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527화 (527/634)

Dark Match 13.

지옥 같던 오전 훈련이 끝난 뒤, 선수들은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자리에 뻗어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헤엑, 헤엑…….”

“크하악……. 하아……!”

대충 이 정도인가.

헌터가 나에게 동조해줘서 일부러 좀 더 빡세게 굴렸고, 그 덕인지 진짜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싹 뻗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작 이 정도냐?”

그 말에 몇몇 선수들이 반응했다.

세스 롤링스를 필두로 업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야망 있는 놈들이 내 말에 반발했다.

물론 몸은 움직이지 못해서 눈알을 희미하게 굴리는 게 고작이었지만.

나는 그 얼굴을 기억해두자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죽어라 뛰어서 입맛은 없을 테지만, 원래 또 먹는 게 중요하지. 끝나면 또 한숨 자는 게 보통이고.”

여기 친구들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레슬링을 배웠다.

그러므로.

“밥이나 먹으러 가자!”

선수들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거의 서른 명 가까운 인원이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나를 따라왔다.

헌터는 그런 상황이 즐거운지 내 옆을 따라오면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은퇴하면 이쪽으로 와라.”

“우리 회사도 바빠요.”

“제기랄, 그거 아쉽군.”

씁쓸하게 웃는 헌터.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전생에 나는 MXT에 프로듀서로 오고 싶었다.

트리플H는 선수로서는 잡음이 많았지만 경영자로서는 유능했고 그 덕분에 꿈의 직장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전에 잘렸지만.’

하지만 이제는.

‘당연히 농담이겠지만.’

헌터로부터 직접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내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

새삼 변해버린 삶에 대해서 실감하며 나는 직원 식당으로 들어섰다.

메뉴는 굉장히 다양했다.

뷔페식이었고 레슬러용 식단으로 적합하면서도 맛도 꽤 좋은 편이었다.

그걸 실컷 먹었다.

맞은편에 앉아 함께 밥을 먹고 있던 헌터가 놀라 나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렇게 먹어서 유지가 되냐?”

“어, 오히려 이게 훨씬 낫죠.”

“그래?”

“예, 요새 스케줄이 엄청 많아져서 다니다 보면 뭐 피자랑, 버거랑,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죄악의 음식.”

“그런 걸 먹었다고?”

“그거에 비하면 이건 완전 좋죠.”

맛은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식사를 마친 나는 비슷한 시간에 함께 나온 선수들을 데리고 훈련장으로 이동해 대충 자리에 누웠다.

내가 뭘 할까 싶어서 무슨 새끼 오리들처럼 따라왔던 놈들이 당황했다.

“서, 선배님?”

“너희들도 좀 자둬라.”

수건으로 눈을 덮어 빛을 차단하고 있자니 다른 녀석들이 주섬주섬 내 주변 아무 데나 눕는 것이 느껴졌다.

“야, 야. 좀 절로 가봐.”

“제기랄, 땅에서 자면 등 배긴다고.”

“매트 더 없냐?”

“창고에 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나는 피식 웃었다.

‘저런 느낌이었지.’

매트 뺏기 싸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다 담배라도 피워서 좀 늦게 들어온 녀석들은 매트도 없이 링 위라던가 바닥에 나자빠져서 자야만 했다.

하지만.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곳곳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들 금방 잠이 들었다.

오전 중에 실컷 뛰고, 밥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돌아와서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가운데 꿀 같은 낮잠.

물론 여기 MXT는 업계 최첨단의 시설을 자랑했기 때문에, 싸구려 선풍기가 아니라 중앙 냉방으로 화끈하게 온도를 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이 중앙 냉방 시스템에 한 20퍼센트 정도는 기여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적당히 시간이 흐를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렸다.

코고는 소리가 늘어갔다.

‘이쯤이면 됐나.’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켜 세우자 곳곳에서 뒤엉켜 곯아떨어진 MXT 신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를 가볍게 털어내고 일어선 나는 곧바로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니.

“다 잠들었냐.”

트리플H가 날 반겼다.

“예, 처음에는 매트 좁다고 징징대던 놈들이 지금은 아예 옆에 있는 놈을 매트 삼아서 자고 있던데요.”

“넌 안 쉬어도 괜찮겠나?”

“할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나는 헌터의 어깨를 툭 쳤다.

“그걸 위해 일부러 기다리신 거 아닙니까? 제가 화장실이라도 가는 타이밍에 맞춰서 슬쩍 말을 걸려고.”

“……귀신같은 자식.”

헌터가 뒤쪽을 가리켰다.

혹시라도 선수들이 우리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해서일까.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랐다.

