이 버텼다.

나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옆의 러셀도 그랬다.

“캐나다에서 이런 일은 자주 있지.”

“…….”

눈이 내리는 동네에서 온 러셀은 이 정도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눈빛이 퀭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숀 시나.

“Never, Give, Up.”

이런데서 그거 쓰지 마라.

나를 포함해 네 명의 머슬맨들은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땀으로 흥건해 사우나의 열기를 버텨냈다.

그리고 오튼이 계속 눈을 감으려고 해서 내가 말을 걸었는데.

“어, 그래. 선역.”

시나가 대신 대답을 했다.

“내가 제너럴 매니저로 복귀하고 웨이드를 악역으로 다시 밀어준대서.”

“그 친구 실력 있지.”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웨이드 개럿.

영국 출신의 선수로 큰 덩치에 잘생긴 외모를 가져서 데뷔 때부터 WWF에서 밀어주려던 것으로 유명했다.

“시나 네가 묻었지만.”

“……내가 독선적이었어.”

시나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어쨌든 그렇게 가려는 모양이었다.

시나가 GM으로 복귀하고, 오튼이 턴 페이스해서 웨이드 개럿과 대립을 하고.

최종적으로는 개럿을 크게 띄워주면서 차세대 악역으로 밀어주려는 대립.

하지만 오튼은 순간 학을 뗐다.

“아, 안 해. 안 해.”

“뭐?”

“제기랄 안 그래도 자꾸 티파니가 스케줄을 늘려서 스트레스 엄청 받는데.”

한숨을 내쉬는 오튼 선생.

“놀러오라면서 일 이야기냐? 아니면 버티기 힘들어서 도발하는 거냐?”

“뭐라고?”

“그럼 나도 말해주지. 신.”

오튼이 뭔가를 오해했다.

“너 결혼할 거냐?”

“뭐?”

“요새 소문이 자자하다고. 네가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말이야.”

“아, 아니.”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호오.”

“그게 정말이야, 신?”

흥미로운 듯 돌아보는 러셀과 시나.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일단.

“어디서 들은 소스냐?”

“티파니 본인.”

“……?”

“갑자기 휴가 낸다고 해서 다들 뜯어말렸는데, 휴가 사유가 ‘프러포즈 받으러 감.’이라서 직원들이 난리가 났지.”

“…….”

이를 어쩐다.

아무래도 다들 알게 된 모양인데.

나는 더운 와중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어떻게 할 거야?”

“무, 무슨 말이야?”

“맞기는 하지? 프러포즈.”

“그렇긴, 한데.”

“깊이 생각해본 거 맞지?”

“……그, 그렇지.”

“잡혀 살 게 훤히 보이는데.”

오튼이 걱정스러운 듯 날 보았다.

시나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러셀.

“왜? 둘이 사랑하잖아.”

“…….”

“넌 사랑을 믿냐?”

“당연히 믿지.”

“난 안 믿어.”

오튼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 차이를 캐치했다.

“여기서 ‘다녀온’ 사람과 ‘아직 가지 않은 사람’ 간의 차이가 나오는군.”

나머지 셋이 순간 당황해 날 보았고.

나는 오튼과 시나를 가리켰다.

“너희 둘은 다녀왔고.”

러셀과 나는 아직 안 갔다.

“그 이야기가 왜 나와?”

“신…….”

“닥쳐, 이것들아. 너희도 우리 사생활을 건드렸으니 나도 좀 말해보자.”

그렇게 반격이 시작되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게 힘드냐?”

“그, 게에.”

“아니 결국 스케줄 문제지.”

오튼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스케줄이 많이 줄었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계속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니까.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게 솔직히 말해서 쉽지는 않지.”

“나도 그냥 이쯤 해두려고.”

시나가 쓰게 웃었다.

“중요한 건 섹●야.”

“……?”

“●스. 결국 그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비결이란 말이지. 너희 두 사람, 섹●는 많이 하냐?”

“아니, 이 미친놈아.”

이 양키 놈들의 수위 높은 대화를 따라가는 것이 정말로 어렵게 느껴졌다.

“내가 나중에 기술 하나 가르쳐줄까? ‘One Leg Russian Vacuum’이라는 건데. 효과가 정말 어마무시하지.”

“호, 호오.”

