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Match 15.
원래 각본대로기는 했다.
하지만 세스 롤링스가 순간 신을 따라가지 못한 것은 ‘감정’ 때문이었다.
“물론,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모두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어. 하지만. 너희는 역겹군. 다들 느낄 거야.”
신은 카메라를 돌아보았다.
“내 출연 소식을 듣고 이 방송을 튼 시청자들 모두가 느끼고 있겠지. ‘어? 왜 관객들이 야유하지?’ 분명히 멋진 경기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Waaaaaaaaaaaaaaaaaaggghhh!]
팬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트롤링이었다.
하지만 신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20만의 관객들이 가득 들어찬 경기장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자신이 누군지를 보여주는 게 바로 신이었다.
이곳의 관객들이 아무리 적대적이라고 한들, 그는 오히려 압도했다.
“MXT는 나쁘지 않은 쇼야. 물론 내가 없으니 최고는 될 수 없지만. 처음 그 경기는 꽤 인상적이었다고.”
[Booooooooooooooooooooo-!]
“이거 봐. 또 야유가 나오는군.”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Shame On You. 풀세일 너드들아. 그 경기는 멋졌어. 하지만 너희는 빅 E와 상대였던 보 랠러스의 헌신을 깔보는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고 있지.”
“워, 워, 워워.”
바로 그때였다.
세스 롤링스가 끼어들었다.
“잠깐 기다려봐. 신. 지금 링에 올라와서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Boooooooooooooooooooooo-!]
‘재미없는 선역 MXT 챔피언’ 세스 롤링스에게 팬들은 큰 야유를 보냈다.
거기에.
방금까지 팬들을 휘어잡은 신의 앞에서 마이크워크를 해야만 하는 상황. 세스는 눈앞이 캄캄한 것을 느꼈다.
정해진 연기를 해야만 했다.
그를 위해 이 MXT에 들어와 프로레슬러로서 온갖 트레이닝을 견뎌왔다.
하지만 역시 실전은 달랐다.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것이 신이라고 생각하자 순간 대사를 까먹었다.
“…….”
순간 당황한 세스.
그걸 신이 알아차렸다.
“너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 것 같군. 챔피언. 그럴 만해. 네가 뭘 했다고 다들 이렇게 싫어하지?”
신은 가볍게 윙크를 했다.
세스는 그걸 믿고 따라갔다.
“그걸 지적한 게 당신이라니. 솔직히 좀 기분이 나쁜데. 이 관객들의 태도는 내가 고쳐주려고 했거든.”
[Uoooooooooooooooooooohhh!]
순간 놀라는 관객들.
그로서 세스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내가 이곳의 챔피언이라고.”
세스는 벨트를 번쩍 들었다.
[Yeeeeeeeeeeeeeeeeeeaaahhh!]
환호가 쏟아졌다.
그동안 재미없는 챔피언이라고 생각되었던 세스가 업계의 최강을 앞에 두고 건방지게 챔피언임을 어필했다.
하지만 그 말은 MXT에 큰 자부심을 가진 팬들의 마음에 확실히 닿았다.
“당신이 하는 말은 알겠어. 신. 하지만 그걸 관객들의 탓으로 돌리는 건 회피에 불과하다고. 정말 저기 저 인간들이 내게 환호를 보내주기를 바란다면! 몸으로 증명해야 하는 거지!”
그게 프로레슬링이다.
[Seth! Seth! Seth! Seth! Seth! Seth! Seth! Seth! Seth! Seth! Seth!]
챈트가 나왔다.
“…….”
“…….”
“…….”
고릴라 포지션의 직원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다고?
마치 마술을 부린 것 같았다.
신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을 뿐인데, 어느새 세스 롤링스는 MXT를 대표하는 챔피언으로 인정을 받았다.
더군다나.
그 연기력도 훨씬 좋아졌다.
평소에는 연기력 부분에서 좋지 못한 말을 자주 듣던 세스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홀린 양 소리를 질러댔다.
감정을 토해냈고 그것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환호로 돌아왔다.
“당신은 그렇게 해왔고! 이제는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라스베이거스의 왕이 되었지! 이제는 내 차례야!”
“뭐, 한번 붙어보자는 거냐?”
“그래, Tonight, In Orlando!”
You And Me!
On This Ring!!
세스가 흥분해 소리쳤다.
경기장의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그런 가운데에서, 잠시 세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신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삿대질을 하며 입을 열었다.
“기억났다.”
“……?”
“네 얼굴을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챔피언. 너 그때 PWA에서 날 공격해서 어그로를 끌어보려던 놈이잖아.”
순간 팬들도 의아해했다.