“애들 이야기도 들어보죠?”

“아니, 그럴 생각은 없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헌터.

“왜요? 의외로 거기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확실히 말해두마.”

자리에 멈춰선 그가 날 돌아보았다.

“신, 너는 신인 선수가 단체의 각본에 아이디어를 내고, 그게 통해서 대박 칠 확률이 얼마라고 생각하지?”

“제로에 가깝겠죠.”

“그래, 네가 특별한 경우다.”

헌터는 그렇게 설명했다.

“아니, 사실 신인 시절부터 네가 해온 행동은 ‘월권’이라고 봐도 좋지.”

다만.

“이 업계는 실력이 전부다. 그러니까 다들 넘어갔을 뿐. 하지만. 지금 여기 MXT에 소속된 놈들은 네 그런 재능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지.”

“……아이, 왜 그러십니까. 또.”

“벌써부터 안 좋은 버릇을 들일 수는 없다는 거다. 대체 뭣하러 이 업계에 각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들이 각본을 쓰니까요.”

“그렇지. 각본가가 글을 쓰고 제작자가 프로그램을 만들고,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

그게 바로 WWF의 시스템이었다.

아니, 메이저 프로레슬링의 시스템이라고 봐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ACW도 그렇게 일을 했으니까.

맞는 말이기는 했다.

선수가 각본에 의견을 내는 행위는 그 의도와는 별개로 어쨌거나 정치적인 야망이 있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특히나 신인이 그러는 건 업계 역사상 거의 유례가 없는 행위였다. 한마디로, 묻히기에 딱 좋은 짓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동양인으로서 그렇게라도 안 하면 아무도 관심을 안 줬을 거라 위험을 감수하고 막 던졌지만.

그래도 다행히 바쿠로부터 시작된 프로듀서 라인이 나를 두둔해줬기 때문에 무사히 이곳까지 잘 올라왔다.

하지만.

몇몇 선수들은 내가 그렇게 각본에 개입하는 걸 탐탁찮게 여기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든 내가 각본에 끼어드는 짓이 자기보신의 의도가 있는 정치적인 행위라고 생각을 하는 거지.

신인 시절에는 그로 인해 오해도 사고 고생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선수들 대부분은 각본에 개입을 해도 자기 입지를 탄탄히 다진 다음에 했다.

……그리고 말했듯 나는 그렇게 했다간 아무도 또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쿵-퓨리가 됐을 거라 어쩔 수 없었고.

하지만 그건 내 경우고.

막 데뷔한 선수들에게 처음부터 그런 나쁜 버릇을 들일 순 없다. 헌터 선생님의 고견은 바로 그러했다.

‘아니, 사실.’

그런 헌터가 현역 시절에는 선수들 중에서 가장 자기 각본에 힘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좀 아이러니했지만.

어쨌거나.

뭔가 좀 오해하는 듯했다.

“헌터, 뭘 그렇게 생각해요. 어차피 결과는 모두 정해진 거 아닙니까?”

헌터와 나의 차이.

똑같이 각본에 개입을 했음에도 난 그래도 선수들로부터 존중을 받았고.

반대로 헌터는 현역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로 인해 계속 비판을 받았다.

그 이유가 뭘까.

그건 바로.

헌터는 자신의 ‘승패’에 관련된 각본에 개입했지만, 나는 ‘과정’에 관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질 때는 확실히 져주었고.

승리를 하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드라마를 보여주며 최대한 잡음이 나오지 않는 나만의 시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성공한 나는 선수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고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시대가 아니라 프로레슬링이라는 스포츠를 대하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재창조하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선수 자신의 의견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바로 그것이 내가 의견을 듣겠다고 한 이유였다.

“한 번만 맡겨주세요.”

“안 돼.”

“언제 제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있습니까? 헌터. 절 믿으시라니까요?”

“그렇게 널 믿은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은퇴를 하게 됐지. 아직 파트-타이머로서 뛸 수 있는데 말이다.”

“에이, 잘됐죠! 노구를 이끌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여기서 편하게 여생을 보내시고.”

“아직 그럴 때는 아니다!”

헌터가 버럭 소리쳤다.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이내 거래를 제안했다.

“세스 롤링스 말입니다.”

“……뭐?”

“밀어줄 생각이시죠?”

“아니, 딱히 그럴 마음은 없다만.”

“제 눈을 속이실 수 있을까요.”

애초에,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생과는 역사가 달라졌기에 일단은 좀 더 조심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헌터의 야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생에 세스 롤링스를 필두로 자기 라인의 선수들을 다수 갖췄고, 그들을 내세우며 권력을 쥐려고 했다.

그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터.

