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Match 27.
‘칼날 위를 걷고 있군.’
러셀 오메가는 지금 신이 연출하고 있는 각본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월요일에는 나이트로의 촬영이 있어서 버닝콩을 시청하지 못했던 그는 화요일 재방송을 보며 확실히 느꼈다.
보통 선수였다면 절대 소화하지 못했을 어려운 각본이었다. 완전히 급전개의 끝을 달리는 이야기였으니까.
의문점도 많았다.
왜 신과 좋은 경기를 펼쳤었던 MXT 선수들이 갑자기 트리플H와 함께 그를 상대하는 각본을 수행하고 있는가.
하지만 그런 부분을 분명 신은 흥미롭게 풀어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디테일이 그가 이 업계의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부분이었다.
팬들은 프로레슬링이 각본에 의거한 드라마임을 안 상태에서 시청을 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프로레슬링이 주간 드라마로서 충분히 재미가 있기 때문이었고.
하나는 선수들이 사용하는 기술이나 경기가 분명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으면서도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레슬링은 무척 위험한 스포츠였고, 그것을 수행하는 선수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존중을 느껴서였다.
신은 그걸 자유자재로 이용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그 제각각의 선수들이 누군지 러셀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트리플H가 끼자 기대감은 느껴졌다.
‘미친놈이라니까.’
그는 어이가 없어져 웃었다.
자신과의 대립에서도 언제나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신은 WWF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솔직히 말해 경이로웠다.
이제 갓 데뷔한 산하 단체의 선수들을 데리고 섬머 수플렉스에서 경기를 가진다니, 누가 할 수 있는 일일까.
신의 성격을 생각해보자면 트리플H로 선회할 리도 없었고 분명 지금 계획대로 MXT 선수들과 싸울 텐데.
‘과연 어떻게?’
아니, 그중 누구와?
그 호기심은 생각보다 빠르게 해결되었다.
목요일 밤의 MXT.
쇼가 시작된 직후, 오프닝에서 트럭이 경기장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끼기기이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멈춰 선 트럭.
그 안에서 신이 내리자 관객들의 환호성이 순간 오디오를 크게 채웠다.
[Waaaaaaaaaaaaaaaaaaggghhh!]
이번에는 벨트 두 개도 잘 챙겼고.
트럭을 아무렇게나 주차해둔 뒤, 신은 곧바로 경기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 직후.
뭔가를 또 잊은 듯 황급히 뒤로 돌아선 신이 트럭으로 돌아가, 뒷좌석을 열고 그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로.
슬레지 해머였다.
[Yeeeeeeeeeeeeeeeeeeaaahhh!]
다시금 쏟아지는 환호.
그렇게 위클리 쇼가 시작되었다.
오프닝 영상과 광고가 지나가는 동안, 러셀은 고무 밴드를 이용한 트레이닝을 하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넷 모두를 상대한다고 했겠지.’
그게 맞는 그림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건틀릿 매치인가?’
그 답은 금방 나왔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Welcome To M! X! T!]
[Waaaaaaaaaaaaaaaaaaggghhh!]
폭죽과 해설자의 멘트, 환호성이 교차되었고 곧바로 신의 음악이 나왔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챔피언.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MXT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링으로 올라간 그는 잔뜩 표정이 굳어진 채였고 그대로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채앵-!
트리플H의 음악이 이어졌다.
아예 혼자서 떠들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경기장에 녹색의 조명이 쏟아졌고 트리플H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혼자였다.
[Uooooooooooooooooohhh……!]
순식간에 고조되는 분위기.
두 카우보이가 마침내 만났다.
* * *
트리플H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야수가 아니라, 그 위에 정장을 입었다.
현역 시절에는 어깨까지 길렀던 금발도 탈모와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짧게 잘라서 라인만을 남겨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소라면 으르렁대도 시원찮을 상대인 신을 앞에 두고도 웃으며 말했다.
“계약서는 가져오셨나?”
“…….”
“역시 챔피언답군. 정말 멋진 모습이야. 두 개의 벨트와 선글라스, 슬레지 해머. WWF의 모든 역사가 지금 네 모습에 담겨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헌터의 말솜씨는 여전히 훌륭했다.
그는 독보적인 캐릭터였다.
WWF에서 활동하는 동안 숱하게 많은 적들을 쓰러뜨려온 ‘악당’이 이제는 한 단체의 수장까지 되고 말았다.
물론 현역 시절의 캐릭터는 많이 희석되었다. 헌터는 이제 팬들의 리스펙트를 받는 부분만 많이 남겨두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 어느 때라도, 자신이 원한다면 현역 시절의 악당으로서 돌변할 수 있는 남자였다.
동시에.
그가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MXT 팬들을 하나로 집결시키기에 충분했다.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여기 있는 관객들과 내가 보증하지. 이번에는 다를 거다. 선수들이 너에 대해서 이해를 했으니 말이야.”
누구를 택하더라도 좋다.