“신, 넘어가지 마.”

러셀이 나를 뜯어말렸다.

“두 사람이 알아서 잘 하겠지.”

“러셀…….”

“야야, 우리 사이에 이런 것도 말 못하냐? 나는 너희를 어? 이 업계를 떠나서 정말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나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둘은 직장도 같잖아. 그러면 우리 같은 일은 안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 같은 일이라면?”

“아내랑 1년에 두 번 보는 거.”

“…….”

“…….”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프로레슬러의 직업병.

그건 어쩌면 이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쎄.”

시나의 말도 있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뭐?”

“뭔가, 말로는 설명이 힘든데.”

정말로 오튼의 말처럼 사랑은 다 허구고 결국 언젠가는 사라진다고 해도.

“나한테는 확신이 있거든.”

이 사람이 날 완성시킨다는 확신이.

“그리고 그걸 확인해보고 싶어.”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렇게 생각하며 웃자 이어서 굉장히 냉랭한 공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열심히 해라…….”

오튼이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뭐야?”

“어우, 오그라들어.”

“푸하하하! 신, 멋져. 사랑꾼이야.”

웃음을 터뜨리는 시나.

거기에서 나는 순간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운 이야기를 했는지를 깨달았다.

놈들이 한참을 웃더니.

러셀이 물었다.

“반지는 준비했어?”

“오, 그래. 반지. 다이아 반지.”

“물론 해뒀지.”

“좀 가격 나가는 걸로 해라. 모쪼록 가장 중요한 순간이니까 말이야.”

미국에서는 결혼반지와 약혼반지를 따로 구분을 지었고 약혼반지를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딱히 엄청 비싼 걸 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내가 아무리 비싼 반지를 준비해도 상대(?)가 원한다면 더 비싼 반지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력가라서.

“너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거냐?”

오튼의 말이 좀 신경 쓰였다.

나, 준호 킴 맥센이 되는 건가.

* * *

내가 낸 결론은 간단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자.’

결국 우리 둘의 문제였다.

나와 티파니 맥센의 문제.

그런 생각과 함께 찾아온 약속 당일.

이것이 ‘데이트’였으므로 나는 확실한 복장을 갖춰 입고 티파니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호텔로 찾아갔다.

자동차 앞에 서서 잠깐 기다리자.

“신!”

날 부르며 호텔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로 인해 문제가 하나 생겼다.

하얀 드레스에 멋진 액세서리.

틀어 올려 묶은 금발.

진하지 않은 화장.

너무 눈이 부셨다.

실명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호텔 주변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볼 정도로 환상적인 미모였다.

나는 쓰게 웃었다.

“이렇게 하고 오면 어떻게 해?”

“……예?”

“눈이 부셔서 운전을 못하겠잖아.”

“누가 가르쳐준 멘트에요?”

“여심을 사로잡는 1,000가지 멘트.”

“아, 그거.”

사실 존재하지 않는 책이었다.

하지만 티파니는 다 안다는 듯이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이런 실없는 농담에도 서로 맞춰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참 죽이 잘 맞았다.

나는 그녀를 조수석에 태운 뒤, 차를 몰고 미리 예약을 해둔 곳으로 향했다.

예약하는데 좀 애를 먹었지만 ‘친구’의 도움을 받아 겨우 장소를 잡았다.

‘SIN City’인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비싸다고 하는, 무려 1박에 5만 달러가 넘어가는 초고가 누에보 빌라 호텔.

딱히 밖으로 나가는 일 없이 우리는 이곳에서 둘이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도착하자마자 오늘 우리를 도와줄 호텔 룸의 개인 집사가 우리를 맞아주었고 티파니와 나는 한껏 휴식을 했다.

일단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 풀에서 한참을 놀다가 해질녘이 될 때쯤 바로 옆에 있는 일본식 온천에 들어갔다.

도시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나는 샴페인을 열었고 티파니는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도.

정말로 행복했다.

“이거, 꽤 괜찮은데요.”

“준비한 보람이 있네.”

“예약 꽉 찼을 거 같은데.”

“친구가 좀 도와줘서.”

“누구?”

“트럼프.”

“아~ 요즘 연락한지 됐네. 아버지랑은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는 거 같더니.”

“그래?”

“예, 둘이서 뭐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준비 중인 거 같기도 하고요.”