“……끄응.”

헌터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 * *

그런 식으로, WWF 내부에서는 바트가 은퇴한 이후로도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전생에는 바트가 계속해서 1인자였으므로 헌터&티파니가 존 로이타스나 캐시 던 같은 다른 권력자들과 WWF를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지만.

지금은 그와 좀 달라졌다.

바트의 도움을 받고 있는 티파니 밑에 헌터와 로이타스, 던이 제각각 2인자의 자리를 놓고 싸우는 형태였다.

그리고 사실.

‘아직 티파니가 회장은 아니지.’

다들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뿐.

정확한 직함은 최고 경영자.

다시 말해 CEO였다.

바트 맥센이 그 직함을 물려주고 자신은 WWF 총수 직함만을 남겨두며 실질적으로 가업 승계를 선언했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지나야 실질적인 기업의 완전 승계가 이뤄질 터였다.

지금 당장에 안 그러는 이유는 물론 티파니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었고.

그래도 바트는 자신이 약속한 대로 확실히 회사 경영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집에서 운동만 한다고 들었다. 일밖에 모르던 인간이라서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전에 티파니가 ‘장인어른이 외로워하시는데 찾아가 뵙는 게 사위로서의 도리가 아닐까요?’라고 말했었지.

“…….”

나는 그 기억을 잊었다.

어쨌든.

그런 트리플H의 야망을 이용해 허가를 받아낸 나는 MXT 선수들 중에서 경기를 가질 선수들을 추천 받았다.

첫 주차는 물론 세스 롤링스였다.

직접 그 소식을 전해주자 녀석은 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환하게 웃었다.

“영광입니다! 선배님!”

“그래, 인마. 잘 해보자.”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떻게?”

“예?”

“일단 네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어.”

“나랑 왜 붙고 싶어.”

“그야 물론, 이 업계에서 최고니까요. 당신과 붙는 건 여기 있는 모든 레슬러들의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로 되겠어?”

너무 뻔하잖아.

나는 솔직히 말했다.

“너는 운이 좋은 거야. 너와 나 사이에는 특별한 드라마가 있잖아.”

“서, 설마.”

“그래, 그거.”

분명히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그 일은 지나간 걸로 해두자고.

지금은 나와 세스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나는 로건의 사주를 받은 세스의 습격이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 사실을 각본에 이용할 수 있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네 야망이 드러난 행동이었지.”

“…….”

“그리고 현실에서 벌어졌고.”

그걸 각본에 이용하자.

그러자니 잠시 고민을 하던 세스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녀석은 좋은 아이디어를 내놨다.

현대의 레슬링에서, 선수들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과거와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케이페이브가 지켜지고 있는 셈이었지.

그렇기에 나는 선수 본인이 직접 캐릭터와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내놓는 스타일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세스 롤링스.

아이오와 주 대븐포트 출신의 녀석은, 어렸을 적부터 레슬링을 하고 싶어서 인디 시절을 거쳐 온 선수였다.

누구든 가질 만한 드라마였다.

그렇기에 선수 본인이 자신의 성격과 디테일한 부분을 제시해야만 다른 이들과 다른 특별함이 생겨났다.

“저는 조용한 편이라고 남들이 자주 이야기하지만, 사실 필요한 말만 하는 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그리고 농담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하죠. 그래서 사실 선배님보다는 러셀 선배님을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그 녀석이 진중해서?”

“예, 그래서 멋지다고 여겼죠.”

“그럼에도 속에 야망은 있다.”

“저는 반드시 선배님이 지금 가진 그 벨트를 허리에 둘러 보이고 말겠습니다. 그게 제 삶의 목표니까요.”

“괜찮은데.”

그런 식으로 이어진 회의.

세스와 나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는 채 서로 이야기를 나눴고, 그로써 나도 충분히 녀석을 말로 ‘공격’할 만한 정보를 몇 가지 얻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잠은 좀 못 잤다.

두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리허설을 위해 경기장으로 향하자 헌터가 나와 세스를 불안한 얼굴로 보았다.

“……괜찮겠냐.”

“물론이죠.”

“나는 세스를 말하는 거다.”

헌터가 옆을 돌아보았다.

이런 생활(?)에 적응이 안 된 것인지 세스는 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수염이 배는 더 덥수룩해 보였다.

하지만 헌터의 질문에 녀석은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예, 헌터.”

“…….”

“제가 누군지, 어떤 남자인지 팬들에게 보여줄 생각에 너무 기대됩니다.”

“그러, 냐?”

“최고의 남자와 붙는 자리니까요.”

날 돌아보는 세스.

그 말을 들은 헌터는 지금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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