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534화 (534/634)

Dark Match 20.

티파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섬머 수플렉스를 당길 거예요.]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었다.

각본상의 문제로 인해 기존에 기획되었던 페이퍼뷰가 앞당겨지거나 밀리는 경우가 가끔 한 번씩은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이유가 확실히 짐작이 가는 만큼, 나는 그냥 ‘알겠다.’고 넘기는 대신 좀 더 물어보았다.

“나 때문인가?”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거 아니에요?]

“…….”

[사실, 맞아요. 당신 때문이지.]

티파니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페이퍼뷰에 나오지 않아 판매량이 영 신통치 않았고, 7월의 대립 대부분을 8월까지 넘길 생각이라고.

나는 약간 책임감을 느꼈다.

“단기 대립이라도 할 걸 그랬나.”

[아뇨, 어쩔 수 없었잖아요.]

티파니는 딱 잘라 말했다.

……사실, 내 생각도 그랬다.

단기 대립을 진행해봤자 빌드 업을 해나가는 과정도 짧고, 제대로 된 대립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터.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미리 팬들이 모두 아는 드라마가 갖춰져 있는 선수와 대립을 진행하는 것뿐이었는데.

후보군은 사모아 고나 랜스 오튼.

그 정도?

하지만 오튼은 작년에 대립을 했었고, 고는 지금 한창 U.S. 챔피언으로 군림하는 중이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시나를 바로 복귀시켜 나와 대립을 하게 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하지 말자.

어중간한 대립으로 월드 챔피언과 도전자의 위상을 망칠 순 없으니까.

그게 티파니의 생각이었고.

나와 동일했다.

WWF의 선수들 대부분은 팬들의 마음을 울릴 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남은 건 회사가 그걸 잘 조합해 하나의 드라마로서 탄생시키는 것뿐.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누구든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좋은 대립은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탄생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바트 맥센이나 전생의 WWF는 지금 당장의 시청률에 급급해서 그것을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팬들의 외면을 받았지.’

이제는 아니었지만.

티파니 맥센은 대립에서 시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경영자였다.

충분하게 캐릭터를 보여주고.

그것을 확장시켜 나가고.

대립을 통해 퓨드를 만들고.

그 과정 속에서 실력을 쌓고.

그렇게.

한 명의 선수가 탄생했다.

그 모든 게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일단 그것만 알아둬요. 신, 당신과 죠는 7월 페이퍼뷰가 끝난 뒤 곧바로 대립에 들어가야만 해요. 이쪽에서 각본을 몇 가지 짜두기는 했는데.]

“날 몰라?”

[당신 허벅지 안쪽에 있는 점 개수까지 알고 있어서 문제죠.]

“그래, 그거면 됐어.”

나는 싱긋 웃은 뒤 전화를 끊었다.

각본은 ‘함께’ 짤 생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일단 아이디어를 내고 나면 각본팀이 듣고 첨삭을 더해 완성시켜가는 형태였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좀 쉴 수 있겠군.’

WWF 측에서 섬머 수플렉스를 2주 당겨줘 러셀에게 벨트를 건네주는 시점에서 여력을 쓸 여지가 생겼다.

하지만 기분이 마냥 좋진 않았다.

‘역시 힘들기는 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개의 챔피언 벨트.

그것도 한 단체에서 두 개의 벨트가 아니라, 다른 단체에서 두 개의 벨트였다. 프로레슬링이 세계적인 문화로 성장한 뒤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좋은 선수들도 늘어난 상황에 내가 언제까지나 두 개의 벨트를 모두 차지할 수는 없었다.

여력이 부족했다.

‘빨리 넘겨줘야지.’

뭐,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일단 죠와의 일전에서 타이틀을 지키기로 했으니까.

빅 죠는 분명 위대한 선수였지만.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거다.

그러므로 그는 적합하지 않았다.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후로, 나는 다시 스케줄을 거쳐서 MXT에서 빅 죠와 만날 수 있었다.

스트로먼을 마치 어깨 위의 작은 새처럼 계속 데리고 다니는 죠는 인생의 활력을 되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신! 내 친구!”

“…….”

2미터가 넘는 거구가 그렇게 날 와락 끌어안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밥은 먹었나?”

“아직요.”

“그럼 끝나고 같이 가지.”

땀으로 범벅이 된 죠가 웃었다.

아직 스트로먼이 훈련 중이었다.

나는 링 위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저게?’

스트로먼이 다른 선수들의 손을 붙잡고 탑 턴버클에 올라선 게 보였다.

그리고 이내 손을 놓았다.

중심을 잡으려고 드는 스트로먼.

