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스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먹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은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깔깔거린 뒤 굉장한 유머였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유인즉슨, 나 같은 동아시아인은 당연히 스시를 즐긴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만날 때도, 나는 그들이 혹시나 그런 인종적인 편견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해 스시는 안 먹었다.
하지만 오늘은 괜찮았다.
메뉴가 워낙 탁월하기도 했고.
호텔의 일본인 셰프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다르실 겁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였다.
“호오.”
“먹을 만해요?”
“괜찮은데?”
“신선함이 포인트죠.”
“확실히 비린내가 없네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이 만든 스시는 그 정도로 훌륭했고, 나와 티파니는 일본주를 곁들여서 가볍게 식사를 즐겼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게.
“당신은 더 이상 술 먹지 마요.”
“응……?”
“이유는 이따 가르쳐줄게. 괜찮죠?”
“뭐, 그러지.”
딱히 즐기는 편도 아니라서.
나는 술 대신 셰프가 권하는 차를 마시며 방금 생각했던 바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자주 안 먹다 보니 스시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다른 메뉴로 할 걸 그랬나?”
“그럴 정도까지는 아니고.”
오히려 상대가 티파니였기 때문에 이런 사실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편안한 기분으로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 일로 인해 좀 스시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사라진 듯했다.
스시도 뭐, 나쁘지는 않군.
티파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나도 당신이 스시를 못 먹을 거라고는 생각을 안 해봤었네요.”
“뭐, 내가 먹자고 안 했으니까.”
그런 식이었다.
티파니와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서로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Interracial Marriage.
인종간 결혼.
나는 동양인이고 그녀는 백인이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서로 편하게 대하는 방식으로 극복해오며 계속해서 만나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되겠지.
그렇게 식사는 좋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티파니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면서 들어갔고, 나는 주머니에 준비해온 약혼반지를 쥐고 고민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시뮬레이션’을.
하지만.
링 위에 올라갈 때보다 더 심장이 뛰어서…….
이런, 제기랄. 이걸 어떻게 하지?
‘일단 나오면 어, 와인?’
그러면 일단 룸서비스를 주문해둘까. 아니, 그러면 이제 나도 마셔야 하는데. 티파니가 마시지 말라고 했고.
근데 왜 마시지 말라고 한 거지?
‘이후’의 시간을 위해서?
“…….”
“신.”
“어, 어! 티파니. 응……?”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평소 입는 흰색 바지에 정장 차림으로 나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바로 차 키였다.
“슬슬 출발하죠.”
“어디를?”
“제가 준비해온 것도 있거든요.”
“뭔, 데?”
“일단 가요.”
내 손을 잡아끄는 그녀.
나는 거기에 휘둘렸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그녀가 내비게이션을 찍은 곳은 바로 트럼프 아레나.
“지금 이 시간에……?”
“제가 준비해둔 게 있거든요. ‘우리’의 일은 그게 끝난 다음에 하자고요.”
대체 뭘까.
의문을 느끼면서도 나는 곧바로 티파니의 말대로 차를 몰고 트럼프 아레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녁을 조금 늦게 먹어서 그런지 시간은 벌써 9시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하지만.
대충 결심이 섰다.
‘거기라면 좋겠지.’
링 위에서 하는 프러포즈!
그거라면 좋지 않을까?!
단둘이서?!
* * *
‘우리 일은 그게 끝난 다음에 하자.’
이렇게 눈치를 줬으니 프러포즈를 설마 거기에서 하지는 않겠지 싶었다.
티파니 맥센은 일단, 지난번 레슬 임페리움에서 핀잔을 줬던 걸 만회할 계획으로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했다.
PWA의 선수들.
그리고 신의 친구들.
신이 존경하는 선배들.
가까운 지인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서 신의 챔피언 등극을 축하할 겸 파티를 하는 게, 오늘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프러포즈도 나중으로 미루자고 신신당부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신은 지금 머릿속에 그 생각만 가득한 상태라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트럼프 아레나에서 몰래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백 명 가까운 선수들과 직원들, 자신의 지인들의 존재가 있는 것 역시 몰랐다.
그렇게 도착한 트럼프 아레나.
“이쪽이요.”
“왜 비상등이 켜져 있지?”
“겨, 경비원이 있잖아요.”
티파니는 서둘러 변명을 했다.
경기장 입구로 들어서서 신의 손을 잡아끌며 그녀는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2,000석 규모의 경기장.