“……? 두 사람이 한다는 사업이 설마 프로레슬링 관련된 건 아니겠지.”

“어?”

순간 놀라는 티파니.

음.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트럼프 선생은 돈 냄새라면 기가 막히게 맡는 양반이고, 프로레슬링 업계는 그러기에 충분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나, 나중에 알아보죠.”

“피곤하지는 않아?”

티파니의 어깨에 슬쩍 팔을 둘렀다.

역시 좀 뭉쳤군.

“마사지 서비스 있다던데.”

“아~ 끝나고 받을까.”

“그래도 되고.”

“따뜻하고 좋네요. 이거.”

“일본식이라던데.”

나무로 된 큰 욕조.

찰랑거리는 물과 지평선 너머로 꺼져 가는 태양의 조화가 무척 눈이 부셨다.

거기다.

내 어깨에 슬며시 기대오는 티파니의 존재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계속 내게 말을 걸어왔다.

“쉬는 건 좀 어때요?”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참겠어.”

“그럴 만도 하죠.”

촤악.

순간 욕조 안의 물이 넘쳤다.

티파니가 내 얼굴을 붙잡았다.

“당신이 이 시대 최고의 선수니까.”

그리고.

“앞으로 고생 좀 할 거예요.”

“……빡세게 구르겠군.”

“그래야죠. 지금 가진 게 몇 갠데.”

단체 간 더블 타이틀 홀더.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지금 뽑아낼 시나리오가 몇 갠데. 자기가 최고라고 선언했으면 분명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겠죠.”

“그래야겠지.”

“하지만 오늘은.”

티파니가 내게 살짝 입술을 맞췄다.

“내 마음대로 할래.”

“…….”

나는 약간 취기가 오른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반지, 언제 주면 되지?’

처음 주는 거라 모르겠다.

* * *

한편.

라스베이거스의 번화가로부터 좀 떨어진 PWA는, 밤이 찾아온 시각에도 한창 분주하게 뭔가가 이뤄지고 있었다.

근육질의 거한들과 근육질의 여성들이 모여들며, ‘한 가지’ 계획을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건 아프로 펌 헤어가 인상적인 사내와, 그 옆에 있는 뚱뚱한 체구의 사내. 두 사람이었다.

“좋아, 그건 이쪽으로 옮겨.”

“조심들 하라고. 윗선에서 12시 전까지 준비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으니까.”

“H,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그건 또 뭐냐?”

“비밀 작전 아닙니까.”

“서프라이즈의 서프라이즈란 거죠.”

“그럼 어, T라고 해야 하나.”

“그래요. Miss T.”

“곧 Mrs T가 되는 게?”

“닥쳐, P. 그럼 Ms. T로 칭해.”

“크흠.”

“바쿠~!”

누군가 B를 불렀다.

한 시대의 아이콘이자 얼마 전 시원하게 타이틀을 잃고 은퇴한 C였다.

물론 ‘각본 상’ 은퇴였다.

“등신아! B라고 부르라니까!”

“예, 바쿠. 저희 왔습니다.”

“……그래, C.”

그 옆에 R과 O까지.

“S는 어떠냐?”

“분명 그 새끼 처음이라 제대로 반지도 못 주고 있을 겁니다. T가 말한 대로 여기까지 끌고 올 게 분명해요.”

“새끼, 처음이라니.”

“……보통 처음인 게 좋지 않아요?”

“현실은 그렇지 않지.”

냉정하게 대답하는 B.

바로 그때였다.

“바쿠.”

“바쿠라고 하지 말……!! 아, T.”

“그럼 T랑 헷갈리는데요.”

“Ms. T잖아. 그 사람은.”

“여기 오는 건 처음이군요.”

“그래, T. 자네가 와준다면 분명 신, 아니 S도 좋아할 걸세.”

“……거 참, 콘셉트 한번 이상하군요.”

“오늘만 그렇게 하자고.”

‘B’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오늘은 의미가 깊은 날이야.”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항상.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던 S가 처음으로 깜짝 놀라는 날이 될 테니 말이다.

그를 위해.

두 사람을 위해.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과 인연을 가졌던 과거와 현재의 많은 사람들이 ‘챔피언’을 위해 모였다.

멋진 밤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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