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Match 17.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라.
하지만 동시에 과감해져라.
단체에서 정한 각본을 벗어나라.
팬들을 가장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라.
그게 신이 선수들에게 한 조언.
맞는 말이었다.
만약 트리플H 자신이 이 MXT라는 팀의 리더가 아니었더라면 신의 말이 백 번 옳다고 이야기했을 터였다.
모든 스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선수가 각본을 따르는 게 아니라 각본이 선수를 따를 때가 베스트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모두가 그럴 순 없다는 거지.’
재능.
위상.
그 외, 수많은 이유들로 인해.
모든 선수들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하는 건 분명 혼란을 야기할 터였다.
그래서 신도 분명 책임질 각오를 하고 행동하라는 사족을 덧붙인 거겠지.
하지만 처음 겪는 성공으로 인해 다들 흥분한 상태에서 트리플H는 자신이 한마디 더 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회의를 끝마치고 선수들을 돌보기 위해 훈련장으로 향하던 헌터는 잠시 멈춰 섰다.
쿵-!
콰앙-!!
짜악!
이어지는 소리들.
“…….”
신은 오늘 새벽 비행기로 다음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 떠났건만.
아직 자리에 남아있는 듯했다.
큰 키로 슬쩍 올려다보자 창문을 통해 훈련장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선수들 모두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아침 훈련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거 원.’
다들 어제 그런 고생을 하고도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 눈에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무언가가 느껴졌다.
구체적인 비전.
헌터는 한마디를 더 얹어야겠다는 생각을 철회하고 훈련장에 들어섰다.
“다들 좋은 아침이다!”
우렁찬 외침.
오늘도 MXT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훈련생과 선수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자리에 모여 러닝을 시작했지만 개중에서 그론 스트로먼만은 없었다.
그는 현재, 멘토인 빅 죠와 함께 한창 플로리다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거인 둘을 위해 WWF에서는 특별히 비상구 쪽 좌석을 마련해주었고 덕분에 몸은 편안했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비행기 좌석은 원래 이렇게 큰 남자들의 몸에 맞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겪던 일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오히려 거기에 대해 농담을 나누면서 즐겁게 여행을 했다.
“걸리버가 된 기분이라니까.”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면 확실히 느껴지죠. 이거 때문에 어깨가 이상해져서 자세 교정까지 받았다니까요.”
“크하하하! 그래. 다들 하는 경험이지. 나도 어렸을 적에 덩치가 너무 크니까 부모님 속을 깨나 썩였어.”
서로 거대하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대화는 전혀 끊이지를 않았다.
“WWF 레슬러가 된다는 건 도로 위에서 산다는 뜻이야. 쇼가 끝나면 바로 이동하고, 다시 또 이동하고.”
그나마 요즘 들어 티파니 맥센 산하에서는 선수들의 컨디션을 생각해 스케줄이 꽤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우리 같은 빅 가이들은 둘 중 하나지. 철저하게 준비해두거나. 아니면 소인국에 적응하고 살아가거나.”
각오를 해둬라.
대충 그런 의미였다.
두 사람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그렇기에 죠는 다른 선수들처럼 변장을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동하는 내내 팬들이 길을 가로막아서 몇 번이고 사인을 요청해왔지만 죠는 웃으며 받아주었다.
“팬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하고.”
그런 식으로 죠는 스트로먼에게 업계에서 필요한 마음가짐을 가르쳤다.
사실, 신이 처음 제안했을 때는 조금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던 그였지만.
거대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동질감으로 인해 어느덧 정을 주게 되었다.
스트로먼도 그런 죠를 잘 따랐다.
로드 무비인 ‘벨마와 로이스’에 나오는 주인공 두 사람처럼 빅 죠와 스트로먼은 함께 여행을 다녔다.
죠가 7월 2주차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을 보며 스트로먼은 많은 걸 느꼈고, 메인 쇼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개중에서도 특히 인상이 깊었던 선수는 한창 현역 중에서 절정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랜스 오튼이었다.
경기를 끝낸 뒤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그가 자리에 굳어져 앉아있던 스트로먼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그 눈에 짓궂은 기운이 올라왔다.
“이야, 이놈 정말 어마어마한데?”
“아, 안녕하십니까!”
“너 키가 몇이냐?”
“2미터 4센티미터입니다!”
“어라, 생각보다 안 크네?”
“…….”
“얼굴이 험악하게 생겨서 그런가.”
오튼은 스트로먼을 뜯어보았다.