고릴라 포지션으로 들어서자 이미 조명을 켤 준비는 다 끝마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커튼 뒤에는 바쿠가 숨어 두 사람의 모습을 조심스레 보고 있었다.
그 역할은 간단했다.
티파니의 신호가 떨어지면 조명을 켜고 신에게 달려들어서 얼굴에 준비해둔 케이크를 처박아버리는 임무였다.
선수들은 관객석 의자 밑에 숨은 상태였고 티파니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조명을 하나 켰다.
링 위의 메인 조명이었다.
“자, 이걸로 준비는 끝.”
“……무슨 준비?”
“저도 당신이 준비를 해온 것처럼 준비를 해왔다는 거죠. 같이 가자고요.”
“아하, 이제 대충 알겠는데.”
“예, 이건 ‘제 준비’에요?”
그러니까 신이 준비한 프러포즈는 방 안에서 단둘이 있을 때 하자. 바로 그게 티파니가 유도한 말이었다.
그리고 신은 그걸 이렇게 이해했다.
‘당신이 프러포즈하기 쉽도록 무대를 마련했으니 링에 올라가자마자 해줘.’
바로 그것이라고.
‘음.’
주먹을 불끈 쥔 신은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티파니를 따라 걸었다.
경기장은 완전히 텅 빈 것 같았다.
“이렇게 둘이 오는 건 처음이네요.”
“그러게. 왠지 경기가 없을 때 오면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티파니가 먼저 링으로 올라갔다.
미들 로프에 걸터앉아 탑 로프를 어깨로 밀어내는 매너를 보인 신은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신, 정말 고생 많았어요.”
“…….”
“당신의 존재에 감사해요.”
“나도 당신의 존재에 감사해.”
“제가 뭘 했다고.”
“아니, 당신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곳까지 올 수는 없었을 거야. 확신해.”
신은 티파니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티파니는 왠지 모르게 뭔가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오해했을지도 모른다고.
“티파니 마리 맥센 양!”
“………………???”
쿵!
신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티파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이쪽을 열정적인 눈으로 올려다보는 신이 문득 귀엽다고 느끼면서도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이 경기장에는.
두 사람의 지인이 백 명 이상 와있다.
그리고.
세간의 일반적인 오해(?)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여자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받는 프러포즈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은 그걸 하려고 했다!
무려 자기도 모르는 상태에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 저, 저저저, 저기, 신?”
“오래 생각해왔습니다.”
“아니, 잠시만요!”
“제 결심에 흔들림은 없습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신.
하지만 너무 흥분한 탓일까.
그는 링 위에서 평소 완벽하던 모습과는 달리 약혼반지가 든 상자를 꺼내려다가 실수로 놓치고 말았고.
바지에 걸려 튕긴 그것이 데굴데굴 굴러가 그대로 링 밖으로 떨어졌다.
“……………….”
“……………….”
길게 흐르는 침묵.
그런 가운데.
“가, 가지고 올게.”
“아니! 제 말 좀 들어요?!”
티파니가 얼굴이 빨개져 소리쳤다.
그런 두 사람의 꽁트(?)를 바라보던 바쿠는 환상적인 콤비라고 생각했다.
‘저거 코미디 팀 해도 되겠네.’
그러거나 말거나.
신은 자신이 놓친 약혼반지 상자가 굴러간 쪽으로 향했고, 이내 그 앞에 뭔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가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엎드린.
“……………….”
그리고 링 밖으로 굴러 떨어진 약혼반지 상자가 그 남자의 등 위에 있었다.
뭐지?
도둑인가?
아니면 노숙자?
그렇게 생각한 신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말을 걸어봤다.
“저기, 요?”
“…….”
“누구세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거대한 등이 어딘가 낯이 익었고, 빤히 바라보던 신은 이내 저도 모르게 자신이 잘 아는 남자의 이름을 말했다.
“테이커?”
그러자 움찔.
“…….”
아니, 진짜로?
신이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어, 아무래도 마나님께서는 프러포즈를 받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닌 듯했다.
이를 어쩐다.
순간적으로 정지하는 신의 뇌.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고, 거기에서 모든 상황을 알아차린 티파니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버럭 소리쳤다.
“뭐해요!”
“으, 으응?”
“나 기다리고 있잖아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말하는 것을 들은 신은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테이커 등 위의 반지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결국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티파니의 곁으로 다가간 신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티…….”
“잠깐, 하나만 더요.”
“응?”
티파니가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철컹! 철컹! 철컹!
조명이 들어왔다.