헌터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세스 롤링스? 케빈 오윈스? 아니면 빅 E 랙스턴이나 그론 스트로먼도 괜찮지! 선택을 해보라고. 챔피언.”
“돌아왔구나, 헌터.”
신은 돌연 이상한 말을 했다.
“옛날 그대로야. 당신은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최고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지. 랜스 오튼이 그 대표작이고. 하지만 하나, 당신이 무척이나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어.”
그건 간단했다.
랜스 오튼은 트리플H를 넘어섰다.
레슬 임페리움에서 그를 상대로 승리함으로서 레볼루션 시절부터 이어져온 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랜스 오튼은 단순히 트리플H를 이어받은 악당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다.
“당신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또 똑같은 짓을 하고 있군. 이번에는 누구지? 세스 롤링스인가? 케빈 오윈스? 그것도 아니라면…….”
신은 그대로 돌려주었다.
순간 헌터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신 좀 차려! 헌터! 탐욕도 적당히 부리라고! 당신이 부추긴 탓에 신인들의 커리어를 조지게 생겼잖아!”
[Uoooooooooooooooohhh!!]
“한때는 그랬었지.”
헌터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신. 이제는 새로운 시대야. 네 어깨에 있는 슬레지 해머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신의 슬레지 해머.
그것은 분명히 헌터로부터 이어받은 상징물이었다. 신은 레슬 임페리움에서의 결전 이후로 무기를 쓸 때면 언제나 슬레지 해머를 가장 선호했다.
동시에 현역 시절 헌터의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그걸 버렸으니 자신은 순수하다.
헌터는 그렇게 주장했다.
“나는 이 MXT라는 단체가, 그 어떤 단체보다도 가치가 있기를 원해.”
힘을 주어 이야기하는 헌터.
“그를 위해 필요한 건 이들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신. 너도 모르지는 않잖냐. 네가 여기에 왔을 때 얼마나 많은 시청자가 유입되었지?”
그리고.
“얼마나 많이 남았지?!”
[Waaaaaaaaaaaaaaaaaggghhh!!]
환호하는 풀세일 너드들.
실제로, 7월에 신이 한 달 정도 쇼에 출연한 이후로 MXT의 시청률은 크게 상승한 뒤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때 유입된 시청자들이 떠나지 않고 MXT 위클리 쇼를 시청 중이었다.
비록 1시간 뒤, ACW의 썬더가 시작되면 시청률이 큰 폭으로 하락했지만 그래도 정말 고무적인 결과였다.
거기에서 헌터는 느꼈다.
“이들에게는 기회가 필요해!”
[Waaaaaaaaaaaaaaaaaaggghhh!]
“여기에 모인 놈들은 분명 이 업계의 미래가 될 선수들이야! 하지만 업계의 누구도 그걸 모르고 있지!”
“그래서 나에게 도전하시겠다?”
신은 씨익 웃었다.
“좋아, 그거라면 받아들여주지.”
[Uooooooooooooooooohhh!]
“전도가 유망한 후배들을 가르치는 것도 현재 업계의 정점에 선 이로서의 내 의무일 테니까 말이야.”
자신만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신은 현재 그런 말을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위치였다.
“그런데, 이상하잖아. 헌터.”
“……?”
“왜 선수들의 실력을 보여주겠다면서 나선 게 당신이지? 나는 당신 명령으로 대기하고 있는 친구들과 직접 대화가 나누고 싶은데 말이야.”
그로서 헌터의 주장은 완파되었다.
자신이 아닌, MXT 선수들의 훌륭함을 보여주기 위해 나섰다던 헌터의 말은 이로서 위선임이 밝혀졌다.
“…….”
“좋아, 애송이들. 레슨 원이다.”
신은 입장로를 돌아보았다.
완전히 무시를 당한 헌터의 표정이 순간 다시 굳어졌지만, 신은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너희가 정말 나와 싸우고 싶다면. 링으로 나와. 그리고 직접 무슨 이유로 나와 싸우고 싶은지를 이야기해!”
[Yeeeeeeeeeeeeeeeeeeeaaahhh!]
거기에.
각각의 선수들이 링으로 나왔다.
MXT는 그 장면을 세심하게 연출했다. 결국 여기에서 MXT 선수들의 개성을 보여줘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입장을 통해 그게 표현되었다.
세스 롤링스.
The Architect.
경기의 설계자.
날카로운 메탈 음악 속에 커튼을 걷고 나온 그는 손을 모으고 뒤로 뚜둑 꺾으며 자신의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케빈 오윈스.
The K.O.
두툼한 체격의 소유자인 그는 반대로 투지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빅 E 랙스턴.
앞선 두 사람과 달리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다 할 별명은 없었지만.
두 사람과 달리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서는 인간적인 호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울퉁불퉁하고 거대한 근육의 괴리감이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론 스트로먼.
그는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했다.
2미터가 넘는, 자이언트.
네 사람이 링으로 올라왔다.