머리는 산발한데다가 수염은 가슴께까지 길러서 마치 사스콰치 같았다.
잔뜩 긴장한 똘망똘망한 눈이 이질적이었고 랜스 오튼은 낄낄 웃었다.
WWF가 아무리 변했다고 한들.
랜스 오튼이라는 남자는 절묘하게도 그 사이에 걸쳐 있는 세대였다. 그러므로 구시대적인 행동을 종종했다.
예를 들자면 지금처럼 잔뜩 긴장한 신인을 놀려 터프함을 키워준다던가.
“이번에 데뷔하냐?”
“아니.”
하지만 바로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MXT에 지난주에 데뷔한 녀석이야. 메인 쇼에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
신이었다.
“선배님!”
“신!”
락커룸에서 랜스 오튼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선수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스포츠 백을 짊어지고 안으로 들어온 신을 환영해주었다. 스트로먼도 화색이 돌아 그를 돌아보았다.
“늦었군!”
“미안합니다. 레이.”
신은 솔직하게 사과를 했다.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안 떠서요.”
“출연시간만 안 늦으면 됐지.”
“예, 일단 준비 좀 하겠습니다.”
“고릴라 포지션에는 내가 전하지.”
레이가 밖으로 나갔다.
신이 도착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다행히 쇼에서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왔고 그것은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다.
스트로먼은 놀라 그걸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스트로먼을 신나서 놀려대던 오튼도 신에게 타깃을 돌렸다.
“야야, 신.”
“……뭐 인마.”
“이제 은퇴할 때 된 거 아니야? 아니면 벨트 내려놓을 때가 됐거나?”
신이 피식 웃었다.
“그럼 네가 가져갈래?”
“아니, 사양하지.”
진지하게 대답하는 오튼.
월드 챔피언의 하드코어한 스케줄은 도무지 그의 성격과는 맞지가 않았다.
스트로먼은 묘한 공기를 느꼈다.
신이 오자마자 락커룸 전체의 분위기가 순간 변했다. 다들 기운이 올라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신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일단 옷을 다 벗고.
팬티를 입은 뒤 그 위에 롱 팬츠를 착용하고 손목에 테이핑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을 열었다.
“스트로먼.”
“예, 예!”
“경기장 분위기는 좀 어떠냐.”
“좋은 거 같습니다!”
“너무 쫄지 말고. 결국 여기 이놈들은 함께 일할 놈들이니까. 이번 한 달 동안 많이 배웠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뭘.”
손목의 테이핑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신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는 죠에게 하라고.”
“…….”
스트로먼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사실, MXT 등지에서 배운 대로라면 지금 이 업계에서 가장 높은 상품성을 가진 선수는 눈앞의 신이었다.
하지만 그런 신을 ‘위상’이니 ‘강함’이니 하는 식으로 표현한 게 좀처럼 이해가 가지를 않았었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갔다.
확실히 그는 강한 사내였다.
모두가 존경하는 것.
모두가 동경하는 것.
그게 바로 프로레슬링이라는 스포츠에서 말하는 강함이었다.
* * *
사실.
내 원래 계획은 간단했다.
빅 죠가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서 스트로먼이라는 후계자를 소개해주자.
그러면서 동시에 MXT에 출연해 풀세일 너드들을 가볍게 엿 먹여주자.
바로 이거였다.
죠에게 모범을 보여야만 하는 후배가 생긴다면 현재나 이후의 삶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 사라지진 않을까.
그걸 기대한 부킹(?)이었다.
하지만 MXT의 젊은 선수들은 전생의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멋졌고.
이놈들을 좀 더 도와주고 싶었다.
게다가.
업계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내가 좀 개입해주는 게 훨씬 더 나을 터였다.
전생과 달리, WWF라는 단체뿐만이 아니라 ACW에도 GCW가 존재했고 우리 PWA도 신인들을 많이 받았다.
업계의 인재 풀이 많이 흩어진 상황에서 MXT나 GCW가 좀 더 올라와줘야만 앞으로 업계가 더 활성화될 터.
과거와 업계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흐름에 맞춰서, 나와는 다른 의미에서 선수들의 멘토가 되어줄 전설을 한 명 데려왔다.
바로 리키타였다.
“Hey~ SIN! My Man!!”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MXT에 도착한 그녀는 씨익 웃으며 인사를 했다.