“로건의 사주를 받고 경기장에 난입해서 석고 팔에 얻어터졌던 그 개자식. 그런 네가 바로 여기 서있군. 세스.”
[Uooooooooooooooooooohhh?!]
하지만 그 말에서 다들 알아차렸다.
해설자들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죠?]
[예, 저도 기억이 나는군요. 로건이 인디 선수들을 몇몇 사주에서 PWA에 사보타주를 저지르려고 했죠.]
[그때의 그 선수가 세스였다고요?]
[아마도 그런 모양입니다.]
세스도 인정을 했다.
“그런 일도 있었지.”
팬들은 거기에 흥미를 느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었으니까.
“로건이 나에게 의뢰를 했고, 기회를 찾고 있던 나는 받아들였어. 신, 당신에게 한 방 먹여주기로 했었지.”
세스는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확장되었고 헌터는 평소보다 더 신이 나 보이는 세스의 모습을 보고 느꼈다.
‘천성이 악역이군.’
그 말대로.
세스 롤링스는 이후로 WWF를 책임지는 악역으로 성장하는 사내였다.
“물론 당신 말대로 방심하다가 제대로 반격을 당했고 이후로 로건에게 받기로 한 대가도 받지는 못했지만.”
“ACW와 계약한다는 제안 말인가?”
“그래, 속은 내가 등신이었지. 그때 나는 배웠어. 내가 원하는 그걸 얻기 위해서는 독해져야겠다고 말이야.”
그래도 지금까지는 잘 숨겨왔다.
“계획이 설 때까지는 회사에서 원하는 착한 사람으로 있으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군.”
세스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신은 박수를 쳤다.
“푸하하하! 마음에 드는군! 좋아! 세스! 남자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지!”
신이 벨트를 들었다.
WWF 월드 챔피언 벨트였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애송이.”
[Uoooooooooooooooooooohhh?!]
두 챔피언의 경기는 그렇게 오늘 쇼의 메인이벤트로 성사되었다.
* * *
그렇게 메인이벤트가 성사되고.
다음 경기에는 빅 죠가 나왔다.
[When~~~~~~~~~!!]
[Uooooooooooooooooohhh?!]
관객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터지는 폭죽.
파팍! 파파파파파파파팍!!
초대형 스크린 위에서 타오르며 떨어진 불꽃이 빅 죠의 등장을 알렸다.
[When It’s The Big Joe!]
‘Crank It Up.’
그 또한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어라?’
관객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MXT에 다시 출장하는 것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던 죠는 그런 반응을 의아해하며 천천히 링으로 나섰다.
신과 달리, 예고도 없었던 정말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관객들은 다시금 트롤링할 타이밍을 빼앗겼다.
[Waaaaaaaaaaaaaaaaaaggghhh!]
또한 그들은 방금 신의 마이크워크로 인해 아주 약간은 트롤링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옆에 있는 다른 바보와 다르단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죠에게 환호를 보내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죠는 별다른 방해 없이 링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토록 무섭게 보이던 MXT의 링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죠는 머리 위로 손을 들었다.
“으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Waaaaaaaaaaaaaaaggghhh!!]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그리고 그 상대가 링으로 나왔다.
[Waaaaaaaaaaaaarrrr!!]
순간 이어지는 ‘새로운’ 음악.
그리고 나온 선수는.
[바로 오늘 데뷔하는! 그론 스트로먼입니다! Look At That Size!!]
[놀랍군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운동선수’인 빅 죠와 페이스 투 페이스를 하더라도 전혀 밀리지 않아요.]
[Booooooooooooooooooo-!]
[하하하, 아무래도 관객 분들은 저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군요!]
[죠를 걱정하는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포장이 이어졌지만.
사실 팬들이 스트로먼에게 야유를 보내는 이유는, 그동안 WWF가 내세우던 ‘빅맨’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빅맨은 몸이 거대한 만큼 운동 능력이 평범한 선수들에 비해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보편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보편적인 TV쇼 정서에서는 그런 빅맨을 밀어줄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풀세일 너드들은 빅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오늘 막 데뷔하는 28세의 청년, 그론 스트로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왜 자신에게 야유하는가.
그냥 링에 나왔을 뿐인데.
레슬링의 기본기를 이제 막 알게 된 시점에서 링에 내몰린 스트로먼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는 거대한 몸집과 달리 데즈니 만화 동산 따위를 좋아하는 평범하고 다소 소심한 청년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관객들에게 야유를 받으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이봐.”
“예, 옙.”
“바보 같은 표정 짓지 말고. 카메라로 다 찍고 있으니까. ……놀랍지?”
“아, 음.”
“놀라울 거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너에게 야유를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 꼬마야.”