[Waaaaaaaaaaaaaaaaaaggghhh!!]
풀세일 너드들이 그들을 응원했다.
분위기는 좋았다.
신이 MXT에 다녀간 이후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캐릭터를 장착한 그들은, 사실 긴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버닝콩에서 그런 사고를 쳤으니 전 세계의 프로레슬링 팬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걸 다 예상한 신은 일부러 최대한 그들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마이크워크를 시작했다.
일단 말솜씨가 가장 훌륭한 케빈 오윈스와 먼저 대화를 나누며 다른 선수들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케빈, 분명히 넌 온갖 악독하고 비겁한 짓을 저지르다가 나한테 신나게 얻어터지지 않았던가?”
“그랬지.”
“그런데 또 도전하겠다고?”
“물론이야. 신. 나는 네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 그걸 가져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계획이라고.”
[Yeeeeeeeeeeeeeeeeeeaaahhh!]
신을 앞에 두고도 한마디도 밀리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케빈.
신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세스…….”
“아니, 그전에.”
세스가 신의 말을 잘라냈다.
[Uooooooooohhh!!]
“우리 보스를 무시하지 말라고.”
그는 헌터를 챙겼다.
“신, 당신은 이 남자가 아직도 탐욕을 부린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여기 있는 팬들 모두가 알고 있을걸?”
[Yeeeeeeeeeeeeeeeeeeaaahhh!]
신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걸로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갔다.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이건 실제 상황이었다.
트리플H가 순간 미소를 감추지 못했고 그 뒤로 슥 다가간 MXT 선수들이 헌터의 순수성을 다시 증명했다.
좋은 그림이었다.
[Thank you! Hunter!]
짝! 짝! 짝짝짝!
[Thank you! Hunter!]
짝! 짝! 짝짝짝!
[Thank you! Hunter!]
짝! 짝! 짝짝짝!
팬들의 챈트도 다양하게 나왔다.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서있던 신은 이게 MXT라는 단체의 힘임을 느꼈다.
그들은 ‘군단’이었다.
트리플H를 중심으로 뭉친 군단.
“나를 선택하라고. 신.”
“…….”
“아니, 나를 선택해.”
빅 E 랙스턴이 나섰다.
그는 앞선 선수들과 이유가 달랐다.
“지난 경기를 통해서 깨달았어. 당신은 정말로 대단해! 이게 바로 프로레슬링이구나 싶었다니까!”
“나하고 싸우지 않겠다는 건 일부러 약한 놈을 택하겠다는 말이야! 신!”
곧장 케빈 오윈스가 소리쳤다.
“뭐라고?”
순간 세스 롤링스가 눈을 부라렸고, 두 사람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돌았다.
세스 롤링스와 케빈 오윈스.
그렇게 옥신각신.
각 선수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호기롭게 자신과 싸우자며 말하는 가운데, 신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론 스트로먼.
줄곧 침묵하고 있던 그는 신이 자신을 돌아보자 겨우 반응을 보였다.
“사실 네가 가장 싸우고 싶지?”
“…….”
“안 그래? 스트로먼. 죠가 나와 싸우기 전에 무릎이 박살이 났다고. 네가 복수를 해줘야 할 타이밍 아니야?”
스트로먼은 말없이 나섰다.
신은 나오기 전, 일부러 그에게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팬들이 상상할 여지가 크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거대한 스트로먼은 호기심의 대상인데, 그 신비감을 최대한 이용해야 맞는 거였다.
거기다가.
‘본인 마이크워크도 영 그렇고.’
물론 이후로 크게 성장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급한 대로 그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잡혔다.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MXT!]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팬들의 챈트 속에서 신은 씨익 웃으며 그대로 누구와 싸울지 이야기했다.
최대한 흥미롭게, 소거법으로.
“일단, 세스 롤링스. 넌 아니야.”
[Uooooooooooooooohhh!!]
“케빈 오윈스, 빅 E 랙스턴. 너희들도 아니야. 그렇다고 그론 스트로먼 역시 내 상대가 될 수는 없지.”
그렇게 네 명이 제외되었다.
순간 팬들은 트리플H라는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신은 그것마저 부정했다.
“트리플H, 당신이 나설 수도 없지!”
그리고 이어진 행동은.
폭력의 행사였다.
슬레지 해머.
퍼억!
[Uooooooooooooooooooohhh?!]
계속해서 경악하는 팬들.
헌터가 물러섰고, 신은 네 명의 선수들을 차례차례 슬레지 해머를 사용해 쓰러뜨리며 링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남은 건.
헌터 하나뿐.
그를 향해 다가선 신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천천히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건틀릿 매치야. 헌터.”
“…….”
“여기 있는 네 놈 모두 덤비라고 해. 모조리 박살을 내줄 테니까.”
[Yeeeeeeeeeeeeeeeeeeeaaahhh!]
쏟아지는 환호.
경기는 그렇게 성사되었다.