거기에, 내 뒤에 서있던 십여 명의 여성 선수들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슬쩍 돌아보자, 그녀들은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리키타를 보았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
이제 40세가 된 그녀는 오랜 목 부상으로 인해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또 컨디션이 나빠져 집에서 요양을 했지만, 헌터에게 허락을 받은 내가 부르자 바로 왔다.
“리키타.”
“노인네 불러줘서 고맙네.”
“롤-모델이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이 친구들 보면 알잖아요?”
“호호우, 이게 누구야. 쌔끈한 아가씨들인데. 주먹질들은 좀 하시나?”
리키타가 노골적으로 여성들의 엉덩이를 눈으로 훑었다. ……왜 창피함은 내 몫인 건지 도저히 모르겠군.
이 양반도 결국 옛날 사람이라서.
그래도.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경기는 가능하죠?”
“무리하지만 않으면.”
리키타가 목을 툭툭 건드렸다.
“일단은 다 나았어.”
남은 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뿐.
“여기 애들하고 붙으시면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줬으면 하는데.”
“그래? 누구하고.”
리키타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자연히 뒤로 빠졌다.
원래 이렇게 선배님 나서면 자연스럽게 빠져주는 게 후배 된 도리였다.
……참 이상한 업계로군.
어쨌거나.
“누가 나하고 붙어볼 거야?!”
리키타는 호탕하게 외쳤다.
“자자! 누구든 나서봐! 말해보라고!”
그 말에 손을 드는 누군가.
……케일리였다.
“리, 리키타! 리키타!”
“오, 그래. 귀염둥이.”
리키타는 신나서 앞으로 나오는 케일리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이, 야.”
그리고 조금 당황스러워 했다.
케일리.
사실, 딱히 표현은 안 했지만 그 모습은 지금까지의 ‘여성’ 프로레슬러와는 영 다른 듯한 모습이었다.
머리는 묶었고 소년소녀들을 겨냥한 별 티셔츠에 롱 팬츠를 입고 팔에는 끈을 여러 개 걸쳐서 늘어드렸다.
캡틴 로건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남자, 마초맨 ‘랭 새비지’의 오마주.
리키타는 좀 당황했다.
“요즘에는 이런 애들도 하나?”
“왜요. 귀엽잖아요. 인기 쩐다고요.”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리키타의 그런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케일리는 신이 나 스타를 만난 팬처럼 악수를 청했다.
“정말,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저는 진짜로! 정말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당신 팬이었어요! 리키타!!”
웃음을 터뜨리는 여성 선수들.
케일리는 MXT 내에서도 저 밝고 순수한 태도로 무척 인기가 좋았다.
또한 기존에는 없었던 여성 선수였고, 어린아이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끄는 동시에 남성 팬들로부터도 귀여움을 받는 ‘여자 숀 시나’와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가진 재능의 반도 발휘되지 못한 상태라서 리키타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많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여성 선수들은 남자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아이 캔디’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프로레슬링은 남자의 문화였고.
마초의 문화였다.
……하지만 그것도 옛일.
리키타나 트리쉬가 갈고 닦은 길을 통해 좀 더 많은 여성 소비자들이 업계에 유입되었고 흐름도 변했다.
여성 레슬러도 이제 선수로서 당당히 인정을 받는 시대가 곧 찾아왔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저 사인해주세요!”
“……나랑 왜 싸우려고 하지?”
“싸우긴 왜 싸워요! 리키타! 끝나고 같이 맥주! 맥주 어때요?! 다 같이 펍 하나 빌려서 놀자고요!”
“일단 넌 탈락.”
“예?!”
“케일리.”
내가 제지했다.
케일리가 시무룩해져 들어갔고 다들 웃음을 참지 못하고 분위기는 좋았다.
“야, 너는 오히려 내가 배워야겠다! 성격이 그렇게 좋은데 어떻게 프로레슬링을 하면서 싸우겠다는 거야?!”
리키타도 농담을 건넸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 다시 손을 들었다.
“응?”
유난히 작게 나온 손.
“너 누구야? 나와봐.”
하지만 패기는 죽여줬다.
선수들 사이를 지나쳐 앞으로 나온 그녀는 키가 160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독했다.
표정에서 독기가 느껴졌다.
때문에 리키타도 순간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우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왜 나와 싸우겠다는 거지?”
“……별거 아닌 이윤데요.”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AK LEE.
작은 키였음에도 좋은 기믹 수행력으로 한동안 남성 선수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뿜어냈던 훌륭한 선수였다.
그 기믹은.
“저는 미친년이니까요.”
저렇게 요약이 가능했다.
……좀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