경기장 곳곳의 조명이 켜지면서, 주변을 둘러본 신은 관객석 밑에 숨은 거한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포착했다.
“어, 어……?”
“나! 프러포즈 받아요!”
그렇게 외치는 그녀.
다들 그 말을 알아들었다.
신으로부터 프러포즈를 받게 되었으니 박수와 환호를 보내라는 말이었다.
그걸로 준비는 모두 끝났다.
티파니 맥센은 신을 바라보았다.
신도 티파니 맥센을 바라보았다.
딱히 말은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준비를 끝마쳤다.
경기장 곳곳에 숨어있던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고, 신은 그들의 존재를 순간 잊어버렸다.
얼굴이 빨개진 티파니.
방금까지는 평소의 당차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 같았다.
그렇기에 긴장이 풀렸고.
신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엉망진창이군.”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신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아.”
“…….”
“프로레슬링이란 게 항상 그렇잖아. 언제나 상황은 점점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결국 선수들은 링에서 서로 맞붙어야만 하지.”
그리고 실제로도.
“경기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되어가. 난 이걸 프로레슬러로서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대부분 엉망진창이고, 그걸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태풍이 지나가듯이 겨우 상황이 끝나면 또 다른 ‘엉망진창’이 찾아온다.
그 와중에도 각자의 가치를 좇아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운이 좋게도 다시 한 번의 삶을 살 기회를 얻어 내외적으로 큰 이득을 보았고, 엉망진창이 될 것을 미리 각오한 채 지금까지 걸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티파니와는 엉망진창일 거다.
결혼은 처음이고.
그리고 마지막일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전생의 기억을 알고 있다는 이점이 없더라도, 기꺼이 이 결혼 생활에 빠져들 준비가 되었다.
심지어는 그조차 기대하고 있었다.
그 상대가 자신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영혼까지도 뒤섞인 사람이었으니까.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언제나 엉망진창이었으면 좋겠어.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엉망진창이었으니 말이야.”
신은 아직도 그날을 기억했다.
티파니 맥센이 자신을 걱정해서 경기장으로 달려왔고, 겁쟁이였던 자신이 드디어 결심했었던 바로 그 순간을.
“우리는 언제나 엉망진창일 거야.”
“…….”
“난 당신을 그렇게 사랑할 거야. 삶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후우.
신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물었다.
“티파니 마리 맥센.”
Will You Marry Me.
긴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숨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상황.
하지만 어느덧.
모두가 신의 마이크워크에 빠져들어 링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티파니 맥센은 눈이 새빨갛게 물든 채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Yes.”
이어지는 키스.
무릎을 꿇은 신의 머리를 감싸 안은 그녀가 그대로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나온 환호는.
‘진짜’였다.
[Yeeeeeeeeeeeeeeeeeeaaahhhh!]
경기장 안에 있던 백여 명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보냈다.
세기의 커플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진심을 알고 있는 모두가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고, 개중 몇몇은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감격했다.
“칫, 저 자식들.”
사람을 울리기는.
바쿠가 콧잔등을 슥 훔쳤고 옆에 서있던 할리가 그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새로운 시대로군, 바쿠. 정말로.”
“그러게 말입니다.”
테이커도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사실, 링 아래에서 가장 먼저 신을 깜짝 놀라게 해줄 역할이었던 그는 갑작스러운 사고(?)에 당황했지만.
두 사람은 멋지게 그걸 넘겼고, 방금 기록으로 남겨도 좋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프러포즈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저게 두 사람다웠다.
“이야~. 들었냐?”
옆에 있던 랜스 오튼이 말했다.
테이커가 시선을 끄는 사이 난입해서 신을 놀라게 할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그와 러셀, 시나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고.
평소 진지한 걸 싫어하던 그는 일부러 짓궂게 두 사람을 놀리고 있었다.
“틴에이지 무비로구만.”
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정말 멋진 프러포즈였어.”
러셀은 신과 티파니를 인정했고.
“크흠, 이거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시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에라, 모르겠다.”
오튼은 쓰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렇게 먼저 챈트를 유도했다.
[She Said Yes!]
‘그녀가 좋다고 말했다.’
누군가 공개된 장소에서 프러포즈를 하면, 그 주변에서 관례적으로 해주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점점 그 챈트를 따랐다.
[She Said Yes!]
[She Said Yes!]
[She Said Yes!]
그런 가운데.
티파니와 신은 계속 입술을 맞췄다.
좀 오그라들고.
엉망진창이지만.
뭐, 어떤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인 만큼.
확실히 기억에 남는 편이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