죠의 표정은 험악했지만.
그 내용은 자상했다.
“그걸 즐겨라. 너는 이제 거대한 덩치를 벗어난 거야. 팬들의 사랑과 증오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죠.
220센티미터에 달하는 두 사람.
물론, 거인병을 앓은 죠와 달리 스트로먼은 ‘그냥 평범하게 키가 큰’ 쪽이었으므로 조금 더 작았다.
하지만 그는 젊었고.
에너지로 넘쳤다.
두 사람을 올려다보는 심판.
두 거인의 대결.
그게 바로.
“신화 속 싸움이죠.”
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릴라 포지션 안.
자기 일을 마치고 돌아와 헌터의 옆에 앉은 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의 헌터를 보며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신화 속 싸움’.
거인들의 대전.
프로레슬링 그 자체.
그것을 표현한 듯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헌터는 우려를 금치 못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
“스트로먼은 이제 갓 로프 반동을 뗀 애송이야. 물론 출중한 재능을 지녔지만 아직 한 명의 선수 몫을 내기에는 많이 부족한 상태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인들이 숨만 쉬어도 좋아하고 놀라는 어린이들이 아니라 까다로운 MXT 팬들 앞에 싸워야 하지.”
그런 상황에서 죠와 스트로먼의 대진이 과연 제대로 수행될 수 있을까.
프로레슬링 경기는 단순히 서로 주먹을 주고받고 기술을 쓰는 게 아니었다. 그 안에 항상 서사가 존재했다.
실전이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드라마틱하고 무척이나 과장된 서사였다.
하지만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천재가 아닌 이상 실전이 필요했다.
링 위에서 정말로 팬들의 반응을 보면서 경기를 하는 경험을 거쳐야만 한 명의 선수로서 완성되는 것인데.
“스트로먼은 그렇게 못해.”
“압니다.”
“……자꾸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렇다면 왜 두 사람이 4주 연속으로 경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거냐?”
“죠의 의욕을 위해서죠.”
그리고.
“스트로먼은 좋은 인재입니다. 그런 선수를 키우기 위해서는 기회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기회를 줘보죠.”
“…….”
헌터는 화면을 살폈다.
반응은 좋지 않았다.
[Boooooooooooooooooo!!]
야유 속에서 시작된 경기는 락 업과 체인 레슬링으로 이어졌다. 클래식 클리셰였고, 경기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스트로먼은 엉망이었다.
죠도 엉망이었다.
[Boooooooooooooooooooo!!]
야유가 점차 강해지는 가운데.
트리플H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신이 이내 나직이 말했다.
“좋은 경기는, 분명히 치열한 육체와 육체의 충돌 아래에 이루어지죠.”
“…….”
“하지만 그게 없어도 얼마든지 명경기가 나올 수 있죠. 안 그렇습니까?”
“글쎄다.”
“제발요. 헌터. 빗자루와도 레슬링을 할 수 있는 남자를 생각해보십쇼.”
그 말에 헌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신이 말한 남자.
그는 바로 ‘닉 플레어’였다.
네이처 가이.
그는 나이나 체력과 상관없이 팬들의 앞에서 최고의 레슬링을 보였다.
힘과 기술이 없이도 하나의 멋진 서사로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그걸 생각해보자면 분명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죠 또한.
분명히 경기를 구성하는 능력 자체는 빅맨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트리플H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이 무슨 뜻으로 그 이야기를 꺼냈나를 알아차렸다.
경기 시간은 총 8분.
그중 2분이 지리멸렬한 체인 레슬링이었고 스트로먼이 실수를 계속하면서 분위기는 점점 안 좋아졌다.
야유조차 줄어들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죠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지친 베테랑과.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
그 두 사람의 경기에 사람들이 다시 흥미를 가진 것은 5분여가 지났을 때.
콰앙-!
스트로먼이 쓰러지면서 리드를 잡은 죠가 다 집어치우라는 듯이 욕설을 내뱉으며 링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바리게이트에 몸을 기댄 채로 옆에 서있던 여성 관객을 돌아봤다.
[팝콘 좀 있어요?]
[예?]
완전히 스트로먼을 무시하는 죠.
하지만 그런 돌발 상황 자체가 순간적으로 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바로 이거군.’
헌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죠가 가진, ‘친근한 거인’이라는 포지션이 아주 영리하게 활용되었다.
[남자친구와 왔다고? 옆에 저놈? 제기랄, 힘도 제대로 못 쓰게 생겼군!]
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링 위의 거인이 아래로 내려와 자신들에게 말을 거는 상황이었다. 팬이라면 당연히 즐거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오늘 처음으로 경기에 출전한 남자, 스트로먼은 이를 악물며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