바로 그때였다.

[Waaaaaaaaaaaaaaaaaggghhh!!]

환호가 이어졌다.

옆을 돌아보자 거대한 앰프가 링 바깥쪽으로 설치되어있는 게 보였다. 소리는 바로 그곳에서 나는 것이었다.

“집중해!! 그론!!”

죠가 소리쳤다.

주변의 다른 MXT 선수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스트로먼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훈련인가 싶더라니.’

나는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쾅!

죠가 바닥을 세차게 밟았다.

옆에서 세스 롤링스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바닥을 마구 내리쳤다.

그밖에도 각자 선수들이 앰프 소리 속에 노이즈를 섞으며 스트로먼이 중심을 잡는 것을 최대한 방해했다.

턴버클.

범프 링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코너에 설치된 일종의 완충 장치였다.

하단, 중단, 상단 턴버클이 있고 각각을 밟고 올라가거나 상대를 던져 부딪히게 만드는 짓 따위가 가능했다.

그리고 개중 상단 턴버클은 ‘탑 턴버클’이라고 따로 구분해 불렀고 대부분 이곳에서 공중기가 사용되었다.

공중기.

일반적으로 몸이 작거나 화려한 기술을 좋아하는 선수가 사용하는 기술로, 내 피닉스 스플래시처럼 잘 단련된 공중기는 경기의 큰 재산이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이언트 캐릭터는 그런 기술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죠도 젊은 시절에나 미사일 드롭킥을 사용했고, 기껏해야 테이커의 올드 스쿨 정도? 뭐, 카인도 탑 로프 클로스라인을 즐겨 쓰기는 했었지만.

그로 인해 선수 생명이 한풀 꺾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무릎의 부담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론 스트로먼은 2미터가 넘는 키로 탑 턴버클 위에서 계속 위험하게 중심을 잡고 서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와아아아아악-!!”

귀청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순간 놀라 돌아보자 반대편의 케일리가 비명을 지르고는 씨익 웃었다.

거기에 비틀거리는 스트로먼.

놈이 바깥으로 휙 몸을 던졌다.

매트 위로 떨어지는 스트로먼.

“야호!”

케일리가 환호했다.

“제기랄, 케일리가 이겼군!”

빅 죠가 자신의 옆에 탑처럼 쌓아두었던 이온 음료 중 하나를 휙 던졌다.

“감사합니다!”

씨익 웃는 케일리.

주변의 선수들은 아쉬워했다.

‘호오.’

재미있는 방법이었다.

그냥 훈련을 도와달라고 하면 스트로먼에게 특혜를 주는 셈이니까. 저런 식으로 게임처럼 구성했군.

훈련은 계속되었다.

“뭐하는 거냐! 스트로먼!”

“죄송합니다!”

스트로먼은 무척 지쳐 보였다.

“다시 해! 스쿼트부터!”

“옙!”

그래도 훈련은 계속되었다.

최후의 최후의 순간.

경기의 막바지에는 정말 체력이 완벽하게 바닥이 나서 단맛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레슬링 경기란 그랬다.

그걸 상정하기 위해.

스트로먼은 스쿼트를 했다.

“끄응……!”

온몸에서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를 악물고 있는데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친 모습이었지만 스쿼트를 끝내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

‘기특한 녀석.’

나는 미소를 지었다.

잠깐 옆을 확인하자 팔에 끼워 공격을 받아내는 암 미트가 눈에 들어왔다.

“좀 더 버텨!”

저 훈련이 바보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훌륭했다.

하지만.

보통은 그 이후를 원하는 법이지.

“죠!”

나는 암 미트를 들고 외쳤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죠는 금방 내가 하려는 행동을 이해하고 씨익 웃었다.

나는 곧바로 암 미트에 양팔을 교차 시켜서 끼우고 링으로 올라갔다.

“어이! 스트로먼!”

나는 암 미트를 내밀었다.

“차보라고!”

“해라! 스트로먼!”

빅 죠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좀 후회했다.

‘슈퍼 크네.’

탑 턴버클 위에 서 있는 스트로먼을 보자니 왠지 성경 속의 다윗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곧 골리앗에게 미사일 드롭킥을 맞을, 불행한 다윗 말이다.

스트로먼이 힘껏 뛰어올랐다.

그리고 엉덩이로 떨어지면서.

동시에 내 암 미트를 양발로 찼다.

투-콰앙-!

순간 이어지는 폭발음.

‘뭐야?’

나는 거인의 힘을 느꼈다.

버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런 공격을 버티고 일어서 상대를 짓누르기 위해서 단련을 해왔다.

하지만.

이걸 버텨낸다면 내 의지나 신체의 단련을 넘어서는 게 무너지고 말았다.

바로 인간의 몸에 있는 ‘소모품’.

관절이었다.

나는 버티지 않고 뒤로 날았다.

아니, 아예 점프를 했다.

그래야만 내 뒤쪽에 있는 턴버클에 목이 부딪혀 죽지 않을 수 있으니까.

콰앙-!

턴버클에 등부터 충돌.

그리고 뒤쪽으로 구르려고 하는 몸을 어떻게든 근육으로 버텨내며 그대로 앞으로 암 미트부터 떨어졌다.

쿵!

이어지는 소리.

‘위험했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신!”

“선배님!”

링 아래에서 선수들이 달려왔다.

“야야! 괜찮냐?!”

죠가 곧바로 나를 부축했다.

“아, 별거 아닙니다.”

암 미트를 풀어 헤치고 몸을 확인한 나는 턴버클에 부딪힌 등의 통증 이외에는 괜찮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순간 거기에서 내가 판단을 잘못했다면 분명 죽거나 크게 다쳤을 거다.

턴버클이나 로프에 목이 잘못 끼이면서 말이지. 그 정도로 스트로먼의 킥은 힘 조절을 못한 물건이었다.

“스트로먼!”

“죄, 죄송합니다!”

스트로먼이 달려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제가 어, 으!”

“일단 좀 진정하고 들어봐.”

“……예.”

스트로먼은 울 거 같은 얼굴이었다.

2미터에.

걸어 다니는 사스콰치 같은 생김새로 저러니까 오히려 뭔가 무서웠다.

어쨌거나.

“자주 듣는 말이었잖냐. ‘절대 전력으로 레슬링을 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 그렇습니다.”

거인 레슬러들이 항상 듣는 소리였다. 특히나 스트로먼은 최근 들어 나온 거의 유일한 자이언트였으니까.

귀가 닳도록 들었겠지.

이런 놈들이 전력으로 레슬링을 한다면, 정말 사람이 죽는 수가 있었다.

“방금은 어땠지?”

죠가 흥미로운 듯 나를 보았다.

……아무래도 좀 너무 나서는 감이 있지만 일단 스트로먼의 미사일 드롭킥을 맞은 상대로서 할 말은 해야겠지.

“저, 잘 모르겠습니다.”

“긴장을 하니까 그런 거야.”

피해를 입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엉덩이는 괜찮냐?”

“예? 아, 그…….”

“아프겠지.”

잘못 떨어졌다.

그렇게 말하자 빅 죠가 나를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넌, 미사일 드롭킥을 맞고 날아가면서 그런 것까지 봐둔 거냐?”

“예? 아, 물론이죠.”

“……괴물 자식.”

“아니, 이렇게 강한 걸 맞았는데 어떻게 그럼 그걸 안 보고 있습니까.”

나는 쓰게 웃었다.

어쨌든 이걸로 한 단계 나아갔다.

“목표가 생겼구나. 스트로먼.”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가 어깨를 툭 치며 한 말에 스트로먼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다.

* * *

“긴장해서 그런 거겠지.”

선수들이 씻으러 들어간 뒤.

나와 죠는 자리에 앉아서 잠시 방금 스트로먼의 드롭킥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거기에 적응해야 해. 그리고 몸을 보호하는 법도 익혀야 하지.”

죠는 그렇게 설명했다.

‘자이언트’.

남들보다 훨씬 거대한, 적어도 2미터 이상의 키를 가진 선수들을 뜻했다.

거기다 덩치가 크면 금상첨화였고.

포스가 있는 외모나 마이크워크가 더해지면 금방 푸시를 받고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

“축복을 받은 존재겠지.”

죠는 멋쩍은 듯이 웃었다.

스트로먼을 훈련시키며, 어쩌면 그는 과거의 자신을 연상해냈던 거겠지.

괴물 같았던 자신.

거대하고 두려움을 사는 자신이.

이곳에서는 동료가 되었다.

“그래, 제기랄. 요새 좀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더니 감성이 폭발했었던 모양이군. 너에게도 미안하다. 신.”

“푸하하! 사람이 그럴 수 있죠.”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기에 나는 죠의 행동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기운을 되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말인즉슨.

“슬슬 이야기해볼까요.”

“뭐, 대립 말이냐?”

“예, 그전에 일단.”

나는 죠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그래야 대립을 어떻게 진행할지 정하니까요.”

“딱히 좋지는 않다.”

죠는 왼쪽 무릎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못할 것도 아니야.”

어차피 무릎에 보호대를 착용할 생각이니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죠.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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